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체의 실험들
Anonymous mirror, 1993

pigment print, 140 x 100cm
이 무렵 나는 자연물 오브제로부터 내 몸으로 감각의 관심을 옮겨가고 있었다. Anonymous mirror를 제작하기 위해 작업실의 모든 창을 막아 암실로 만들고, 확대기를 구입해서 필름의 현상과 대형 인화를 직접 하기 시작했다. 스스로 모델이 되어 타자의 몸을 연기하고 카메라의 앵글과 조명 그리고 성기를 감추거나 몸을 카메라 앞으로 기울이는 등의 동작을 연출했다.
이것은 오브제를 다루었던 감각을 ‘몸’으로 옮겨오는 일이었고, 보는 ‘나’와 피사체로서의 ‘나’를 분리시켜 카메라 앵글 속의 ‘몸’ 이미지를 타자화 하는 또 하나의 재배치 작업이었다. 이것을 위해 식별 가능한 신체의 부위를 카메라 앵글의 프레임 바깥으로 배치하거나 동작을 통해 가림으로써, 익명성과 젠더의 모호성을 확보해 대상의 인격과 시선의 구조를 교란하는 타자성의 거울을 만들었다. 흑백의 세련된 콘트라스트와 실제 몸보다 훨씬 큰 크기로 인화했던 것도 타자성을 강화하는 장치로 고안된 것이다.
1997년 뉴욕 휘트니미술관에서 열린 낸 골딘의 전시포스터에 실린 문구 “I’ll be your mirror”와 마크 퀸의 자기 피로 캐스팅한 자소상, 사라 루카스의 Get off your Horse and Drink your Milk, 1994의 도판을 보고 비록 맥락과 방식은 다르지만, 몸에 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는 시기적 동시성에 흥미를 느꼈다.
침묵의 방, 1993

슬라이드 프로젝션, 21초 간의 암전, 심장박동 소리와 침묵
빛이 차단된 독립된 공간, 어둠 속에서 슬라이드 프로젝터가 작동되다가 갑자기 꺼진다.
21초 간 암전과 침묵이 관람자들을 짓누른다. 나즈막한 심장박동 소리가 들려오고 프로젝터의 램프에 다시 노란 빛이 켜지며, 일본군에 의한 독립운동가들의 처참한 학살, 해방과 전란, 시위와 5.16 기록장면들을 비추다 다시 21초 간의 암전과 침묵이 반복된다.
이 작품은 매체실험을 위한 것이었다. ‘안전한 감상’의 재배치를 위해 죄수들의 유쾌하지 않는 머리카락 냄새를 맡게 하고, 느닷없는 암전과 침묵 속에 가두어 놓는 시공간 설계를 고안해서, 바라보는 자의 권력을 흔들었다. 그리고 이 실험은1996년의 <Epilog, "ŁÓDŹ GHETTO", 1996>에서의 전기 스파크와 1997년 <침뱉기>의 감정적 폭력과 <untitled 97-7>의 사적 경험의 폭로 등으로 이어졌다. '보는 일'은 생각처럼 만만한 일이 아니기에.
18th May 1993

single cut slide projection & sound 2배속 재생
1993년 5월 18일, 나는서울의 거리에서 쏘다니며, 장면과 소리를 채집하고 한 컷의 슬라이드 필름과 2배속으로 재생한 사운드를 설치했다.
최전방 포병부대에서 1980년 5월 18일의 살떨리는 진동을 겪었지만,13년 후의 서울엔 그 어떤 기억의 흔적도 없었다. 난 이 한 컷의 필름과 사운드로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기억의 공백’을 재배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