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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미술 감상법 - 창작과 감상의 궤도 운동

탁월한 예술작품들에는 예외 없이 Rothko의 색면 같은 여러 겹의 복잡하지만 중요한 Layer들이 있다.
자신의 취향이나 안목의 한계 내에서 예술을 감상(소비)하려는 사람들은 대개 이런 Layer들을 인지하지 못한다. 그들은 작품을 이해하고 현대미술의 담론에 참여하는 일보다 표피적 ‘정보’와 fashion trend를 구경하거나, 자신의 입맛과 감상에 투자할 시간과 구입여부를 판단한다.
이들은 주로 작가의 명성이나 career, 작품의 크기, 재료, 가격, 소장자 나아가 투자가치 같은 것들에 관심을 갖는데, 자신의 구매에 따른 credit을 얻고 싶어 하는 것이다.

반면 어떤 감상자들은 예술작품의 시각적 정보와 작품의 배후 맥락, 예컨대 그 작가의 이전 작품이나 statement, ‘예술’에 관한 사전 지식들을 총동원하여 이면의 Layer들을 읽어 내려 노력한다. 이런 노력은 작품이 아니라 자신의 지성과 문화감수성을 성장시키는 일종의 돈 들지 않는 투자인 셈이다.
중요한 것은 이미 알고 있는 정보(trend)나 익숙한 미적 가치의 확인이 아니라 알고 있는 바들과 충돌하는 낯선(새로운) 사실들이며, 바로 이 간극이 그의 감상활동을 고도의 지적, 감각적 가치생산 활동으로 끌어올리는 교두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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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Blind Man 2, eds. Marcel Duchamp, Beatrice Wood, and Henri-Pierre Roché (New York, May 1917), pp. 2–3.

가령 Marcel Duchamp의 <La fountain, 1917>이나 <L.H.O.O.Q., 1919>에서 우리는 남성용 소변기 오브제라는 사실과 모나리자 복제품 사진이라는 표면의 정보를 확인할 수 있고, 현대미술 담론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으며, 지금 필라델피아 미술관에 소장된 오브제는 원본이 아니라는 등등의 약간 전문적인 Layer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가 있다.

좀 더 전문적인 내용들은 어떻게 이 소변기가 예술작품이 될 수 있는 것인지, ‘왜’ 이 소변기가 현대미술 담론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는 것인지, 원본은 왜 없어졌는지 등등의 의문을 가짐으로써 구체화된다.
이 의문은 곧 뒤샹의 레디메이드 전략에 대한 이해로 이어지게 되고, 왜 그가 예술의 ‘전통’을 향해 그런 테러를 자행했으며, 그의 명성과 영향력이 이후의 예술가들과 비평가들의 공감과 공명을 배경으로 만들어졌음을 이해해가는 단서가 된다.
이것은 현대미술의 맥락을 깊숙이 파악하는 방법이자, 작품이나 작가에 대해 수동적이었던 감상활동을 현대미술 담론에 직접 참여하는 주체적 생산 활동으로 전환시키는 일이 된다.

이런 감상은 예술가들 사이에서나 역량 있는 비평가들에게서 특히 심화되어 나타나는데, 그런 사례는 그린버그의 마네 작품분석이나 폴 세잔의 탈 인상주의, 피카소와 브라크의 다시점 심화, 메를로퐁티의 세잔 분석 등등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이들은 이런 감상과 분석을 통해 문제를 인식하고 대안을 모색해 냄으로써 새로운 미술의 역사를 이끌 수 있었다.

고희동, 자화상, 73 x 53,5cm, 캔버스에 유채, 1915, 도쿄

고희동, 자화상, 73 x 53,5cm, 캔버스에 유채, 1915, 도쿄예술대학부 박물관

이에 반해 한국의 작가들과 비평가들은 서구의 미술담론이나 형식을 첨단의 정보나 유행으로 받아들여 모방하고 추종하거나 살짝 변형시키는 수준에서 수용해 왔고, 그 결과는 오늘 우리가 두 눈으로 뚜렷하게 확인할 수 있는 한국 미술계의 낮은 생산성과 국제무대에서의 미미한 존재감으로 나타나고 있다.

우물 안의 개구리 또는 소아병적 영웅주의에 빠진 일부 작가들의 과대망상은 현대미술이 추구해 온 가치나 지향과 한참 거리가 먼 것이다. 필자는 그들의 모습 속에서 현대미술이라는 ‘전위Avant-Guard’ 브랜드를 빙자해서 현대미술이 극복하려했던 근대미술의 우상적 특혜(권위)를 누리고 싶어 하는 이율배반과 모순을 보며, 바로 이 장면이 그들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고 생각한다.

다시 강조하지만, 현대미술은 아는 만큼 볼 수 있고, 내가 모른다고 남도 모를 것이란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필자가 만나고 경험했던 해외의 전문가들은 한국미술계의 이런 속사정을 민망할 만큼 잘 알고 있었고, 바로 이점을 보완하고 극복하지 않는 한, 한국미술의 세계미술 시장진출은 여전히 어려운 일이 될 것이다. 고희동이 서양미술을 배우기 위해 일본유학을 떠난 것이 1909년의 일이고 보면 그 후로 약 110년이 지나도록 한국미술이 동시대미술사에 흔적조차 남기지 못해 왔다는 사실이 의미하는 게 무엇이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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