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이 없는 인왕
내게 쉬운 길은 단 한 곳도 없었다. 2019년 강화도의 작은 창고 한 구석을 정리해서 작업공간을 만들고 ‘손가락 드로잉’을 시작했지만, 폐작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그 실패의 시간들이 내게 가르쳐 준 것은 그림 그리는 방법이 아니라 몸을 지각하는 일이었다. 손가락은 몸이 감각의 장을 여는 순간이었고, 드로잉은 그 감각이 행위와 시간 속에서 펼치는 각각의 사건들이었다.
"손가락으로 그리는 그림이 아니라 몸이 감각을 여는 일이었다."
이 점은 최근 이 아카이브를 제작하며 더 선명하게 되새김질 되었다. 그건 나의 감각이 세계와의 접점이었던 오브제를 통해 작동하다가 비디오를 통해 몸으로 이동하고, 다시 드로잉을 통해서 더 깊이 들어와 감각과 행위, 시간의 차원에 도달해 있다는 자각이었다. 그건 단순한 기법이나 형식의 변화가 아니라, 내가 알고 있던 회화들과 전혀 다른 방법론인 것이다.
그런 까닭에 나의 드로잉에는 그려야 할 대상이 없다. 어떤 것을 묘사하거나 표현하지도, 설명할 필요도 느끼지 않는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인왕산의 형상을 제거한 ‘인왕제색’ 같은 것이다. 남는 것은 단지 ‘지각이 열리는 상태’ 뿐이다.
중요한 것은 이미지가 아니라 감각과 행위, 그리고 질료가 만나는 순간에 발생하는 사건이다.
내겐 질료들도 도구가 아니다. 고유한 존재로서 자기 발언의 강한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 나는 그것을 지배하고 사용하기보다 그 특성을 존중하고 수용하려 한다. 종이와 캔버스, 목탄과 안료는 각기 고유한 구조와 성질을 가지고 있고, 나는 최소한의 개입만으로 서로가 제 모습을 잘 드러낼 수 있는 방향으로 관계를 조정한다.
이 감각과 몰입된 행위가 질료와 만나는 순간이 사건이고, 화면 위에 남는 것이 흔적이다. 그것은 시간과 행위가 비선형적으로 펼쳐지는 투명한 기록들이다.
나는 종종 폴 세잔과 겸재를 생각한다. 세잔은 오랫동안 빅투아르 산을 바라보며 분석했다. 그의 회화는 그런 장기간의 시각연구에서 비롯된 것이다. 반면 겸재는 관찰이 아니라 몸으로 마주하기 위해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수없이 인왕산에 올랐다.
이 차이는 내게 중요하다. 나의 드로잉은 보이는 것을 분석하거나, 보이기 위해 표현하는 일이 아니라, 몸이 감각을 열어 지각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출발되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나의 드로잉은 지각이 몸을 통과해 질료와 만나는 자리가 되고 사건이 된다. 이 절대적 몰입을 위해 난 새벽의 청정한 침묵 속에서 감각을 깨워낸다.
몸과 감각, 질료와 시간은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다.
untitled-비선형적 선긋기, 2025

종이에 먹과 목탄, 물, 109.6 x 78.5 cm
untitled-비선형적 선긋기, 2025

종이에 목탄과 미디엄, 109.6 x 78.5 c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