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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현대미술의 쟁점 #2

- 국전미술의 소외는 타당한가?

 

 

한국현대미술의 역사적 질곡에 관하여                        
   
1950-60년대 당시 중견 및 원로작가들 중 상당수가 <대한민국전람회>(이하 <국전>으로 표기)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었던 반면, 현대미협과 벽동인 작가들은 미술협회를 전술적으로 활용해 가며 국제전 진출권을 장악해 대응했다. 당시 신진세력들의 세력화는 생존전략의 하나였을 것이나, 이것이 훗날 대한미협과 한국미술가협회의 대립에 이은 또 하나의 '패거리 문화'라는 바람직하지 못한 전통을 만들었다. 예술가들이 학연과 이해관계에 따라 패를 지어 이합집산하며 미술대학과 미협을 중심으로 화단주도권을 장악하고, 사실 왜곡과 예술의 가치 전도를 일삼으며 화단의 주류로 행세하면, 미술평론가들과 저널이 뒤늦게 이것을 현실로 받아들여 추인해 오는 식의 행태가 더 문제였다. 이 사이 시대적 의식과 감수성, 탁월한 개별 예술가들의 성취는 소외되어 버렸고, 우리 미술은 지극히 편협하고 얄팍한 주변부 아류미술의 역사를 손에 쥐고 있게 된 것이다.
이렇게 주류로 나선 작가들은 훗날 <국전>과 각종 공모전의 심사위원이 되어 심의를 둘러싼 각종 잡음을 만들었고, 끝내 공모전들이 폐지되는 등 자신들이 비난했던 선배들에게 결코 뒤지지 않는 역사의 큰 얼룩들을 남겼다.
     
     

<국전> 아카데미즘의 오해와 역사적 소외

우리 미술이 안고 있는 심각한 문제 중의 하나가 <국전>에 대한 잘못된 비판과 <국전>에 관여했던 작가들의 역사적 소외이다.
1956년 4인전을 비롯해 현대미협과 벽동인 작가들은 <국전>의 아카데미즘에 반대하며, 심사의 불공정성을 비판했다.
그러나 <국전>의 미술들이 아카데미즘이란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그들의 주장은 미술 아카데미즘에 대한 몰이해로 인해 빚어진 오류이며, 실제 <국전>의 현상과도 상당히 다르다는 점에서 이것을 비판적으로 견제하지 못하고 오히려 동조하거나 두둔해 온 평론가들과 미술사가들의 책임이 크다.

아카데미는 본래 르네상스 예술가들이 중요하게 다룬 예술의 과학적 체계와 이론들로, 예술의 정신적인 기반을 전승하려는 의도를 내포하고 있었다.1) 17세기 프랑스 전체주의를 통해 권위를 갖게 된 ‘왕실 회화조각 아카데미’는 미술교육과 미술정책, 전람회 개최 등의 제도적 체계 확립과 르네상스 미학을 계승하는 규칙을 마련했으나, 획일화 양상 때문에 ‘전형의 예술’로 비판받기도 했다.2)
그러나 미술아카데미즘 자체는 본래 지성과 통찰력을 갖춘 미술가의 위상을 스스로 확립하며 형성된 개념이며, 시대의 변화에 따라 그 의미와 역사성, 범주 등이 다르게 평가되어 왔다. 따라서 미술아카데미즘은 미술양식의 답습이나 제도이식 차원에서 ‘구상계열’이나 ‘사실주의’ 등으로 간단히 정리될 문제가 아니라는 주장3)에 상당한 설득력이 있다.
 
<국전>의 아카데미즘과 일본 <문부성미술전람회>(이하, <문전>)의 유사성 논란4)은 <문전>을 답습한 것으로 알려진 <조선미술전람회>(이하, <선전>)를 모델로 <국전>을 만들었고, <선전> 출신 작가들이 <국전>의 심사위원과 초대작가로 활동했다는 점에 근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일본 <문전>은 메이지정부의 문화제도 확산과 미술산업 정책의 일환으로 개최되었다. 즉 일본의 군국주의자들은 <문전>을 통해 ‘미술의 표준’이라는 기능적인 측면을 강조5)하고 장려하되, 중앙이 통제하는 정책으로 자국의 문화경제를 부흥시키려 했으므로6), 그 지향성 자체가 르네상스나 프랑스 미술아카데미즘과 근본적 차이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이런 맥락에서 일본의 <문전>을 본 따서 만든 <선전>이 표면적으로는 유사해 보일지라도7), 3.1운동 이후 문화통치 수단으로 고안한 조선총독부의 식민정책이었음을 감안할 때, <선전>이 <문전> 보다 훨씬 더 제한적이었을 것임은 어렵지않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따라서 이를 <국전>이 물려받았다고 해도 <국전>의 미술을 아카데미즘으로 규정하는 것은 <국전>과 아카데미즘 양자를 다 잘못 알고 있다는 의미인 것이다.
 
 
<국전>의 소외가 의미하는 것

아카데미즘에 관한 당시의 이해가 부족했음을 감안하더라도 <국전>에 출품된 작품들이 다 일제 강점기의 <선전>이나 일본 <문전>의 대표적인 양식으로 알려진, 소위 '좌상파' 미술8)이었던 것도 아니다. 물론 좌상파 미술이 미술의 역사에서 배제되어야 할 이유도 없다. 그 자체가 미술의 논리에서 비롯된 주장이 아니라는 점에서, 좌상파 미술의 비판과 배제는 문제가 있는 주장이었다.  
문제는 <국전>이 좌상파 미술로 채워져 있었던 것도 아니고 아카데미즘 미술도 아니었다는 것을 당시 전시되었던 <국전> 수상작들의 작품을 통해서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9)는 점에 있다. 이런 맥락에서 <국전>=좌상파 아카데미즘의 도식은 단순한 오해라기보다는 <국전>의 배제를 목적하는 정치적 기획이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국전>이 <선전>의 제도답습과 심의위원들의 선전 활동이력, 심사잡음 등 초기부터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었던 것도 사실로 판단된다. 때문에 이것을 성토하는 비판이 줄을 이었으며, 1955년에 이르면 일간지의 단골기사가 될 정도로 사회의 지탄을 받았다. 그러나 이 시점은 교육과 행정, 사법제도 등등 사회전반이 일제강점기의 제도를 존속시키거나 활용하고 있던 때이므로, <국전>에만 국한된 문제는 아니었다.
그런 맥락에서 <국전>의 아카데미즘 비판과 당시 대다수 미술인들의 가장 보편적인 활동무대였던 <국전> 미술 전체의 소외가 초래한 20세기 한국미술의 역사적 손실은 매우 큰 것이며, 이들을 비판하며 몰아낸 작가들보다 <국전>에 관여했던 작가들의 작품 중에서 주목할 만한 예술적, 문화적 가치를 지닌 작품들을 훨씬 더 많이 발견할 수 있다는 점에서 복원노력이 절실하다. 이제 <국전>에 대한 역사적 평가오류는 단순한 공정성 차원의 윤리문제를 넘어, 화단의 주도권 장악을 위해 빈곤했던 20세기 한국미술의 역사를 정치적 배제나 선택적 소외를 통해 더욱 얄팍하게 만들고 비평적, 역사적 가치를 전도시켜 왔다는 점에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화단 전체의 불신과 반목의 뿌리가 되고 있다는 점에서 심각하게 재고해 볼 시점이 되고 있는 것이다.(2016)

 



각주

1) 니콜라우스 페브스너, 『미술 아카데미의 역사』, (서울 : 다민, 1992), pp.11-166, 참조.
     이일, 「미술에 있어서의 아카데미즘 논고」, 『홍익대학교논총』, (홍익대학교, 1973), 전문 참조.
2) 앙리포시옹 Vie des Formes. p.23, 이일, 같은 글, p.123, 재인용
3) 육순호, 「아카데미즘에 가려진 <대한민국미술전람회>」, 한국현대미술운동사, 2011.
4) 서성록 · 오광수, 앞의 책, pp.164-165, 참조.
    오광수, 『한국현대미술사』, (서울 : 열화당, 2004), p.118.
5) 고지마 카오루, 「근대일본에서 관전의 역할과 주요 작품분석」, 최경현(역), 『미술사논단』, 13호, 2001, pp.12-15.
6) 문전 창설 당시는 급격한 서구화가 이루어지던 시절로, 서양화의 신파와 구파의 갈등뿐만 아니라 일본의 전통화단에도 다양한
    파벌양상이 혼재하고 있었으며, 1914년 서양화부의 2과제를 요구하는 화가들이 독립적으로 이과회 결성한 정황들도 있었다는 점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문전과 일본의 아카데미즘을 평가하는 것도 간단한 일은 아닐 것으로 판단된다.
    이가라시 코이치, 「조선미술전람회 창설과 서화」, 『한국근대미술사학』제12집, (한국근대미술사학회, 2004), pp.345-346.
7) 육순호, 「아카데미즘에 가려진 <대한민국미술전람회>」, 한국현대미술운동사, 2011
8)  '좌상파' 미술이란 당시 국전의 아카데미즘 미술로 지목된 전형적인 그림형식으로, 의자에 앉아 있는 인물을 말한다.
9) 제1회 국전의 대통령상 수상작은 류경채의 <폐림지 근방>이었고, 제2회 문교부장관상을 수상한 전혁림의 <소(沼)>, 제 3회 문교   부장관상을 수상한 문학진의 <F건물의 중앙> 등 ‘사실주의 아카데미즘’이나 ‘인상주의 내지는 사실주의 화풍’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작품들이 다수 있었다. 육순호, 「아카데미즘에 가려진 <대한민국미술전람회>」, 한국현대미술운동사,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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