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log, "ŁÓDŹ GHETTO",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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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log, “Łódź Ghetto”>, Opening Performance, 1996, steel wire, electricity, voltage regulator, neon, blacklight, bible, etc.
발화되지 않는 예술
<Epilog, “Łódź Ghetto”>에 관하여
1. 작가의 위치
예술가에게 국적은 큰 의미가 없다. 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시간과 사건들을 향해 공시적으로나 통시적으로 열려 있는 존재다. 때문에 인간이라는 보편적 존재와 역사 전반에 대해 관심을 갖는 건 당연한 일이다. 내가 한국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한국 사람들이나 한국의 역사에만 관심을 한정시킬 이유가 있을까.
2. 작업 배경
1987년 말 나는 큰 고민을 안고 떠났던 여행길에 뮌헨 근교의 Dachau memorial을 방문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인간이란 존재의 끔찍한 본성에 직면했다. 그건 고통과 억압 그리고 침묵과 기억, 저항이 뒤범벅된, 인류가 공유해 왔던 인간성의 근원적 조건이었다.
Łódź는 나치가 세운 첫 번째 Ghetto(유태인 수용소)가 만들어진 폴란드의 도시이름이다.
3. <Epilog, “Łódź Ghetto”>
<Epilog>는 그것들을 마주하려는 시도였다. Łódź Ghetto의 역사적 재현도, 유대인 학살의 비극을 거대한 내러티브로 끌어오려는 게 아니었다. 나는 국가나 이념 같은 절대 권력의 억압 속에 놓인 인간존재-몸과 말과 기억이 모두 삭제되는 상태를 말하고 싶었다.
3-1. Installation
블랙라이트와 강철 와이어, 나무와 성경, 네온 등의 서로 다른 감각적 요소들을 밀폐된 공간 속에 겹쳐놓음으로써, 감상자들에게 자신의 몸이 어디에 놓여 있는지조차 분간하기 어려운 ‘경계적 공간’을 만들고자 했다. 특정한 역사적 장소의 재현보다 억압과 침묵 그리고 공포가 인간에게 어떤 시간성을 부여하는지를 감각적으로 드러내는 장치였다.
3-2. Performance
강철 와이어로 공간을 구획해서 감옥 같이 폐쇄된 두 개의 공간 사이로 좁은 통로를 열어 놓고, 그 강철선들에 전기를 통하게 한 뒤 오프닝 퍼포먼스를 통해 쇠붙이가 이 와이어들에 닿으며 스파크를 일으키며 불꽃이 튀어 오르는, '몸–공간–전기–위험–발화되지 못한 에너지'의 사건을 연출했었다. 관람자들이 ‘억압된 공간의 위험한 전압’을 충격적으로 느끼며, 통제와 감시, 격리와 고립, 위협을 상징하는 사건 속으로 빠져드는 감각적 실험이자, 통과하기 어려운, 혹은 통과해서는 안 되는 경계의 공간이었다.
얇지만 무수히 많은 강철선들이 분절시키고 있었던 그 공간은 하나의 긴장된 구조물이었고, 누가 그 공간 안에 갇혀 있고, 누가 보고 있는 것인지 모호한-어둡고 푸르며 차갑고 우울한, 어딘가 불안한 감정을 느끼게 하는 공간이면서, 결코 ‘조용한 기억’ 속이 아니라 언제든 폭발할 수 있는 전압을 품은 위험한 장소였다.
3-3. 사건으로의 전환
이 퍼포먼스는 ‘시간적 에필로그’였다.
전기가 흐르는 순간, 이 공간은 단순한 설치물이 아니라 “압력–통제–위험–침묵”이 뒤섞이는 장소로 변하고, 퍼포먼스는 그 장소가 작동하는 방식을 감각적으로 드러내는 장치-역사적 사건은 끝난 게 아니라 여전히 현재의 감각 속에서 반복되고 있음을 체험시키는 시간적 장치였다.
나는 이 퍼포먼스를 통해 “어둡고 푸른 블랙라이트 빛의 압력”과 “차갑고 우울하며 불안한 감정을 품은 공간” 속에서 “참회와 기도와 비상을 꿈꾸는 몸”을 통해 “차분함 속의 극한 퍼포먼스”를 연출했다. 그것은 한 인간이 어둠 속에서 자신의 몸을 세계의 잔여와 접속시키는 의식(ritual)** 같은 것이었다.
<Epilog, “Łódź Ghetto”>
이 작업의 본질은 정지된 조형물이 아니라, 어둠과 전압, 공기와 몸, 움직임과 불꽃 그리고 침묵이 순간적으로 결합되는 시간적 사건으로 전환시키며, 기억이나 역사를 재현이 아니라 현재적 사건으로 ‘작동시키는 조건’을 제시하려는데 있었다. 이 작품은 대상이 아니라 사건이며, 작가의 몸을 수행적 매개로, 관객의 몸을 사건의 공동 생산자로 전환시켰다.



다하우 메모리얼, 1988년 1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