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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리움의 <아트 스펙트럼 2006>을 타고 번지는 위기들

미술전시는 미술작품을 보여주는 행사이지만, 기획의 의도를 담는 일이기도 하다. 전시는 많은 작품들 속에서 특정 작가와 작품을 ‘선택’하여 ‘집중’시키는 일이며, 미술관에서의 그것은 공적 가치를 지닌 문화행사이다.
미술관의 기획전시는 비록 사립미술관의 경우라고 해도, 미술작품이라는 상품을 팔기 위한 상업화랑들의 전시나 대관화랑들의 단순한 작품 발표전시와 구별되어야 한다. 이른바 큐레이터는 연주자들을 한 자리에 모아 교향악을 연주하는 지휘자 같은 존재이며, 대중에게 미술의 가치를 문화적으로 번역하여 제공하는 사회적 임무를 지니고 있다. 이것을 위해 사회는 미술관이나 비엔날레 같은 전시행사의 제도적 시스템과 전문적인 큐레이터 쉽을 통해 그들의 영향력을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힘이 큐레이터의 ‘선택’과 ‘집중’을 미술의 현장에 상당한 영향력으로 행사될 수 있도록 보장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큐레이터들의 영향력에 상응하는 만큼의 소양과 전문성 등에 관한 검증이 필요하다. 또 전시를 구성하는 미술작품들과 전시기획 및 작품 선정의 의도와 구성방법 역시 첨예한 쟁점과 이슈가 되어야 하고, 미술계는 이것을 대중적 관점과 미술의 맥락에서 각각 검토해 가야 한다. 한국미술계의 관행이 어떻든, 내가 아는 한 미술이라는 문화는 그런 것이다.

최근 십수년 간 한국미술계에는 시대적 트렌드로서의 전형적인 스타일과 이슈들을 손쉽게 차용하여 공유하려는 행사들이 부유해 왔다. 그러나 정작 그런 미술의 스타일들과 이슈들이 대두된 배후의 담론들과 변화의 궤도에 관한 고민이나 문화적 대응을 찾아보기는 힘들다. 유행병 환자들/국제병 환자들의 글과 작품들은 늘 그래왔듯, 이런 이슈들과 스타일들이 도출된 배경이나 문맥 상의 설득력 있는 근거의 제시를 과감하게 삭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우리는 이들의 전시와 작품들로부터 동시대미술로서의 스타일과 이슈들의 손쉬운 차용 이상의, 쟁점 자체에 관한 그들의 구체적인 생각들을 읽어낼 수가 없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툭하면 ‘소통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소통’이란 그것의 중요성을 강조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소통의 목적과 필요 그리고 방법과 채널을 제시함으로써 가능해지는 것이고, 대화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자세가 더 중요한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이들의 태도는 작품을 읽고 미술을 이해하려는 대중들의 소통욕구를 거꾸로 저지하고 교란시키며 흐트러뜨리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강조하는 ‘소통의 중요성’은 이 교란을 위한 위장술인 것이 아닐까?

미술작품은 예술가에 의해 제작되지만, 미술 그 자체는 문화라는 공적 가치의 기반 위에 서 있는 것이다. 실로 상식적인 말이지만 우리는 바로 이 점을 명확히 해 둘 필요가 있다. 미술 자체의 문제들은 물론이거니와 시민들과 함께 공유할 문화로서의 미술을 만들기 위해서도 미술과 미술제도가 투명해져야 한다는 말이고, 소통이란 바로 이런 지점에서 그 필요와 가능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런 상식이 통하지 않는 미술계이기에 하는 말이다.

이른바 포스트모던 바람을 타고 만연된 이런 미술현상들은 현대미술의 담론들을 문화적 트렌드주의로 변질시키며, 대중들의 돈으로 대중들을 소외시켜 놓는 본말전도의 상황을 연출하면서, 자발적으로 한국미술계의 서구미술 시장화를 고착시켜 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실로 저질스러운 한국미술계만의 웃기는 해프닝일 뿐이다. 수많은 논자들과 작가들의 입에 회자되고 있는, 이젠 흔하다 못해 지겨울 지경인 틀에 박힌 이슈들과 멀미나는 스타일들의 범람은, 한갓 비평담론의 부재로 인한 미술적 가치의 혼란현상에 다름아니기 때문이다. 무슨 대단한 미술인양 떠들어대고 막대한 공적 자금을 쏟아 붓지만, 이것은 본질적으로 미술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자들이 겁 없이 벌이고 다니는 사기극에 지나지 않는다. 그저 동시대 유행패션의 차용 반복에 지나지 않고, 궁극적으로도 문화적 가치의 생산과 거리가 먼 문화적 소비행태에 지나지 않는 것을 현대미술로 착각하고 있는 현실, 이것이 현재 한국현대미술을 표류시키고 있는 핵심적인 문제인 것이다. 문제는 이런 현상들이 시민들의 세금이나 미술관 등 미술제도의 공적 가치들을 근거로 연출되고 있다는 점이며, 미술계가 이런 현상들을 비판적 검증조차 없이 그저 무기력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현실에 있다.


최근 삼성 리움미술관은 <아트 스펙트럼 2006>을 열었다. 삼성 리움미술관은 삼성이라는 대한민국 최대의 재벌기업이 기업이윤을 사회에 환원한다는 명분을 가지고 벌이는 문화사업인 까닭에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고, 그런만큼 그에 상응하는 막강한 영향력을 미술계의 안팎에 행사해 가게 될 것이다. 물론 삼성의 최고 지향성이 미술이라는 전문영역 속에서도 유효한 것일지는 의문이다. 미술관 건물을 최고로 비싸고 화려하게 짓고 작품들을 비싸게 사들일 수 있을지는 몰라도, 정작 미술의 가치는 돈으로 축적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움미술관에 관한 미술계 안팎의 통념적 인식을 배제할 수는 없다. 이 전시가 삼성이라는 배경을 지니고 있음을 확인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 아트 스펙트럼 2006>에는 총 17명, 14팀의 작품들이 출품되어 있다. 전시소개 리플렛은 기획의 배경이나 전시작품의 설명으로는 너무 피상적이라, 전시의 맥락을 이해하는데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저 밑도 끝도 없이 불쑥 이런 저런 전형적인 이슈들을 제시해 놓고 이내 “젊은 작가들이 국내외적으로 한 단계 더 성장하는 발판이 되고, 한국현대미술의 담론을 형성하는 전시로 자리매김하기를 기대한다.”는 맺음말 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나는 전시장 입구에서부터 기대와 혼돈으로 버무려진 ‘삼성의 말씀’에 관해 생각해야 했다. 친절한(?) 리플렛이 이 전시가 젊은 작가들을 중심으로 최근 “한국 현대미술의 다양한 현상을 조망하는” 행사임을 알려주었고, 전시된 작품들이 그 점을 어느 정도 확인시켜 주었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사실 삼성 리움미술관의 전시라고는 하나 현재 한국미술계의 상황을 고려하면, 이런 전시 하나를 가지고 민감한 문제들을 논한다는 일 자체가 ‘관심의 과잉’이 될 여지가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 지극히 상투적으로 보이는 전시 속에서라도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에 접근할 실낱 같은 의문을 포착하지 않는다면, 앞서 언급한 현상들이 한국미술계의 시계를 흐려 놓고 있는 일을 계속 방치하게 되리라는 위기감이 이 글을 쓰도록 만들고 있다. 그런만큼 나의 의문들은 현재 당면하고 있는 미술의 문제를 풀어 가기 위한 작은 단서이며, 이 노력에 삼성 리움미술관 측이 외형만큼 내용적으로도 기여해 주기를 바라는 생각을 담고 있다.
우선 나는 삼성 리움미술관이 포착하고 있는 ‘한국현대미술의 다양한 현상’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며, 그 현상을 어떤 각도에서 ‘조망’하고 있다는 것인지에 관해 주목할 필요를 느낀다. 주목할 필요라고는 했으나 실인 즉, 단서라고는 그것 밖에 없는 것이다. 대신 나는 그 필요를 최근 우리 미술계에 두드러지고 있는 일련의 현상들, 예컨대 일부 전시기획자들의 활동과 더불어 나타나는 미술계의 표면적 현상들과 연관을 짓기로 했다.
삼성 리움미술관이 말하는 ‘다양한 현상’이란 여타의 전시행사를 통해 나타나는 특징일 수도 있고, 미술 자체의 변화일 수도 있으며 혹은 이 두 가지 측면을 함의하는 말일 수도 있다. 일단, 논의의 구체성을 갖기 위해 미술관 측이 밝히고 있는 ‘다양한 현상’을 최근 미술계의 표면을 장식하고 있는 현상적 문제들과 미술 내적 맥락에서의 문제들로 나누어 생각할 필요가 있다. 흔히 미술의 현상이란 예술가들의 미술에 관한 고민과 그 대안의 제시로 드러나는 것이지만, 이런 당연하면서도 상식적인 판단이 적어도 한국의 미술계 속에서는 신중하게 유보되어야만 한다는 점을, 지난 한국현대미술의 역사가 그리고 한국 미술비평의 역사가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한국현대미술에 관한 한 현대미술에 관한 보편적 상식의 적용은 절대 금물인 것이다.

삼성 리움미술관이 말하는 한국현대미술의 다양한 현상이라는 것이 만일 여타의 전시행사를 통해 나타나는 바들을 지칭하는 것이라면, 유감스럽지만 나는 삼성 리움미술관의 학예역량에 관한 의구심을 표면화할 수밖에 없다. 이미 다 드러나 있듯, 우리는 이런 행사들을 주관해 온 사람들이 누구인지 그리고 그들의 역량과 수법이 어떤 것인지를 익히 잘 알고 있고, 그 한계 또한 명백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런 아류 기획자들이 연출해 내고 있는 트렌드주의 현상들을 근거로 ‘다양한 현상’을 말하는 것이라면, 삼성 리움미술관의 학예사들에게는 도수가 아주 높은 안경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 다양한 현상이라는 것이 미술 자체의 변화를 일컫는 것이라면, 삼성 리움미술관 측은 이제라도 그 ‘조망’의 각도와 결과를 구체적으로 밝혀야 한다. 즉 삼성 리움미술관 측이 인식하고 있는 한국현대미술의 다양한 현상의 내용이 무엇이고, 그에 관한 문제의식들이 어떤 것인지, 그것을 바라보는 관점과 <아트 스펙트럼 2006>의 기획 취지를 미술 내적 맥락에서 더 구체적으로 피력해야만 한다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삼성 리움미술관이 지니고 있는 미술관이라는 공적 제도기관으로서의 위상에 값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밝혀두건대, 나는 불충스럽게도 ‘삼성이 그렇다면 그런 줄 아는’ 부류의 사람이 아니다.

최근 한국의 미술계에서 미술 내부의 역동에 근거하는 새로운 미술현상을 찾아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새로운 미술현상이라고 할만한 것이 없거나 미미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베니스 비엔날레 등을 비롯하여 막대한 공적 기금이 투자되는 거대 전시행사들과, 삼성 리움미술관처럼 막강한 재력과 호사스러운 영향력을 뽐내는 제도기관들의 행사들이 시야를 가려 놓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비엔날레 같은 행사들은 그것이 아무리 크고 화려하다고 하더라도, 행사가 끝난 뒤 쓰레기로 뒤덮힌 황량한 행사장의 뒷모습처럼, 그저 한 순간에 지나치고 말면 그뿐인 그야말로 일시적인 행사일 뿐이다. 문제는 화려한 불빛이 꺼진 쓰레기더미 속에서 다음 행사만을 기다리며 삶을 이어가야만 하는 사람들, 즉 행사에 동원되고 소비되는 예술가들과 한국의 미술계가 안고 가야할 숙제들 속에 있다.

내가 주목해 온 한국현대미술의 다양한 현상들은 이미 앞서 언급했다시피, 동시대적 트렌드의 차용과 서구미술의 소비시장화, 즉 다원주의에 포섭된 자발적 후기 식민화 현상에 다름 아니다. 시민들의 혈세를 쏟아 부우면서도, 평생 미술만 공부해 온 나 같은 사람들조차 이해할 수 없는 행태들로 시민들을 현대미술을 이해하지 못하는 무식한 대중들로 전락시켜 놓는 행사들이 무수히 범람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행사를 주도하는 위인들이 기획자로서의 헤게모니를 위해 역량있는 작가들을 배제하고, 주로 나이 어린 작가들을 젊은 작가라는 미명으로 손쉽게 동원해 왔음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렇게 동원된 대부분의 젊은 작가들은 기획사가 돈벌이 수단으로 내세운 유행가수들 같은 간판에 지나지 않는다. 내게는 이 표면의 현상들보다 젊은 작가들을 빠르게 소모시키며, 영향력을 확대해 온 늙고 추한 기획자들의 음험한 웃음소리가 더 크게 들린다.

나는 지금 삼성 리움미술관이 말하는 ‘다양한 현상’이 젊은 작가들의 약진이 아니라, 손쉽게 동원되고 금새 버려지는 ‘제도적인 젊음의 희생’이 아닌가 되묻고 있는 것이다. 지금 한국 미술계의 각 제도들은 역량없고, 기회주의적이며 세속적인 정치성에 닳고 닳은 자들의 손에서 이해관계에 따라 좌지우지되고 있다. 내게 삼성의 이번 전시는 바로 그런 미술판의 현실을 미술의 현상으로 추인하는 대신, 삼성의 자본과 브랜드 파워를 앞세워 그 영향력을 미술현장에까지 확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충고하건대, 그것은 중대한 리스크를 자초하는 일이다. 세계의 유명 미술관들이 한결 같이 제도적 보수성을 띠는 까닭은, 그 미술관들이 대안공간들이나 상업화랑들 처럼 언제든 망하면 문 닫을 수 있는 기관이 아니기 때문이며, 그렇기 때문에 몇 백년간을 이어갈 기관으로서 리스크를 최소화해 가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삼성 리움미술관의 <아트 스펙트럼 2006>은 검증되지 않은 이슈들과 스타일들을 젊은 작가들과 다양한 현상이라는 모호한 미명으로 쟁점화하는 리스크를 자초했다. 그리고 나는 이것이 바로 삼성 리움미술관의 실체가 아닐까 의심을 하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뻑쩍지근한 껍데기 속의 볼품 없는 알맹이, 화려한 미술관 건물 속에 초라하게 숨쉬고 있는 빈곤한 학예역량을 보게 된다는 말이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전시를 둘러보고, 작가와의 대담이라는 프로그램을 들으며 구체적 단위의 작품들에 관해 논의하고 싶은 생각이 싹 가셨다. 뭘 모르는, 그저 삼성의 부르심을 받고 기뻐서 달려온, 왕자님의 키스 한번으로 한순간에 모든 어려움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신데렐라 콤플렉스에 빠진, 그저 그런 나이에 걸맞지 않게 되바라진 작가들의 얘기를 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사실 젊은 작가들에게는 때때로 이제 뭔가 이루어질 것 같은 순간들이 찾아온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자신의 위기일 수도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현실이라고 불리는 세속적인 성취, 그것은 적어도 예술가로서의 꿈도 현실도 아니다. 예술가들에게는 상류사회 사람들에게 비싼 값에 몸을 허락함으로써 물질적 풍요를 보장받는 고급 위안부들의 삶과 같은 현실과는 거리가 먼, 예술가로서의 현실과 진정성reality이 있는 것이다.
젊은 예술가들에게는 삼성 같은 거대한 괴물들 사이에서 위태롭게 살아남아야 할 아슬아슬한 미래가 있고, 그 외에도 무수한 위협들이 곳곳에 상존해 있다. 작가란 이런 역경과 함정들을 피해 평생을 살아 남아야만 하는 존재이며, 한철의 메뚜기 떼들처럼 덧없이 소모될 수는 없는 존재들인 것이다.

사실 내가 제기하는 문제는 <아트 스펙트럼 2006>이라는 하나의 전시에 국한된 것은 아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삼성 리움미술관이라는 건물과 재력보다 더 거대해 질 수도 있을 영향력이 미술의 현장에 내어 뻗치고 있는 손길, 그것이 미술계에 몰고 올 또 다른 영향을 고려한 문제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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