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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비평의 대중화, 그 험난한 길을 바라보며

 

 

 

 

 

 

모든 시각예술은 사회적 기능과 역사성을 지닌다는 의미에서 공공성을 띤다. 그러나 이런 의미에서의 미술의 ‘공공성’과 공공미술Public Art이 표방하는 그것은 명확하게 구별할 필요가 있다. 공공미술Public Art이란 각종 Monument들과 Propaganda들을 말하는 것으로, 시각예술의 가치를 사회적으로 기능화 하는 도구적 성격으로 인해, 순수성과 자율성을 생명으로 하는 순수예술의 본질과 배치되는 측면이 있다.

 

아주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이 공공미술이 최근 무슨 새로운 쟁점인 양 다시 부상하고 있다. 물론 그 배후에는 예술작품의 미적 가치와 장식성에 관한 오해, ‘예술의 공공성’과 ‘공공성을 위한 예술’ 사이의 개념적 혼란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시각예술과 대중의 실체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미술의 ‘대중화’라는 괴이한 주장을 늘어놓으며 어설픈 상업주의화를 기도하고 있지만, 이 역시 유감스러운 넌센스다. 이런 일들은 일 년 내내 황사가 끼어 있는 것처럼 시계가 흐려져 있는 이 미술판을 더욱 혼탁하게 만드는 일로, 근본적으로는 비평문화의 부재로 인한 결과에 다름 아니다.

 

19세기 중반 이후 시각예술은 스스로에 관해 회의懷疑를 거듭해 왔고, 이 과정을 통해 큰 변화를 겪어 왔다. 시각예술은 이제 더 이상 이미지에 의존하지 않으며, 장식적 가치를 추구하지도 않는다. 그로테스크grotesque하고 아이러니irony하며 데카당decadent한 방법으로 예술의 존재방식 자체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왔고, 이 급진적인 변화의 과정이 대중들의 이해를 어렵게 만든 측면이 있다.

이 점을 두고 혹자는 현대미술이 지나치게 난해한, 특권층의 향유물이라고 매도했으나, 그것은 현대미술의 문맥과 존재방식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고 하는 말이다. 역사상 그 어떤 예술도 현대미술만큼 예술가의 특권의식을 철저하게 해체시키지 못했고, 예술적 가치의 생산과 소비를 수평적인 상호소통 구조 속으로 끌어 들이지 못했다.

 

오늘날의 시각예술이 대중사이로 파고들지 못하는 이유는 현대미술의 급진적 전위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주변의 문화 인프라 확장으로 인해 대중들의 취향과 기호가 변화된 이유도 있다.

시각예술이 본질의 탐구를 계속하는 한, 전위성을 띠는 것은 불가피한 일로, 예컨대 수학자에게 '대중들이 재미없어 하니 고등수학 연구를 중단하라고 할 수는 없는 일' 정도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대중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시각문화는 현대미술을 제외하고도 무수히 많고, 현대미술은 특유의 비판적 존재방식으로 자신의 존재이유를 제시해야만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현대미술의 위상은 현대미술 특유의 생리와 실천을 통해 구해져 왔고, 따라서 오늘날 예술가들의 본질에의 탐구는 오히려 더욱 가속화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현대미술은 그 나름의 방식으로 대중문화에 기여해 왔고 또 기여해 갈 것이다. 가령 오늘날 부의 상징처럼 떠받들어지는 미니멀 패션이 대중들이 그토록 싫어했던 미니멀 아트의 소산인 것처럼 말이다.

 

이런 맥락에서 한국의 예술가들이야말로 어설프고 맥락도 없는 대중취향에서 벗어나 근본적 변태變態를 꾀해야만 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시각예술보다 TV 연속극을 더 선호하는 대중들의 취향을 바꿀 수 없음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시각예술이 TV 연속극이나 유행가처럼 온 국민의 사랑을 받아야 한다고 믿는 것이 아니라면, 조작된 대중문화에 식상한 문화수요층을 향해 다가설 여지는 얼마든지 열려져 있는 것이다.

 

비평 활동과 미술관, 화랑, 저널리즘, 교육기관 등의 인프라들이 확장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시각예술을 대중들에게 확산시키는 일은 시각예술 분야의 제도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맡겨진 소명이다.

그러나 그에 앞서 1990년대 이후 폭발적으로 늘어난 세금으로 문화예술 정책이나 전문 인력 양성 등의 준비도 없이 전국 시도에 문예회관과 미술관 건물들을 신축하고, 정권의 비호세력이나 공무원들에 그 운영을 맡김으로써, 전문역량의 부재로 말미암은 혼선과 무기력을 자초해 왔음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정부가 막대한 세금을 무분별하게 쏟아 부어 미술계의 생태구조를 거꾸로 파괴해 왔다는 말이고, 이런 오류가 30여년이 지나도록 전혀 개선되지 않고 있다는 뜻이다.

 

한국의 시각예술 제도의 역량부재는 생각보다 훨씬 더 심각한 문제다. 최근에는 제도가 시각예술 현장을 왜곡시키고 예술가들의 활동을 위축시키는 명백한 역기능 현상까지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시각예술 분야는 예술로서의 가치를 생산하는 창작활동과 그들이 생산한 예술의 가치를 문화적으로 소비하는 제도의 영역으로 나누어진다. 이 두 영역은 원활한 소통과 건강한 상호 견제를 통해 보완적인 공생관계를 유지해야 하지만, 전문역량이 없는 종사자들에겐 이 당연한 시스템의 운영이 대단히 어려운 일이 된다. 공생관계의 구축 이전의 상호 본질에 관한 이해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전문성의 부재가 시각예술과 시각예술 문화를 위해 작동해야 할 시스템을 밥그릇 싸움으로 변질시키고, 본말을 전도시키며 미술과 미술문화를 불신과 반목으로 오염시켜 놓고 있는 것이다.

 

얼마 전 어떤 상업 화랑이 컬렉터들의 취향을 조사하여 그림을 주문했다는 말을 들었는데, 이런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더라도 모든 시각예술 제도는 겉으로만 시각예술을 위해 존재할 뿐, 실제로는 제도 자체를 위해 작동되는 속성을 지닌다. 예술가들도 제도의 이런 속성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한다. 나를 위해 존재하는 제도는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제도는 언제나 스타를 원하고, 명성과 돈으로 영향력을 확보함으로써 자신들의 존재이유를 설명하려 들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가 지닌 피할 수 없는 속성으로 인해 속물적 부르주아들의 면전에 던진 뒤샹의 소변기와 만조니의 오물이 우상화되었지만, 그것이 곧 시각예술의 가치는 아닌 것이다.

 

Piero Manzoni, Artist's Shit(Italian-Mer

Piero Manzoni, Artist's Shit(Italian-Merda d'artista), 1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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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cel Duchamp, La fountain, 1917

바로 이 복잡한 경계 위에 비평이 해야 할 일이 있다. 물론 한국의 시각예술 비평은 지금껏 이런 기능을 수행해 오지 못했다. 마땅히 해야 할 공부와 주어진 책무에는 나태하면서, 먹거리에만 눈을 번들거리는 유명 평론가들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고, 심지어 비평은 재미가 없어 때려치우고 전시기획자로 나섰다고 자랑스럽게 떠벌리는 인물이 있는가 하면, 작가들이 너무 허약해 제대로 된 비평을 할 수 없다며 우쭐대는 평론가도 있다.

 

한국에는 미술사 책이나 외국비평 담론들을 통해 시각예술을 이해하고 있는 전문가들이 유난히 많다. 텍스트의 독해와 창작 글쓰기가 다른 일이듯, 시각예술 분야에 관한 공부와 창작활동의 이해는 전혀 다른 차원의 일이다. 책 속에서 ‘예술’을 찾는 건 ‘넌센스’라는 말이다. 그들에게는 난감한 주문이겠지만, 예술가들의 작품을 비평하고 역사적으로 자리매김 하기 위해서는 ‘예술’의 맥락과 ‘창작활동’에 관한 애정과 감수성, 창의적 독해력이 요구되는 것이다.

 

쏟아지는 전시 카탈로그마다 가득 찬 주례사 서문들이나 미술잡지들의 전시리뷰들 대부분이 그렇지만, 저서라고 펴낸 책들 중에도 조잡한 것들이 너무 많다. 이 텍스트에서 저 텍스트로 옮겨가는 방식의 글쓰기도 그렇지만, 검증을 위한 기초적 리서치조차 없이 남의 글을 인용하여 짜깁기해 놓고, 학문적인 글처럼 위장하고 있는 역겨움을 수없이 겪게 된다.

자다가 봉창 두들기는 글들이 쏟아져 나오고, 연구와 분석조차 없이 미술운동과 사건들을 미술사로 둔갑시키는 일들이 버젓이 자행된다. 이런 문제들에 이의를 제기하는 작가들을 ‘학자’로서의 권위를 운운하며 윽박지르는 위인들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도대체 이런 일들이 어떻게 용인될 수 있는 것일까? 과연 대중들이 이런 글들을 읽고 시각예술을 이해할 수 있을까? 시각예술과 대중을 서로 소외시켜 놓고 있는 이 불합리한 시스템들 속에 최소한의 자정 장치조차 갖추지 못하고 있는 비평계와 미술사학계의 현실이 바로 현대미술과 대중 사이의 거리를 벌려놓고 있는 핵심적 문제인 것이다. 사기와 허위의 가능성이 난무하는 현대미술에 있어 메타비평의 부재는 우리 모두에게 치명적인 리스크가 아닐 수 없다.

 

오늘날의 대중은 수만 개의 직업에 종사하는 전문인들이며, 한 나라의 정치판을 뒤흔들 만큼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이다. 그중에서도 현대미술에 관심을 갖는 대중들은 탁월한 교양과 문화적 취향을 가지고 있는 이들로, 모든 미술관계자들이 힘을 모아 그들을 합리적으로 납득시킬 수 있는 매력적인 시각예술 문화를 구축해야 한다.

 

시각예술과 시각예술 비평 문화의 대중화를 위해선 무엇보다 시각예술과 비평의 질적 개선을 시급히 이뤄야 한다. 또한 지금껏 우리 시각예술 문화의 발전을 저해해 온 미술계의 온갖 불순한 위계질서와 파벌들을 해체시키고 철저한 무한경쟁 체제를 구축해야 한다. 이것이 미술인들에게 부담스러운 일임에는 틀림이 없겠으나, 내부적 경쟁력의 강화만이 이 미술계로부터 사이비들과 아류들을 축출해 내고 대중들을 설득할 수 있는 길이며, 한국의 현대미술이 21세기 동시대미술의 미래를 힘차게 이끌어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생각해야 한다.

수백 명의 무기력한 평론가, 수천 명의 제도 운영자, 수만 명의 미술가 무리들보다 이 부패한 미술판을 뒤엎어 버리고, 교양 있는 대중들의 설득에 앞장 설 한 사람의 논객이 절실한 까닭이다.(2007, 월간 Public Art / 2019 일부 수정)

 

오상길(작가,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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