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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irin Neshat, Rebellious Silence, 1994,

Shirin Neshat, Rebellious Silence, 1994, B&W RC print & ink, photo by Cynthia Preston, Courtesy Gladstone Gallery, New York and Brussels.

현대미술의 정치학

 


I.
흔히 예술과 정치를 분리시켜 이해하지만, 정치로부터 자유로운 예술은 없다. 현대미술이 누리는 무한대의 자유와 고도의 정신적 퇴폐성을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라는 체제로부터 분리시켜 이해할 수 있을까? 정권이 바뀌면 미술의 환경도 바뀌는 것이다. 지난 5년간 충분히 경험해 오지 않았던가?

II.
현대미술만큼 정치성을 띤 예술도 없다. 그러나 이 정치성은 예술 그 자체를 위한 것일 뿐, 체제를 위해 봉사하지는 않는다.

미래주의자들의 말로가 이것을 대변해 주고 있지 않은가?

III.
현대미술은 일반적으로 ‘이념’과 ‘양상’, ‘제도적 측면’ 등이 한데 뭉뚱그려진 상태로 이해되고 있고 이 때문에 늘 잡다한 혼선이 빚어진다.

현대미술이란 용어는 이념적 차원과 그 양상 및 제도의 측면에서 각각 분리되어 다루어질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념’으로서의 현대미술은 미술이라는 가치의 본질을 묻는 일종의 형이상학/관념으로, ‘미술이란 무엇’이고 ‘미술이 우리 삶에 어떤 가치’를 지니며, 그런 미술이 ‘어떤 방식으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인지’를 지향한다. 이에 따라 현대미술은 고차원의 전략과 전술을 필요로 하게 되었고 나름의 독특한 정치성을 띠게 되었다.

‘양상’으로서의 현대미술은 그러한 이념이 구체적으로 시도된 다양한 미술의 존재방식들을 말한다.

미술작품들의 형식적 특징들이 이에 해당하지만, 태생적으로 스타일화 될 수 없다는 한계를 지닌다.

많은 작가들이 트레이드 마크 같은 스타일화를 보이고 있지만, 미학적 진전을 이루지 못하는 한 이것은 명백한 자기 복제이자 비평적 자기 기만인 것이다.

모든 이념과 그것의 제도화에는 늘 모순들이 존재하게 되는데, 사회는 다양한 장치들을 통해 이런 문제들을 보정해 왔다.

현대미술의 경우, 다양한 ‘미술제도’들과 ‘담론 문화’가 그것이다.
미술제도란 미술의 현장과 대중 사이를 연결하는 저널리즘과 미술관, 교육기관 등을 말하는데, 주로 미술의 현장적 가치를 문화적 가치로 전환시키는 역할을 맡고 있다. 그러나 이 제도가 미술을 위해 존재한다는 생각은 아주 잘못된 것이다. 제도는 미술을 이용해 존재이유를 밝혀 왔고, 그로 인해 미술현장과 제도 간의 본말 전도가 일반화되어 왔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문제들을 제어할 수 있는 장치가 담론 문화로, 현대미술은 그 문화의 주체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담론의 힘에 의해 온전한 가치를 발현시킬 수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미술의 담론이 허약하거나 부재할 경우, 필연적으로 미술은 추악하게 일그러진 사기극으로 변질되어 특권층의 문화적 취향에 봉사하는 위안부 문화로 전락하거나 투기의 대상이 되고 만다. 최근 미술시장이 호황이라고들 하는데, 이렇다 할 비평문화도 없이 무엇을 근거로 작품값들을 산정하고 있는 건지 의문이다. 1990년대 초반의 경우처럼 이 호황을 틈타 한 몫을 챙기고 튈 자들로 인해 야기될 후유증을 다음 세대들이 앓게 될 것이기에 하는 말이다.

IV.
현대미술이라는 커다란 의미의 문화는 ‘이념’과 ‘양상’ 그리고 ‘제도’와 ‘담론’ 간의 밀접한 영향관계와 균형을 필요로 한다. 물론 이 관계가 늘 균형 잡혀 있는 것은 아니다. 현대미술의 양상들은 제도의 요구에 따라 부풀려지거나 억압되기도 하며, 이런 양상들의 확대가 이념 자체를 전도시켜 놓는 경우도 허다하다.
모든 경우에 있어 제도는 필요에 따라 ‘선택’하고 ‘집중’하게 되는데, 이 때문에 제도 종사자들과 예술가들 사이에는 늘 갈등이 빚어진다. ‘선택’과 ‘집중’은 필연적으로 다수의 ‘배제’와 ‘소외’를 동반하게 되므로, 기득권과 권한의 범위를 둘러싼 잡음이 끊이지 않게 되는 것이다. 필자는 이런 논란이 다분히 소모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는 점을 수긍하면서도 논란 자체는 더욱 활성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논란이 소모적인 것일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은 이것이 결국 기회의 부여라는 다분히 제한적인 비미술적 문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란이 좀더 본격적으로 활성화되기를 기대하는 것은 그것이 담론화의 틀 속에서 양성화됨으로써, 보다 근본적인 문제에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미술계의 담론문화는 그만큼 절실한 것이다.

최근 한국의 미술계에서는 급격히 비대해진 제도들에 의해 빚어지는 우려할만한 양상들이 빈번히 관찰되고 있고, 이것이 제도에 의한 미술이념의 전복 상황으로까지 치닫고 있다. 욕망의 노예가 된 자아가 초자아를 억압하는 단계를 지나, 아예 욕망이 초자아 위에 군림하는 심각한 병리 현상까지 서슴없이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작가인 필자가 망설임 끝에 필봉을 잡게 된 이유도 이런 상황들에 대한 위기감과 무관하지 않으며, 졸고들이 온통 어설픈 비평가들과 사이비 작가들을 향해 날이 선 언어들로 채워질 수밖에 없는 까닭이기도 하다.

현대미술은 민주주의처럼 절대적 가치를 인정할 수 없는 상황에서 시작되어 유동적인 형태로 존재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궁극적으로 대안적일 수밖에 없다. 즉 현대미술의 양상들은 ‘어떤 미술을 이 시대의 미술이라고 보아야 할 것인가’의 이념적 토대로부터 출발하고 있는 것이며, 무수히 검증되고 수정되어가야 할 숙명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현대미술의 양상들이 근대미술의 그것과 달리 충격적이고 데카당하며 그로테스크하게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도 이러한 현대의 정신을 반영하고 있음에 다름 아니다. 17세기 렘브란트에서 발화되어 19세기 후반의 미술에서 심화된 이 일그러짐의 징조는 20세기 초 입체파와 미래주의 그리고 다다이즘에 이르러 절정을 이루었으며, 20세기 중반 이후에는 아예 새로운 전형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물론 이런 역사의 배후에는 산업혁명 이후 지속적으로 유지된 서구사회의 물질적 풍요와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 그리고 냉전체제 속에서 이루어진 자유주의의 우월성 과시 등등의 정치 사회적 상황의 문제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이런 현대미술의 양상들을 제도적 측면에서 살펴보는 일은 지금까지의 현대미술 맥락을 전혀 다른 관점에서 이해하는 계기를 만들어 준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잭슨 폴록은 화려한 명성에도 불구하고 잘 팔리지 않는 작가였으며, 미니멀리스트들의 단순하고 건조한 입방체들도 화상들을 난감하게 만들었다. 다소 비약된 감이 있지만, 이런 미술들이 역사의 중심에 자리를 잡고 미술 작품이 큰 돈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미술들을 정치적으로 필요로 했던 미국 정부와 이 예술가들의 명성을 화폐적 가치로 전환시킬 줄 알았던 화상들 그리고 그들에 의해 전략적으로 기용된 저널리즘 및 일부 비평가들 덕분이었다. 물론 앤디 와홀처럼 내놓고 미술로 돈벌이를 했던 상업주의 작가들과 이런 일들을 미덕으로 수용한 미국사회의 정서 등이 배경으로 작용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1940년대 이후 동시대미술의 주도권을 장악한 미국 미술계의 영향력 아래 미술에 있어서의 자본의 우월성은 상식이 되어 왔고, 그에 따라 현대미술은 제도적 측면에서 재편되어 왔다.

V.
그러나 이런 현상도 결국은 잠시 출렁이다 말 세숫대야 속의 작은 물결에 지나지 않는다. 미술은 제도보다 생명이 길고, 제도는 숙명적으로 변화를 요구받기 마련이다.
최근 그 중요한 단서 중의 하나가 포착되고 있다. 기술과 자본 그리고 거대 시장을 앞세워 빠른 속도로 제1세계를 따라 잡고 있는 아시아의 약진과 이슬람 및 중남미, 아프리카 등의 저항확산은 현재의 문화정치적 불균형에 어떤 변화를 예고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제3세계권 사회들은 선결해야 할 많은 문제들을 가지고 있다. 특히 제3세계권 비엔날레들에서 자주 목격되는 주변부적 제3세계성은 문화적 역량이 경제와 산업 분야의 약진에 비해 형편없이 뒤떨어져 있음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뜬금없는 중국 작가들의 부상이나 100여 개에 이르는 제3세계권 비엔날레들, 한국미술계가 앓고 있는 국제병과 패거리 문화 등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문제들이 스스로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이다.

적지 않은 작가들과 평론가들이 서구미술을 추종하며 마치 국제적인 미술이 따로 있는 것처럼 주장해 왔지만, 그런 국제성이란 실재하지 않는 허구적인 개념이다. 흔히 글로벌리즘을 얘기하는데, 글로벌리즘이란 서구적 관점에서 세계를 하나로 묶고자 함이 아니라, 지역단위의 다양한 가치들을 공유함으로써 세계를 하나로 인식해 가자는 이념인 것이다.
이렇게 보면 국제병 환자들은 한국미술을 서구미술의 주변부적 존재로 만들려는 아둔한 자들로, 한국사회의 서구미술 소비시장화를 부추기는 망국적 존재들이 아닐 수 없다. 바로 이런 허황된 인식들이 미술의 주변부적 제3세계성을 만들고 있고, 진정한 글로벌리즘에의 주체적 동참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는 말이다.

VI.
그런 위인들 덕분에 한국의 현대미술은 흉물스럽게 일그러져 있다. 그러나 이것은 “충격적이고 데카당하며 그로테스크한 모습”과는 전혀 다른 기괴함으로, 잘못된 이식수술로 인한 부작용 같은 것이다. 우리 미술이 이렇게 일그러진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현대미술 문화를 공유하는 주체들 간의 담론부재와 미술과 전혀 무관한-실제로는 존재하지도 않는 가상의 문화권력들에 의한 바이러스 감염이다.
“실제로는 존재하지도 않는 가상의 문화권력들”이란 ‘누가 떨어진 밥풀떼기 몇 알을 집어 먹느냐’를 문화권력으로 착각하고, 아무데나 유행어처럼 ‘권력’의 딱지를 붙여대며 그것이 마치 그 ‘권력’에 대한 비판적인 의식인 것처럼 인식하고 있는 이들을 겨냥한 말이다. 권력이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구축되는 것이며, 코드인사로 자리에 오른 정권의 홍위병들이나 담합을 통해 집단세력을 형성한 자들이 휘두르는 전횡 따위를 일컫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문화권력이란 문화예술계가 주체적으로 강력한 힘을 구축할 수 있어야 하고, 그 힘이 정치권력을 견제할 수 있을 만큼 커져야 하는 것이다. 우리 문화예술계 형편으로 그런 풍토나 조성할 수 있겠는가?

VII.
혹자들은 필자의 이런 비판으로 현실이 바뀔 것 같으냐고 반문할 것이다. 물론 욕망의 현시에 눈 먼 자들이 매질을 한다고 달라지겠는가? 그러나 떨어진 밥풀떼기를 주워 먹느라 미술판을 썩어 문드러지고 있는데, 그저 수수방관하고 있는 일도 칭찬받을 일이 아니다.
어차피 누군가는 어떤 위인들에 의해 무엇이 어떻게 잘못되어 가고 있는지를 밝혀야 하고, 그런 자들이 향후의 새로운 문화지형에 개입할 수 없도록 차단해 가야 한다. 오늘이 아니라 내일을 위해 오늘 해야 할 일을 감연히 실천해 가야 하는 것이다.
시간이 필요한 일이지만, 일그러진 현재와 타협하고 안주할 것인지, 미래를 위해 고독한 현재를 감당해 갈 것인지는 전적으로 본인들에게 달린, 지금 결정할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현대미술도 민주주의처럼 많은 사람들의 도전과 투쟁 그리고 고귀한 희생을 통해 얻어졌다. 미술 그 자체와 방법을 회의하며 시대와 맞섰던 예술가들이 있었고, 그들의 정신과 성취를 평가하며 뒤좇아 온 예술가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라는 말이다. 렘브란트의 고독을 이해하기 위해 100년이 필요했고, 마르셀 뒤샹의 전략을 받아들이는데 47년의 세월이 필요했음을 되새겨 보아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진정 예술가들이라면 그들의 시대로 돌아가 그들의 이방인 같았던 삶과 고독을 생각해야 하고, 칠흑같이 어두웠던 그들의 현재가 역사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진정한 힘이었음을 이해해야 한다.

현대미술은 삶의 현장과 캔버스 속의 진실 사이에서 방황하며 좌절과 절망을 반복 경험했던 예술가들과 그들의 정신과 성취를 기꺼이 받아들여 역사를 만들어 온 이들의 힘에 의해 오늘 퇴폐적일 만큼 흐드러진 꽃을 만개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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