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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조건에 대하여: 작동 기반으로서의 윤리

​동시대미술은 안정된 기준 위에 서 있지 않다.

공유된 형식 언어도,

매체에 대한 규율도,

통합된 미학적 지평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예술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다시 증명해야 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중요한 것은 예술작품처럼 보이는 일이 아니라,

예술이 어떻게 존재하는가는 묻는 일이다.

우린 예술을 판단하는 기준이 사라진 자리에 서 있고,

그 질문에 관한 답은 오직 작업의 내부에서 구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표면의 형상이나 개념적 설명이 아니라,

작업이 실제로 그렇게 작동하는가의 문제인 것이다.

 

그림이 예술이 되는 일에 필요한 것은 선언이나 제도의 승인이 아니다.

애초에 그런 건 존재하지도 않는다.

지각과 행위 그리고 판단이 실시간으로 결속되는

내부적 정합성이 바로 예술의 윤리다.

이것은 도덕이 아니라 작동 방식이며,

그 작업이 스스로를 검증하는 과정을 보유하고 있는가,

그리고 반복과 장식성, 개념적 대체 같은 것으로 붕괴되지 않는지를 묻는 일이다.

오직 그런 조건만이 오늘날의 예술을 가능하게 한다.

모더니즘의 제 이론들은 틀린 게 아니라 거기에 미치기에 부족했던 것뿐이다.

 

나의 40년에 걸친 작업은 이 조건들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실험하고 검증하는 과정이었다.

자연물을 빌려와서 전시장에 가설하는 방식으로 작품을 제시하고,

전시가 끝난 뒤 원래의 자리로 되돌려 놓았던 10년간의 작업들은

형태의 완결이 아니라 관계의 발생 조건을 다루고 있었다.

 

비디오 작업은 저해상도의 이미지와 신체의 근접성을 통해

감상의 안전한 거리를 무너뜨리고,

지각이 안정된 해석으로 이동하는 경로를 교란하려는 시도였다.

무리수 알고리즘을 도입한 후

프레임의 재생 순서를 비반복적 구조로 전환함으로써

시간의 선형성과 의미의 축적을 해체해 버렸다.

중요한 것은 이미지가 아니라

시간이 작동하는 방식 자체의 재구성이었다.

 

최근의 드로잉 작업 역시 동일 선상에 놓여 있다.

맨손과 물, 안료와 중력, 시간의 조건 속에서

나의 행위들은 표현의 수단이 아니라

감각이 발생하고 소멸해 가는 사건들의 흔적으로 남겨진다.

그리고 이 모든 시도는 하나의 질문으로 수렴된다.

예술은 무엇인가가 아니라,

예술은 어떻게 발생하는가로.

 

동시대의 미술환경 속에서

이 질문이 더 이상 내부에서 다루어지지 않고 있음을 잘 안다.

스타일은 반복을 통해 유지되고,

개념은 언어를 통해 합리화되며,

성취는 축적을 통해 구성되고 있음도 잘 안다.

 

이러한 치환이 지속될 때,

작업은 자기 검증을 멈추고

존재하지 않는 외부 조건에 의해 유지되는 구조로 전환된다.

남는 것은 예술이 아니라 그 시뮬레이션이고,

그 시뮬레이션이 자각된 상태에서 유지될 때,

그것은 필연적으로 기망의 구조를 형성하게 된다.

 

예술은 다시 본래의 조건으로 돌아가야 한다.

외부의 승인이나 명령에 의해서가 아니라,

작업 내부에서 발생하는 필연성에 의해서.

 

각자는 자신의 방식으로,

예술이 존재할 수 있는 조건을 정직하게 수행해야 한다.

주장보다 예술이 발생할 수 있는 조건을 실제로 작동시킴으로써.

 

어느 순간, 모든 것이 한꺼번에 무너지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내게 그 순간은 한 꼬마의 손가락 피아노 그림 앞에서 찾아왔었다.

어떤 양식도, 개념도, 전략도 없었지만,

그 그림 안에서 감각과 행위가 분리되지 않은 채 작동하고 있는 걸 보았다.

 

그건 일종의 리셋 신호였다.

예술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

예술이 어떻게 발생하는가에 대한 감각의 복원.

 

예술은 더 이상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조건으로서,

번번이 다시 만들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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