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 근현대미술의 이해 #5
신고전주의와 Jacques-Louis David
어려서부터 그림에 특출한 재능을 보였던 다비드는 프랑스 왕립 아카데미의 프랑수아 부셰François Boucher에게 사사받았다. 출세욕구가 강하여 로마상의 수상을 갈구했으나 경쟁자들에게 밀려 여러 차례 낙방한 끝에 1774년에야 이 상을 수상했다. 그는 로마 유학에서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과 고대 그리스, 로마미술에 심취했으며, 이에 기초하여 신고전주의 미술의 기틀을 닦을 수 있었다. 1783년 두 번째로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국내외적으로 유명해졌고, 그와 함께 미술의 중심지가 로마에서 파리로 옮겨졌다는 속설이 생길만큼 큰 영향력이 있는 화가가 되었다.1)
쟈코뱅 당원으로서 프랑스 혁명의 열렬한 지지자였으며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의 친구이기도 했던 다비드는 그 사실 때문에 로베스피에르의 실각 후 투옥되었으며,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에 의해 다시 중용되면서 파리 화단의 가장 영향력 있는 지도자로 부상했다.
다비드의 신고전주의 미술양식은 자신들의 정치적 신념을 대변해 줄 미술양식이 필요했던 혁명세력의 필요와 계몽주의 사상 등 당시의 특수한 정치 사회적 상황 속에서 귀족들의 로코코 미술을 대체할 새로운 문화양식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러나 신고전주의 미술의 특징을 완전히 갖춘 것으로 평가받고 있는 1784년작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 The oath of the Horatii>는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는 1789년 보다 5년이나 앞서 제작된 것이다. 이것은 다비드가 프랑스 대혁명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점을 확인시켜준다.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는 수평과 수직의 기본적인 구도로 간결하지만 명확한 공간의 깊이를 보여주고 있다. 바닥의 장방형 무늬와 양 옆의 벽면을 이용해 시선을 인물 뒤의 아치형 기둥으로, 다시 기둥 너머 매우 어둡게 처리된 더 깊은 공간으로 끌어가는 강제적인 원근법과 명암법을 사용하고 있다.
이렇게 확보된 3차원적 공간 가운데 결의에 찬 삼형제의 모습을 사선구도로 그려 넣어 주제와 배경의 주종관계를 명확히 분리해 놓고 있으며, 여인들은 아버지 뒤에 슬픔으로 괴로워하고 있는 대조적인 모습으로 그려 놓음으로써 마치 한편의 연극무대를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갖게 한다.
다비드의 작품들이 유명해지자 다비드가 작품의 주제로 삼았던 내용의 연극이 공연되었고, 다비드의 작품을 3차원 공간에 재연하는 무대장식이 많아졌다. 그러나 인물들은 상당히 정교한 디테일 묘사에도 불구하고 마치 조각상처럼 굳어 있는데, 이것도 다비드의 회화 전반에서 보이는 특징이다.
Oath of the Horatii, 1786
The Death of Marat, 1793
1793년 작 <마라의 죽음>은 프랑스 혁명기의 정치인이었던 Marat의 피살을 주제로 삼고 있다. 마치 오늘날 사건의 현장 사진을 연상시키지만 실제로는 피살 현장의 재현이 아니라 이 사건에 관한 다비드 자신의 입장과 시각을 보여주기 위해 연출된 것이다.
악성 피부병으로 고생했던 마라는 종종 욕조에 약을 풀어 놓고 그 안에 들어가서 업무를 보았다고 알려져 있으며, 손에 쥐고 있는 종이는 자객이 전해준 편지로 당시의 상황을 재현하기 위한 장치로 동원되고 있다.
전체 화면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어두운 배경은 이 사건이 지닌 무겁고 암울한 현실인식을 보여주기 위한 장치로, 비스듬히 힘없이 기울어진 마라의 머리가 암살의 잔혹함을 더욱 극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어두운 배경과 인물의 극적 대비효과는 도미니크 앵그르의 <오달리스크, 1814>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화면 앞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마라의 얼굴과 아래로 축 늘어뜨린 오른 팔 그리고 편지를 들고 있는 왼쪽 손은 인물의 죽음을 암시하고 있다. 하지만 펜을 들고 있는 오른 팔과 편지를 쥐고 있는 왼쪽 손목의 근육에 남아있는 긴장은 죽은 사람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마라의 죽음을 순교자와 같은 숭고한 사건으로 해석하려는 다비드의 의도로 해석된다.
욕조 앞의 낡은 나무 탁자는 마라가 얼마나 검소한 사람이었는지를 강조하고 있고, 이 탁자의 전면에 마라를 추모하는 사인을 그려 넣어 마치 기념 묘비처럼 표현해 놓고 있음이 이를 뒷받침한다.
관람객의 시선을 화면 앞에서부터 탁자와 펜을 들고 있는 오른 쪽 팔, 책상처럼 덮개를 덮은 욕조, 편지를 들고 있는 왼쪽 팔 그리고 어두운 배경에 이르기까지 점진적으로 끌고 들어가는 단순하고 명징한 3차원적 공간을 연출하고 있다. 역시 주제가 되는 마라의 모습을 수평과 수직의 긴장을 깨뜨리며 사선으로 배치하는 화면의 구성을 사용하고 있으며, 이는 다비드가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 1784>나 <독배를 드는 소크라테스>에서도 즐겨 사용하던 전형적인 시각적 장치들이다.
신고전주의 미술은 혁명적 이상을 의식화하고 국민들의 미의식을 계도하려는 정치사회적 목적에 따라 국가적 차원에서 독려되었다. 이것은 정치적 목적이라는 한계 속에서의 일이기는 하지만, 미술이 왕족이나 귀족 또는 부유한 계층들만이 향유하는 장식물로서의 가치를 넘어 공적 가치를 띠기 시작했다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런 시대적 배경이 다비드의 예술적 소신과 일정 부분 맥락이 닿아 있었고, 서로의 필요에 의해 그의 예술적 성취와 화단에서의 영향력이 극대화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다비드가 전적으로 이런 정치사회적 목적에 봉사하기 위해 그림을 그렸다고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는 점차 사회적 필요에 의한 그림과 자신의 개인적인 미적 취향에 충실한 그림들을 구분해서 그렸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다비드는 프랑스 미술계를 대표하는 지도자로 대혁명 당시 유물 보호에 앞장서기도 했으나, 혁명정부의 몰락과 함께 다시 투옥되었다가 국외로 추방당하는 등 정치적 시련을 겪었다. 하지만 다비드는 탁월한 역량의 문하생 장 오거스트 도미니크 앵그르Jean-Auguste- Dominique Ingres(1780-1867)를 두었고 신고전주의 미술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이로써 19세기의 서막은 앵그르의 신고전주의 미술과 바로크 미술의 가치를 재발견하는 외젠 들라크르와Eugène Delacroix(1798-1863)와의 대립을 통해서 서구 근대미술의 초석을 다져 놓고 있다. (2011년 5월 / 2016년 6월 일부 수정)
각주
1) 미술의 중심도시가 로마에서 파리가 된 것은 다비드의 영향력이기 보다는 나폴레옹의 권력을 향해 유럽의 자본이 집중되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으로 판단된다. 이런 현상은 세계 제2차 대전 이후 미술의 중심도시가 파리에서 뉴욕으로 바뀐 사실과도 유사하다.
* 이 글 중에는 다른 글에서 인용된 부분이 있는데, 메모를 찾을 수가 없어 출처를 밝히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