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비평가들이여 내 칼을 받아라 #No.6

-윤진섭 『한국 모더니즘 미술연구』(4부)

​졸저, 비평가들이여 내 칼을 받아라, ICAS, 2005

미술비평의 진실성과 ‘기획된 정치성’에 관한 의혹

 

 

앞서 언급했듯 윤진섭은 『한국 모더니즘 미술 연구』에서 1957년이 추상미술의 원년으로 간주되는, 한국 현대미술사상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지니는 해이며, <현대미술가협회>의 창립을 추상미술의 기점 설정의 근거로 보는 시각이 보편적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그러나 이 주장은 이 책의 맺음말에 이르러 기존의 1957년의 기점설에 대응하는 1956년 설의 제시로 바뀌고 있다. 윤진섭은 이 맺음말을 통해「반국전 선언」을 아방가르드로서의 상징적 의미로 보아 높게 평가하고, 이에 근거하여 기존의 1957년 설을 1년 더 앞당길 수 있는 계기가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1956년, <4인전>의 화가들에 의한 《반국전 선언》은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그것은 일제시대에 일본식 미술교육을 받고 <선전>을 중심으로 발판을 굳힌 구세대에 대해 신세대가 행했던 첫 반란이었다. (…) 본 논문에서 반국전 선언에 많은 지면을 할애한 까닭은 그것이 지닌 상징적 의미도 의미려니와 한국 현대미술에 대한 기점 논의를 1년 앞당길 수 있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1)


지금까지 조사한 바에 따르면 《4인전》은 중요하게 다루어질 만큼 비중 있는 전시가 아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다만 일부 평론가들이 이 전시에 내걸린 「반국전 선언」을 한국현대미술의 기점설정 문제와 관련하여 다루고 있을 뿐이고, 이것이 윤진섭 등의 평론가들에 의해 다시 과장되어 ‘집중’되고 있는 것이다.

윤진섭의 1956년 설은 주장의 타당성 여부를 떠나 최소한 구체적인 쟁점과 논의의 근거를 제공해 주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전시와 선언의 실체가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과연 이 선언이 한국미술로서의 ‘현대성’에 값할 수 있는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검증함으로써, 실질적인 비평적 성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 논의를 좀더 구체화하기 위해 윤진섭에게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앞서 언급했듯, 윤진섭은 《국전》에 대한 비판적 정서가 이미 1955년 경부터 일간지에서도 자주 다룰 만큼 보편적으로 팽배되어 있었음을 알고 있는가?
둘째, 1956년 《4인전》에서의 「반국전 선언」이 《국전》의 역사적 위상 및 왜곡된 아카데미즘에 대한 도전과 비판, 그리고 대응논리를 구체적으로 담고 있었다고 보는가?
셋째, 《국전》의 아카데미즘에 관한 비판적 관점과 대안미학이 이들의 당시 작품에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있었다고 생각하는가?
넷째, 위 문제들에 값할 만한 근거가 뚜렷하지 않다면, 윤진섭의 주장은 결과적으로 이미 몇 년 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국전》에 반발하고 있는 상황에서의 사건을 너무 과장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다섯째, 평생 《선전》 및 《국전》의 존재를 원천적으로 거부해 온 작가들의 소신과 실천은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그런 사실을 알고는 있는가? 윤진섭은 이들을 아방가르드라고 했는데, 그런 아방가르드적 저항은 《4인전》 같은 단체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인가?
여섯째, 이 전시의 참가작가 중 박서보가 불과 십여 년 뒤 국제전 및 다양한 공모전들의 문제에 개입하고 화단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 오면서 잡음을 일으켜 온 인물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는 점에서, 윤진섭이 말하는 아방가르드로서의 실체가 변질되어 왔음에 대해서는 왜 아무런 언급이 없는 것인가?

사실 나는 지난 2년간의 광범위한 자료조사를 통해서도 당시 출품된 작품 전체를 확인할 수 없었다. 다만 이 자료조사를 통해 1966년 대한민국예술원에서 간행한 『한국예술지』 1권에 실린 이마동의 언급, “국전과의 결별과 기성화단의 아집에 철저한 도전과 항쟁을 감행할 것과 적극적이며 개방적인 조형활동을 통하여 창조적인 시각개발에 집중적으로 참여한다.”와 관련 기사자료들 및 도판 일부 그리고 당시 이 전시와 선언을 실제로 보았던 작가 및 평론가들의 증언을 채록했을 뿐이다. 그러나 이 내용들을 통해 그 선언과 전시가 《국전》의 아카데미즘에 대한 구체적인 미학적 대응으로서의 내용을 담고 있다는 근거는 전혀 확인할 수 없었다. 오히려 이 모든 내용들을 검토하여 종합적으로 판단할 때, 윤진섭의 주장에 무리가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즉 선언문과 전시된 작품들에 《국전》의 아카데미즘에 대한 구체적인 미학적 대응의 근거가 없고, 따라서 이 선언은 기성세대에 대한 반발 정도의 차원에 한정시켜 평가해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뒤에 다시 다루겠지만, 당시 국전에 대한 반발은 이미 일간지에서도 자주 다룰 만큼 보편적인 정서였고
2), 《국전》에 출품도 하고 입선도 했던 젊은 작가들의 갑작스러운 선언적 제스처를 아방가르드 예술가로서의 소신이라고 보기에도 무리가 있는 만큼, 이것을 한국현대미술의 기점논의 차원에서 다루거나, 심지어 기점으로 설정한다는 것은 생각하기조차 어려운 일이다.

윤진섭의 이 같은 주장에 대해 당시 활발한 비평활동을 펼쳤던 작가 김병기는 필자와 가졌던 대담을 통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특히 《4인전》의 반국전 선언을 우리 현대미술의 기점논의의 근거로 삼는 것은 하나의 넌센스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웃기는 얘기예요. 우리는 일제 강점기를 거쳐 왔지만 그때도 그런 문제를 다 생각했던 사람이에요. 나만 생각한 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하다가 죽어 갔고, 사라져 갔어요. (…) 《4인전》을 가지고 역사의 기점을 이야기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얘기예요. 《국전》에 대한 비판적인 의식 같은 것은 그 전부터 다 있어요. 일정(일제 강점기; 필자 주) 때 《선전》에 대한 반발, 김용준 같은 사람도 그랬죠? 우리 아버지(김찬영)도 《선전》에 내지 않았습니다. 참여도 안 했습니다. 이상범, 김은호 뭐 이런 사람들이 참여할 때에도 우리 아버지는 그러지 않았다는 겁니다. (…) 동경미술학교 출신이고, 정통을 시작한 사람인데…. 어떤 하나의 사건을 가지고 그렇게 구획을 지으려고 하는 미술사가들의 태도는 그럴 수밖에 없겠지만, 그 밑바닥을 흐르고 있는 면면한 정신성을 생각지 않으면 안돼요. (…)”
3)

또한 미술평론가 이구열은 이 점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논문 쓰는 학생들도 와서 이걸 그대로 믿어도 되냐는 질문들… 그러면 나는 알아서 믿으라고 그래요. 모든 역사가 책에 나왔든 아니든 그것이 진실이냐 아니냐 하는 의문을 갖은 상태에서 하는 것이 공부하는 자세가 아니겠느냐 생각해요. 이후에 평론가나 미술사가들은 달리 자기 나름대로 할 얘기도 없고, 그 시대 상황을 체험도 안 했고, 누군가의 말을 전적으로 믿고 시작하니까 그런 글을 쓸 수밖에 없는 거죠. 《4인전》 같은 것은 박서보가 중요하다, 중요하다 자꾸 그러니까 그런 것처럼 생각하는 거지, 당시 젊은 사람들이 그런 반항적인 그림을 왜 안 그렸겠어요. 다 그렸지. 정작 박서보씨는 《국전》에 출품했었어. 그리고 몇 번 낙선을 했거든? (…) 한번인가는 입선을 했었는데 특선 같은 것은 하지 못했다고. 자연주의적인 그림들이 많았고, 또 내부의 부패구조도 상당했으니까 박서보처럼 자신감이 넘치고, 의욕이 넘치는 사람한테는 완전히 타도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어요. 그건 그때 상황에서 정당해요. 젊은 학도들이 그런 생각, 반항심을 갖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에요. 이후에 앵포르멜 붐을 이뤘는데, 그러면 그 전에는 현대미술운동이 없었는가 하면 그렇지 않아요. (…) 기억하기로는 그때 이미 변영원 같은 사람도 거의 추상적이라고 할까? 그런 그림으로 6․25의 처참한 상황을 그린 사실이 있어요. 김흥수도 미인도만 그린 게 아니라 <침략자>라고 해서 마스크 같은 걸 그렸거든? 그리고 어떤 잡지인가 신문에 난 것을 읽은 기억이 나는데, 그때의 대담 같은 것을 보면 추상미술에 대한 논의가 이미 있었어요.”
4)

한편 윤진섭은 《4인전》 에 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4인전>에서 표출된 반국전 선언은 동세대에 해당하는 현대미협의 작가들 뿐만 아니라 일부 기성작가들에게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반국전 선언이 선언된 이듬해인 1957년에는 국전에 불만을 품고 있던 기성작가들이 <4인전>에 자극을 받아 각기 다른 이념과 성격을 표방하며 그룹을 창립하게 된다.”
5)

이 글은 1957년에 창립된 《모던아트협회》와 《창작미술협회》, 《현대미술가협회》, 《신조형파》, 《백양회》 등의 단체들이 《4인전》의 「반국전 선언」에 자극을 받아 창립을 보았다는 논리로 해석된다. 일단 《4인전》의 「반국전 선언」이 시기적으로 이들 단체의 창립보다 앞서 있다는 점과 이마동이 위의 단체들의 창립을 “이 선언에 따른 행동의 구체화”라고 진술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견 설득력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정작 이마동은 「반국전 선언」이 “성명이 아닌 선언으로서는 최초의 것”임을 지적하고 있을 뿐이고, 국전에 대한 비판적 정서는 1955년부터 신문지상에 오르내릴 만큼 이미 보편적 정서였으며6), 《현대미협》을 제외한 《모던아트협회》와 《신조형파》 등이 《4인전》의 「반국전 선언」에 영향을 받아 각각 창립되었다는 주장은 앞서 인용한 김병기7)와 이구열 그리고 다음의 정점식의 진술에 비추어 사실과 상당한 차이가 있다고 판단된다. 《모던아트협회》의 일원이었던 작가 정점식은 필자와 가졌던 전화 대담을 통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정점식: 《모던아트협회》는 1955년 당시 동화백화점에서의 개인전(1955. 7. 25.-7. 31. 동화백화점 화랑)에 모였던 김환기, 유영국 선생 등과 함께 우리나라의 모던아트의 폼을 만들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취지에서 발단이 되어 1957년에 창립이 되었습니다. 당시 《국전》을 배격하는 분위기가 일반적이어서 우리도 《국전》과는 얼마간 거리가 있었지만, 《국전》에 대항한다거나 하는 일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상길: 그렇다면 《모던아트협회》가 1956년의 《4인전》 「반국전 선언」으로부터 자극받아 창립되었다고 할 수 없겠군요?

정점식: 물론이지요. 그때쯤 내가 이봉상 씨 연구소에 가서 박서보의 그림을 본 기억이 있는데요? 당시 박서보는 대학교 3학년 학생이었습니다. 《모던아트협회》는 이미 1955년에 얘기가 되었던 것이었어요.

오상길: 그렇다면 《4인전》의 「반국전 선언」을 통해 기성작가들이 《국전》을 거부했던 것이 아니라, 이미 《국전》을 불신하는 분위기가 화단의 보편적 정서였다는 말씀인가요?

정점식: 특별히 반국전이라는 말을 쓰지 않았다 뿐이지, 다들 그랬어요. 지금 김병기 씨가 국내에 있나? 김병기 씨가 당시 내용들을 잘 알고 있어요. 그때 평론을 했으니까….
8)

위 대담에도 잘 나타나 있듯 당시의 엘리트였던 작가들은 《국전》의 권위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으므로, 《국전》을 맞서서 투쟁할 만한 대상으로 인식하고 있지도 않았던 것 같다. 지금도 대다수의 작가들이 한국의 미술계가 썩어빠졌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런 문제를 상대로 투쟁하려 들지 않고 있는 것과 별다를 것이 없다는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대학을 갓 졸업한 젊은 작가들이 뾰족한 미술적 대안도 없이, 말로만 썩어빠진 미술계를 비판하며 선언문을 내걸고 그룹전시를 가졌다고 누가 이들을 아방가르드라고 한단 말인가. 당시 《4인전》의 작가들은 선언을 통해 “국전과의 결별과 기성화단에 대한 도전”을 내세우고 있지만, 정작 그에 대응하는 미학적 대안이 준비되어 있지 못한 상태에 있었는데, 당시에 이미 상당한 기반을 구축하고 있었던 스승 연배의 기성작가들이 대학을 갓 졸업한 신예들의 선언적 제스처에 자극을 받아 일제히 단체를 창립하고, 서로 다른 성격의 미술활동을 시작했다는 것은 논리적으로도 이치에 닿지 않는다.

윤진섭의 이러한 주장은 사실과도 차이가 있고, 설득력도 없지만 사실여부의 문제보다 더 중요한 문제를 남기고 있다. 그것은 윤진섭이 적지 않은 저술활동을 해 온 지명도가 높은 직업적인 평론가임에도, 이런 주장을 하기 전에 역사적 사실확인 과정을 거치지 않음으로써 또 다른 문제들을 파생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생각하기에 따라 사소한 것일 수도 있는 이런 문제들이 심각하게 다루어져야 하는 까닭은 비평계나 미술사학계의 자체적인 검증이 전무한 현실 속에서, 이런 주장이 당대의 활동과 작품들이 지닌 역사적 의미나 가치를 전도시켜 버리는 역사적이고 윤리적인 차원의 문제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윤진섭을 비롯한 미술평론가들과 미술사가들은 당시 활동의 당사자들과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이런 비평적 현실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아야만 하고, 나아가 그 당사자들이 모두 세상을 뜨고 난 뒤에 이런 주장이 역사를 대변하게 될 수도 있다는 점에 대해서도 생각을 해 보아야만 하는 것이다.


윤진섭의 주장은 1차적으로 사실확인이라는 절차를 거치지 않은 연구자로서의 나태함을 보여 주고 있지만, 그의 경력과 글의 앞뒤 문맥의 논지로 미루어 보아 이러한 결과가 단지 ‘실수’였을까 하는 의문을 남기고 있다. 그는 앞서 밝혔듯 1930년대 후반 이후의 미술을 납득할 수 없는 이유를 들어 근대미술로 차별화하면서, 1950년대 후반의 앵포르멜 미술에 강한 집착을 보였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런 윤진섭의 주장이 그의 책 『한국 모더니즘 미술 연구』전반에 걸쳐 드러나고 있는 박서보 개인에 대한 과도한 ‘집중’과도 꼭 맞아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그가 어떤 기획을 염두에 둔 ‘의도’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물론 한 개인의 입장에서라면 그가 누구를 지지하고 옹호하며, 심지어 추종을 한다고 하더라도 문제가 될 것이 없다. 그러나 그가 미술평론가라는 직함을 가지고 사회적 기능을 수행하고 있고, 더구나 한국미술평론가협회의 회장으로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대규모 전시행사를 기획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는 한, 그의 전문성 및 중립성에 이런 문제가 있다는 사실은 미술과 미술계 그리고 미술의 역사에 심각한 위협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들은 그 자신과 한국의 미술비평 그리고 그가 속한 단체의 위상에 적지 않은 타격을 주게 될 것이고, 나아가 수위 높은 비평적 검증 요구에 직면하는 상황을 피할 수 없게 만들고 있다.
게다가 이것은 그동안 한국 미술비평계 및 미술사학계에 대한 미술인들의 원천적인 불신의 원인이 되어 왔던 문제의 한 단면이라는 점에서, 연구자로서의 단순한 나태함이었던 어떤 ‘의도’ 때문이었든 ‘아니면 말고’ 식으로 무책임하게 넘어갈 문제가 아니게 되어 있는 것이다. 




각주
1) 윤진섭 『한국 모더니즘 미술 연구』, 도서출판 재원, 2000, pp.221-222.
2) 대한미협에서 이탈한 작가들이 한국미협을 창립하고, 그 이듬해인 1956년 《국전》 보이콧 사건을 일으켰다. 말하자면, 《국전》에 대한 잡음은 이미 《4인전》의 선언 이전부터 화단의 쟁점이 되어 있었으며, 그 내용 면에서도 큰 차이가 없다.
* 관련기사
  서울신문 1955. 5. 22, 《한국미술연합》 결성
  동아일보 1955. 5. 26, 문화소식-한국미술가협회 신발족
  한국일보 1955. 6. 21, 김영주, 「반성기의 미술문화, 제7회 대한미협전을 중심으로」
  동아일보 1955. 7. 30, 김병기, 「미술시론-새로운 구성모색」, 이봉상, 「집단행동과 미협」
  동아일보 1955. 10. 28, 변관식, 「국전을 앞두고-그 비공정성에서 파생될 화단의 병」
3) 「김병기 대담」, 『한국현대미술 다시 읽기 IV』, Vol.3, ICAS, 2004, pp.142-143.
4) 「이구열 대담」, 앞의 책, pp.180-181.
5) 윤진섭, 『한국 모더니즘 미술 연구』, 도서출판 재원, 2000, p.24.
6) 동아일보 1954. 11. 21. 변관식, 「국전 평」
   동아일보 1955. 10. 28. 변관식, 「국전을 앞두고-그 비공정성에서 파생될 화단의 병」
   동아일보 1955. 12. 28. 박고석, 「창조촌전의 진통기」
   동아일보 1956. 1. 7, 8, 10, 12, 13, 14. 계정식, 이무영, 이상범 등, 「迎春 淸談放談」
   평화신문 1956. 10. 1. 김철, 「한국화단의 공개장」
   한국일보 1956. 10. 18. 「국전을 열어라 무소속 작가들 성명」
   한국일보 1956. 10. 21. 이일선, 「미와 조화-국전분규에 대한 문외한의 소감」
   동아일보 1956. 10. 23. 24. 김응현, 「국전과 작가의 양식」
   한국일보 1956. 11. 15. 김영주, 「제5회 국전종합 평」
   동아일보 1956. 12. 12. 김청강, 「역류한 국전의 동양미술」
   한국일보 1956. 12. 20. 김영주, 「한국은 고도가 아니다, 미술인의 정신적과업을 논함」
7) 오상길: (…) 어떤 분들은 1956년 《4인전》의 「반국전 선언」이 동기가 되어서 《모던아트협회》도 만들어지고, 《현대미술가협회》도 만들어졌다고 말합니다. 선생님께서 아시는 범위 안에서 《모던아트협회》가 그 「반국전 선언」에서 어떤 자극이나 동기를 부여받았다고 생각하십니까?
   김병기: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김병기 대담」, 『한국현대미술 다시 읽기 IV』, Vol.3, ICAS, 2004, pp.143-144.
8) 「정점식 전화 대담」, 2003. 11. 25.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