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환점에 서 있는 한국의 현대미술
글에 들어서면서
오늘의 한국미술 앞에는 많은 문제와 기회가 함께 놓여 있다. 그 문제들은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누적된 결과이고, 이것의 해결이 곧 오늘의 기회이자 한국미술의 미래가 될 것이다.
필자는 오랫동안 한국미술의 과제를 한국미술이 걸어온 역사 속에서 찾아 왔다. 20세기 한국사회가 경험해 온 파란만장한 역사와 한국미술을 함께 살펴보면서, 비판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20세기 한국미술을 다뤄왔고, 그에 기초한 규모 큰 전시들도 열렸다. 그중 국립현대미술관의 세 전시는 한국의 미술비평과 미술사 그리고 미술관의 학예역량을 종합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미술이 안고 있는 문제들을 살펴보기에 적절한 대상이라고 보았다. 아울러 국가의 문화예술정책이 미술계의 생태환경에 어떤 영향을 주어왔는지 언급했는데, 이 두 주제를 한꺼번에 다루는 게 자연스럽지 않지만 현재의 한국미술에 가해지고 있는 가장 위협적인 문제들이라는 점에서 다소 무리를 감수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1. 근현대사의 기점 논의들
한국근대사의 기점은 18세기 실학사상의 등장을 기점으로 보는 입장과 문호개방을 결과했던 병자수호조약을 기점으로 보는 입장, 갑신정변설, 갑오농민 혁명과 갑오개혁설 등등 역사학자들 간에도 견해가 분분하다.
미술에 있어서의 ‘근대’ 역시 서구문화의 수입이전 설, 개항전후 설, 서구미술 수용 이후 등의 주장들이 있고, ‘현대’ 역시 해방이후 설, 6․25 전쟁 이후 설, 1957년 설 등등을 찾아볼 수 있다. 크게 나누어 미술에 있어서의 ‘근대성’과 ‘현대성’을 근․현대사의 역사과정 속에서 찾으려는 입장과 미술 내적 맥락에서 찾으려는 입장의 차이를 보이지만, 그 준거의 틀을 서구의 방법론에 입각해 논의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다.
2. 한국현대미술의 역사를 다룬 국립현대미술관의 세 전시들
가. 《한국현대미술 20년의 동향》展
1979년 국립현대미술관과 한국미술협회가 공동기획한 《한국현대미술 20년의 동향》전은 한국현대미술의 태동을 1957년으로 잡고, 그 근거를 추상미술의 등장으로 제시하고 있다.
여섯 사람의 미술평론가들이 1957년부터 1977년에 이르는 추상미술의 흐름을 4부로 나누어 다루었는데, 이경성과 이구열은 각각 「개관槪觀」과 제1부 (1957-1965) 「뜨거운 추상운동의 도입과 전개」에서 1950년대 후반-1960년대에 걸친 한국의 앵포르멜 집단화를 젊은 세대들의 6․25 전쟁 체험과 전근대적인 체제에 대한 반발로 보고, 구미의 새로운 회화사조의 자극과 영향의 결과로 설명하고 있다.
이 전시는 역사적 체험과 한계를 공유하고 있는 동同세대 평론가들의 진술이라는 특징을 띠고 있다.
나. 《한국현대미술의 시원》展
그로부터 21년 뒤 국립현대미술관은 《한국현대미술의 시원》전을 통해 《한국현대미술 20년의 동향》展의 기본적 시각을 재확인하고 있다. 다만 전시도록에 실린 「초기 한국현대미술의 단면」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필자인 김연희는 다음과 같은 고민을 토로하고 있어 눈길을 끌었다.
“‘현대미술의 시원’이라는 전시명에 걸맞는 개념설정을 위해 선결되어야 할 수많은 문제들에 대한 나름대로의 고민과정이 깔려있었음도 아울러 밝혀두고 싶다. 그 물음들은 대단히 원론적이고 미술사뿐만 아니라 문화사 전체 그리고 미학적 가치판단까지를 조망해야 하는 문제들이었다. 그 문제들이란 우선 ‘현대’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그것을 ‘모던modern’으로 보아야 하나 ‘컨템퍼러리contemporary’로 보아야 하나? 그것에 일종의 정신 상태로서 철학적·문화적 해석을 부여할 것인가 아니면 그것을 역사개념으로 해석할 것인가? 그리고 그 ‘현대’와 ‘미술’이라는 예술장르와의 해후를 정신사적 개념으로 해석할 것인가 아니면 양식사적 개념으로 해석할 것인가? 그리고 일반적으로 ‘모더니티’를 둘러싼 논의의 종주국인 서구열강에서는 그 이념이 제국주의라는 형태로 발현되었지만 제국주의 열강의 피해 당사자의 입장에서 식민지시대라는 특수한 역사적 상황을 겪으며 근․현대사를 이룰 수밖에 없었던 ‘한국’이란 특수한 공간에서 ‘현대’와 ‘현대미술’ 그리고 ‘현대성modernity’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즉 서구미술과 동일한 개념으로 한국 ‘현대미술’이 ‘현대성’을 가늠할 수 있는가? 게다가 어디에 어떤 방식으로 그 ‘시원’으로서의 의미를 부여할 것인가? 등등 수 없는 물음들이다.”
김연희의 고민들은 20세기 한국사와 미술을 바라보는 중요한 단서들일 수 있다. 즉 이런 고민을 통해 서구의 미술이념과 양식 등 시대사조들의 틀을 빌려 한국미술의 ‘근대’와 ‘현대’를 설정하는 방법론에 대응할 새로운 대안모색의 가능성을 열어 놓아야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정작 이 전시에서 그 고민의 실제 흔적을 찾아볼 수는 없었다.
《한국현대미술 20년의 동향》전이 1979년의 시점에서 한국현대미술의 기점을 규정하려는 다소 성급한 시도를 했었다면, 2000년의 《한국현대미술의 시원》전은 그로부터 20여 년의 시간적 거리에 값할만한 진전된 연구내용이나 심화된 비평적 시각이 무엇인지 의구심을 갖게 했다. 특히 20세기 한국미술사 전반에 나타났던 다양한 양상들을 대부분 배제한 채, 특정 집단의 활동에 집중해 ‘시원’을 운운하며 무리한 역사화에 나서고 있다는 건 국립현대미술관이란 위상에 비추어 심각한 문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다. 《한국미술 100년》展
그로부터 6년 뒤 국립현대미술관은 《한국미술 100년》展 1, 2부를 기획하면서 “제1부 전시가 20세기 초입부터 6․25전쟁까지의 ‘근대’를 다루었고, 제2부 전시가 전쟁 직후에서 20세기 후반을 가로지르는 ‘현대’의 시기를 중점적으로 다룬다”고 밝혔다. 2부 전시는 1957년부터 1966년에 이르는 시기를 “전후 모더니즘 미술과 실존적 정체성의 모색”으로 정의함으로써 앞선 두 차례의 전시와 같은 맥락을 재차 확인하고 있다.
“1950년대 중반에서 6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한국현대미술의 주요흐름으로 자리 잡은 ‘앵포르멜’ 혹은 추상표현주의‘ 미술을 중심으로 모더니즘 미술운동의 양상과 의미를 살펴본다. 이 새로운 미술흐름은 국전을 비롯한 기성미술계의 경직된 관행에 대한 반감에서 비롯되었고, 당대의 젊은 작가들이 경험한 실존적 정체성의 위기상황에 탈출구를 제공하였으며, 한국현대미술을 본격적으로 발아시키는 토양이 되었다.”
일부 청년작가들의 서구 앵포르멜 미술에의 동화를 “한국현대미술의 주요 흐름으로 자리 잡았다”거나 그들의 유사 앵포르멜 양식을 중심으로 “한국 모더니즘 미술운동의 양상과 의미를 살펴본다.”는 주장은 사실과도 다르고 이치에도 닿지 않는다. 서구 모더니즘 미술과 비슷한 그림을 그린다고 한국 모더니즘 미술이 만들어지는 건지, 미술‘운동’이 모더니즘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인지 되묻고 싶은 대목이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오히려 당사자들에게 “기성미술계의 경직된 관행에 대한 반감”과 서구 앵포르멜 양식 수용 간의 내적 필연을 구체적으로 확인하고, 또 그것이 어떤 맥락에서 “그들이 경험한 실존적 정체성의 위기상황에 탈출구”가 되었다는 말인지 답을 구했어야 했다. 또 ‘근대’와 ‘현대’는 납득할만한 근거제시도 없이 “20세기 초입부터 6․25전쟁까지”, “전쟁 직후에서 20세기 후반” 식으로 임의로 나누어 규정할 수 있는 게 아니다.
3. 한국의 현대미술을 향한 문제의식
역사는 기술자記述者의 시각에 따라 동일한 사건과 상황에 대해서도 인식의 차이를 드러낼 수 있다. 특히 미술은 인문학에 한정하여 해석할 수 없는 특수성을 지니고 있고, 바로 이 점이 미술사라는 독립적인 역사진술의 당위성을 보장해줄 수 있는 근거인 셈이다.
말하자면 한국의 현대미술은 한국미술로서의 ‘현대성’이란 무엇인지, 예술작품 속에 나타나는 ‘현대’적 가치가 어떤 것인지를 쟁점화하고 구체화해 감으로써 밝혀야 한다. 사건이나 시대가 예술가에게 영향을 줄 수 있듯, 예술가 개인의 발상전환이 미술이념과 유파의 발단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가. 특정 집단에의 집착이 부른 역사의 왜곡
그동안 국립현대미술관을 비롯해 다수의 미술평론가들과 미술사가들이 “한국의 모더니즘 미술”이란 실체 없는 개념으로 유사작품들을 포장해 서구미술과 동일시해 왔다. 그러나 모더니즘 미술은 서구사회의 현대화 과정에 수반된 다양한 이데올로기들과 미술양식 전반을 일컫는 거대담론이므로, 그 역사적 문맥들을 간과하고 미술양식만을 차용해서 손쉽게 편승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한국의 모더니즘 미술” 같은 식의 접근은 동시대미술의 주요 이데올로기나 미술현상, 쟁점들의 이해에 혼선을 빚고, 카운터 파트로서의 대안모색에도 상당한 어려움을 가중시켜 왔다.
하지만 이런 표면의 문제들보다 더 심각한 것은 앵포르멜 양식 수용에의 집착이 결과적으로 당대의 한국미술 대부분을 소외시켰다는 사실이다. 이 시기에는 남관이나 류경채, 김환기, 유영국, 이상범, 변관식 등등 내로랄 만한 작가들이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었고, 주목해야할 뚜렷한 예술적 성취들을 잇달아 선보이고 있었다.
특히 《국전》은 30여 년간 연인원 4만여 명이 참여했던 대대적인 공모전 행사로, 변모해가는 미술경향들과 각 개별 작품들의 변화과정을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역사가 아닐 수 없다. 《국전》에 대한 일각의 비판은 대체로 일제 강점기의 《조선미술전람회, 이하 ‘선전’》을 본떠서 만들었다는 역사적 한계와 아카데미즘 미술의 온상이란 주장 그리고 일부 심사위원들의 부정행위로 집약된다.
그러나 당시 우리 사회가 일제 강점기의 운영체제들을 대부분 물려받고 있었으므로 《국전》의 체제만을 비판하는 일은 타당하지 않다. 또한 아카데미즘 미술의 온상이란 주장도 해당되지 않는 매도에 지나지 않으며, 심사 비리는 일부 소양을 갖추지 못한 인사들의 일탈행위였다는 점에서 《국전》과 참여 작가들의 배제는 당위성이 없는 일이다.
역사적 문맥도 없고 내적 필연도 결여된 앵포르멜 양식에의 경도현상을 한국현대미술의 기점에 위치시키기 위해, 국립현대미술관이 당대 주요 작가들의 활동과 《국전》에 참여했던 모든 작가들과 작품들을 일제히 역사에서 배제한다는 건 어떻게 생각해도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국립현대미술관은 《국전》에 참여했던 수많은 작가들이 당대의 심사부정에 1차 피해를 입고, 이런 무모한 역사관에 의해 아예 존재자체를 부정당하는 2차 피해를 입고 있다는 걸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런 오류는 수많은 작가들의 역사적 경험이 녹아있는 당대의 중요한 예술적 성취들을 한국미술의 역사에서 송두리째 소거함으로써, 가뜩이나 빈곤한 각론 단위의 비평담론과 ‘근현대적 자각’의 실체들을 아예 실종시켜 놓는 일로 이어진다. 필자는 이런 국립현대미술관의 무리한 역사화가 특정 단체들의 미술운동을 미술사로 둔갑시켜 왔던 일부 평론가들과 미술사가들의 정치성 짙은 ‘기획 작업’에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 주목을 하게 된다.
나. 수용문화로서의 위상정립 - 『한국현대미술 다시 읽기』
우리 미술계는 현대미술의 맥락이나 각종 이데올로기, 미술양식들에 대한 비평의식 부재가 매우 심각한 수준에 있음을 직시해야만 한다. 앞서 언급한 내용들은 작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정부의 문화예술정책으로부터 대학 미술교육, 국공립미술관들의 학예역량, 비평과 미술사, 저널리즘, 미술시장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많은 문제들이 산적해 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아쉬운 것은 한국미술을 바라보는 ‘주체적 역사의식’의 부재다. 전문 인력들이 모호한 개념과 부정확한 용어들을 남발하고, 미술현장과 작품 같은 구체적 대상을 연구하기보다 기존의 부실한 텍스트들을 손쉽게 인용하고 또 재인용하는 방식으로 오류를 반복 재생산하는 행태가 보편화되고 있어 사태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
필자는 1999년 『한국현대미술 다시 읽기』를 기획하며 “현재의 시점에서 요구되는 비평담론의 생산적 구축”이 목적임을 강조했다. 이 프로젝트는 2017년까지 19년간 총 5차례에 걸쳐 추진되었는데, 1930년대 추상미술로부터 1980년대 소그룹운동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1949년부터 1981년까지 30여 년간 개최되었던 《대한민국전람회, 이하 ‘국전’》 등에 관한 14,937종의 자료수집과 분류, 58명의 주요 작가 및 평론가들과의 대담 그리고 13차례의 기획전시와 13회의 학술세미나를 개최했다.
자료의 수집과 대담은 본격적인 한국현대미술의 연구를 위한 기초자료의 접근성을 높이려는 목적과 아울러, 특정 집단이나 개인에게 편중된 자료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것이었다. 특히 주요 작가 및 평론가들과 나눈 첨예한 대담은 당시 활동을 뒷받침하기엔 턱없이 일천한 자료들을 결정적으로 뒷받침해 주면서, 당시 미술계의 상황과 분위기, 문제의식의 실체를 밝히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한국현대미술 다시 읽기』를 관통하는 중요한 키워드는 ‘한국미술에 있어서의 현대성이란 어떤 것인가’라는 물음이었다. 필자는 한국의 현대미술은 한국 작가들의 현대적 자각의 실체가 무엇이고 그 자각에 기초한 예술적 성취가 어떤 것인지 검증함으로써 구체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생각은 화단의 시류나 특정 인물들의 활동에 집중되어온 그간의 진술들과 상당한 거리와 시야를 확보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다. 사례: 한국의 유사 앵포르멜-그 문화적 혼성성에 주목
필자는 네 번째 『한국현대미술 다시 읽기, 2004』를 통해 한국의 앵포르멜 미술이 서구 앵포르멜이나 추상표현주의의 영향을 받은 명백한 ‘문화적 후위’로, 김환기 등 일제 강점기 유학파들의 추상이나 그 이후의 미술상황과 별 다른 차이가 없다는 점을 밝혔다. 따라서 20세기 한국미술은 서구미술과의 문화혼성과 전통의 단절이라는 난제를 ‘어떻게 풀어 갈 것인가’에 집중해서 다시 읽고 써 가며, 대안적 특성을 부각시킬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앵포르멜 미학을 제창했던 미셀 타피에는 "유럽의 전후추상, 즉 앵포르멜 Art-Informel은 제2차 세계대전이나 실존주의적 허무와 파괴의 표현으로만 이해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오해에도 불구하고, 큐비즘까지의 오랜 고전주의 미술과의 결별이자, 다다의 정신적 계승이라는 역사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앵포르멜의 격정 그 자체는 다다적 허무와 반항의 표현이 아니라 '원자핵적 우주관에 대응하는 새로운 「구조」와 「내용」을 지향'한다."고 밝혔다.
앵포르멜은 유럽미술의 근간이 되어왔던 회화적 형식과 구조 자체-사각형의 캔버스 안에서 이루어져 온 수평과 수직의 구조에서부터 대상 재현이나 상징, 형태와 음영, 원근법, 심지어 스케치나 아이디어, 습작에 이르기까지의 회화에 관한 인식 자체를 밑바닥에서부터 완전히 뒤엎어버리는 수준의 전환을 지향하는 것으로, 해체와 전복의 전제-유럽의 고전적 회화전통의 반동이라는 측면에서의 의미와 역사적 위치를 갖는 미술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필자는 《고난 속에서 피어난 추상, 2004》展을 통해 한국의 앵포르멜 작가들의 작품들을 연도별로 디스플레이하여 이들의 작업이 서구의 그것과 반대로 비정형에서 출발해서 정형화되어 갔음을 규명했는데, 이 전시에 출품을 거부했던 박서보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었다.
조용익
빅서보
장성순
정상화
윤명로
서구의 앵포르멜이 “큐비즘까지의 고전주의 미술”이라는 역사적 테제에 대한 반동이었고, 다다를 정신적으로 계승했다는 미학적 당위성을 갖고 있었던 반면, 이것을 트렌드 미술양식으로 수용한 한국의 앵포르멜은 형태적 유사성만 갖고 있을 뿐, 반동의 대상과 지향할 새로운 「구조」와 「내용」이 없다는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앵포르멜 양식에 대한 내적 필연성 결핍은 한국작가들의 거친 몸짓을 점점 공허한 제스처로 만들어 갔고, 자연스럽게 화면의 내부 문제-구도나 이미지, 마티에르 같은 조형성에의 집중으로 변화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이 점이 ‘문화적 후위’로서의 새로운 해석에 흥미로운 단서들을 제공한다.
요즘 한국미술의 혼란스런 제 현상들도 새로운 문맥을 찾아가기 위한 중요한 단서이자 ‘텍스트’들일 수 있으므로, 연구자들은 한국현대미술과 서구 동시대미술을 동일시하는 오류에서 벗어나, 이 혼란 속에 잠재해 있는 가능성을 찾는 일에 주력할 필요가 있다.
르네상스 미술은 그리스 미술의 문화적 후위였고, 파블로 피카소도 폴 세잔의 후위였듯, 한국작가들의 문화적 후위 현상도 한국미술로서의 새로움을 찾아가는 중요한 motive일 수 있다.몽고의 침략이 남긴 댕기머리와 색동이 한반도에서 더 아름다운 문화적 후위로 살아났듯, 한국미술이 서구미술의 후위로서 21세기 동시대미술을 이끌어 갈 새로운 대안문화를 창출할 수도 있을 것이다.
4. 미술 제도화의 역기능
국립현대미술관의 학예역량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5,60년의 세월을 거치면서도 전혀 나아지는 기미가 없고, 오히려 더 심각해지는 경향마저 감지된다.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필자는 국립미술관으로서의 전문성을 쌓아가지 못하는 원인이 무엇인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문제와 더불어 국공립미술관들을 비롯한 미술제도들이 미술현장에 끼치는 역기능 현상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국공립미술관들의 설립과 미술계의 생태환경 파괴
정부는 1988년 올림픽 이후의 경제호황과 금융실명제, 토지초과소득세, 신용카드 사용 등으로 인해 갑작스럽게 늘어난 세금수입으로 전국의 시도 문예회관과 미술관들을 잇달아 짓고, 대형 비엔날레들을 개최했다. 1988년 서울시립미술관을 시작으로 1991년 경기도문예회관, 1992년 광주시립미술관, 1993년 부산문화회관, 1995년 광주비엔날레, 1998년 부산시립미술관, 2000년 미디어시티서울, 2001년 부산비엔날레, 2010년 대구문예회관, 2011년 대구미술관 등등이 줄지어 들어섰다. 현재 문화체육관광부에는 국립현대미술관을 비롯한 31개의 기관이 소속돼 있고, 산하기관인 한국문화예술회관연합회에는 251개의 문예회관 등이 등록되어 있다. 물론 각 지방자치단체 소속의 미술관 등도 있어 실로 방대한 조직이 공적 예산으로 운영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기관들과 행사를 운영할 전문 인력을 양성하고 다양한 콘텐츠들을 개발하려는 노력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이 기관들은 늘 기획물의 빈곤과 전문성 부재로 허덕였고, 문화예술 분야의 중장기적 성장전략 없이 예술 현장과의 긴밀한 협력과 소통에도 일정한 한계를 보여 왔다. 물론 중앙부처에서는 외부 인력의 자문이나 TF 팀의 운영, 심의제도 등을 운영했지만, 전문성보다는 정권이나 정부에 우호적인 인사들로 채워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실효성은 별로 없었다.
이런 내부적 한계는 이 기관들이 미술현장과 긴밀하게 소통하며 지원을 극대화해 갈 전문역량과 문화예술정책의 부재로 인해 표면화되었고, 정부기관의 관료적 속성과 바람직하지 못한 행정 중심적 시스템과 맞물리며 미술계의 생태환경을 파괴하는 역기능으로 이어졌다. 그런 일들은 예술가들이 가꾸어 온 미술계의 생태환경을 고려하고, 함께 성장해 갈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한 후 단계적으로 시행했어야 했던 일이다.
실제 수많은 문화예술기관들의 기관장과 학예사들의 인사권이나 임기 및 역할, 권한의 범위들이 각 행정기관들의 통제권 속에 있어서, 이 기관들이 문화예술 현장의 지원을 위한 전문역량을 제고해 가는 일보다 상급기관의 눈치를 살피거나, 관료사회의 권위의식을 갖고 있는 인상을 주며 문화예술 현장의 불신을 자초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일례지만, 국공립미술관 관장들의 임기는 2-3년인데, 부임 첫 해를 전임 관장의 기획을 대행하는 일로 채워야 하고, 이듬해 준비하는 기획들을 다음 관장에게 맡겨야 하는 형편이다. 연임이 되지 않는다면 무엇인가를 해 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니므로 소신껏 일하기보다는 인사권을 가진 기관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게 되어 있다. 관장들의 직급이 비상식적으로 낮다거나, 지극히 행정적인 발상에 기초해 있는 공모절차와 평가기준도 행정기관의 통제권 강화를 뒷받침하고 있다. ‘미술계가 콘크리트 장벽으로 둘러싸인 관료들의 놀이터가 되어 버렸다’는 푸념도 무리가 아닌 것이다. 뉴욕의 MoMA와 우리 국립현대미술관의 전문성과 역량의 차이가 어디서 발생하는 것인지, 그 차이가 얼마나 큰 성과의 차이를 만들고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런저런 이유들로 전문 역량을 갖추지 못한 제도기관의 급격한 양적 팽창이 미술현장의 불신과 갈등을 초래해 어렵게 구축해 왔던 생태계가 순식간에 뒤엎어졌다. 그리고 이런 혼선과 분열이 대중문화에 악영향을 끼치는 것 역시 당연한 일이다. 세간의 주목을 끌었던 부끄러운 사건들, 가령 신정아 사건이나 조영남 대작 사건, 천경자, 이우환, 박수근, 이중섭 위작 사건, 미술대학 입시비리 사건들은 이런 사정들과 무관하지 않은, 빙산의 일각들이다.
글을 마치며
몇 년 전 필자는 한 토론에서 경영학을 전공하고 미술공간을 운영하는 분으로부터 한국의 미술시장 규모가 OECD 국가들의 평균에 비해 약 30분의 1 정도 밖에 안될 만큼 작고, 그 원인을 비전문성과 불투명한 시장구조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 미술에 조예가 깊은 한 가톨릭 신부님이 이 말을 받아 미술계가 아마 우리 사회에 마지막으로 남은 ‘혼탁한 분야’로 “참으로 정의롭지 못하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평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한국 미술이 중요한 turning point에 다가서고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20세기 한국미술은 일제 강점기와 6.25 전쟁 등 격변기의 혼란 속에서 극심한 문화혼성을 겪으며 ‘전통의 단절과 현대화로의 비약’이라는 역사적 질곡을 경험했다. 한국의 작가들은 열악한 문화 환경 속에서 전문역량과 비평담론의 지원을 받지 못했고, 이 때문에 동시대미술의 핵심적 이슈를 효과적으로 공유하지 못함으로써, 대안 모색보다 새로운 스타일에 함몰된 짝퉁 브랜드들을 양산해 오기도 했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필자는 한국현대미술에 관한 자료수집과 분석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 왔고, 한국미술로서의 의미 있는 성취들과 고민들이 불순한 기획들에 의해 은폐되어 왔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한국미술의 어지러운 현상들은 대부분 그 원인을 상당히 명쾌하게 파악할 수 있는 것들이고, 힘을 모아 충분히 해결해 갈 수 있는 일들이다.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의, 역사적 전환의 역동을 일으킬 중요한 에너지원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문제와 원인을 정확히 진단할 수 있다는 것은 그것을 직시할 의지와 솔루션이 있다는 뜻이다. ‘무엇을’ 추구해야 할지에 관한 고민을 외면하고 ‘어떻게 해야 할지’에만 몰두해 온 과거를, ‘무엇을’ 향한 ‘어떻게’로 바꾸어 한계를 동기로 삼고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 가야한다. 그것이 지금 우리에게 맡겨져 있는 소명이자 기회인 것이다.
비판은 대안을 찾아 가는 첫 걸음이다. 새로운 역사로의 전환을 위해 과거와의 명료한 선 긋기가 필요하고, 미술계가 안고 있는 다양한 난제들을 강력한 동기이자 기회로 삼아야 한다. 역사는 과거를 재료로 미래를 만드는 현재의 요리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의 현대미술사는 36년의 일제식민강점과 분단현실, 전쟁과 빈곤을 딛고 한강의 기적을 일궈낸 사람들의 강인한 역사를 미술의 관점에서 진술해 가는 작업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오상길. 2019.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