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예술의 비가시적非可視的 세계
미술관이나 화랑, 저널리즘 등을 통해 예술작품을 접하면서, 배후의 보이지 않는 세계를 함께 인식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현대의 시각예술 작품들은 표면에 드러나지 않는 배후의 맥락을 이해해야 할 경우가 많고, 이걸 해독할 수 없으면 그 작품은 물론 동시대미술 전반을 이해하기 어려워진다. 이것이 현대미술이 난해하다고 여겨지는 이유이기도 하고, 남의 그림이 좋아 보인다고 비슷하게 따라 그려도 아무 의미가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가령 Chuck Close보다 훨씬 더 큰 캔버스에 더 세련된 붓터치로 더 치밀하게 그릴 수는 있지만, 그래봤자 문맥 상 의미를 상실한 Chuck Close의 아류이자 짝퉁미술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탁월한 작품의 뒤에는 의례 그 작가의 태생적 DNA와 성장과정, 학습내용, 세계관이나 문화적 감수성, 창의적 idea, 예술적 감각, 작가의식, 작업의 idea나 concept, 시각...적 code나 어법idiom, 문화특성, 시대의 흐름과 예술담론, 이슈로서의 가치 같은 중요한 요소들이 숨어 있다. 그림 속에서 이런 요소들의 단서를 발견할 수 있다면 상당한 수위의 감상활동이 가능해지고, 새로운 창작에의 단서를 움켜쥘 수도 있다. 현대미술은 아는 만큼 볼 수 있는 것이다.
미술관 문화
전시기획자-큐레이터나 화상은 뚜렷한 목적을 위해서 전시를 기획하고, 이 목적을 만족시키는 작품을 골라서 선정한다. 즉 전시회란 그들의 필요를 반영한 작품들로 구성된다는 말이다. 그림은 작가가 그렸지만 전시회는 큐레이터나 화상이 그리는 그림인 셈이다. 일반적으로 예술애호가들은 물론이거니와 대다수의 작가들조차 이 보이지 않는 힘들의 영향력과 구조적 역학을 잘 이해하지 못하게 마련이다. 하나의 작품이 세상의 빛을 보게 되는 과정에는 탁월한 역량을 지닌 전시기획자의 안목이 필요하고 국가의 문화예술정책이나 애호가들의 문화적 취향과 수준, 미술관의 중장기적 문화전략, 예술작품으로서의 비평적 가치판단 예측, 넓은 의미에서의 시장적 가치판단 예측, 잠재성장성, 투자자본의 성격, 문화 권력의 방향성 등등 수많은 예술 내, 외적 문제들이 고려되는 것이다.
미술관은 단순히 작품을 모으거나 전시하는 장소가 아니라 시각예술의 문화적 가치를 생산하고 소통시키며, 교육을 통해 시각예술 문화의 향유를 촉진하는 사회적 공간이다. 미술관은 작가의 창작활동과 그를 둘러싼 비평활동, 저널리즘을 지원 생산하고 애호가들이 함께 공감하고 공명하며 소통할 수 있게 만드는 공간이며, 이곳에서 생산되는 문화담론이나 비평이슈가 당대의 미술과 시장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다. 결국 대중들이 만나는 예술작품 대부분은 이런 ‘보이지 않는 다양한 종류의 힘들의 의도가 강력하게 반영’된 결과인 셈이다.
미술관의 전시회는 화랑이나 아트페어의 그것과 기획의 목적, 성격, 방법, 수준 등 거의 모든 부분에서 차별화된다. 참고로 화랑의 전시는 근본적으로 상품을 진열해 놓고 값을 흥정해가며 판매하기 위한 showcase인 셈이다.
전문 비평과 저널리즘
한 작가의 작품이 세상에 알려지기 위해서는 전문 비평과 저널리즘의 역할이 절실하다. 그러나 이것은 작품을 해설하거나 유명하게 만드는 홍보작업과 다른 일이다. 필자가 말하는 전문 비평과 저널리즘은 대중들의 문화적 향유에 앞서, 시각예술 내부의 문화적 가치를 검증하고 비평적 가치를 쟁점화하여 한 시대의 문화담론으로 발전시키는 윤리적 과정으로서의 또 하나의 창작활동이다. 예컨대 Jackson Pollock의 all over painting 작업들과 Clement Greenberg의 The Modernist Painting 같은 비평 text의 관계나 Greenberg의 비평적 관점과 Frank Stella의 저 유명한 발언 “What you see is what you see!”의 관계를 들 수 있을 것이다.
all over painting이라는 Jackson Pollock의 어법idiom이 어떤 비평적 맥락 위에서 의미를 획득하는 것인지는 Clement Greenberg의 The Modernist Painting 같은 비평 text 속에서 아주 명료하게 설명된다. 이 맥락의 이해를 위해선 상당히 긴 시간의 집중력 있는 학습이 필요하다. 하지만 답답해하는 분들을 위해서 다소 무리를 해서 쉽게 말하자면, Clement Greenberg에 의하면, 미국의 완전한 추상회화는 서구회화의 전통-대상을 연상시키거나 재현하는 이미지, 문학적 서사narrative, 3차원적 공간감, 주제와 배경 따위의 전통회화의 구조를 완전히 배제한, 캔버스라는 편평한 화면의 단일구조와 색채로만 구성된 순수한 추상성을 조건으로 하며, 이것을 만족시키는 최초의 그림이 바로 Jackson Pollock의 추상회화-all over painting이다. 이런 의미에서 극단적으로 Jackson Pollock의 all over painting은 Clement Greenberg의 The Modernist Painting의 임상 실험보고서 같은 성격을 갖는다고 볼 수 있으며,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all over painting은 Greenberg가 Jackson Pollock의 손을 빌려서 만든 작업이라고 비아냥대는 말이 나돌기도 한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Greenberg의 비평text가 미국의 현대추상회화를 탄생시킨 결정적 산파역할을 수행했다는 사실이며, 이 text가 전 세계의 수많은 예술가들의 분별력을 자극해 194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 중반에 이르는 시기의 역사상 가장 화려한 시대-New York 중심의 동시대미술 전성기를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이다. 사실 Michael Fried나 Michel Tapie, Pierre Restany 등 예술작품을 뒷받침하는 비평이 아니라, 걸출한 비평가들이 예술작품 앞에 서서 예술담론 자체를 이끌어 나아가는 비평이 동시대미술을 견인하는 일은 다반사였다.
이런 맥락에서 Frank Stella의 “What you see is what you see!”는 추상미술 이론가인 Clement Greenberg나 Michael Fried와 minimal artist인 Donald Judd, Robert Morris, Frank Stella 등 작가들과의 불꽃 튀기는 논쟁들과 맞닿아 있고, 시각예술의 근원적 속성과 존재방식에 관한 이 첨예한 쟁점들이 이른바 New York 전성시대를 이끈 1등 공신들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Donald Judd, Robert Morris, Frank Stella의 작품들은 근본적으로 비평적 성격을 띤다고 말할 수 있고, 그런 맥락에서 minimal art 역시 비평적 성격을 지닌 예술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비평이 시각예술의 담론 수위를 한층 더 견인해 올리는 현장을 심심치 않게 목격하게 되는데, 이런 비평들은 작가의 창작활동을 넘어서는 지점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필자는 시각예술 문화의 확산과 성장을 위해선 아주 예리한 비평과 저널리즘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사실 동시대미술은 근본적으로 시각예술의 존재이유와 존재의 방식에 관한 비평적 문제제기와 그에 관한 대안으로서의 답변 형태로 진행되어온 측면이 있고, 이런 의미에서라면 시각예술 자체가 비평적 성격을 띠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즉 예술가들의 창작활동 자체가 이미 비평적 단상 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말이다.
전문 비평과 저널리즘은 대중들이 당대의 수준 높은 시각예술 문화를 향유할 수 있도록 보호하는 역할과 나아가 예술가들의 창작활동을 손쉽게 차용해 좀먹는 사이비들의 확산을 억제하는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예술의 창작환경을 보장해 준다.
1950년대 이후 New York의 미술시장이 누려온 장기간의 호황은 이런 치열한 비평담론을 통해 쟁취한 동시대미술 패권 장악의 결과이며, 거꾸로 이런 강력한 비평과 저널의 힘이 New York의 미술시장을 떠받치고 있기 때문에 장기 호황이 가능했다고 말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