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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 근현대미술의 이해 #8

회화적 리얼리티의 여러 얼굴(3)

인상주의의 서막-Edouard Manet

1863년 프랑스 파리에서는 <낙선전>이라는 이름의 이상한 전시회가 열렸다. 이 전시는 당시 귄위의 상징이었던 살롱전에 낙선한 작가들이 왕궁의 담벼락에 그림을 늘어 놓고 벌이던 시위를 수습하기 위해 마련되었다.
<낙선전>은 그 자체만으로도 세간의 화제가 되었지만, 이지적이며 재능 있는 젊은 화가 마네Edouard Manet(1832-1883)의 <풀밭 위의 점심>이라는 작품 때문에 더욱 유명해졌다. 그러나 마네가 얻은 명성은 비난과 혹평으로 가득 찬 악명이었는데, 주제와 기법 그리고 독창성 면에서 각각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파리의 미술계는 계몽적이며 애국적인 주제의 미술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고, 따라서 예술작품의 가치를 평가하는 기준도 명료했다. 당시는 풍경화나 정물화 그리고 인물화 등이 명확하게 구별되어 있었으며, 그림의 구도와 색채 그리고 기법들 모두가 주제에 맞추어져 있었다.


그러나 마네의 이 그림에는 당시 미술의 모든 기준들이 무시되고 있었다. 때문에 당대의 사람들에게는 이 그림이 고의적으로 풍경화와 인물화 그리고 정물화를 한 화면 속에 합성해 놓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남의 작품을 모방하는 등 독창적이지도 못하며, 주제의 설정도 외설적이고, 색채와 깊이 면에서도 천박하며, 기법적으로도 설익은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보수적인 시민들과 권위 있는 예술가들은 마네의 이 그림에 경악했고, 마네는 일약 뻔뻔스러운 작가로 악명을 떨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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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ouard Manet, The Luncheon on the Grass,1862-18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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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cantonio Raimondi, Judgement of Paris(a part).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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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AN-FRANÇOIS MILLET, El Ángelus, 1857-1859

마네는 16세기 이탈리아의 동판화가 마르칸토니오 라이몬디의 작품 <파리의 심판, 1515>을 차용하여, 파리 근교의 숲 속에 벌거벗은 여인과 검은 턱시도를 갖추어 입은 남자들로 대체해 놓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게다가 신비로움으로 가득 찼던 앵그르의 나부와는 아주 거리가 멀게 느껴지는 육덕진 여인의, 관람객을 빤히 쳐다보는 당돌한 눈빛을 통해 이 풍경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퇴폐성으로 물들여 놓았다.

당시에는 각 인물들의 시선 방향이 주제를 설정하는 중요한 키워드였음에도, 마네는 이를 의도적으로 어긋나게 설정함으로써 주제로서의 어떤 의미도 구성할 의도가 없음을 분명히 하는가 하면, 발색의 효과를 위해 여러 번의 덧칠과정을 거쳤던 거장들의 색채와 기법들을 비웃듯, 설익고 가벼운 필치로 공간의 깊이감을 박탈해 버렸다.
때문에 이 그림은 르네상스 이후 캔버스 속으로 깊이를 더해가던 3차원적 공간감을 납작하고 편평하게 만들었으며, 혼색과 덧칠을 줄여 다른 그림들보다 한층 밝게 보임으로써 고상함과는 거리가 멀게 느껴지고 있었다.(밀레의 ‘만종’과 비교해보라.)

당시로선 <풀밭 위의 점심>이 포르노그라피 수준의 것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이 그림에 많은 비난이 쏟아졌지만, 마네는 명백한 도발을 위해 이 모든 것을 고의적으로 연출했다. 마네는 대담하게도, 권위에 차 있던 아카데미즘 미술의 허구적인 엄숙함을 조롱하고, 미술을 그 어떤 이념으로부터도 자유롭게 해방시켜야 한다는 소신을 과감하게 피력하고 있었다.
사실 당시의 기성미술은 이미 주제의 진정성과 거리가 먼 형식의 반복적 아카데미즘에 빠져들고 있었으며, 그에 따라 주류미술은 젊은 예술가들로부터 배척을 당하고 있었다.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은 바로 이런 시점에서 출현한 그림이었고 당시 젊은 예술가들의 불만을 그대로 담고 있었으므로, 세간의 비난과는 달리 젊은 예술가들의 용기 있는 대변자로 부각되었다. 

당시 평론가들 사이에 상상력이 부족한 화가로 평가(다른 작품의 모티브를 자주 차용한 탓에)되던 마네는 통렬한 비판정신 때문에 젊은 예술가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으며, 역사는 이 작품을 최초의 모더니스트적 혁신을 보여준 기념비적 걸작으로 평가한다.
그리고 마네 이후 이러한 아이러니가 새로운 미술의 전통으로 자리를 잡음으로써, 비난과 냉소, 발상과 가치의 전복, 새로움의 충격들이 미술의 역사를 이끌며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한 미술의 역사를 장식하게 된다.

Edouard_Manet,_Olympia,_130.5cm_×_190cm,

Edouard Manet, Olympia, 1863

Tiziano Vecellio, Venus of Urbino, Oil o

Tiziano Vecellio, Venus of Urbino, 1538

1920px-Giorgione_-_Sleeping_Venus_-_Goog

Dresden Venus(c. 1510-11), traditionally attributed to Giorgione 

but for which Titian at least completed the landscape.

이후 마네는 발표하는 작품마다 논란을 일으켰고 그때마다 거센 야유와 비난을 받았지만, 결국 당대의 거장들 대부분이 마네의 작가적 역량을 인정했고 또 그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기도 했다.

수많은 지지자와 추종자들을 거느리게 된 마네는 자신과 이름의 철자가 비슷한 모네Claude Monet(1840-1926)에게 사인을 바꾸라고 종용했을 만큼, 그리고 자신을 인상주의자들과 동일시하지 못하도록 할 만큼 우월감을 과시했던 것으로 전해진다.(그래서인지 모네의 사인은 필기체이다.) 하지만 마네는 이런 우월감 때문에 역사상 가장 중요한 유파 중의 하나인 인상주의를 주도할 기회를 스스로 걷어차 버렸다.
더욱 아이러니한 점은 마네가 노년에 이르러 모네의 인상주의에 감화되었다는 사실로, 그토록 무시하던 후배의 미학을 거꾸로 추종하게 됨으로써 아카데미즘으로부터 인상주의로 넘어가는 가교 역할에 한정되어 평가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편 당시 세인들의 웃음거리였던 <낙선전>의 개최는 파리 미술계를 지배하고 있던 아카데미즘에의 반발이 이미 집단화되고 있었음을 역사적으로 증언해 주고 있으며, 아카데미즘의 종식과 인상주의의 출현 그리고 무심사 미술제인 독립전Indenpentants의 서막이 됨으로써, 미술사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전시로 남게 되었다.(2011년 6월 / 2016년 7월 부분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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