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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현대미술號의 항로航路 읽기

우리의 문화와 제도 대부분은 일본과 서구의 그것을 수용하거나 이식받은 것들로, 그 배경이나 작동원리, 역사적 맥락, 시행착오의 경험들을 공유하지 못한 채 외형의 수용에 급급해 온 측면이 있다. 물론 이것도 길게 보면 시간이 해결해 줄 문제일 수 있겠지만, 이런 혼돈을 약간 다른 각도에서 보면 결정적 전환(shift)의 기회가 될 수도 있음을 알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은 패전국인 독일이나 승전국인 프랑스, 영국 등 유럽 강대국들의 영향력을 크게 위축시켰고, 최대의 수혜자였던 미국이 급부상하는 기회가 되었다. 막대한 군수산업을 배경으로 중동의 유전까지 장악한 미국은 치밀한 전략과 은밀한 외교, 막대한 자금 지원으로 미술문화의 중심을 파리에서 뉴욕으로 옮겨왔다.

그런 일이 가능했던 건 1930년대 대공황 당시의 뉴딜정책(예술가 후원)과 2차 대전을 피해 건너온 앙드레 부르통이나 피에트 몬드리안, 윌리엄 드 쿠닝, 마르셀 뒤샹, 프란시스 피카비아 등등 유럽의 중량급 작가들이 미국을 무대로 활동하면서 두터운 작가군이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미국의 여러 미술학교에서 후학들을 양성하며, 1950-60년대의 잭슨 폴록, 마크 로드코, 바넷 뉴먼 같은 작가들을 순차적으로 배출하는 견인차 역할을 해냈다.


이런 미술문화의 환경은 알프레드 바나 클레멘트 그린버그, 할 포스터, 로잘린 클라우스, 마이클 프리드 같은 걸출한 이론가들이 등장하는 배경이 됨으로써, 전란의 폐허 복구에 여념이 없던 유럽의 예술 활동이 위축된 사이, 동시대미술의 주도권을 행사할 수 있을 만큼의 미술 내적 역량을 축적할 수 있게 했다.

Josef Albers, Homage to the Square, Secl

Josef Albers, Homage to the Square, Secluded, 1951, SF MoMA

한편, <미국추상회화, 조각전Abstract Painting and Sculpture in America, Jan. 23–​Mar. 25, 1951, MoMA>으로 상징되는 뉴욕 미술계의 화려한 부상 이면에는 냉전시대의 체제경쟁과 공산주의 이념 확산에 위협을 느꼈던 미국의 CIA와 FBI, USIA(미해외정보국) 같은 정부기관들의 은밀하면서도 막강했던 지원도 큰 몫을 했다.

 

이즈음 국내 미술계에 큰 영향을 주고 있던 Time지나 일본의 미술수첩, 미즈에 같은 잡지들엔 추상표현주의나 앵포르멜 관련 기사가 도배되다시피 했고, 주요 작가들의 일본전시도 러시를 이뤘다. 1957년 4월 9-21일 덕수궁에서 열렸던 《미국현대8인작가전》 역시 USIA가 후원하고 시애틀 미술관이 기획한 해외순회전의 하나였고, 1958년 이후 한국의 유사 앵포르멜 운동의 직접적 도화선이 되었다.

미국의 문화전략은 우리나라 같은 아시아의 여러 국가들과 남미, 유럽 등 전 세계에 뉴욕 미술문화의 소비시장을 광범위하게 구축하는 교두보가 되었으며, 이것을 토대로 1950년대 이후 뉴욕 미술계가 전 세계의 미술시장에서 벌어들인 돈은 헤아릴 수조차 없을 만큼 많은 것이었다.

Abstract Painting and Sculpture in Ameri

Abstract painting and sculpture in America, January 23–​March 25, 1951, MoMA

정리하자면 그렇다. 미술문화 시장의 활성화는 그림을 사고파는 거래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현대미술이라는 새로운 문화상품을 개발해내고 문화시장에 유통시킬 수 있는 문화역량과 정책, 이것을 실행할 수위 높은 전략, 전술의 개발을 통해 가능해지는 것이다. 최근 영국의 YBA나 중국미술의 부상 역시 1950년대 뉴욕과 유사한 양상들을 보였으나 처음부터 내재되어 있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채 long run에 실패했다.


국내 미술시장의 규모나 생태구조 특히 김환기나 일부 단색조 작가들의 작품 값을 둘러싼 일련의 해프닝 등도 우리 미술의 세계시장 진출이 얼마나 요원한 일인가를 반증해 줄 뿐이다. 정부의 문화정책이나 국공립, 사립미술관들은 이보다 한술 더 떠서, 자신들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자체를 인식하지 못한 채 막대한 공적 자금만 축내며 무의미한 행사에 매달리고 있는 형국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런 사실들이 미술계 외부, 즉 산업과 경제를 통해 축적된 유동자본의 투자욕구가 높고, 국민소득 3만불 시대를 맞이해 시민들의 미술문화 향유욕구가 그 어느 때보다 높아져 있음을 엿보게 한다는 역설이다. 필자는 이런 미술계 내부의 형편과 외부의 강한 욕구 사이의 gap이 대단히 크고 강하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즉 이 gap들을 어떤 정책과 전략, 전술을 통해 조정해 나아가는가에 따라 미술계나 투자환경이 급격하게 전환될 수도 있으리라 생각한다는 말이다. 이런 변화의 가능성에 내재된 에너지에 비하면, 지금까지의 한국미술계 권력이란 새 발의 피鳥足之血에 불과한 것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싸게 살 그림이나 은행이자 보다 나은 수익을 기대하는 푼돈들이 아니라, 조만간 다가서게 될 큰 시장의 기회를 선점하기 위한 현대미술과 문화정책에 대한 전문적 학습과 치밀한 준비일 것이다. 물론 이 학습은 어설픈 귀동냥 수준의 미술사 공부나 동시대미술의 짝퉁 스타일들, 밑도 끝도 없는 미술시장의 엉터리 통계 같은 걸 말하는 게 아니다. 멀리 길게 뛰려면 근육부터 길러야 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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