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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미술이란 무엇인가?

마크 퀸, Self, 작가의 피, 2001.

많은 사람들이 현대미술을 난해하다고 말한다. 물론 인기도 없다. 하긴 세상에 쉽고 재미있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TV만 있어도 심심치가 않은 세상이 아닌가. 나름의 고민들을 안고 바쁜 일상에 시달리는 이들이 골치 아픈 미술을 좋아할리 없다는 말에도 일리가 있다. 한국인들 중 약 70%가 평생 단 한번도 미술관에 가지 않는다는 통계도 있으니 말이다.

그러면서도 반 고흐의 그림이 수백만 달러에 팔렸다는 소식에는 귀들이 솔깃한 모양이다. 그런 일들은 얼마든지 있다. 제럴드 포드가 유산으로 남긴 다섯 점의 르누아르 그림이 포드가 사망한 뒤 포드 자동차가 벌어들인 수익보다 더 큰 돈을 벌어 주었다는 소식도 있었다. 그 뿐인가? 영국의 부호 찰스 사치가 수천만원에 사들인 마크 퀸의 자소상(참고도판)이 불과 십수 년 만에 23억원이 되었단다.

우리나라에서는 이중섭이나 박수근이 가장 유명한 화가들이고, 그림 값도 무척 비싸다. 하지만 이들은 그저 한 시대를 고통스럽게 살다가 비극적으로 죽어간 많은 예술가들 중의 일부일 뿐이다. 물론 특별한 예술적 성취를 이루어낸 화가들도 아니다. 그들은 분단현실 속의 사회적 무관심과 냉대 속에서 굶어 죽다시피한, 죽어서도 상업적으로 철저하게 이용당하는 불행한 예술가의 전형일 뿐이다. 그런 예술가들이 어느날 누군가에 의해 ‘천재’로 ‘국민화가’로 우상화되고 있는 것이다. 예술가들 중에 불행한 삶을 살다간 이들이 이중섭과 박수근 뿐이랴. 살아 생전에 인정을 못 받아 가난하게 살다 죽어간 예술가들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세상의 몰이해로 고통을 받으면서 스스로를 학대하다가 삶을 마감한 이들도 하나 둘이 아니다. 문제는 이런 일들이 수백 년간이나 계속되어 왔는데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를 않는다는 사실이다. 예술가의 입장에서는 참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상한 점은 이중섭 전을 보기 위해 길게 줄을 늘어서 있는 사람들이다. 거액의 광고비를 내고 TV 광고를 때리는 블록버스터 전시들에도 인파가 몰린다. 뿐인가. 졸업 후 진로가 이렇게 불투명한데도 거의 모든 대학들이 미술과를 개설하고 있고, 미술대학에 가려는 학생들이 해마다 치열한 입학경쟁을 벌이고 있지 않은가.
이렇게 보면 현대미술에 대한 대중들의 문화적 욕구가 없는 것도 아닌 셈이다. 미술관들과 화랑들, 저널리즘과 교육기관 등 미술문화 저변의 인프라로서의 제도기관들이 적은 것도 아니고, 이 기관들에 종사하는 전문인들과 이 시스템의 운영을 위해 지출되는 비용이 적은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미술이 지닌 참다운 문화적 가치의 소비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뭔가 지독하게 소모적인 양상이 오래도록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이 글은 원래 몇달 전 음악가인 친구로부터 무가지無價紙 음악신문에 미술칼럼을 써 달라는 부탁을 받고 썼던 글을 조금 손보아 <예술과 시민사회>의 시민미술강좌에 다시 옮겨 놓은 것이다. 나로선 이 글이 의식적으로 거리를 유지해 온 비전문인들을 향한 글쓰기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이 글을 이곳에 다시 옮기는 것은 미술을 이해하고자 하는 분들을 위해 평생 해 온 공부를 나누고자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미술에 관한 책들을 적지 않게 출간해 왔지만, 주로 미술을 이론적으로 공부하는 사람들, 특히 한국의 현대미술을 공부하는 비평가들과 미술사가들을 돕기 위한 것이었고, 덕분에 찾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 책들이었다. 그리고 지난 해 내로라는 미술평론가들을 두들겨대는 책 한권을 더 냈다. 예술가가 평론가들을 이론적으로 비판하는 일이 평범한 것은 아니지만, 이런 비판적 논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문화적 가치는 생각보다 크다. 물론 나로선 잃게 되는 것들이 적지 않다. 평론가들의 공적公敵이 될 것이고, 예술가들과 제도기관들의 미움을 살 것이다. 하지만 그 따위 일들에는 신경쓰지 않고 산다. 나는 예술가이지 아류들과 잘 지내보려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미술을 ‘아름다움(美)을 추구하는 기술(術’) 쯤으로 여기는 분들에게는 미술계가 살벌한 싸움판으로 보일지도 모르는 일이라 마음이 좀 쓰인다. 하지만 나는 이런 논쟁들이 현대미술의 새로운 존재방식을 좀더 명확하게 설명해 줄 것이라고 믿고 있다.


나는 <예술과 시민사회>의 시민 미술강좌를 통해 현대미술에 관한 비전문인들의 이해를 돕고, 난해하다는 통념을 건널 다리를 놓으려 한다. 이를 위해 ‘난해하다’는 통념의 실체를 밝히고 미술이 예술가들과 특권층들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점을 알려갈 것이다.

현대미술은 한마디로 ‘미술을 회의懷疑하는 미술’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대중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그저 ‘감상하는 미술’이 아니라 ‘생각도 해야 하는 미술’인 셈이다.
청중 없는 음악회, 관람객 없는 전람회, 독자 없는 문학을 생각할 수 있을까? 대중의 호응이 없는 예술활동이 꽃을 피울 수 없는 일이고 보면, 어떤 측면에서는 예술활동이 문화적 소비를 전제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예술을 생산과 소비의 메카니즘 구조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이고, 그런 관점에서 보면 예술 담론들이 대중들의 입장에서 전개되어 왔다기보다는 주로 생산자들의 입장에서 진행되어 왔다고 말할 수 있다.

‘천재적’ 또는 ‘위대한’ 따위의 수식어로 통칭되는 일련의 우상주의나 신비주의 같은 것들이 그렇고, 박물관 문화가 또한 그렇다. 나는 대중들이 지금껏 탁월한 예술가들을 향한 경외심을 강요받아 왔으며, 그들이 성취한 가치들의 통제선 밖에 격리되어 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려낼 수 있는 능력과 그것을 느끼고 읽어낼 수 있는 능력은 결코 다른 것이 아니다. 창작과 감상은 읽고 느끼는 공명에서 함께 출발해서, 각각의 주체적인 독해에 이르는 정신활동이다. 보았으니 느낄 수 있고, 느꼈으니 표현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훌륭한 감상활동이 탁월한 예술적 성취만큼 가치있는 일이라고 믿고 있고, 감상이 창작의 결정적인 동기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우선 자연으로부터 영감을 얻어온 예술가들의 경우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들은 우리와 같은 자연을 함께 바라보면서 새로움을 발견해 낸 탁월한 감상자들이었다. 이런 점에서는 물론 예술가들과 감상자들 사이에 분명한 차이가 있다. 하지만 대신 감상자들은 모네가 찾은 빛의 아름다움과 반 고흐의 열정을 읽어내는 방식으로, 예술가의 한계를 넘어 예술의 세계를 확장시켜 왔다. 나는 이 점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해 왔는데, 그것은 우리가 보고 느끼는 예술적 가치가 캔버스 위에 발라진 물감들 속에 담겨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것을 그려내고 또 읽어내는 감성적 교감 속에 있는 것인지를 끊임없이 물어 왔기 때문이다. 만일 예술적 가치가 예술가들과 감상자들 간의 감성적 교감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캔버스나 물감이 없어도 예술적 성취가 가능할 것이고, 그렇다면 예술활동이 생각만으로도 가능해지지 않겠는가?

한 예술가의 작품을 감상하며 새로운 영감을 받았던 예술가들은 더욱 많다. 아니 대부분의 예술가들이 그랬다. 대다수의 예술가들이 또 다른 예술가들에게 자극을 받아 예술가가 되었고, 다른 예술가들의 성취를 새롭게 독해함으로써 독자적인 세계를 열어온 것이다. 모네의 <낟가리>에서 영감을 얻은 칸딘스키의 유명한 일화를 굳이 환기하지 않더라도 한 예술가의 성취가 또 다른 예술가의 성취를 자극한 경우는 얼마든지 있다.
이런 맥락에서 생각해 보면, 보고 느끼고 표현하는 창작과 감상의 메카니즘은 서로 다른 영역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술적 가치의 창의적 독해야말로 창작의 결정적 동기인 것이다.

미술이 ‘미술이란 무엇일까?’를 회의하게 된 것은 적어도 수백 년간 추구해 온 예술의 가치를 의심하는 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사실 정말 난해한 것은 근대미술을 떠받치고 있는 저 불가사의한 천재성과 그것을 의심조차 없이 받아들여 온 근대인들의 의식 속에 숨어 있었다. 현대미술은 근대의 천재들에 의해 구축되고 전유되어 온 일체의 미적 규범과 우상적 가치를 비판적으로 회의함으로써, 미술을 근원적인 차원에서 다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예술이란 무엇이고, 예술이 우리 삶에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지, 도대체 무엇이 예술적으로 가치가 있는 것인지를 밝히지 않고서야 어떻게 예술의 가치를 논하고 또 추구할 수 있다는 말인가? 사실 이러한 미술의 변화는 시대가 변하면서 달라진 사회적 환경과 그에 수반되는 인식의 변화와 그 궤를 같이 하고 있다.

현대미술은 적어도 100여 년간에 걸쳐 이런 고민을 통해 변화해 온 미술을 말하는 것이다. 100여 년에 걸쳐 전개되어 온 다양한 국면들을 한꺼번에 다 설명하기는 어려운 일이지만, 그 모든 상황을 빠짐없이 알아야만 현대미술을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예술가들의 의문과 그것을 해결해 내는 발상 및 인식의 전환을 이해하고 나면 결코 어렵지 않은 것이 현대미술이다. 아니 지적인 사람이라면 오히려 대단한 유쾌함을 만끽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현대미술의 변화는 합리적인 사고의 과정을 통해 이루어졌고, 예술가들 중에는 실로 재미있는 괴짜들이 많기 때문이다.


현대미술은 난해한 것이 아니라 생각을 바꾸고 있기 때문에 낯설게 느껴질 뿐이다. 통념에서 벗어나고 있기 때문에 상식의 범위 안에서 이해가 잘 가지 않는 것이다. 현대미술은 미술의 문화를 누구나 예술가일 수 있고, 비평가일 수 있으며, 누구든 또 다른 누구의 관객일 수 있는 문화적 환경으로 만들어 놓고 있다. 흔히 현대미술을 대중들이 이해하기에 너무 난해하고, 그래서 소수 특권층들끼리만 향유하는 엘리트미술이라고 비판하지만, 사실은 그 정반대이다. 현대미술은 미술의 방법을 통해 대중들의 문화의식을 견인해 올리고 있는, 말하자면 미술을 민주화시켜 온 반反부르주아 미술인 것이다.(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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