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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사실주의 회화에 대한 오해

지석철의 <반작용>과 극사실주의




일찍이 칸트는 인간이 오성으로 판단할 수 없는 不可知의 세계에 관해 언급한 바 있다. 인간이 오감과 이성으로 알 수 있는 한계가 있다는 말이고, 그렇다면 영원히 알 수 없는 것들도 얼마든지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여기에 '아는 것'과 '안다고 착각하는 것' 사이의 미시적 혼란까지 감안하면, 인간의 지적 활동이란 것은 '알 수 있음'과 '알 수 없음' 사이의 연속적인 혼돈과 방황일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생각해 보면 객관적 세계란 인간의 思考 바깥에 존재하는 不可知의 세계 같은 것이다. 언어는 인간이 가장 보편적으로 신뢰하는 소통수단이지만, 그 자체에 내재된 의미체계와 의미한정이라는 매우 까다로우면서도 모호한 한계를 지니고 있다. 독서(읽기/보기)와 작문(쓰기/그리기)에 숙고가 필요한 것도 이 때문이고, 읽기와 쓰기의 어려움이 결코 줄어들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저 '멍하니 바라보는 일'과 '주목하고 관찰하면서 보는 일' 사이에는 행위의 목적과 태도 그리고 방법상의 차이가 존재하고 그에 따라 결과도 크게 달라진다. 또 표현의 과정에 개입하는 무수한 변수들-감각적이고 반사적인 대응이나 우연적이거나 필연적인 습관의 개입 등-로 인해 글/그림은 언제나 새롭게 읽고 이해하며 느껴야 할 가치를 생산하기도 한다. 결국 대상은 언제나 저 만큼 떨어져 존재하는 그 무엇이고, 그 대상을 사유하는 일은 주관적 이해의 한계이자 순간적 결단의 연속인 셈이다.
그렇다면 주체의 지각과 인식의 결과물은 그 대상과 다른 '낯선 그 무엇'일 것이다. 어차피 알고 있는 것 혹은 알고 있다고 믿는 것은 주관적 경험으로 얻은 데이터를 기초로 한 기억의 재구성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림 그리는 일과 그림을 보는 일은 비록 진지한 탐색과 성찰을 지향한다 하더라도 본질적으로 예측할 수 없는 곳으로 튕겨 나가는 불규칙 바운드 같은 '낯선 곳으로의 일탈'이라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이것이 현대의 많은 예술가들이 진리라는 이데아 대신 낯선 곳으로의 일탈에 나선 까닭이고, 현대미술이 그로테스크한 외피 속에 감춰진 이 매혹적인 속살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에 의해  꽃을 피워 올 수 있었던 이유이다.

지석철,_반작용(Reaction),_Color_pencil_and_tur

지석철, 반작용, 1978

지석철,_부재,_2012.jpg

지석철, 부재, 2012

지석철의 그림들은 이런 의미에서 몇 가지 흥미로운 단서를 제공한다. 예컨대 70년대 후반부터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되다시피 한 <반작용> 시리즈들은 일상적인, 아니 적어도 일상적이라고 보일만한 가죽 소파쿠션의 한 부분을 확대하여 마치 그것이 사실인 것처럼, 아니 사실로 보일 만큼의 치밀한 데이터의 재구성을 통해 드라마틱하게 재현해 놓음으로써, 마치 스치고 지나쳐 버린 일상적인 현실의 한 귀퉁이를 문득 마주치는 것처럼, 대상과 인식 사이의 혼란을 다시 경험하도록 한다.


레자크 종이 표면의 요철을 이용해 부드러운 가죽의 표면 디테일을 확대한 주름으로 재현한다거나, 깊고 극적인 tone의 Contrast를 통해 편평한 화면에 풍부한 볼륨감을 만들어 내는 일 등은 작가의 예리한 관찰력과 탁월한 묘사력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이 그림이 일상의 한 단편을 환기시킨다고 해서 어떤 현실적 reality를 재현하고 있다고 보는 것은 재미없는 성급한 해석이다. 여기에는 본다는 행위와 알고 있다고 믿고 있는 습관적이고 관념적인 태도를 교란시키고 어떤 순간적 일탈을 경험하게 하는 시각적 장치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눈이 인지하는 시각적 조건의 재구성을 통해 통념을 확인시키는 장치, 즉 trompe-l’oeil는 회화의 오래된 테크닉이다.

그가 극적인 reality의 구현보다 다른 세계로의 일탈을 꿈꾼다는 것은 그의 또 다른 그림들, <부재> 시리즈들이라든가 <예사롭지 않은 날> 등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나뭇가지 형상의 브론즈로 제작된 미니어처 의자들도 그렇지만, 그것의 이질적인 병치의 방식 역시 낯선 곳으로의 일탈을 지속적으로 기도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만일 누군가 그의 그림들이 사실과 꼭 닮아있다거나 오히려 사실보다 더 사실적으로 보이기 때문에, 그것이 일상이라는 현실의 한 단편을 보여주는 작업이라고 평가하거나 지석철이 그런 의도에서 <반작용>을 제작했다면, 그그림은 그저 낡은 소파의 가죽 쿠션을 실감나게 그린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나는 그런 그림들을 예술작품으로 평가할 생각이 없다. 사실 나는 지석철을 비롯한 한국의 극사실주의 화가들에 관한 미술평론가들의 상투적 주장들에 동의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극사실주의'란 이데올로기를 얼토당토않게 해석해서 이 작가들에게 적용시키고 있다고 생각한다.
 
지석철의 <반작용>은 오히려 한국현대미술사의 맥락에서 다시 읽혀져야 할 새로운 논의의 불씨를 안고 있다. 그것은 앞선 세대, 즉 집단적이고 획일적인 70년대 단색조 미술에 대응하는 '반작용'의 하나였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린버그식 모더니즘의 재현적 리얼리티의 해체라는 이념과 강령에 따라 덩달아 금기시 되었던 재현회화의 현실모방이 사실은 회화에 있어 현실이라는 모티브의 가치 재인식과 방법론적 전략의 재고라는 맥락에서 비판적 반성을 요구하고 있으며, 상실된 그리는 본능을 복원하려는 일종의 '반작용'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말이다. 이러한 점에서 지석철의 그림에 등장하는 리얼리티는 추상회화가 벗겨내려 했던 재현적 리얼리티에로의 복귀가 아니라 또 다른 일탈을 약속하며 재현의 외피를 다시 덧씌우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반작용>의 재현적 이미지가 정교하면 할수록 실재와 그림 사이에서 빚어지는 갈등은 극대화되며, 지각과 인식의 체계가 지니는 한계에 관한 뒤늦은 자각을 통해 오히려 현실로부터 벗어나는 경험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아울러 나는 지석철의 그림 읽기에 임하며 또 하나의 과제를 생각하게 된다. 그것은 이 세대들에게 자극을 주었던 하이퍼리얼리즘 이데올로기가 한국이라는 문화적 프리즘을 통해 또 다른 가치와 국면을 생산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인데, 나는 이 문화적 스펙트럼의 현장을 어떤 맥락으로 이해하고 담론화해 갈 것인가의 비평적 역량에 따라 한국의 현대미술은 동시대 미술 맥락에 관한 대안적 가치를 구축해 갈 수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2002년 9월/2016년 12월 부분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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