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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HIBITION REVIEW : 미술평단 1998년 여름호
 
오상길의 비디오 이미지
생물학적 피드백에 의한 탈 담론화 현상

 

                                                                                                                                                         이필(미술평론가)
 


예술가에게 있어 여행이란 적게는 그의 예술세계에 있어, 크게는 그가 속한 사회의 예술계에 많은 변화와 파장을 예고하는 것이다. 매스 미디어의 범람 이전에는 예술가의 여행이란 간간히 듣기만 하던 새로운 세계의 경향을 직접보고 터득하고 와서 자신이 몸담던 곳에 외로운 뿌리를 내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매스 미디어의 범람과 더불어 이미 유행과 사조의 옹골진 경계란 것이 없어진 지금, 예술가의 여행이란 그 사회의 속속들이를 체험함으로써 우리가 사는 문화전체에 대한 비판적 틀을 다지는 역할을 한다. 그는 그곳을 느끼고 와서 외로운 뿌리보다는 보다 활기찬 생기를 이곳에 제공한다. 

맨하탄의 연인들Lovers in Manhattan」이나 「무제 97-7untitled 97-7」,「맥도날드와 말보로 라이츠 Macdonalds & Marlboro Lights」등의 작품에서 오상길이라는 한 예술가의 진한 여행냄새를 맡을 수 있다. 이상의 작품들이 사회, 정치적인 문제의 외형을 하고 인간의 내적인 문제를 파고든다는 점에서 기존 작품들의 컨텍스트를 크게 벗어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제목에서 느껴지듯이 예외적으로 여행지라는 장소의 특수성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누구보다도 명료한 언어로 탈 모던과 탈 정치를 표방하고 있는 작가로 알려진 오상길이 수많은 인종과 언어로 뒤범벅이 된 맨하탄이라는 그 모든 모순의 온상에서 테크놀로지의 메카니즘을 통해 진정 드러내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언제나 그러했듯이 그가 하나의 작품을 통해 너무나 많은 문제들을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기 때문에 그의 작품 읽기는 몹시 난해하다. 뿐만 아니라 이번 전시에 내보인 비디오 작품들의 경우 작품의 한 소절을 보고 나면 그 안에 내재하는 담론들의 가닥이 명료하게 잡히는 듯 하지만 그 다음 소절도 또 그 다음 소절도... 결국은 한 작품 전체가 처음 한 소절의 동어 반복적 구성이기 때문에 이러한 읽기는 결국은 미궁으로 빠져들고 처음에 잡았던 가닥들마저도 오리무중이 되고 마는 현상이 나타난다.

맨하탄의 연인들은 오상길이라는 한 한국인 작가가 자신들의 키스 씬을 클로즈-업 하도록 허락했다. 「맨하탄의 연인들」에서 클로즈-업 된 연인들의 동적 이미지가 주는 시각적 비결정성은 움직이는 영상 및 그 반복된 분절과 더불어 관람자의 특수한 지각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이러한 부분 이미지들은 전체적으로 구획된 형태를 볼 때보다 오히려 관람자의 상상력을 더욱 자극하는 듯 하지만, 그것이 동적 이미지임에도 불구하고 지루한 반복의 이미지이라는 점에서 우리의 상상력은 점차로 움츠러들고 종국에는 그것의 설자리마저도 잃어버리게 된다. 빠르게 움직이는 클로즈-업 된 화면을 자세히 살펴보면 연인들은 동성간이기도 또 이성간이기도 하며, 의도적으로 피부색깔의 차이를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모든 사회적 고정관념을 무시하는 듯한 용감한 그들의 사랑의 표현은 아름다운 감동으로 다가올 수 도 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똑같은 씬이 지루하게 반복된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처음에 명확하게 떠오르던 인종과 섹슈얼리티, 섹스와 관련된 모든 담론들은 차츰 그 껍질을 벗는다. 이제 그 반복적 시간 속에 서 있는 관람자에게 오로지 남는 사실은 키스라는 행위 혹은 그 의미에 대한 회의에까지 이르며, 더 나아가 인간과 동물의 경계에마저도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잔잔하게 물결치는 변기의 수면에 한 방울의 핏빛, 두 방울, 세 방울...끈끈한 핏덩어리마저도 떨어지고, 이윽고 온통 붉은 핏물의 흐느적거림과 잠시후의 쓸어버림, 그리고 그 반복... 인간이 자기 신체에 대한 표현 욕구를 느끼고 그 구체적인 제작을 시작한 이래로 인간의 모습은 끊임없이 미화되기 시작했다. 예술은 곧 미적인 것의 표현에 다름 아니었기에 서구인들은 인간신체를 통해 지고의 이상 미를 표현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 극한에까지 이른 노력의 노정 속에서, 필연적 결과로 실재하는 인간의 모습에 더 자세한 주의를 기울이게 되기 시작하고 절대적인 미 개념은 상대적인 미 개념 및 추한 것의 표현마저도 예술작품 속에 용인하게 된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인간 신체의 리얼한 모습이나 양태에 대한 과학적 연구업적이 오래 전부터 있어왔지만, 미술에 있어서의 인간 신체는 수많은 표현형식의 변천에도 불구하고 그 표피성과 관념성을 쉽사리 떨쳐버리지 못했던 듯 하다. 그것이 신체의 진실을 회피함으로써 단일 인종의 우월성을 견지하고자 수많은 허위의 담론으로 무장해왔던 서구사회의 모순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요구와 맞물린 것은 불과 수 십 년밖에 되지 않았으며, 그 짧은 기간동안 미술에서의 신체의 표현은 표현도구로서의 테크놀로지의 본격적 유입과 더불어 실로 파격적인 장면에까지 이르렀다.
이러한 양상은 이제 오상길이라는 냉철한 문화 비판적 시각을 가진 작가에게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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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작품 속에서 하얀 피부의 팔등신의 선남 선녀는 어느덧 피부색깔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은(우리는 그것이 누구의 혈액인지 모른다. 흑인, 백인, 황인, 남, 녀?) 한 여성의 생리혈, 혹은 한 남성의 항문 열창에 의한 피의 쏟아짐 자체마저도 리얼하게 담아내는 표현으로까지 치달았다. 그 충격적 이미지는 인간 생식의 문제 및 동성연애자들의 생태를 상상하게도 하며 그에 따른 에이즈와 같은 인류전체를 위협하는 재앙마저도 연상시킨다. 그러나 처음의 충격은 예의 그 반복적 시간이 지나면서 무감각해지고 문제의 담론적 성격도 차츰 탈색되기 시작한다. 이제 관람자에게 남는 것은 그것이 나의 신체일 수 도, 혹은 나와 가장 가까운 누군가의 신체일 수 도 있다는 생각이며, 따라서 그 이미지는 우리 신체의 솔직한 모습을 담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 솔직한 드러냄엔 어떠한 담론도 필요치 않은 인간 일반의 진실된 모습이 숨겨져 있다.

맨하탄으로의 여행자는 맥도날드 햄버거와 말보로 라이츠를 신물나도록 먹어댄다. 이러한 경험은 역시 햄버거를 먹는 과정을 클로즈-업시킨 비디오 작품으로 구체화된다. 그는 먹는 과정에 일어나는 햄버거의 물리적 변화 및 화학적 변화에 따른 신체의 소음들을 리얼함을 가장한 과장된 리얼함으로 담아낸다. 그 모습들은 적어도 우리가 상대방에게 보이면 안되는 것들, 최소한의 매너를 벗어난 것이라고 교육받아온 것이다. 관람자는 그 매너없음과 은폐되어야 할 이미지들의 노골적 까발림에 거북한 뒤틀림을 느낀다. 더욱 짖궂게도 그는 인-풋in-put의 모습 속에 아웃-풋out-put의 이미지마저도 연출해냄으로써 마침내 관람자의 내부에 참을 수 없는 역겨움을 끄집어내고야 만다. 그러나 관람자가 느낀 그 의도된 역겨움은 비단 대량생산 및 다국적 기업의 상징인 맥도날드와 말보로 라이츠라는 브랜드와 미국식 상품문화에 대한 비판적 감정에만 국한되지는 않는다. 역시 반복적 시간을 통해 그 정치적 역겨움은 차츰 꼬리를 내리고 그 다음 우리가 생각하게되는 문제는 처음의 그것과 다른 어떤 것, 먹고 배설하는 인간신체의 기본적 메카니즘과 관계된 어떤 것들이다.

오상길의 작품 읽기는 대략 이러하다. 그는 테크놀로지라는 대중매체의 주역을 선택하여 신체, 인종, 성, 대중문화, 권력의 담론을 명확하게 떠올리게 하는 구체적인 이미지들을 사용하고는 있으나, 움직이는 영상의 반복적 특성을 통해 처음에 일으킨 특수한 감정적 지각반응을 다시 한번 걸러내어 종국에는 그러한 현란한 담론의 빛깔마저도 퇴색시켜버리고 또 다른 차원의 문제,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에 가까운 어떤 것에로 관람자를 이끌어간다. 이 모두에서 오상길은 테크놀로지의 문화 속에 함몰된 인간존재의 불편한 모습들을 테크놀로지라는 차가운 기계의 눈을 통해 극명하게 드러내는 역설적 방법을 선택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그는 예술에 대한 막대한 애정을 가지고 있으되 맹목적으로 그 안과 밖의 모든 것을 사랑할 수 가 없는 차가운 눈의 소유자이다. 그는 순수한 예술적 태도에 어긋나는 일체의 정치적인 것을 지양한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 그가 충분히 정치적으로 보이는 이유는 진정 탈정치를 원하는 사람은 누구보다도 정치적이라는 세계를 잘 읽어내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차곡차곡 쌓이는 한 예술가의 삶의 흔적과 그 속에 생멸했던 진지한 사고의 과정을 작품을 통해 추적해 볼 수 있는 부류의 작가중 한 사람이며, 따라서 빈번했던 작품의 형식적 거듭나기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에서는 어떠한 흔들림도 없어 보이는 동일의 무게가 느껴진다. 이러한 거듭나기를 통해서 그는 인간 삶의 인위적인 구조자체에 어떤 문제를 제기하는 작품을 하고 있으며, 이는 문화에 대한 넘쳐나는 비판적 열정에서 기인한다. 그러나 그 비판적 열정은 순도 높은 예술적 표현의 결과물로 제시된 후에는 모든 정치적 껍질을 벗고 무언가 우리에게 본질적인 어떤 문제를 사고하고 성찰하게 한다. 이번 전시에서 느낄 수 있었던 충격적 이미지를 통한 심리적 변화의 과정 이후에 나타나는 탈 담론화 현상은 바로 예술적 표현의 탈 정치화를 위한 그의 욕망의 표명에 다름 아닌 듯 하다.(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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