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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계와 미술 저널리즘, 이대로 좋은가?
 
 
                                                                                                                                            
        
I.


최근 문화예술계의 추문들이 잇달아 TV와 일간지, 인터넷을 도배하고 있다. 한 큐레이터의 맹랑한 학력위조 파문과 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 사퇴, 《미술대전》 심사비리, 이중섭 위작 논란, 문예진흥기금 편파지원 등에 이어 미술시장의 ‘묻지마 투자’까지 언론의 도마에 오르내리고 있다. 알 만한 사람들에게는 다 알려져 있던 일들이 짧게는 수년, 길게는 수십 년간 방치되어 오다가 뒤늦게 사건화되고 있는 것이다.


 
II.


어느 사회에나 비리는 있지만 한국 사회의 그것은 험난했던 역사만큼이나 범위와 깊이를 가늠하기 어렵다.
미술계의 제도적 부패는 적어도 1920년대 《조선미술전람회》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국전》의 심사비리도 1950년대부터 일간지의 단골 기사였다. 반국전 운운하며 언론플레이로 재미를 보았던 앵포르멜 세대들 역시, 제도권 진입 후 국제전 독식과 각종 《민전》 및 《국전》의 수상작 선정을 둘러싼 추문을 일으키며, 반국전이 미술계의 헤게모니 장악을 위한 낯간지러운 구호였음을 스스로 드러냈다. 미술하는 사람들의 추한 행태는 이후에도 계속 이어져, ‘민중’과 ‘공공성’을 팔아 기득권을 챙기는 무리들의 추태로 이어졌고, 이젠 반사회적인 사기극까지 펼치고 있는 것이다.

 

 
III.

 

미술계 전체가 곪고 썩어서 악취가 진동하고 피고름이 흥건해져도, 미술하는 사람들은 침묵과 방관이 유일한 방어 수단인 양 이기적이고 배타적인 풍토를 만연시키고 있다. 절단부위가 발목에서 무릎으로, 다시 허벅지로 올라가고 있는데 말이다.
개인들에게 무슨 힘이 있느냐고 항변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패배주의자들의 기회주의적 변명일 뿐이다. 이 상황은 명백히 상호간의 견제와 협력으로 지탱되어야 할 각 제도기관들이 불신과 반목의 온상으로 변질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오히려 뜻있는 개인들이 제도기관들과 집단적 패권주의에 맞서 강력한 반동을 보여줄 때이다. 미술의 주체는 예술가들이지 제도가 아니기 때문이고, 제도기관들과 단체들의 부패는 졸속으로 팽창시켜온 시스템들을 재정비할 기회이기 때문이다.

IV.


미술하는 사람들은 이제라도 자정에 나서야 한다.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이들이 모여 구심점을 형성하고 공개적인 발언을 시작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의 공명을 일으켜야 한다. 문제를 전면적으로 쟁점화하여 공론화함으로써, 자신들을 도덕적 타락으로부터 보호하고 미래를 주체적으로 일구어 갈 기반을 만들어야 한다.
나무는 줄기보다 더 굵은 가지를 키우지 못하는 법이다. 젊은이들은 썩어 빠진 기성세대들에게 기회를 얻기 위해 굽실거리지 말고, 스스로 개척해 기회를 쟁취해야 할 것이다. 이 미술계의 썩은 곰팡이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바로 이런 젊은이들의 모습이다. 지금은 미술계의 쇄신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고, 그 일에 앞장 서는 것이 사회로부터의 폭넓은 지지를 확보하는 지름길임을 확신한다. 
  

 

V.


저널리즘도 미술계의 부패에 일조해 왔다. 미술계를 위해 물심양면으로 애써온 일부 저널과 저널리스트들이 있지만, 그 이상으로 부패를 촉진하며 기회주의로 일관해 온 저널리즘도 있는 것이다. 최근 신정아 사태와 이중섭 위작 논란, 투기성 미술시장 등등의 배후에도 문제의 미술 저널리즘들이 도사리고 있다.
 
몇 가지만 짚어 보자.
적지 않은 신문들이 신정아를 신데렐라로 치켜세웠는데, 전문성이 없는 기자들이 무슨 수로 그녀의 능력을 검증했다는 것인가. 일설에는 상당수의 기자들이 그녀에게 관리(?)를 받았다고 하던데, 그녀의 관리가 기자로서의 자존심까지 저버릴 만큼 큰 것이었는가, 아니면 그녀가 지면을 메우기에 적당한 인물로 보였던 것인가.
『월간미술』도 신정아에게 월간미술상이란 것을 주어 사기행각을 뒷받침해 놓고, 아직까지도 일언반구 해명조차 없다. 말 나온 김에 하는 말이지만, 미술평론가 모씨에게 주어진 월간미술상의 근거 텍스트도 읽어보니 실로 한심하기 짝이 없는 글이었다. 이 점에 대해 『월간미술』이나 당사자로부터 반박이 있다면 그 텍스트를 적나라하게 해부해서 보여줄 의사가 있다.  『월간미술』은 이런 근거없는 상들이 미술계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으나, 지금 이 미술판이 그런 제도를 운영할만한 환경이 되는지 먼저 생각해 보았어야 했다. 좋은 뜻이 늘 좋은 결과를 낳는 것은 아니기에 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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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의 드로잉들이 위작으로 밝혀지기 전, 한 일간지에 크게 보도되었던 외국 경매시장의 거액 낙찰기사를 본 기억이 있다. 해당 신문사와 기자는 그 작품들이 위작으로 밝혀지지 않았을 경우, 그 기사가 화상들에 의해 어떻게 악용되었을지 생각해 보았는가.
 
미술시장에 관한 보도는 어떤가. 최근 미술시장의 행태에 의구심을 제기한 기자도 있지만, 달아오르는 투기판에 기름을 부어 넣는 기자들도 있다. 미술시장의 문제야말로 실태를 파헤쳐 보도해야 할 심각한 사안인데도 그런 기자들은 결코 눈에 띄지 않는다.
 
 
대다수의 일간지들은 미술에 대한 전문지식은 물론, 관심과 애정조차 없는 기자들을 미술담당으로 발령한다. 어제는 사회부 기자로 오늘은 미술부 기자로 활약하는 팔방미인들이 너무 많고, 그 중에는 미술담당 기자로 발령을 받았기에 짤리지 않으려고 기사를 썼을 뿐 미술에는 관심도 없다고 말하는 일간지 기자도 있다. 사정이 이쯤 되면 미술이 무엇이든 미술계가 어떻게 돌아가든 관심없는 기자들이 제공되는 보도자료들과 이해관계에 따라 지면을 메우는 것도 무리가 아니지 않겠는가.
 
군사정권의 언론통제 경험을 통해 불순한 필터링 기법을 배운 기자들도 있다. 미술에 관한 철저한 비전문성을 바탕으로 봉투나 특정 이해관계 등에 따라 제멋대로 기사를 통제하는 기자들의 전횡이 아주 볼만하다.
 
사건왜곡 문제도 심각하다. 지난 2007년 1월 초 KBS 1TV 저녁 9시 뉴스는 <미술계 전반의 문제점 진단>을 내세우며, 한국미술협회 이사장 선거와 《미술대전》을 둘러싼 비리 의혹을 연속 보도했다. KBS는 5.16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기회주의적으로 처신해 온 일개 사설단체의 해묵은 비리를 미술계 전반의 문제로 확대 과장하여 보도했다. 썩어 빠진 인간들이 후미진 밀실에서 벌이는 음습한 행태가 어째서 “미술계 전반의 문제”란 말인가.
KBS는 미협이 공공연한 비리를 저지르도록 공적 기금을 지원해 온 정부가 관리감독의 직무를 유기해 왔다는 사실에 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음므로써, 관변 언론의 위상을 스스로 드러냈다.
또한 KBS는 지난 해 문화예술 NGO <예술과 시민사회>가 조사한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심각한 운영실태에 관한 국회의원실의 보도요청도 거부했었다. 고작 1억원의 예산을 지원받아 벌이는 《미술대전》의 비리는 미술계 전반의 문제로 부풀려 며칠씩 메인 뉴스로 방영하고, 매년 350여 억원의 적립금까지 축내면서 예산을 불려, 문화예술계를 갈등과 대립의 파국으로 몰아가는 정권 홍위병들의 문제는 보도자체를 거부하는 것, 이런 편파적 이중성이 바로 관제방송 KBS의 실체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VI.

 

미술잡지들의 문제 역시 심각하다. 한국의 미술잡지들은 하나같이 전문지로선 내용이 너무 일천한데도 버젓이 전문지 행세를 하고 있다. 내용은 차치하고라도 중요한 사건마다 낮게 엎드려 피하기에 급급하고, 기득권 세력과 연대한 어용세력을 자처하거나, 돈받고 특집을 꾸미며 사이비 화상들의 장삿속을 채우는 일 등등, 저널로서의 기본적인 보도윤리에서조차 벗어난 경우가 허다하다. 문제는 이런 행태들이 전혀 검증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잡지사들의 고충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한국처럼 좁디좁은 미술판에서, 게다가 책읽기를 한사코 싫어하는 미술인들을 상대로 채산성을 맞추기 힘들 것이고, 그런 만큼 소위 힘깨나 쓰는 위인들의 입김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형편이라는 점도 잘 알고 있다. 그뿐이겠는가? 명함만 평론가인 지식사기꾼들이 대다수인 이 미술판에서 필자를 확보하는 일도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닐 것이며, 논쟁의 미학을 이해하지 못하는 미술인들을 상대로 민감한 사안들을 쟁점화하기도 어려울테니 지면 메우는 일인들 쉽겠는가.
 
그러나 사정이 딱하다고 복지부동과 떳떳치 못한 타협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그것이 잡지가 되었든 전문지가 되었든 저널리즘을 표방하는 한, 공적 가치에 반하는 모든 행태들은 비난의 대상이 되어야 하고, 저널리즘으로서의 위상도 의심받아야 마땅하다.
 
 
VII.

 

미술잡지의 문제들을 함께 고민하는 차원에서 대안을 생각해 보자. 우선 독자층을 변화시켜야 한다. 몇 안되는 미술인들에게 의존할 것이 아니라, 눈을 밖으로 돌려 대중문화산업에 식상한 많은 지식인들에게 다가서야 한다는 말이다.  
물론 이들에게 접근하기 위해 먼저 자신들의 수준을 한참 끌어 올려야 한다는 문제가 있다. 이것이 두 번째 과제이다. 일부 사이비 평론가들과 기획자들이 어설픈 상업주의와 대중문화 바람을 조장하며 현대미술을 대중화한다고 떠벌리는데, 이는 현대미술의 원리와 생태 그리고 존재방식과 역사성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의 잠꼬대같은 소리일 뿐이다. 이들은 현대미술의 역사가 바로 그 상업주의와 문화적 대중주의에 대한 반발로 심화되어 왔음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우물 안의 개구리들 마냥, 상업주의로 인해 포장된 서구미술을 현대미술의 실체로 착각하고, 포스트모던을 무슨 패션쯤으로 이해하면서 대중의 지적 수준을 얕잡아 보고 있지만, 세상 넓은 줄도 모르고 미술에 대해서도 모르는 딱한 위인들이 아닐 수 없다.
현대미술의 쉽게 풀어쓰기는 난해한 문맥을 정확히 통찰하고 있는 전문가들의 문화 번역작업이며, 이것이 활성화되지 않는 한 현대미술이 대중으로부터 환영받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 좋은 필자를 확보하는 일, 이것이 세 번째 과제일 것이다. 물론 필자층도 미술계 바깥까지 확대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예술처럼 무형의 가치를 구현해야 하는 분야일수록 높은 도덕성이 요구된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현재의 미술잡지들은 지금까지 이 점에 있어 명백한 역행을 보여 왔다. 날카로운 비판이나 깊이 있는 담론들은 가급적 배제하고 그 자리를 사이비들의 어쭙지 않은 글들로 채워 미술계의 혼탁을 가중시켜 오지 않았는가.
 
요컨대, 핵심은 미술잡지들이 어설픈 대중화나 싸구려 상업주의에서 벗어나 고도의 전문성을 통해 시장을 공략해 나가는 진취적인 전략과 전술을 개발해야 하고, 이에 앞서 현재까지 안주해 왔던 잡지의 체질을 과감하게 개선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일간지나 TV 등 일반 언론매체들도 전문기자 제도를 도입하여 시대적 추세에 역행하고 있는 오류를 바로 잡아가야 한다.
 
 
VIII.

 

누누이 강조해 온 말이지만 미술계는 미술현장과 현장에서 생산된 예술의 가치를 문화적으로 소비하는 제도영역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두 영역을 연결하고 견제하는 역할을 해야 할 미술 저널리즘이 사이비들과 담합하여 부패를 촉진해 왔다는 사실은 혹독한 비판을 면할 길이 없는 것이다. 담론이 활발하고 저널이 투명한 곳에서 사이비 지식사기꾼 따위의 인간 곰팡이들이 서식할 수는 없는 일이다. 미술제도 중 그 어느 한 축만이라도 제 역할을 수행해 왔다면 최소한 오늘과 같은 수모를 겪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고, 미래가 이토록 불안하고 암담하게 생각되지는 않을 것이 아닌가.(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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