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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미술의 생산적 성격과 문화 소비로서의 제도미술

 

글에 들어서면서 
 

현대미술Contemporary Art은 당대의 미술이라는 포괄적 의미보다 ‘미술이란 무엇’이고 ‘미술작품을 만든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이며, 따라서 오늘날의 미술이 ‘어떤 방식으로 성립될 수 있는 것인가?’의 대안을 제시하는 문화적 성격을 띠고 있다.

 

현대modern라는 말도 원래 고대나 근대 같은 구체적인 시기를 지칭하는 역사 개념의 용어가 아니라 자기 시대의 가치와 성격을 반영하는 일반적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즉 과거에도 사람들은 자신들을 현대인으로 인식했다는 말인데, 이 용어가 서구 근대화modernization 과정1)을 거치면서 특정 시대와 문화적 특성을 가리키는 역사적 과정 개념으로 자리를 잡았다.

 

문화비평가 홍가이는 서구 근대화 과정을 이끈 합목적적 합리주의purposive rationalism2)가 도구적 합리주의에 빠져, 인간을 전대미문의 관료적, 행정적 질서와 논리 속에 노예처럼 예속시키는 모순irony과 역설paradox을 연출하게 됨으로써, 계몽주의 과정Enlightenment process의 문제는 또다시 새로운 반성이 요구되는 절박한 상황인식을 갖게 되었다고 말한 바 있다.3) 현대미술이란 바로 이런 서구 사회의 현대화 과정의 문제를 비판적 해체, 혹은 전통적 가치에 대한 근원적인 저항과 자기 부정의 방식을 통해 극복하려는 역사적 맥락에 기초해 있다. 이른바 모더니즘과 아방가르드로 설명되어지는 이 흐름들은 그들의 역사에 대응하는 문화적 대응으로 설명할 수 있다.

서구의 전통회화와 조각은 오랫동안 재현적 리얼리티를 궁극적 목표로 삼아 왔고, 이것이 현실의 모방이자 문학적 가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궁극적 한계를 안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예술가들과 비평가들에 의해, 다른 어떤 가치로부터도 독립적인 미술의 순수적 가치를 규명self-definition하기 위한 노력이 시작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미국의 저명한 미술평론가 클레멘트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의 Modernism 강령에 따라 모더니스트들은 회화와 조각의 본질 이외의 것들을 배제해 갔으며, 순수 추상Abstraction4)이라는 새로운 미술담론을 구축함으로써 전통회화의 오랜 역사적 빚을 청산했다고 주장했다.

 

한편, 서구 문화의 전통적 가치 자체를 거부하고 미술문화의 틀을 파괴하려는 예술가들은 자신들의 존재마저 스스로 부정하는 문화적 테러를 감행하는, 모더니즘과 다른 방식의 역사적 대응으로 아방가르드5) 미술6)이라는 새로운 국면을 만들었다.

흔히 동전의 앞뒷면에 비유되는 이 모더니즘과 아방가르드 개념은 '무엇이 이 시대의 예술이고, 어떻게 예술로서 성립할 수 있는 것인지' 그 본질에 관한 궁극적 자문을 스스로 제기함으로써, 이 시대의 미술이 과정적이고 실험적인 성격을 갖도록 만들었다. 즉, 예술과 비예술을 구분할 경계로서의 절대 가치를 제시할 수 없으므로 대체할 그 무엇을 끊임없이 제기하고 논의해야 한다는 것이며, 따라서 예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믿어져 왔던 일체의 전통적 규범들은 폐기되고 정리되어야 할 낡은 가치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어 버린 것이다.

현대미술에 있어서의 생산성

 

결국 이런 논리는 예술인가 아닌가를 판단할 절대 가치가 부재한 상황에서 무엇으로 예술 작품의 가치를 가늠할 것이며, 나아가 ‘예술이라는 가치 자체가 유지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인가’라는 궁극적 문제- ‘무엇을 제시하든 그것이 예술이 아니라고 말할 수도 없는’ 상황을 떠안게 만든 셈이다.7) 때문에 현대미술은 밖으로부터의 평가 이전에 예술이 예술로서의 존재가치를 스스로 입증할 새로운 존재방식과 담론을 필요로 하게 되고, 이런 맥락에서 비평적 가치가 요구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바로 이 지점, 미술이 미술일 수 있어야 하고, 그것이 이 시대의 문화적 가치를 구현할 수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입증해야 하는 위기의 국면 속에서 현대미술의 생산적 성격이 설명될 수 있는 것이다.

 

즉 현대미술의 생산성은 예술작품이 이 시대의 문화적 담론 속에서 어떻게 예술로서 가능한 것인지를 스스로 규명함으로써 비로소 가능해지는 것이므로, 단순히 어떤 스타일의 작품을 제작함으로써 구해지는 것이라기보다 그 작품이 문화적 대응으로서의 담론적 가치를 획득할 수 있는가의 판단을 통해서 얻어지는 셈이다.

 

예컨대, 필라델피아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마르셀 뒤샹의 ‘샘’이 오리지널 작품이든 아니든 그러한 차원의 가치는 이미 중요한 것이 아니며, 실제 작품을 보았든 그렇지 않든 그것의 담론적 가치만으로도 현대미술로서의 충분한 생산성을 지니게 된다는 식이다. 이점은 제작의 개념을 배제시키려는 뒤샹의 레디메이드 전략이나 앤디 워홀과 도널드 저드, 일련의 콘셉추얼 아티스트들과 제프 쿤스에 이르기까지 작가의 비제작 개념을 뒷받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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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제도의 소비 속성

 

하지만 제도적 측면에서의 미술은 그것이 비록 현대미술이라 할 지라도 근원적으로 수용자 중심의 성격을 지닌다는 측면에서 생산적이기보다 소비적 성격을 띤다. 예컨대 미니멀 아트와 패션과 가구, 실내장식 등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확장된 미니멀 스타일의 문화인프라 사이의 차이가 이점을 잘 드러낸다. 아름다움은 모든 사람들이 추구하는 가치이지만 개별적인 취향과 개체적인 감성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아름다움의 향유는 이미 알고 있는, 그래서 충분히 익숙해진 가치를 소비하는 활동이다. 이런 점에서 오늘 날 대중들에게 실질적 아름다움을 제공하는 이들은 예술가들이 아니라 디자이너들을 앞세운 자본가들이며, 이 논리가 모든 아름다운 것들의 상업적 가치와 거대한 유통구조를 명쾌하게 설명해 준다. 예컨대 아름다운 드레스는 그저 사서 입으면 되고, 작품을 많이 팔고 싶은 작가는 콜렉터들이 원하는 작품을 제작하여 수완 좋은 상업화랑을 통해 팔면 되는 것이다. 즉 소비가 이 아름다움의 주체인 셈이다.

문제는 현대미술이 요구하는 새로움이 지금껏 생소한 것이거나, 최소한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을 뒤틀고 어긋나게 함으로써 낯설게 만드는 일에서 시작된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상업적 가능성을 빗겨가게 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발상의 전환으로부터 비롯하는 인식의 변화가 우리를 새로운 감각과 관념으로 이끌며, 그 과정에서 생산되는 정신적 에너지가 그 중요한 핵심이 되기 때문에, 현대미술은 관람자의 미의식에 호소하거나 정적인 감동을 선사하기보다 그들에게 혼란과 충격을 대신 제시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구조를 보완하기 위해 미술의 제도적 측면을 보다 전문적이고 체계적으로 구축하고 운영하는 일이 필요해 진다.

 

이런 이유로 미술제도는 생산자로서의 예술가들과 이것을 담론화하고 제도 속에 수용하려는 비평가들과 미술관, 그리고 이러한 문화를 미술 애호가들에게 올바르게 전달하고 이들의 인식을 향상시켜 가는 교육기관과 저널리즘, 이렇게 구축된 현대미술의 문화적 가치를 보급하고 유통시키는 화랑과 궁극적인 소비 주체로서의 미술애호가 등을 아우르는 시스템을 구축하게 된다. 그리고 이 미술제도는 예술가로부터 향유자에게 보급되는 일방적 구조가 아니라 상호간의 끊임없는 feed back 효과에 의해 보완적 성격을 갖는다. 예컨대 예술가들을 통해 제기된 문제가 담론화 될 만한 가치로 생산되고, 이것이 비평가들과 미술관, 저널리즘과 나아가 미술애호가들 다수가 참여하는 쟁점화와 이슈화의 과정을 통해 비평적으로 검증되어 거꾸로 작가에게 영향을 주게 되는 식으로, 작가와 비평가, 미술관과 화랑, 저널리즘이 상호 발전적인 대안을 모색할 수 있게 한다.

 

한국의 경우, 이러한 제도적 장치들은 90년대 이후 외형적으로 크게 확장되었으나, 이를 효율적으로 운영하는 전문인력과 담론화의 역량부재로 인해, 제도의 양적 팽창이 오히려 질적으로는 미술문화에 역기능을 해 온 측면이 있다. 우선 서구 미술 맥락의 수용에 따르는 역사적 단절과 비약의 문제를 주체적으로 담론화 하지 못함으로써 정체성의 고민에 빠져 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동안 한국미술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은 전통과의 단절과 역사적 비약에 관한 비판적 극복의 자각보다 한국이라는 지역적 특성을 부각시키려는 브랜드로서의 스타일화에 급급함으로써, 근본적인 역사적 대응의 문제의식을 빗겨왔다.8) 이러한 한계는 동시대미술 문화 속에서 한국미술이라는 대응적 성격을 구축하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함으로써 동시대 세계미술사에서 한국현대미술이 소외되는 원인이 되었다. 말하자면 현대미술 문화의 핵심이 되어야 할 담론부재로 새로운 예술에 대한 쟁점과 방법론보다 새로운 스타일의 형식 속에 함몰된- ‘무엇을’ 추구해야 할 것인지 보다 ‘서구미술의 새로운 스타일’9)에 급급하며 표류해 왔다는 것이다.

이것이 현대미술로서의 문화적 역량 축적보다 근거없는 권위와 시장성을 중시하고, 공적 예산에 의존한 관료 중심의 문화행사에 함몰되고 있는 현실적 배경이다. 한마디로 한국의 미술제도는 미술과 미술애호가들의 사이를 오히려 단절시키고, 한국현대미술의 역사적 자각과 문화적 대응으로서의 가치 구축을 어렵게 만들고 있는 셈이다.

 

 

글에서 나서면서

 

미술제도가 제 기능을 다하고 있지 못한 이런 상태에서는 누구도, 어떤 권위도 보장받을 수 없으며, 오직 전면적이고 전격적인 변화에의 욕구만 유효해 진다. 비록 일부 예술가들과 비평가들에게 있어서 이런 상황인식에 근거하는 변화의 욕구가 강렬하다고 해도, 그 실현을 위한 여건 자체가 요원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새로움을 향한 그 어떤 역사상의 변화도 처음엔 무명의 투쟁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오늘날의 예술이 전통적 개념의 기예에 토대를 두고 있지 않은 것처럼, 현대의 예술가들도 장인들과는 다른 존재인 것이다. 때문에 예술가의 개인적 현실과 사회적 현실 사이의 거리는 멀 수도 있고 가까울 수도 있는 것이며, 그 거리는 오직 작가 자신의 신념과 실천적 태도에 달려 있다고 하겠다. 기존의 가치에 대한 의구심과 더 나은 것을 향한 의지와 실천이 현대적 각성의 요체였다는 사실이나, 자신의 시대를 향한 고민과 대응의 실천이 새로운 역사를 이끌었다는 역사적 교훈 속에서도, 이 시대가 오늘의 작가들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선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이 시대의 작가들은 위대한 미술작품이라는 환상에서 벗어나 한 사람의 예술가로서 어떻게 존재해야 할지 고민해야 하고, 이 시대의 미술담론에 어떻게 참여해야 할 것인지 대안과 전략에 절치부심할 필요가 있다. 많은 문제가 있다는 것은 힘겹지만 극복해야 할 대상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의미이며, 이를 실천함으로써 스스로 역사적 전환의 주역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사실 이 시대의 예술가들에게 이보다 더 선명한 예술적 동기가 있을까? 지난 100여 년 간 누구도 이 역사적 과제를 해결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바로 이 시대의 작가들을 위해 그 주인공의 배역을 남기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2001, 2020 부분 수정)

 

 

오상길(작가, 한원미술관 관장)

 

각주

1) 계몽주의 과정Enlightenment Process, 인간이성의 독립과 세계에 대한 합리적 관조를 통해 무지와 미신에서 해방된 새롭고 좀 더 평등한 자유인들의 세상을 세우려는 의지의 역사적 과정. 홍가이, 현대미술․문화비평, 미진신서23, p18, 미진사, 1987

2) 합목적적purposive, 정형적formal, 논술적discursive, 앞의 책

3) 산업혁명이후 자본주의 시장 경제원리에 의해 자본가와 노동자간의 계급구조가 심화되고, 신흥 부르조아 계급이 귀족계급의 문화양식을 자신들의 예술양식으로 수용함으로써, 19세기 중반까지 예술, 문화 부분은 귀족문화 중심의 전통양식이 고수되었다. 반면 생산합리화의 표본인 공업화 과정에서 노동자들은 인간 최저의 자존심마저 유지하기 힘든 합리화 이전보다도 더한 노예화 상태에서 착취당하게 되었다. 앞의 책

4) 그린버그는 잭슨 폴록의 All over painting 회화야말로 이전의 어떤 회화보다도 현대적인 조건, 즉 비대상성(non-objective)적, 비구상(non-figurative)적, 비재현(non-representational)적 조건을 갖춘 최초의 완전한 추상회화라고 말한다. C. Greenberg, The Modernist painting,

5) 아방가르드 예술이론, 페터뷔르거, 이광일 역, 동환출판사, 1986

6) 아방가르드는 예술분야에서 전위의 개념으로 사용하는 임시용어로 쓰이며, 현재의 미적 관습을 초월하고 그 자체와 현재의 실천사이에 식별할 수 있는 거리를 확보하는 극히 소수의 예술, 혹은 예술가들을 뜻한다. “퇴폐적” 이후의 그 시기를 앞선, 이미 구축된 규칙들을 위반하는, 사람들을 설득도 하기 전에 불쾌감을 주는 세 가지 변별 범주를 만족시키는 희귀한 작품을 지칭한다. 아방가르드 사전p13-p15, 리처드 코스텔라네츠, 양은희 譯, 시각과 언어, 1997

7) ‘사기와 허위의 가능성의 산재’ Stanley Cavell,"Music discomposed", Collected in Must We Mean What We Say, Cambridge Univ. Press,1968 홍가이,「현대화의 패러독스와 문화적 대응」, 공간 ’87.4에서 재인용

8) 졸고, 한국현대미술 다시 읽기 I, 청음사, 2000년,

한국현대미술 다시 읽기 II, 도서출판 ICAS, 2001년 참조

9) 치바 시게오, 틈새에서 잉태한 미술-한국미술의 현재, 아시아 세기의 서두에 전시서문 중에서, 오오사카, 해안통 갤러리 2001. 8. 21-‘아시아의 창조력’ 심포지움

치바 시게오는 한국의 현대미술이 “6.25 동란 후 서구와 북미의 신경향 미술을 모방하고 배우면서” 시작되었고, “한국작가들은「무엇을」표현해야 할 것인가를 충분히 결정짓지 않은 상태에서 「어떻게」표현할 것인가 하는 측면에만 자신들의 리얼리티를 드러냈고, 결국 이러한 토대 위에서 각자가 표현방식을 모색하기 시작했다”고 지적하면서 “「환원」reduction파(앵포르멜파) 대 「확산」diffusion파(다다 또는 반예술적 경향)의 활동들도 이제 와서 보면, 「무엇을what to express」충분히 결정하지 못한 점으로 미루어보아 양자간의 차이는 없다고 본다.” 라고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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