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 근현대미술의 이해 #6
회화적 리얼리티의 여러 얼굴(1)
앵그르와 들라크루아
19세기 서구 미술사에는 당대 거장들 간의 흥미로운 마찰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 쟁점들이 신고전주의와 네오 바로크 그리고 리얼리즘과 인상주의 등등의 유파를 만들어 냄으로써, 미술을 양식style의 시대로부터 이즘ism의 시대로 이끌어 간다. 즉 서구의 미술은 이 시기에 이르러 예술에 있어서의 미적 가치란 무엇이고, 어떻게 성취할 수 있는가를 고민하게 되며, 이에 따라 미술은 ‘생각’하고 ‘이해’하는 예술로 변모되어 간다. 이것은 미술이 시각적 한계를 넘어 개념과 관념의 세계로 그 영역을 확장해 가는 과정이자, 예술에 관한 풍부한 담론을 생산해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미술의 이런 변화는 또한 감상의 문화도 변화시켰는데, 애호가들로 하여금 각자의 미적 취향에 따라 수용하고 거부하던 소극적인 입장에서 벗어나, 예술에 관해 함께 생각하고 발언하며 담론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게 만듦으로써, 미술을 보다 공적인 가치를 지닌 문화로 바꾸어 놓았다.
19세기 서구의 미술사는 미술에 있어서의 리얼리티가 대상 모방이라는 재현의 미학들 속에서 이루어진, 각 예술가 나름의 리얼리티에 대한 치열한 주체적 인식의 결과이자, 미술문화 향유자들과의 교감과 공명의 산물이라는 점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많은 예술가들은 바로 이 예술적 소신 때문에 당대의 거장들과 다른 그림을 그리려 했고, 그러한 소신에 관한 시대적 공명과 마찰이 미술의 역사를 변화시킨 적극적 추동력이 되었다는 말이다.
이런 맥락에서 작금의 한국 미술이 주체적인 역사와 미학 담론을 구축해 내지 못하고 있고, 그로 인해 어떤 콘센서스를 형성해내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우리 미술계는 무엇이 이 시대의 예술적 가치이고 어떤 것이 우리 시대 미술의 존재방식인지 치열한 고민과 논쟁을 거쳐 사회와 향유자들을 설득해 가려는 노력은 기울이지 않으면서, 그저 자기만 알아달라는-세상이 자신을 몰라준다는 어린아이 같은 피해의식만 갖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
미술의 감상은 잘 그려진 그림의 표면에서 느끼는 망막적 즐거움을 넘어 이러한 정신과 역사성을 이해하는 창조적인 작업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감상법은 감상자들로 하여금 미술이라는 특수한 채널로 역사를 바라보는 새로운 경험을 제공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앵그르Jean-Auguste-Dominique Ingres는 다비드Jacques-Louis David의 문하생으로 출발하여 신고전주의를 절정으로 이끈 화가였다. 정확한 뎃상(선묘)과 날카로운 관찰력 그리고 세련된 색채 감각을 함께 과시하는 그의 그림들은 엄격하면서도 우아하며 신비롭기까지 하다.
특히 부드러우면서도 명료한 곡선들과 치밀하면서도 명징한 화면이 돋보이는 <La Grand Odalisque, 1814>는 가히 신고전주의 회화의 백미로 꼽을 만하다. 하지만 이 작품도 당대에는 기형적으로 변형된 형태 때문에 혹평을 면치 못했는데, 감상자들이 실제 인체의 비례를 기준으로 이 그림을 잘못 그려진 그림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Jean Auguste Dominique Ingres, The Valpincon Bather, 1808
Jean Auguste Dominique Ingres, La Grande Odalisque, 1814
흥미로운 사실은 바로 그 기괴하고 불균형스러운 변형이 미술사적으로 중요한 쟁점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즉 후세의 미술사가들은 이 변형을 통해 앵그르가 인체라는 대상의 리얼리티 자체를 그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으로부터 회화의 새로운 미적 질서를 재구축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La Grand Odalisque>의 변형은 폭이 긴 변형 캔버스라는 조건 속에서 완벽한 짜임새를 구축하는 결정적인 조건이 되고 있는 것이며, 그 때문에 이 그림에서는 기형적으로 늘려진 인물의 허리에도 불구하고 시각적 불쾌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즉 세인들의 혹평과 달리 역사는 이 ‘사실과 다른’ 회화적 변형을 당대 미술의 중요한 쟁점으로 인식하고 있으며, 회화적 리얼리티에 관한 이러한 인식의 변화는 적어도 렘브란트를 제외한 앵그르 이전의 예술가들이 감히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사실과 다른’ 회화의 가능성들이 폴 세잔과 같은 훗날의 거장들에게 특별한 영감으로 포착되고 있는 것이다.
화면을 비스듬히 가로지르는 나부와 어두운 배경 간의 강렬한 명도 대비는 다비드의 <마라의 죽음>에서의 그것과 많이 닮아 있지만, 앵그르는 이것을 보다 순수한 미적 질서를 위해 활용하고 있다. 어두운 배경으로부터 청색 커튼과 밝게 빛나는 나부 그리고 소파위에 펼쳐진 천 조각들에 이르기까지 점진적으로 전개되는 공간의 깊이는 전형적이고 기계적이지만, 섬세한 질감표현과 우아하면서도 강렬한 보색대비를 통해 발현되는 세련된 미적 감수성이 이 공간을 오히려 돋보이게 만들고 있다.
<La Grand Odalisque, 1814>는 아름다우면서도 관능적이지만, 퇴폐적인 성적 욕망과 구별되어야 할 회화적 관능의 세계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Eugène Delacroix, Liberty Leading the People, 1830
Eugène Delacroix, Portrait of Frederic Chopin, 1838
한편, 동시대 예술가들 중 특별히 주목해 보아야 할 또 한사람의 작가가 있다. 앵그르와 동시대의 작가이면서 평생의 라이벌이었던 들라크루아Eugene Delacroix (1798-1863)이다. 들라크루아는 이지적이고 치밀했던 앵그르와는 대조적으로, 상상력과 열정 같은 인간 내면의 감정을 중시했으며,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영혼을 감동시키는 회화를 추구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두 예술가의 개인적인 신념의 차이와 시대적 공명이 전혀 다른 미술의 역사를 만드는 결정적 동기가 되고 있으며, 이에 따라 미술이 역동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엄격하고 이지적인 앵그르의 눈에는 감정에 호소하는 퇴폐적이고 선동적인 네오 바로크 회화의 등장이 달갑지 않았으나, 들라크루아의 눈에도 시민들이 왕정에 맞서 일어나 공화국을 탄생시키고 있는 현실과 유리된, 형식적이고 귀족적인 취향의 신고전주의 미술이 마땅치 않았던 것은 마찬가지였다.
들라크루아의 격정은 앵그르의 냉철한 미적 주관과는 또 다른 측면에서 회화미술의 새로운 국면을 열었고,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이후 앵그르와 들라크루아는 사사건건 첨예한 대립과 마찰을 빚게 되는데, 이 두 거장 사이의 갈등은 곧장 당시 미술에 관한 풍성한 담론의 생산과 연결되었고 흥미로운 에피소드를 남기고 있다.
예컨대 앵그르와 들라크루아가 벌인 회화미술에 있어서의 ‘형태와 색채의 논쟁’은 회화미술의 중요한 두 요소를 각각 분리, 심화시키는 계기가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두 거장의 자존심 대결이라는 비생산적 국면들을 가지고 있었다. 탁월한 색채감각을 겸비했던 앵그르는 들라크루아를 의식해 제자들로 하여금 형태의 중요성에 집착하도록 만들었고, 그를 열렬히 추종했던 제자들은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미술의 담론에 적응하지 못하는 시대의 희생양들이 되었다.
이는 훗날 브라크와 마티스 등 전혀 다른 개성의 거장들을 길러낸 퀴스타브 모로라는 걸출한 선생의 교육과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으며, 예술가는 교육으로 길러지는 것이 아니라는 교훈을 다시 한 번 확인시키고 있다. 탁월한 예술가들은 스스로 성장하여 대가의 반열에 올라서 왔으며, 예술교육이란 이들에게 적절한 성취의 동기를 제공하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는 평범한 상식을 이 일화가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준다고 하겠다. (2011년 5월, 2016년 7월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