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성의 재배치 — 명의의 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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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셀 뒤샹, 샘, 1917
fountain–false–fable–four, 네 개의 소변기, 1985, 앙데팡당, 서울
Fountain–False–Fable–Four, 네 개의 소변기, 1985
1985년 나는 작가로서의 첫 작품을 서울 앙데팡당전에 출품했다. 작가의 이름은 내 이름이 아니라 마르셀 뒤샹이었다.
네 개의 소변기를 각각 독립된 받침대 위에 올려놓고 십자형으로 배치하여 서로 마주 보도록 설치했다. 두 개로도 충분했겠지만 네 개를 선택했던 건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하나의 구조를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제목은 fountain–false–fable–four였다. 나는 뒤샹의 Fountain(1917)이 예술과 일상의 경계에 충격을 가했던 사건이었지만, 이후 미술 제도 속에서 점차 하나의 역사적 신화로 굳어졌다고 생각했다. 특히 오늘날 우리가 미술관에서 마주하는 소변기는 1917년의 그 오브제가 아니라, 훗날 제작된 또 하나의 오브제다. 이 점에서 false라는 단어는 단순한 부정이 아니라 하나의 알레고리였다. 그것은 진품과 가품의 문제라기보다는, 예술 제도가 사건을 역사로, 역사 를 다시 신화로 바꾸어 가는 과정을 가리킨다.
나는 동시대미술의 흐름에 깊이 공감하고 있었지만, 동시에 서구미술의 역사적 문맥 속에 단순히 반복적으로 편입되지 않고 어떻게 개입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뒤샹의 샘(Fountain), 1917은 한때 예술과 일상의 경계를 뒤흔드는 사건이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 소변기는 미술제도 속에 편입되어 하나의 역사적 개념으로 굳어졌다. 사건이 개념으로 정착한 것이다.
이 작업은 그 상황을 다시 이동시키려는 시도였다. 레디메이드를 뒤샹의 저자성이라는 틀 속에 다시 배치함으로써 의미의 축을 이동시키고, 저자성이 본질이 아니라 배치의 효과라는 점을 드러내고자 했다. 따라서 이 네 개의 소변기는 뒤샹의 제스처를 반복하려는 것이 아니라, 개념화된 레디메이드를 다시 사건의 상태로 되돌리려는 일종의 ‘거꾸로 다시 읽기’였고, 그런 점에서 이 작업은 존경하는 선배와의 비평적 대화이면서, 뒤샹이 즐기던 언어 유희의 오마주 같은 것이었다.
이때 처음 제시된 재배치(repositioning)라는 방법론은 이후 다양한 작업 속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게 된다. 다만 그것이 당시에는 거의 읽히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은 소통의 실패라기보다는 작품과 관람자 사이의 비동기적 간극에 가까운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