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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현대미술의 쟁점 #1

- 미술양식의 차용과 역사적 해석

20세기 한국미술의 흐름 중 국립현대미술관을 비롯, 주요 미술관들과 화랑들, 주류로 행세해 온 미술평론가, 미술사가들이 한국현대미술의 기점으로 설정하고 추인해 온 1950-60년대 유사 앵포르멜 미술에 관한 비판적 글쓰기를 시작한다. 『비평가들이여 내 칼을 받아라』의 출간을 통해 정식으로 문제를 제기했으나, 누구도, 어떤 형태로도 답을 하지 않고 있으므로, 현 단계 한국미술의 침체를 벗어나기 위해 보다 확대된 형태의 전방위적 비판이 필요하다는 판단이 선다. 


1. 1930년대의 추상미술에 관해
  
주경, 김환기, 유영국, 정규, 정점식 등에 의한 초기 추상미술은 주로 일본 유학시절 학교나 학원에서 이루어진 서구미술에 관한 초보적 수준의 이해와 기초적 학습과정 정도로 판단된다. 1930년대 당시 유럽화단에서의 초현실주의와 초기 기하추상의 첨예한 대립을 그대로 재현했던 일본 미술계의 상황이 반영된 것으로 보이며, 이들이 각기 독자적으로 추상양식에 이르는 일련의 전조현상이 따로 관찰된 바 없는 것이 그 근거이다. 그러나 이런 현상은1950년대 후반 이후의 문화수용 과정에서의 앵포르멜이나 실험적 경향의 미술들에서도 유사하게 발견되는 현상으로, 그 대상이 다변화된 정도의 차이를 보일 뿐이라는 점에서 차별화되지 않는다.
김환기의 경우 종달새 노래할 때(1935)와 집(1936), 론도(1938) 사이에는 추상양식으로의 이행을 뒷받침할 미학적 연계성이 뚜렷하지 않으며, 귀국 후 나무와 달(1948), 항아리(1950년대), 섬(1950년대) 등을 주제로 한 단순화된 구상회화를 발표했다. 이후 본격적인 추상형식은 1964년 도미 후 다시 등장했으나 이때의 추상과 1930년대 일본유학 시절의 추상양식 사이에서도 특별한 연계성을 찾기 어렵다. 도미 후의 추상은 당시 뉴욕미술계의 뜨거운 쟁점을 형성했던 후기 색면 추상의 영향을 받고 있는 것으로 보여, 그가 외부적 환경에 꽤 민감하게 반응했던 작가임을 짐작할 수 있다.
한편, 비교적 일관되게 추상양식을 유지했던 유영국은 형태의 단순화를 통해 도달한 색면분할 형태의 추상회화 작품을 귀국 후에도 일관되게 발표했고, 기성 미술학교 교육을 받지 않은 전혁림의 화조도(1953)에서 보이는 독특한 추상 이행과정이나 남관의 몇몇 작품의 경우는 향후 중요한 연구과제로 삼아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2.  한국의 유사 앵포르멜에 관해
 
Dada와 앵포르멜 그리고 한국의 유사 앵포르멜
Dada가 제1차 세계대전의 참상에 대한 mass hysteria로 일어난 현상이라면, 앵포르멜은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시대적 배경 속에서 잉태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정치적 상황이 결과한 전쟁 경험이 예술가들에 의해 새로운 미술현상으로 나타나는 아이러니 현상으로, 전쟁 상황에 대한 예술가들의 문화적 대응인 셈이다. 통증을 수반한 상처로 남을 전쟁의 역사조차도 형이상학적인 가치로 승화시켜온 예술의 위대한 힘인 것이다. 우리의 역사에서도 댕기머리와 색동 저고리 속에 내재된 몽고침략의 상흔을 엿볼 수 있다.
 

앵포르멜이란 무엇인가?
앵포르멜 Art-Informel은 제2차 세계대전이나 실존주의적 허무와 파괴의 표현으로만 이해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오해에도 불구하고, 큐비즘까지의 오랜 고전주의 미술과의 결별이자, 다다의 정신적 계승이라는 역사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앵포르멜의 격정 그 자체는 다다적 허무와 반항의 표현이 아니라 “원자핵적 우주관에 대응하는 새로운「구조」와「내용」을 지향”하고 있는 것이었다.
프랑스의 미술비평가 미셀 타피에는 고독하게 제작에 몰두하고 있는 각 개별작가들의 작품에 나타나는 전후의 독특한 정신상황을 ‘다른 미학Un art autre’으로 상정하고 ‘앵포르멜’이라 명명하면서, 다다나 초현실주의 같은 유파(에콜)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밝힌바 있다. “앵포르멜이란 앵포름informe(부정형, 형을 만들지 않음)이라는 소극적이고 엄밀하지 않은 의미와는 반대로, 피안의 추상적 세계를 나타내는 극히 보편적인 용어”로, “형식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려는 올가미가 바로 무질서 아카데미즘”이며, “아포리오리한 의미 문제를 제시하지 않는다.” 1) 이런 맥락에서 보면 앵포르멜이란 어떤 이념 혹은 방법론을 지닌 집단적 운동도 아니었고, 통일된 양식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타피에의 다음과 같은 발언은 앵포르멜 미학이 지닌 개체적이면서도 역사적인 성격을 잘 드러내고 있다.
 
“생성하는 온갖 실재처럼, 수많은 망설임과 표면의 변혁을 겪은 후에, 다다의 활발한 청산淸算 작업인 무질서한 따블라 랏사에 의하여 예술은 전복되어 버려야 마땅하다. 그러나 광영光榮에 굳어진 매너리즘의 지적 안일 속에서 얻은 습관 때문에 부패된 타성의 힘은 화가의 참다운 창조정신과 예술 애호가의 창조적 윤리를 모조리 경화시켜 버렸다. 이 때문에 이미 현재의 작품들에 나타난, 다른 것으로 향한 전진과 거기에서 끌어낸 뜻밖의 결론은 그 깊고 예기치 못한 새로움과 그 절대적인 계시로 우리를 경탄시킨다. 우리는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그리고 이런 사실에서 우리는 그들을 확인하고 등록하고 적어도 거기에 복종할 따름이다. 그러나 우리를 미혹에 빠뜨리고, 두렵게 하고, 상처받게 하는 것은 우리를 반대하는 결말結末과 또 우리들 개인적 윤리와는 상관없는 오만한 침입이다. 이것은 우리의 습관인 이론異論의 여지없는 상습常習이 가져다 준 반사적인 길들여짐을 분쇄해 버린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 작품이 존재하고 틀림없이 획득된 것을 느끼기 때문에 이에 대한 깊은 지식을 바라는 것이다.” 2)

 

앵포르멜의 양식 차용이 의미하는 것
우리나라는 일본의 태평양 전쟁 패배 덕에 해방을 맞았고, 해방공간의 혼돈과 남북분단, 6.25 전쟁과 4.19, 5.16 등 숱한 여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적 통증이 잉태한 유사 앵포르멜은 유감스럽게도 근본이 없는 사생아 같은 것이다. 그것도 전쟁의 화약 냄새가 걷히고, 유엔의 지원과 미국 차관 등에 힘입어 복구가 한창이었던 1958년부터 1965년까지 약 7년여 간에 걸쳐 뒤늦게 일어났던, 역사적 근본이 없는 미술이란 뜻이다.
이 시기의 미술을 근본 없는 미술로 평가하는 까닭은 이들이 서구미술의 역사적 맥락에서 잉태된 앵포르멜 미술양식을 백화점에서 쇼핑하듯 손쉽게 차용해 집단적으로 공유한, 역사적-비평적 문맥에서 이탈된 미술이기 때문이다. 어떤 전조현상이나 후위현상도 없는, 뿌리도 없고 꽃도 없으며 씨앗도 없는 기이한 미술인 것이다.
 
 
한국의 유사 앵포르멜이 스스로 상실한 것들
1957년 창립된 현대미협을 시작으로 60년 미협 동인, 악뛰엘로 이어진 유사 앵포르멜 작가군들은 이합집산하며 감정의 과잉이 두드러진, 공감과 공명이 일지 않는 생경한 선언문들을 잇달아 발표했다. 이들의 선언문들이 설득력을 갖지 못하는 이유는 자신들만의 절박했던 주체적 역사 경험을 유럽과 미국의 추상미술 양식을 빌려 거창한 Manifesto를 쏟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들의 발표와 선언들은 대학을 갓 졸업한 20대 신예들의 치기어린 제스처들에 지나지 않는다. 문제는 이것을 과대포장해서 역사의 기초를 삼으려는 일부 몰지각한 인사들의 역사의식 부재와 이것을 비판적으로 견제해 내지 못한 비평적, 미술사적 윤리의식 부재에 있다.
 
안타까운 것은 당시 젊은 작가들의 내면에 자리 잡고 있었을 절박한 역사경험과 현실인식이 서구의 추상미술 양식의 차용과 섣부른 주장들로 손쉽게 해소되어 버린 점이다. 비록 고통스러웠지만 그 시점, 그 장소에 있지 않았으면 경험할 수 없었을 역사인식을 비록 서구미술의 수용을 통한 표현이었을지라도, 후위문화로서의 제2의 창작가치를 획득해 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아닐 수 없었다. 사실 서구의 미술도 대부분 서로 다른 문화권 간의 영향과 간섭, 수용의 과정을 거친 후위문화들이므로, 당시 현대미협과 벽동인 세대들은 후위문화로서의 한국현대미술을 동시대미술 문맥 속에 각인시킬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들에겐 그런 진지한 몸부림이나 역사의식을 찾아보기 어렵다. 오히려 앵포르멜 양식의 집단적 공유를 통해 멤버들이 스스로 유사형식에 함몰됨으로써 역사적 좌표는 물론, 개별적 성취와 서로 간의 차별화에도 각각 실패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것이 소위 스타일리스트들의 함정이다. 남의 양식을 빌리고 남의 역사에 염치없이 무임승차하면서도, 당시엔 첨단을 달리고 있다는 자부심을 느끼면서, 땀흘리며 자신만의 출구를 찾아 모색하는 작가들을 한심하게 보았겠지만, 정작 예술은 세상의 그 어떤 스타일 속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지극히 평범한 교훈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이 시기의 미술에 대한 두 번째 유감은 동세대 미술평론가들과 다음 세대의 평론가들 및 미술사가들의 비평적 오류에 기인한다. 그들은 현대미협을 한국현대미술의 중심에 위치시키기 위해, 설익은 젊은 작가들의 치기어린 행태를 현대적 자각에 의한 미술운동으로 과대포장 했다. 이들은 스타일화 될 수 없는 앵포르멜(비정형성)의 양식화, 집단화라는 아류들의 기이한 문화현상을 전위현상으로 전도시켜 국립현대미술관을 비롯한 주요 미술관들의 전시를 거쳐 버젓이 한국현대미술의 기점에 위치시켜 놓고 있는 것이다. 바로 1950년대 세계 최빈국에서 2010년대 세계 13위의 교역대국으로 성장한 놀라운 나라의 현대미술이 서구미술의 추종과 모방의 아류미술로 전도되어 버리고 있는 실로 가슴 아픈 장면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각주

1) 미셀 타피에, , 미즈에, 1956년 12월호

2) 미셀 타피에, 앞의 글

Wols_(Alfred_Otto_Wolfgang_Schulze),_194

Wols, untitled,1946-47

박서보, 原形質(원형질)NO.18_64, 180x180, 1964.JPG

박서보, 원형질NO.18, 1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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