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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막난 진술, 고통의 인식
-오상길의 설치작품에 관하여
ART VIVANT 제 37호(시공사. 1995) 서문, 서성록(미술평론)
두 부류의 작가가 있다고 치자. 하나는 즉흥적 영감으로 무한한 깊이의 상상적 공간을 확보하는 작가이고 다른 하나는 주도면밀한 생각에 의존하면서 손으로서가 아닌 머리로 창조의 의미 층을 두텁게 쌓아올리는 작가이다.
오상길은 이중 어디에 속할까? 그의 감성은 뜨겁고 이와 함께 그의 판단은 매우 냉철하다. 냉철하면서도 사색적이기를 좋아하고 더욱이 시대를 앞질러 내다보는 날카로운 통찰력을 그는 동시에 구비하고 있는 것 같다. 그리하여 예술 일반의 문제로 흐를 때는 그의 감성이 칼날처럼 곤두서는 것을 볼 수 있고 그의 생각이 자신의 작품 문제로 환원될 때는 매우 이지적인 방향으로 흐르는 것을 종종 발견하게 된다.
오상길은 여러모로 호기심을 갖게 하는 작가이다. 그 '호기심'은 그가 80년대 탈모던' 운동을 이끈 주역이라는 사실, 그리고 '후기미술작가협회'를 이끌면서 각종 학술회 및 기획전을 거뜬히 소화해 낸 일꾼이라는 잘 알려진 사실 이외에도 그의 작업에 줄곧 나타난 변신과 단속성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이때의 변신과 단속성이란 흔히 말하는 '철마다 옷 갈아입기'식 임시변통과는 분명 구별해야 할 것이다. 그에게 있어 변화란 자신과의 치열한 싸움, 부단한 갱신의 자각을 통해 얻어진 결과요, 좀더 이해하기 쉽게 말하면 그가 체질적으로 '되풀이하기'를 혐오하는 데 기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이같은 갱신의 여정은 철옹성같은 장르의 장벽을 무색하게 만들면서 '월경越境'의 모험을 마다하지 않았다는 데서도 발견할 수 있다. 평면에서 입체 따블로(<가변적 오브제>,1985-86)로, 입체 따블로에서 설치(<작업>,1987-88, <무제>,1986-88)로, 다시 설치에서 입체(<지혜, 저항, 초월>, 1992-93)로 쉴새없이 작품의 각피角皮를 갈아치우고 또 새 형식을 찾아 나서면서 , 한편으로는 관념과 리얼리티, 우연성과 필연성, 담론 질서의 재구성과 해체, 환원과 표현의 배리 및 궁극적 동일성을 모색하면서 때로는 뒤쫓아가기 힘들 정도로 혁신적인 자세로 예술에 대한 자기 입장을 윤곽 지었으며 또 이를 심화시켜갔다.
필자가 그의 작업에 대해 가지고 있는 생각은 남들이 인정하고 있는 바와 크게 다르지 않다. 뭔가 중요한 발언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도대체 그 요점이 무엇인지 알 길이 없다는 식의 생각이 그것이다. 이런 평가를 듣는 것은 그의 작품이 지닌 속성, 나쁘게 말하면 일종의 현학성, 좋게 말하면 심오성 때문이리라. 오래 전부터 지녀온 그의 작품에 대한 이같은 성질은 바꾸어지지 않고 있다. 바꾸어 말하면 남이야 자신의 작품을 어떻게 여기든지 오직 외길만을 걸어왔고, 또 앞으로도 그럴 공산이 크다는 것을 결코 배제할 수 없다.
그의 작품에 얽힌 에피소드 하나를 소개하면, 「성형의 봄」전(덕원미술관, 1973)에 오상길이 입체작품을 출품했을 때의 일이다. 그는 이 전시에 슬라이드 프로젝터와 음향기기를 이용해 우리의 격랑이 심한 현대사를 표현한 듯한 작품을 출품하였는데, 그의 의중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필자가 “한국의 정치사를 지적한 것이냐?” 라고 묻자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 “글쎄, 그럴 수도 있지만 실질적인 것은 영상이 그치고 프로젝터에서 다음 영상이 나을 때까지 흐르는 정적, 그리고 그 사이에 녹음된 사람의 박동소리였다."라고 대답했다. 말하자면 그는 ‘보이는 것 = 전부’에 길들여진 우리의 관습에 허를 찌르고 이와 함께 심장박동을 통해 은닉된 또 하나의 커뮤니케이션 기제의 유용함을 드러내 보이고, 나아가 그것을 내부세계와 외부세계의 연결 고리로 활용한 셈인데, 필자의 그림 읽기는 작가의 생각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사실이 대화를 통해 판명이 났다. 그러나 작가의 설명을 들은 후에도 필자는 별로 놀란 기색없이 그의 말을 아주 태연스럽게 받아들여야만 했다. 이런 사례는 이번만이 아니라 지금까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으며, 전혀 예상치 못했던 데에 의중을 두고 그리하여 감상자의 의표意表를 찌르는 경우가 허다했기 때문이다.
과연 이러한 그의 작품 읽기의 어려움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그것은 다음과 같은 자신의 예술에 대한 한 토막의 글을 인용할 때 어느 정도 납득될 수 있을 것이다.
나에게 있어 ‘나' 와 ‘세계'는 그 자체로 무한하며 내 안의 깊이로부터 내가 알지 못하는 어느 곳에서인가 이루어지고 있을 어떤 현상에 이르기까지 그 관계적 상황의 에너지는 끝이 없다. 나의 작업이란 바로 이러한 지평 속의 일이며, 그 에너지를 현전시키는 일로서 사유와 감성으로부터 호흡과 심장의 박동, 그리고 상상력과 알 수 없는 것들을 포함하는 내 활동의 전부로 내 존재와 사유의 특수한 영역과 나를 둘러싸고 있는 관계의 보편적 영역을 소통시키는 중간자인 것이다.
그는 자아에 대한 확정성이나 세계에 대한 확정성을 부정한다. 그 엄연한 존재 자체를 부인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존재가 실체, 본질의 차원으로 발전되는 것을 엄격히 규제한다. 다만 존재의 ‘상황’ 과 나와 세계가 맞딱뜨려지는 곳에서 부단하게 야기되는 ‘에너지'를 주목하고 그 자신은 존재의 이러한 상황을 경각시키는 파수꾼으로 머물게 할 따름이다. 아마도 그러한 존재에 의해 성취될 수 있는 것은 지배 내지 상실 뿐이요, 어떤 내적 부피나 실현을 가져다주지 못하는 것이라는 믿음이 깔려 있기 때문이리라.
오상길은 그의 작품을 늘 외부적인 것, 이를테면 문화 역사적이거나 사회 정치적인 문제와 결부시키고 또 미술 내적인 역사의 맥락과 접합시켜 왔다. 하지만 그러한 접근은 전통적 반영이론에서 보듯이 전형적인 형상을 취하거나 외형의 표상을 내세우기보다는 일종의 알레고리로 나타내어 왔다. 나뭇가지나 안료를 이용해 원형의 바닥을 만든다든지 또 그 위에 나무 밑둥, 돌을 배치시킨다든지, 식육의 살점을 베어내어 그 위에 페인트칠을 하거나 슬라이드 프로젝터에 투사된 영상과 자아의 박동소리 및 그것의 멈춤 따위를 대비시킨다든지 하는 일이 그것들이다.
물론 이러한 작품들은 ‘성균戒均', ‘성조歲造' 의 케케묵은 조형적 척도로는 잴 수 없는 것이요, 대단히 관념적인 사유로 성사된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지닌 의미내용을 명확히 밝혀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는 “작품이나 그 작품을 제작한 작가의 내면이란 사상적 배경 -그것도 매우 모순될 수밖에 없는-과 역사적 체험 그리고 체질적 감수성 같은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문제들이 매우 복합적인 형태로” 뒤엉켜 있기 때문에 “작품이란 작가 자신이 의도하는 바 이외의 예기치 못한 우연성의 결합”이며, “토막난 진술로 그 언저리를 어렴풋이나마 소개하고자 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예술을 피폐한 현실이 이미 내재화된 것으로 보고 흡사 섬광과 같이 어느 한 순간 그것을 외화外化 내지 방출故出시키는 것으로 간주하는 셈이다. 물론 그렇게 방출된 이미지가 표상하는 것은 그가 적대시하는 대상성 일반임은 두말할 것도 없다. 따라서 그가 구사하는 알레고리란 작품의 내용을 제시하기 위한 수단이기 전에, 표상할 수 없는 것을 표상하게 하는 선택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가 제시하는 오브제는 실상 의미내용의 확정성을 부인하고 개연성의 너비를 증폭시키기 위한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나, 여기서 유의해야 할 점은 그러한 확정성의 거부가 소통 불가능성으로 직결되거나 의미부재로 해독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는 ‘토막난 진술’과 ‘손상을 입은 의미'로 오히려 좀더 원천적인 것, 근본적인 것을 지적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통증과 분열의 담화야말로 층위가 어긋난 세계를 바로 볼 수 있게 한다고 자신한다. 비록 오브제의 단순 제시, 그리고 불친절한 암축(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작품에 대해 자상하게 서술하는 등의 친절을 베풀지 않기 때문이다)에 그치고 있기는 하지만, 이해의 가로막힘 속에서 획득되는 '혼돈' 과 갈등'이야말로 저 알량한 작품해독의 명료성보다도 더욱 ‘투명한 소통’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말하자면 ‘토막난 진술’ 과 ‘문득 튀어나온 순간의 표출’이야말로 복합적 상황의 뒤엉킴으로 말미암은 것이며, 결국 그것은 '대상화된 자신의 역설적 체험' 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소통에 매진하는 것은 밖의 세상에 대한 그의 불신도 크게 작용하고 있지만, 더 근본적으로 보면 일반적 담론의 전횡에 대한 불신이 내재해 있는 듯이 보인다.
나는 지금껏 현대미술의 맥락 속에서 쉽사리 읽혀져 온 일반적이고 상투적인 개념들을 거부한다. 조형예술 작품에 대한 기호학적 해석이 이미 작품의 존재와는 별개의 차원인 것은 언어, 기호 자체가 세계에 대한 인간의 대상화의 본질을 가지고 있고, 언어는 이미 언어 그 자체의 자율적 체계에 의해 ‘관계적으로’ 추구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호화되어 있는 의미체계가 한정하는 적정 범주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나 지각적 사실을 사유할 수 있는 한계에 대한 회의와 더불어 우리의 지각적 경험을 언어화할 때의 피할 수 없는 간접화의 숙명을 가지는 단지 약정된 기호체계일 뿐이라는 점에서 언어 기호는 제한된 영역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긴 인용이지만, 위의 글에서 우리는 보편자가 누리는 경험이 그가 말하다시피 ‘약정된 기호체계'에 의해서만 규정되며 또한 이러한 과정을 밟아 형성된 기초 체계를 소통의 준칙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도식으로 풀이하면, 어떤 경험 A라는 것이 있다고 칠 때 그것은 언어 B에 의해서 기호화되고, 언어 B가 경험 A를 대신하고 있다고 믿지만 언어 B라는 것은 A의 일개 기호, 약호에 지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포괄하는 전체이자 실제를 능가하는 것으로 여기고 있다는 얘기이다. 더욱이 B가 나름의 질서 체계를 구축하면서 참다운 실제를 재현하지 못한 상태에서 B의 유효성은 더 이상 설득력을 가질 수 없다는 판단을 내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앞에서 말한 언어 B를 그는 무엇으로 간주하고 있을까? 두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경험과 실제 위에 무소불위無所不爲의 절대자처럼 행세하는 온갖 이념과 논리를 가리킨다.
참다운 창조의 에너지를 논리로 제한하고 해석의 자유를 속박하는 독재의 사슬을 풀고, 예술에 대한 온갖 이념과 논리의 무장을 해제하여 작가나 관람객, 그리고 작품이 이루는 지평을 찾아야 하며, 그때서야 진정한 소통을 개시할 수 있다.
우리의 시선을 좀더 그의 작품 속에 들이대면, 그의 일련의 작품들은 끝없는 부정의 결과이자 그러므로서 회화의 참다운 위상을 얻어내려는 의지를 함유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의 부정심리는 대체로 세 가지 차원에서 언급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형식적 모더니즘이 몰고 온 회화적 담화 체계의 일률성과 그것이 내포하는 위압적인 체계에 관한 것이며, 다른 하나는 오늘의 미술 행위가 동시대의 문명성과 유리됨으로서 발생하는 일종의 자괴감에 관한 것이고 마지막으로는 아무리 새로운 회화적 이념마저도 그것이 분열의 언어임을 자인하지 않는 한 무의미해질 수밖에 없다는 부정심리의 표현이다. 특이하게도 오상길의 경우에는 이러한 부정성에 근거하여 그의 작품의 중심이 형성되어지며 부정의 자기소유라고 말할 수 있는 작품과 그것이 점유하는 의미층간의 역학관계가 상호 모순적이고 비변증법적으로 형성되어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흔한 말로 예술을 자기와의 대결로 비유할 수 있다면, 이 작가만치 이 말과 맞아떨어지는 작가도 없을 것이다. 그에게 있어 자기와의 대결은 우리가 생각하는 의식의 자기고양을 위한 것도 아니며 실존적인 차원에 해당하는 성질의 것도 아니다. 그의 자기투쟁은 이미 자신 속에 완전히 용해되어버린 -주체 중심적 이성의 절대화가 불러들인 결과가 자연의 지배 또는 인간의 지배 도구로 전락하였다는 의미로서의 -과학적 이성의 굳은살을 벗겨내기 위한 의식의 발로이며, 이런 점에서 그것이 지향하는 바는 결국 세계와의 항구적인 대결로 요약된다. 외부세계의 모순성과 폭력성이라는 것이 엄밀한 의미에서 비단 밖의 사건만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어떤 기호체계로 둔갑하거나 상징체계로 변화하여 이미 심연 한복판에 스며든 거역 불가의 '전체성'으로 물화物化되어 온다고 볼 때, 오상길은 그러한 전체성에 전율을 느끼면서 자아의 보루로 남아 있는 원자화된 개체성을 온갖 힘을 다해 보존하고자 한다. 의사소통이 만연하고 무언의 힘에 의해 인간성의 억압이 그 어느 때보다 증대되는 시점에, 심지어 그런 사실의 인식조차 희박해져 가는 암울한 시기에 그는 한 명의 사유하는 사람으로서 토막난 언어, 이미 불구화된 언어로써 손상된 인간과 문화, 또 예술에 대해 사색하는 것이다. 그의 이러한 심각한 사색이 “예술은 떠들거나 그리거나 모방하지 않고 본질을 포착함으로써 사회적 인식이 된다."는 아도르노의 경구를 떠올리게 해주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다.(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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