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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 근현대미술의 이해 #12 회화적 리얼리티의 여러 얼굴들(7)

- 색채의 마술사 Paul Gauguin

유진 앙리 폴 고갱Eugène Henri Paul Gauguin은 1848년 프랑스 파리에서 출생했다. 고갱이 출생한 이듬해 나폴레옹이 다시 권력을 잡았고, 공화주의자였던 아버지를 따라 남미로 망명을 떠났다. 고갱은 남미 리마에서 성장하다가 일곱 살때 다시 파리로 돌아왔다. 
성장 후 선원이 되었다가 후에 증권거래소에서 일하면서 꽤 많은 돈을 벌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돈의 여유가 생기자 미술작품을 콜렉션하면서 당시 인상파화가들과 알게 되었고, 직접 그림을 그리기도 하면서 살롱에 입상을 하는 역량을 드러냈다. 라파엘로와 앵그르를 존경했고, 피사로와 세잔 등의 영향을 받았으며 1880년부터 인상파전에 출품하면서 증권거래인이자 화가로 인정받았다.

Paul Gauguin. Study of a Nude (Suzanne S

Paul Gauguin. Study of a Nude (Suzanne Sewing), 79.5cm x 111.4cm, 1880, Ny Carlsberg Glyptotek, Copenhagen, Denmark

1880년 작인 누드습작 <바느질하는 수잔>은 따뜻하고 밝은 색채와 성긴 붓 터치들로 색을 병치시키는 기법 등 당시 인상주의의 영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가운데, 안정적인 구도와 형태의 명징한 윤곽, 뚜렷하고 단순한 공간감, 정지된 듯 움직임이 없어 보이는 포즈 등에서 앵그르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게 한다.

 

1882년 주식시장의 붕괴로 증권거래소를 그만두고 나온 고갱은 그림 그리는 일에 전념했는데, 경제 불황과 살롱의 보수주의자들, 중산층 부르주아들과의 충돌 등으로 인해 직업화가로서의 성공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고 얼마가지 않아 경제적인 어려움에 빠지게 되었다. 계속되는 생활고로 아내와 사이가 나빠졌으며, 결국 아내는 다섯 아이들과 함께 고향 덴마크로 떠나고, 홀로 남은 고갱은 일당 5프랑의 전단지 붙이는 노동일 등을 하며 어려운 시간을 보냈다. 중산층의 안정된 생활을 박차고 예술가의 길로 들어선 고갱은 실로 큰 대가를 지불해야 했던 셈이다.

 

그러나 이 어려운 시간들은 방랑벽에 보헤미안적 기질을 가진 고갱으로 하여금 가장으로서의 무거운 책임에서 벗어나 예술가로서의 완전한 자유를 누릴 수 있게 해 주기도 했다. 무능하고 무책임한 가장으로 낙인찍힌 고갱은 차라리 편한 마음으로 창작생활에 몰두할 수 있었으나, 그의 탁월한 재능과 비평적 안목을 알아보지 못하는 유럽 사회 앞에서 좌절과 모멸감을 깊이 내면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Paul Gauguin. Study for the Bathers. 188

Paul Gauguin. Study for the Bathers. 1886. Black chalk and pastel. Art Institute of Chicago, Chicago, IL, U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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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ul Gauguin, Madeleine Bernard, 58cm x 72cm, oil on canvas, 1888, Musée de peinture et de sculpture, Grenoble, France

1886년 생활비가 적게 드는 브르타뉴 퐁타뱅으로 이주한 뒤 고갱은 그곳 젊은 작가들의 지지에 힘입어 인상파를 극복해내는 매우 독자적인 회화양식-평면적이면서도 장식적인-을 구축해 낼 수 있었다.

고갱은 브르타뉴에서의 삶에 그런대로 만족했었으나 1886년의 인상파전에 출품된 클로드 모네의 연작들과 이목을 집중시킨 또 하나의 걸작, 조르쥬 쇠라의 <그랑드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가 거두고 있는 놀라운 성취에 자극을 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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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orges-Pierre Seurat, A Sunday Afternoon on the Island of La Grande Jatt, 207.5 × 308.1 cme, oil on canvas, 1884–86, Art Institute of Chicago

지금까지의 성취 그 이상의 무엇이 필요했던 고갱이 찾은 대안은 원시림으로의 탈출이었다. 당시 프랑스는 일본과 남태평양 식민지들의 토속적인 문화와 예술양식에 매료되어 있었고, 고갱 역시 일본 판화와 토속미술들에 큰 호기심을 느끼고 있었다. 당시 유럽인들을 매료시킨 남태평양 열대의 신비한 원시성은 그들의 이국적 취향에 알맞게 조정된 일종의 환타지 같은 것이었다.

고갱은 이 이국적 취향과 칠보기법을 통해 찾은-두껍게 둘러진 윤곽선 등을 통해 현실의 재현보다 형태를 경계 짓는 뚜렷한 외곽선에 의해 분할된 색면들 그리고 그 색면들이 결합된 보다 진전된 색채들로 독특한 회화들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고갱의 변화는 빛의 변화를 포착하기 위해 형태의 구조와 질량감을 포기해 버린 인상주의 회화로부터 고전주의 회화로 회귀하는 측면이 있었고, 다른 일면으로는 대상의 객관적 묘사라는 전통적 목표로부터 대상에 대한 작가의 주관적 해석과 회화가 자연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확신을 암시하고 있었다.

특히 일본 우키요에 판화의 영향은 당시의 많은 예술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고갱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 <설교 후의 환영-천사와 씨름하는 야곱, 1888년>에 나타나고 있는 원경에는 빛과 물리적 공간의 차이가 전혀 표현되어 있지 않으며, 심지어 그림자조차 그려져 있지 않다. 이 극히 단순화되어 균질하게 처리된 붉은 색면과 화면의 오른 쪽 하단에서부터 왼쪽 상단으로 이어지며 화면을 대각선으로 분할하는 굵은 나무 등은 일본판화의 영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음을 보여주는 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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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ul Gauguin. Vision after the Sermon; Jacob Wrestling with the Angel. 93.1cm x 74.4cm, Oil on canvas, 1888, National Galleries of Scotland

하지만 클로드 모네로부터 반 고흐와 폴 고갱에 이르기까지 당시 유럽 예술가들이 받은 일본판화의 영향은 특정한 양식에 국한된 것이었다. 즉 당시 유럽의 작가들은 일본 판화의 배후-문화적 배경 등에 관한 깊은 이해 없이도 강렬한 원색들의 평면적 처리나 대담한 화면 분할, 구도 등에서 파격적인 진전을 이루어내고 있는 것이다. 이 점은 100여 년간 서구미술의 수용에만 급급하고 있는 한국미술의 현실과 대조적인 모습이 아닐 수 없다.

 

한편 같은 시기 프로방스의 아를에서 독자적 회화양식을 구축해 가고 있었던 반 고흐 역시 고갱처럼 서로의 예술적 신념을 확인하고 지지해 줄 동지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반 고흐의 유일한 후원자였던 동생 테오는 당시 몽마르뜨 언덕의 유능한 화상이었고, 늘 채무에 시달렸던 고갱으로선 아를에서 반 고흐와 함께 지내줄 것을 요구하는 테오의 청을 거절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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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ul Gauguin. Van Gogh Painting Sun flowers, 1888, Oil on canvas, 73cm × 91cm , Van Gogh Museum

마침내 고갱은 반 고흐와 아를에서 함께 지내기로 했고, 이 소식을 들은 반 고흐는 고갱의 아틀리에를 세심하게 준비하며 들떠 있었다. 하지만 개성이 강한 두 화가의 밀월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반 고흐는 늘 고갱을 높이 평가했지만 고갱은 특유의 오만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반 고흐를 자신의 가르침을 따라야 할 제자 정도로 인식했으므로, 두 사람 간의 깊이 있는 대화와 공명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여기에 건강상태가 점점 더 악화되고 있었던 반 고흐의 불안 증세와 고갱에 대한 병적 집착이 두 사람의 관계를 더 힘들게 만들어 가고 있었다. 갈등과 경쟁 그리고 날카로운 대립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던 어느 날 환각에 시달리던 반 고흐가 자신의 귀를 자르고 정신병원에 격리되면서 두 사람의 관계도 끝이 났다.

 

그러나 브르타뉴로 돌아온 고갱도 편안한 삶을 산 것은 아니었다.

그의 미학적 성취는 서구 회화사에 있어 놀라운 미술사적 진전으로 평가될만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보수 화단에 대한 저항의 기치를 올렸던 인상주의 화가들과 마찰을 빚게 되었던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결국 우려하던 일은 1889년 고갱의 파리 만국박람회 미술전시 출품이 거부되면서 표면화되었다. 고갱을 화가의 길로 인도한 피사로마저 그의 작품을 전근대적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고갱은 출품거부에 맞서 전시장 앞 카페를 빌려 피에르 보나르와 조각가인 마이욜 등과 함께 ‘인상주의와 종합주의’라는 전시를 열어 시위함으로써 인상주의와 결별했다.

‘종합주의’란 훗날 ‘나비(히브리어로 예언자)파’로 불리는 화가들의 주장-대상을 묘사하거나 재현하기보다는 독립적인 회화를 위한 형태와 색채를 강조한 고갱의 사상-을 담고 있었다.

Paul Gauguin. Self-Portrait with Halo an

Paul Gauguin. Self-Portrait with Halo and Snake,

79cm x 51cm, Oil on wood, 1889, National Gallery of Art, Washington

한편 파리 만국박람회는 남태평양의 이국적 풍물과 열대지방의 원시적인 삶에 대한 고갱의 동경을 더욱 자극했고, 그는 자신을 배척하며 천재성을 알아보지 못하는 파리 화단과 썩고 병든 문명세계를 떠나 새로운 미지의 세계로 떠난다.

그러나 고갱이 도착한 타히티는 이미 문명에 오염되어 있었다. 유럽의 식민지로 더럽혀진 열대에는 더 이상 원시의 순수하고 신비로운 아름다움이 남아있지 않았고, 고갱은 때 묻지 않은 세계를 찾아 더 깊숙한 곳으로 향했다.

 

그렇게 정착한 곳이 타히티의 마타이에야였고 고갱은 이곳에서 순수하고 아름다운 13세의 폴로네시아인 소녀 테하마나와 동거를 시작했다. 테하마나는 이후 고갱의 왕성한 창작활동에 새로운 영감과 열정을 불어 넣어 주었고 많은 그림의 모델로 등장하고 있다.

타이티의 열대림과 폴로네시아인들의 건강한 삶의 모습, 눈부시게 작열하는 태양은 그의 회화를 더욱 투명하고 화려하게 빛나는 색의 향연으로 변화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Paul Gauguin. Ia Orana Maria (Hail Mary)

Paul Gauguin. Ia Orana Maria (Hail Mary). 109cm X 86cm, Oil on canvas. 1891.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New York, USA

<Ia Orana Maria, 1891>와 <Market Day, 1892>에서 보듯 화면은 수직과 수평으로 단조롭게 구축되어 있으나, 신비롭고 오묘한 색조들과 화려하게 치장된 무늬 등의 색면들로 인해 화면은 전혀 단조로와 보이지 않는다. 순색에 가까운 강렬한 원색들-빨간색과 녹색, 노란색과 청색의 보색대비는 중간색들과의 절묘한 조화로 인한 극적 효과를 만들어 내고 있다.

타히티에서 제작된 고갱의 회화들은 하나같이 형태와 색채가 자연을 모방하고 재현해 내기 위한 목적에서 벗어나서도 얼마든지 독립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줄 수 있다는 점을 명확히 보여준다. 우리를 미적 쾌감의 절정에 이르게 만드는 고갱의 이 놀라운 그림들은 1890년대 당시에 이미 향후 20세기 서구회화가 무엇을 위해 어떻게 존재해야 할 것인지에 관한 분명하고도 강력한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Paul Gauguin. Market Day, 1892, Oil on c

Paul Gauguin. Market Day, 1892, Oil on canvas, 73 x 91.5cm, Kunstmuseum, Basel

물론 당시 수집가들은 유감스럽게도-어쩌면 당연하게도 고갱의 이 주옥같은 작품들을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고갱의 재능을 아끼며 뒤를 봐주던 화상 테오의 죽음이 고갱에게는 크나큰 손실이었다.

타히티 생활로 돈이 떨어진 고갱은 다시 파리로 돌아와 야심적인 전시회를 열었으나 몰이해한 비평가들의 혹평과 대중의 싸늘한 외면으로 단 한 점의 그림도 팔 수 없었고, 좌절감에 깊은 마음의 상처만 안고 타히티로 돌아가야만 했다. 이 불세출의 천재화가 고갱은 파리를 떠나기 전, 리옹역에 앉아 절망에 찬 눈물을 한없이 흘렸다고 전해진다.

 

타히티로 돌아온 이후 고갱은 예의 자신감과 총기를 서서히 잃어갔다. 과음으로 심신이 허약해졌고 매독의 후유증에 시달리게 되면서 급기야 자살을 기도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자살은 미수에 그쳤고, 살아난 후에도 계속되는 불행과 사건사고로 힘든 시간들을 보내야만 했다. 몇 차례 심장발작으로 힘겨운 말년을 보내던 고갱은 1901년 도미니카 섬으로 이주하여 살다가 1903년 결국 심장병으로 사망했다.(2011년 4월 29일 / 2016년 7월 일부 수정)

 

글쓴이 : 오상길(미술작가,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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