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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 근현대미술의 이해 #7
회화적 리얼리티의 여러 얼굴(2)
예술의 의미를 묻다 - Gustave Courbet
당대의 거장이었던 앵그르와 들라크르와의 논쟁은 동시대 또 한 사람의 거장, 구스타브 쿠르베Gustave Courbet(1819-1877)의 등장으로 종식되어 버리고, 회화미술은 이제까지와는 전혀 국면으로 빠져든다.
스스로 사회주의자임을 자처했던 쿠르베의 등장은 미술의 문제를 새로운 차원으로 이끌어 갔는데, 그것은 회화와 현실, 즉 삶과 예술에 있어서의 리얼리티를 새롭게 인식시키는 것이었다. 쿠르베에게 있어 삶과 예술의 리얼리티는 형태나 색채, 감정과 개성 그리고 상상력 따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부르주아들로부터 착취당하면서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서민들의 삶과 그들을 처참한 현실로 내몰고 있는 비인간적인 사회 속에 있었다. 쿠르베의 신념은 당대의 예술가들과 부르주아들의 거센 반발과 비난의 대상이 되었지만, 이에 관한 격렬한 논쟁이 그를 새로운 거장의 반열에 올려놓게 된다.
“Art vivant!" 살아있는 예술을 부르짖는 쿠르베에게 앵그르와 들라크루아는 현실을 외면하고 귀족과 부르주아들에게 빌붙어 기생하는 존재에 불과했다. 쿠르베는 들라크루아를 향해 “내게 천사를 보여 달라, 그러면 나는 천사를 그릴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1855년 파리 만국박람회의 심사위원들로부터 출품을 거부당한 <화가의 작업실>은 폭이 6m에 가까운 대작으로, 쿠르베 자신과 쿠르베에게 영향을 주었던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을 모델로 등장시키고 있는 역작이다.
쿠르베는 화면의 왼쪽에 절망적인 삶에 찌들린 서민들과 주검을 배치하고, 오른 쪽에 자신에게 영향을 주었거나 지지해 주고 있는 지식인들을 그려 넣고 있다. 화면의 중앙에 모델을 등 뒤로 한 채 풍경을 그리고 있는 쿠르베 자신과 어린아이 그리고 개 한 마리가 등장하고 있는데, 이것은 자신의 상황을 드러내는 알레고리이다.
서구의 전통회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시선방향은 대체로 그림에 담겨 있는 스토리를 구성하는데, 이 사실을 참고삼아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시선방향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즉 쿠르베에게는 자신이 관심을 쏟고 있는 서민들이나 자신에게 영향을 주고 자신의 이념을 지지하는 지식인들, 심지어 오른 쪽 끝에 그려 넣고 있는 보들레르마저도 정작 자신의 예술세계에 무관심하거나 몰이해한 사람들로 인식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Gustave Courbet, The Painter's Studio-A Real Allegory, 1855
이보다 앞서 그려진 <돌 깨는 사람들>이 있다. 채석장에서 작업을 하고 있는 두 사람의 인부를 그리고 있는 쿠르베는 중노동을 감당하기에 너무 늙거나 너무 어린 소년을 모델로 내세움으로써, 고된 노동에 시달리는 서민들의 모습을 담고 있다. 쿠르베는 감상자의 시선을 외면하고 있는 인물들의 익명성을 통해 이 사실을 알레고리화 하고 있으며, 늙은이와 어린 소년의 노동력마저 착취하고 있는 사회적 현실을 비판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 그림들도 다비드의 <마라의 죽음, 1793>이나 앵그르의 <La Grand Odalisque, 1814> 그리고 들라크루아의 <Liberty Leading the People, 1830>처럼 연출된 것이며, 쿠르베의 리얼리즘이 형식적 측면에서의 사실성과 상당한 거리가 있는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쿠르베는 자신의 역작이 만국박람회의 심사위원들로부터 거부되자, 박람회장 입구에 가건물을 짓고 따로 전시를 열면서 이 전시장을 ‘리얼리즘관’이라고 명명했다. 이 특이한 행태로 인해 쿠르베는 사실주의의 대명사처럼 인식되었고, 사실주의는 다비드와 앵그르로 대표되는 신고전주의와 들라크루아의 네오바로크를 잇는 중요한 미술사조로 자리를 잡는다.
쿠르베의 리얼리즘은 미술사에 있어 예술가가 ‘무엇을, 왜 그려야 하는가?’라는 목적성을 구체화하고, 명확한 답을 하려 했던 최초의 유파였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이 목적 지향적인 성향은 예술의 순수성을 강조하는 역설의 결과를 낳게 했으며, 리얼리즘에 대해 냉소적이었던 인상주의의 출현을 보다 극적으로 돋보이게 만들었다.
쿠르베는 정치적인 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그는 한때 프랑스 혁명정부(코뮌)에 가담하여 미술인 동맹의 대표로 활동했는데, 폭도로 변한 일행의 만행(문화재 파괴, 방화 등)에 충격을 받고 사퇴했다. 그러나 귀족들과 관리들에게 미운 털이 박혔던 쿠르베는 이 일에 대한 책임을 추궁당하게 되었고, 작품을 몰수당하고 투옥과 망명을 겪으며 건강이 쇠약해져 끝내 스위스에서 58세를 일기로 사망하고 만다.
흥미로운 사실은 예술가 쿠르베(1819년 프랑스 태생)와 철학자 칼 마르크스(1818년, 독일 태생)가 한 살 터울의 동시대 인물들이었다는 점이다. 생전에 서로 만났다는 기록도 없고, 서로의 존재를 알고 있었는지도 확인할 길이 없으나, 자신들의 시대에 맞서 각자의 방식대로 철학적 소신을 펼쳤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된다.(2011년 6월 / 2016년 3월 26일 수정)
Eugène Delacroix, Portrait of Frederic Chopin, 1838, 이 작품은 전쟁 중 화재로 소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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