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근현대미술의 이해 2. 빛을 그려낸 예술가
한 인간이-설령 그가 탁월한 능력을 지닌 인간이라고 하더라도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를 뛰어 넘어 홀로 미래에 도달할 수 있을까? 아이러니하게도 탁월한 상상력과 창의성으로 눈앞의 현상을 넘어서, 미래의 세계에 홀로 도달했던 예술가들 대부분은 당대로부터 외면을 당해야 했다. 대중들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토록 명확한 대상을 눈앞에 두고 어떻게 낯설고 어색한 모습을 선뜻 받아들일 수 있었겠는가?
렘브란트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는 빛이 없던 시절 상상으로 빛을 그려낸 화가였다. 요즘 사람들의 눈에 지극히 익숙한 이 조명들이, 이토록 선명하고 극적인 빛과 짙은 음영이 만들어내는 드라마틱한 장면들이 상상으로 재구성해 연출해 낸 것임은 아주 놀라운 일이다. 어떤 참조의 대상이나 그 누구의 조언도 없이, 어둡고 고독한 작업실 안에서 오직 혼자만의 생각과 그 생각을 실현시켜줄 기법의 개발을 통해 이루어낸 세계였다.
렘브란트는 1606년에 태어나 1669년 사망할 때까지 네덜란드 밖으로 나가 본 적이 없었던 사람이었다. 부모들의 가계 속에서도 예술가의 유전자를 찾아볼 수 없고 관련된 직업에 종사했던 이들조차 없었지만, 그는 어릴 때부터 그림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방앗간을 운영하던 렘브란트의 부모는 그림을 배우게 했고, 26세의 젊은 나이에 암스테르담 외과의사협회의 주문을 받아 <니콜라스 툴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he Anatomy Lesson of Dr. Nicolaes Tulp, 1632>를 제작하여 일찌감치 초상화가로 명성을 떨쳤다.
당시 네덜란드는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후 황금기를 구가하던 개신교 공화국이었고, 도시의 상인들이 무역으로 부를 쌓아, 왕족이나 귀족, 교회 못지않은 초상화 주문 고객이 되어 있었다. 사진기술이 등장하기 전까지 유명한 화가가 그린 초상화는 부유한 시민계급의 부와 명예를 상징했다. 암스테르담 외과의사협회처럼 조합이나 단체 등 그룹 단위의 초상화를 주문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것이 렘브란트의 예술가적 재능을 발휘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The Anatomy Lesson of Dr. Nicolaes Tulp,216.5×169.5cm, 1632
Self Portrait as a Young Man, 22.5x18.6cm,1628
렘브란트를 일약 유명한 초상화가의 반석에 올려놓은 <니콜라스 툴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는 줄 맞춰 서서 찍는 학급의 단체사진 같은 당시의 그룹 초상화들의 건조한 형식을 넘어 현장감 넘치는 장면을 연출해 내고 있다. 전체 화면의 중앙 오른 편에 해부학을 강의하고 있는 툴프 박사를 배치하고, 중심 하단에 배치된 핏기 없는 시신을 에워싸고 박사의 강의에 집중하고 있는 인물들을 비대칭구도로 배치하여 드라마틱한 현장감을 자아내고 있다. 이 불균형한 구도를 단조로운 색채들과 특유의 극적 조명효과로 묶어내며 차분하면서도 경건해 보이기까지 하는 분위기로 이끌어내고 있는 것이다. 화면의 오른 쪽 하단에 사선으로 비스듬히 세워져 있는 장서와 왼쪽 상단 배경 벽의 아치를 이용해 빛을 화면의 중앙으로 모아 관람자들의 시선을 자연스럽게 중앙의 인물들로 유도하고 있음도 볼 수 있다.
요즘 연극무대의 부분 조명효과를 연상하게 하는 빛 처리는 이 그림에 빼 놓을 수 없는 극적 효과의 핵심이 되고 있다. 그러나 당시는 이런 조명이 만들어 질 수 없었던 시절이었다. 대낮에도 실내는 어두컴컴했고 횃불이나 등잔불이 조명의 전부였음을 감안할 때, 너무도 완벽하게 그려져 자연스럽게 보이는 빛의 처리가 얼마나 놀라운 관찰력과 상상력 그리고 창의적인 사고의 결과물인지 깜빡 잊고 넘어갈 정도이다. 이런 사실을 환기하지 않는다면 대부분의 관람자들은 렘브란트가 모델들을 그저 정확히 보고 잘 묘사해 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이것이 유명한 렘브란트 조명효과이다. 렘브란트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빛과 어둠은 대부분 실제 눈에 보이는 현상과 다른 창작의 결과물로, 이것이 대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해내던 초상화의 성격을 시적詩的 영역으로 끌어올리고, 단순한 삼차원적 공간의 환영을 영혼의 깊이를 느낄 수 있을 만큼 심리적으로 확장시켜 놓고 있다.
그의 또 다른 작품 <황금투구를 쓴 남자>에서 보듯 이 조명효과는 단순한 3차원적 공간감이나 덩어리감을 넘어 고뇌하는 인물의 내면적 표정까지 드러내주고 있다.
이 작품은 렘브란트가 즐겨 쓰던 공기원근법을 잘 드러내고 있다. 공기원근법이란 관찰자와 대상 사이의 거리감을 표현하기 위해 명도와 채도, 색상, 윤곽 등의 변화를 조절하는 회화적 표현방법으로 르네상스 이후의 화가들이 인물화와 풍경화에 자주 사용했던 명암 원근법 테크닉의 하나였다.
빛을 받아 황금빛 금속성을 띠며 번쩍이는 투구의 어두운 면과 남자의 얼굴에 드리워진 그늘 그리고 역시 빛을 받아 번쩍이는 가죽질감의 목과 왼쪽 어깨를 제외한 몸통, 특히 어둠 속으로 사라진 오른 쪽 어깨 등을 배경과 같은 tone의 색조로 어둡게 처리하여 마치 어둠이 감싸고 있는 듯 효과를 내고 있는 것이 바로 공기원근법이다.
하지만 렘브란트의 공기원근법은 단순한 공간감 이상의 것을 만들어내고 있다. 공간의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어두운 배경 속으로 서서히 빨려 들어가는 그의 스푸마토 기법은 인공적인 빛에 의해 극적으로 강조되고 있는 덩어리감과 디테일의 질감 등과 강하게 대비되면서 존재 자체가 아예 연기처럼 사라져 버리는 것 같은 회화적 효과를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이런 렘브란트 회화의 드라마틱한 특성은 대상의 재연 자체를 목표로 했던 당시의 회화적 규범에 비해 매우 낯설고 이질적인 것으로 비쳐졌을 것으로 판단된다. 대상의 사실적 재연을 규범으로 삼던 사람들의 관점에서 보면, 렘브란트의 회화는 사실과 다른 거짓과 허구의 결정판으로 생각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후의 미술사는 바로 이런 점을 오히려 높이 평가했다. 렘브란트의 예술은 당대는 물론 17세기 로코코 미술과 18세기 신고전주의 미술 등 100여 년간에 걸친 혹독한 비판과 평가절하를 거친 이후 19세기 네오바로크 시대에 이르러 화려하게 되살아났다.
Man with the Golden Helmet, 1650
The Night watch, 363 x 437cm, Oil on canvas, 1642
렘브란트가 매우 인기 있는 초상화가였다는 사실은 당시에도 그의 그림을 좋아하는 이들이 많았음을 뜻한다. 하지만 그의 등장으로 인해 뜻하지 않게 구태의연하고 진부한 화가들로 밀려난 경쟁자들의 존재와 렘브란트의 그림이나 예술가로서의 자존심을 좋아하지 않았던 사람들도 상당히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논란이 되었던 작품 <야간순찰The Nightwatch, 1642>은 잘 나가던 초상화가 렘브란트를 일순간 곤경에 빠뜨리고, 훗날 그를 네덜란드라는 국가와 맞먹을 정도의 비중을 지닌 화가로 만든(?) 작품으로 유명하다. 크고 역동적인 이 그림은 민병대 대장 바닝 코크와 그의 부대원들을 위한 단체 초상화로 주문을 받은 것이었다. 그런데 렘브란트는 이 그림에 주문받은 단체 초상화 이상의 우의적 의미를 덧붙여 닭을 허리춤에 매달고 있는 소녀를 비롯한 외부인들을 추가해 그려 넣었다. 덕분에 이 그림은 단체 초상화이기 보다는 한편의 역사적 장면을 담은 기념비적 성격의 역사화로 보이게 되었고, 주문자들 중 일부는 어둠 속 변두리에 파묻혀 누군지 알아 볼 수도 없게 처리되었다.
이 주문 내용과 다른 내용의 초상화는 곧 논란의 대상이 되었고, 렘브란트를 곤란하게 만들었다. 당시 이 그림을 주문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부유한 상인들이었고 당시의 초상화에 대한 인식은 요즘처럼 독립적 가치가 존중되는 예술작품과 다른 것이었으므로, 돈을 내지 않은 인물들을 자신들이 주문한 그림에 자신들과 함께 그려 넣거나 더 비중 있는 위치에 배치해 놓은 사실에 분개했다는 설이 있다.
예술작품으로서의 가치보다 자신들의 권리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던 주문자들과 렘브란트의 대립은 결국 주문의 감소로 이어져 그를 몹시 곤궁하게 만들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 점이 예술적 맥락에서는 렘브란트 회화의 위대한 성취로 평가되고 있다. 즉 그저 돈을 내고 주문한 단체의 평범한 초상화일 수도 있었던 이 작품에 렘브란트는 초대받지 못한 인물들을 배치하고 특유의 조명효과를 부여함으로써 역동적 생명력과 독창적인 예술성을 얻어냈다. 하지만 이러한 성취가 지닌 의미를 인식할 수 없었던 주문자들에게는 이것이 오만한 화가의 독선일 뿐이었던 것이다.
젊어서 성공했던 화가 렘브란트는 이 사건 이후에도 방만한 살림살이를 이어갔던 것으로 보인다. 1656년 경제적으로 파산한 렘브란트는 집과 작품 심지어 묘지터까지 팔아야 했고 그럴수록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려는 자화상 제작에 집중했다.
Self Portrait, 86×70.5cm, Oil on canvas, 1669
역사상 많은 화가들이 자화상을 그렸다. 화가들은 자의식이 강하고 스스로에 대한 나르시시즘 성향을 띠는 경향이 흔히 있기 때문에, 자화상은 그런 자신의 내면을 통찰해 내려는 화가들의 시도로 이해된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런 자화상이 주로 유명해지기 전이나 대외적인 어려움에 빠져있을 때 많이 제작되었고, 바로 그런 점 때문에 이 시기의 자화상들이 당시 그 작가의 절박한 리얼리티를 담고 있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돈이 없어 모델을 살 수 없을 때, 언제든 거울만 있으면 자신이 원하는 내면적 표정까지 연출해 줄 수 있는 가장 완벽한 모델이 화가 자신이기 때문일 것이다.
렘브란트는 23세 때 그린 <자화상, 1628>으로부터 그가 사망한 해에 그려진 마지막 <자화상, 1669>에 이르기까지 자화상을 많이 그린 화가로 유명하다. <자화상, 1628>은 드물게 역광처리가 되어 있으며, 이 때문에 인상을 특징짓는 이마와 눈 등 얼굴의 주요 부분이 어둠에 쌓여 있다. 렘브란트는 이때 벌써 밀도 높은 화면의 구성과 특유의 빛과 어둠의 강한 대비contrast, 스푸마토 기법 등을 능숙하게 구사하는 등 그의 중요한 회화적 특징이 일찌감치 완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말년의 <자화상, 1669>은 전체적으로 안정감 있는 공간 속에 차분한 색조를 띠고 있다. 특유의 조명효과도 여전해 보이지만, 그러면서도 어딘가 쓸쓸하고 애잔한 느낌이 든다. 이것은 그가 즐겨 사용하던 빛과 어둠의 극적 contrast가 절제되어 볼륨감이 훨씬 덜 강조되고 있기 때문인데, 이 때문에 유난히 더 늙어 보이는 모습 속에 자신의 생애를 관조하는 슬픔이 짙게 배어 있다.
말년의 렘브란트는 세상의 관심으로부터 아주 멀어져 아무도 그의 임종을 알지 못했다. 그가 어둠 속에서 홀로 이루었던 예술적 성취에 비해 말년이 너무 비참했던 까닭에 그의 삶과 예술에는 드라마틱한 전설들이 많이 전해진다.
***
그의 작품을 논하는 일에 빠뜨릴 수 없는 문제가 위작논란이다. 그의 작품은 오늘 날 레오나르도 다 빈치에 필적할 만큼 유명하고 인기가 있기 때문에 수많은 위작들이 나돌고 있다.
1996년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렘브란트 실에서 다른 그림들에 비해 유난히 볼륨감이 부족하고 디테일의 묘사가 조악해 보이는 그림을 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리다가, 작품설명을 보고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는 것 같은-하지만 꽤 기분이 좋았던 적이 있다.
그 그림은 위작이었는데,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측이 그 그림을 진품으로 알고 구입해 기증한 분을 위해 그 사실을 공개하지 않았다가, 기증자가 사망한 뒤 위작 사실을 공개한다는 내용이었다. 비록 속았지만 거액을 들여 렘브란트의 그림을 사서 기증한 분의 뜻이나 그런 기증자의 뜻을 배려해 위작 사실을 공개하지 않았던 미술관 측의 배려에 다시금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었다.(2011년 4월, 2016년 3월 26일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