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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현대미술 다시 읽기 III 세미나, 일본 미술평론가 미네무라도시아키

다시 읽고 다시 써야할 과제들

 

 

오상길(작가, 한국현대미술 다시 읽기 기획자)


 

 

글머리


한국현대미술에 관한 논의에 앞서 나는 몇 가지 전제를 먼저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대략 ‘현대미술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인식론적 자문과 함께 현대미술이 한국이라는 지역의 역사적 특수성 속에서 또 다른 문화적 가치를 생산할 수 있을 것인지,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어떤 방식으로 가능한 것인지 등의 문제와 관련된 생각들이다. 물론 이러한 고민은 현대미술이란 동시대 문화담론과 모순된, 고립적이고 배타적인 지역주의 문화담론에 빠질 위험을 안고 있다. 현대미술의 동시대성이 적어도 이러한 폐쇄적인 문화적 경계를 넘어 존재한다는 점에서, 다소 혼란스러운 전제로 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실 문화적 차이란 추구되기보다 드러나는 것이며, 따라서 이러한 의도적인 담론화가 안게 될 부담이 전혀 없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론 이런 global한 시대에도 집단간 혹은 개체간의 차이는 여전히 존중되어야 할 이유가 있으며, 세계는 하나로 통일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가치를 세계라는 커다란 범주로 묶고 함께 공유해 가야 할 필요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비록 현대미술이 서구 사회의 역사적 맥락에 대한 비판적 극복의 과정으로 출발했다 하더라도 오늘에 이르러 동시대 미술문화로서의 가치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다양한 문화권들 간의 이해와 소통을 바탕으로 하는 공존의 양상으로 발전해 가야하며, 공통의 과제에 대응해 가는 다원적 가치를 생산해 간다는 전제 역시 유효한 것이 되어야 한다. 다만, 이 시대의 미술문화 담론이 무엇이고, 그에 대응해 가는 방법론이 어떠한 것인가의 문제가 ‘지금 여기’의 인식과 ‘차이’와 ‘다름’의 가치를 가늠하는 열쇠가 되는 것이다.


한때 서구사회에서 유행을 이루었던 소위 제 3세계 미술에의 관심은 서구라는 프리즘을 통해 굴절된 시각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이것도 또 다른 관점에서는 제 3세계들의 주체적인 문화적 대응이 미흡했던 한계를 다시 확인하게 되는 일일뿐이다. 우리의 경우도 현대미술의 동시대적 문화의식과 방법론을 공유하는 일이 단순히 미술의 이념과 양식을 수용하는 것만으로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지난 50년간의 한국현대미술 역사와 경험을 통해 확인하게 된다. 사실 우리는 광주비엔날레를 비롯한 대규모 국제미술행사들을 적지 않게 유치하면서도 소위 제 3세계로서의 소외와 궁극적인 고민을 해결하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한국의 현대미술은 지난했던 역사의 틈바구니에서 소수 선배들의 열정에 의존해 꽃피워 왔으며, 오늘에 이르러 우리들에게 그 역사적 주체로서의 역할을 요구하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 자신도 이 역사의 한 귀퉁이에 서 있는 것이며, 때문에 우리 미술의 역사를 다시 읽고자 함은 지극히 당연한 역사의식에 다름 아닌 것이다. 말하자면 역사의 다시 읽기는 우리 자신의 현재와 내일을 열어가기 위한 소박하고 진지한 노력이자, 우리 자신의 역사적 위치와 한계를 명확하게 자각하는 일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오늘의 <70년대 단색조 회화의 비평적 재조명>의 노력 역시 역사적 공과나 그에 관한 섣부른 평가가 아니라, 오늘의 문제를 역사로부터 발견하고 현재를 다지는 일을 위해 준비되고 있다. 지극히 상식적인 말이지만 역사는 현재적 가치를 통해서 재현되는 것이며, 오늘의 우리도 언젠가 다가설 다음 사람들의 시각에 의해 또 다시 재현되지 않겠는가?

 

쟁점 1: 미술사인가, 운동사인가?


흔히 한국현대미술은 한국전쟁 후의 서구미술 영향과 그에 따른 화단의 일련의 변화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물론 이 기점의 문제가 오늘의 쟁점은 아니다. 다만 우리 현대미술을 바라보고 담론화해 가는 현재까지의 비평적 시각들이 한국현대미술이라는 가치를 생산하기에 적절한 것이냐의 의문은 가져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에게 있어 ‘현대미술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규정되어야 할 것인지’에 관한 문제제기를 하는 것으로 오늘 발제의 쟁점에 다가서고자 한다.


한국전쟁 후, 그러니까 서구 앵포르멜 회화 양식의 집단적 수용이 이루어졌던 1950년대 후반을 한국현대미술의 기점으로 설정하고 있는 입장들은 대략 ‘반국전 선언’으로 유명한 1956년의 4인전과 현대미협 3회전부터 선보이기 시작한 앵포르멜 풍의 비정형회화 집단의 출현을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1) 사실 작가들의 활동은 현장에서 이루어지며 그것의 역사적 의미는 비평적 담론에 의해 다루어지므로, 반국전 선언과 비정형회화의 집단적 운동을 한국현대미술의 ‘현대성’의 담론적 근거로 보아야 할 것인가의 문제는 어디까지나 비평적 문제이다. 따라서 한국현대미술의 기점 문제는 반국전 선언이나 비정형회화의 집단적 운동이라는 현장의 사건들을 ‘현대’의 기점으로 규정하기에 앞서, 이 사건들을 둘러싼 상황적이고 역사적인 맥락과 아울러 작품에 관한 미학적인 분석과 미술에 있어서의 ‘현대성’에 관한 다양하고 심도 있는 비평적 검증을 통해 접근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실제 한국현대미술의 기점 설정에 관한 많은 이론가들의 텍스트들을 통해, 자신들이 설정하고 있는 한국현대미술의 기점에 관한 충분한 논거를 찾기 어렵다는 점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예컨대 반국전 선언은 ‘선전’을 물려받은 ‘국전’의 체제에 대한 반발이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비정형회화의 집단적 운동은 전후의 폐허 위에서 진행된 새로운 세대들의 열기를 품고 있었다는 점에서 각각 화단의 운동사적 관점에서 비중 있게 다루어져야 할 대목이며, 이것이 곧 한국미술에 있어서의 ‘현대성’의 획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현장의 운동성과 미술에 있어서의 현대적 가치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며, 미술의 가치는 어디까지나 미술의 문제로 다루어져야 한다는 말이다. 서구미술의 이념과 양식을 수용한다고 해서 서구미술이 지닌 비판의 역사적 대상과 방법론까지 고스란히 유효한 것이 아니라면, 이 많은 이론가들의 한국현대미술의 기점 설정에는 정작 가장 중요한 미술에 있어서의 ‘현대성’에 관한 구체적인 연구와 논의들이 빠져 있다는 말이 되지 않는가?

 

쟁점 2: 다시 읽는 70년대


1950년대 후반부터 80년대까지의 한국현대미술에 관한 그간의 진술들은 어떤 측면에서 작가들의 집단적 운동이라는 특수한 흐름에 의존해 있고, 그 중 70년대 단색조 평면회화는 지금껏 한국현대미술 맥락에 있어 가장 화려한 조명을 받아온 미술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시대의 작가들은 당시까지의 한국현대미술 운동에 비해 광범위한 체제를 구축했던 집단적 운동을 전개했으며, 한국미술의 정체성 자각과 국제무대로의 진출에 관한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타진하기도 했다. 때문에 이 미술에 대한 비평적 담론 역시 상대적으로 활발하게 개진되었고, 한국현대미술사에 관한 다양한 논의의 단서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상대적으로 큰 비중을 지니고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비평적 다시 읽기의 맥락에서 보는 70년대 단색조 평면회화는 당대의 운동과 현재적 해석의 사이의 시간적 간격과 역사적 조망이라는 관점에 따른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으므로, 이러한 차이가 소모적 논쟁보다 생산적 담론으로 발전해 갈 수 있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할 필요가 있다. 문제의 핵심은 과거의 운동이 이루어지던 시점과 현재 사이의 역사적 거리를 어떻게 설정하고 이해할 것인가에 있으며, 이러한 비평적 담론화의 노력이 역사적 가치의 중립성을 확보하기 위한 방법적 전제를 얼마나 견실하게 구축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을 것이다.

 

 

1. 미술의 한국적 가치와 한국적인 것의 가치-평면성

모두에 밝혔듯 ‘현대미술이란 무엇’이며, 그와 관련한 한국적 가치는 어떻게 천착될 수 있는 것인지에 관한 근본적인 자문은 현대미술 맥락을 수용한 시점으로부터 현재까지 여전히 가장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사실 이러한 자각이 집단적으로 쟁점화 되었던 시기가 70년대 중반이었고, 그 논의가 단색조 평면회화, 특히 백색 모노톤 회화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70년대 단색조 회화미술이 역사적으로도 여러 가지 중요한 쟁점을 안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컨대 당시 작가들과 비평가들에 의해 제기되었던 회화의 평면성 문제와 ‘한국적’ 가치 혹은 방법론에 관한 담론들은 최소한 미술의 존재방식과 미학적 이슈에 관한 집단적 자각의 양상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지적은 당시의 논의가 이미 ‘현대미술이란 무엇’이며, 소위 ‘한국적 가치가 어떤 것’인지의 근본적인 문제 의식에 도달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사실 이러한 자각은 앞서 여러 차례 지적했듯 역사적 비판과 그에 관한 문화적 대응의식으로부터 비롯되어야 하는 것이며, ‘현대미술’의 몇 가지 원리를 공유하고 ‘한국적’ 특성이라고 할 수 있는 단서를 제시함으로써 간단히 획득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이 70년대 미술을 둘러싼 그간의 ‘모더니즘’ 운운하는 비평적 논의
2)를 근본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이다.


미술과 비평에 관한 제 3세계 문화권 속에서의 어려움은 ‘현대미술’이 단순히 그 이념과 방법론을 선택하고 수용하는 것으로 공유되는 것이 아니라는데 있다.3) 작품을 제작하고 그에 관한 비평적 논의를 개진하는 일은 근본적으로 ‘현대미술’을 공부하고 이해하는 일과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즉 현대미술은 이 시대의 ‘미술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라는 근본적인 자문의 형태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이며, 현재까지 나타나 온 일체의 미술들은 수용되거나 공유될 성질의 것이 아니므로, 결국 새로운 대안적 미술과 담론만이 유효할 뿐이라는 말이다. 예컨대, 왜 ‘평면성’의 문제가 70년대 작가들에게 갑자기 그토록 중요한 것으로 받아들여졌으며, 과연 회화의 ‘평면성’이란 화면에서 단순히 재현적 이미지를 소거하거나 혹은 아무 것도 그리지 않는 방식으로 획득될 수 있는, 화면 구조상의 문제였던 것인가 라는 의문에 값하는 어떤 단서도 찾을 수 없다는 당혹스러움이 있다.

 

서구미술 맥락에 있어서의 평면성은 그들의 전통적인 재현회화의 역사를 비판적으로 극복하기 위해, 회화의 본질을 찾아 벽화의 덧칠을 벗겨내듯(그린버그) 해체해 가는 과정에서 대두된 개념이었다. 따라서 이들에게 있어서 재현적 이미지의 제거나 구조적인 평면성의 확보는 회화만의 고유한 Identity를 통해 회화가 스스로를 규정self-definition하기 위한 명확한 방법론의 하나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회화의 현대적인 존재방식이었다고 할 수 있다. 즉 이들에게 있어서의 평면이란 전통회화의 두터운 덧칠을 벗겨내고 최후에 도달한 결론 중의 하나였으며, 따라서 근본적으로 과정적 성격을 지니는, 스타일화 될 수 없는 개념적 이슈인 것이다. 사실 미술 이데올로기들은 어떤 쟁점으로부터 전방위적으로 파생되어 나가는 복잡한 양상을 띨 수밖에 없고, 설사 어떤 쟁점을 둘러싼 대응적 측면이 있다하더라도 본질적으로 부분적인 비평적 이슈에 지나지 않는다. 예컨대 그린버그의 세잔의 그림 읽기로부터 확인되는 논리와 실제 세잔의 그림 사이에는 적지 않은 차이가 있고, 이 틈새로 우리는 그린버그 식 세잔 읽기의 한계를 넘어설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

때문에 이러한 쟁점들로부터 현대미술의 쟁점과 이슈를 살펴보고, 그 맥락을 이해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지만, 서구미술의 역사적 비판과정에서 대두된 ‘평면성’ 등의 쟁점과 이슈를 동시대 미술 이념과 양식의 문제로 단순하게 해석하고 수용하는 일은 언제나 일정한 한계를 지니게 마련이다.3) 예컨대 회화의 평면성은 회화의 궁극적 본질을 향한 전통적 가치의 해체라는 과정적 성격을 띤 당대의 쟁점이자 이슈였을 뿐으로, 이 평면성을 실재화 하는 일에는 모리스 루이스의 경우와 같은 웃지 못할 해프닝이 동반되었던 것이다. 너무도 잘 알려져 있듯 이 문제는 후기색면추상을 지나 미니멀 아트에 이르러 전혀 뜻밖의 쟁점을 만드는 아이러니를 낳았다. 그런데 과연 이 평면성의 문제가 역사적 해체의 대상을 공유하고 있지 않은 한국의 작가들에게 있어 강령처럼 작용했던 이유는 무엇이며, 그로부터 생산된 일련의 미술양식들은 어떻게 정리되어야 하는 것일까?

 

 

2. 미술의 한국적 가치와 한국적인 것의 가치-인식론

또한 70년대 작가들과 비평가들의 한국적 가치 자각에 관한 다음과 같은 질문, 즉 이러한 한국적 가치 자각의 동기가 무엇이었고, 그 인식론적 토대와 방법론들은 어디에서 왔으며, 그에 관한 비판적 검증은 적절하게 이루어졌는가에 관하여서도 쉽게 납득되지 않는 국면들을 의식하게 된다. 많은 작가들과 심지어 비평가들까지 동양적 사유와 민족적 감성으로서의 색조를 제시하고 있으나 정작 가장 중요한 의문, 예컨대 그 동양사상의 실체가 무엇이며, 그것이 어떤 인식론적 토대 위에서 현재적 실체로 규명될 수 있다는 것인지, 또 그것이 어떤 측면에서 현대미술의 방법론으로 소용될 수 있다는 것인지에 관한 어떤 구체적 언급도 찾을 수 없다는 점은 매우 의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흔히 ‘無의 思想’이나 ‘無爲自然’을 논하지만 이러한 세계 속에서도 현대미술은 가능한 것인가? ‘無’란 세계와 존재 그리고 삶의 태도와 심지어 자기 존재와 의식 자체에 이르기까지의 일체를 회의하는 ‘覺’의 세계이자 ‘法’의 세계이므로 모든 것이 ‘空’하다는 깨달음 위에 서있는 사상이며, 삶의 실천적 태도인 것이다. 때문에 만일 누군가 부처님의 깨달음이나 노․장자의 인식론을 통달하여 ‘지금 여기의’ 새로운 사상을 펼치고, 그러한 맥락에서 현대미술의 맥락을 새롭게 구축한다면, 그것은 미술의 문제가 아니라 그야말로 인류 역사상의 거대한 패러다임의 전환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세계의 일체가 ‘無(헛것)’에 지나지 않음을 깨달았던 뛰어난 선승들의 자각이나 ‘무위자연’하려 했던 노․장자의 인식론(별첨부록 참조)이 수 천년을 가로질러 오늘 날 그저 누군가 선택함으로써 취해질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되지 않는 이상, 이러한 주장은 스스로 규명해야할 논리로 되돌아 갈 뿐이다.

우리보다 앞서 미술에 있어서의 일본적 가치에 눈떴던 모노하의 담론들은 실로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한다. 1969년 이우환은 「존재와 無를 초월하여-關根伸夫論」과 「世界와 構造-對象의 互解이후」를 발표함으로써 트릭적인 요소를 기본으로 하는 세키네 노부오關根伸夫의 「位相-大地」를 “있는 그대로의 세계의 신선함이라고도 할 수 있는 감동적인 표현을 보여주는 하나의 물체로 변화시켰다”고 봄으로써 모노하 발단의 실마리를 제공한 바 있다.5) 이어 이우환은 「발언하는 신인들; 비예술의 지평에서-만남을 찾아서」6)등을 연이어 발표했고, 스가 기시오管 木志雄의 「상태를 초월하여 존재하다」와 「사물이 열리는 세계」7)등의 좌담회가 개최되는 등 모노하를 둘러싼 담론들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일본 미술계에 있어서의 모노하의 등장은 무엇보다도 서구화 백년 동안 서구의 모방이나 아류로써 남겨진 「繪畵․彫刻」등 서구화 백년의 추종과 모방에 시종일관해 온 미술들을 어떤 식으로든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게 했다
8)는 점에서 커다란 획을 긋는 계기가 되었다. 말하자면 모노하는 현대미술에 있어서의 일본적 가치, 즉 일본적 발상과 사유의 방법론에 입각한 세계와 사물에 관한 인식이라는 독특한 가치를 천착해 가는 길을 열고자 하는 중요한 계기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일본의 모노하는 서구의 미술 양식이나 이념을 수용함으로써 공유하려 해 왔던 아류로서의 미술맥락으로부터 ‘현대미술’의 일본적 존재방식과 미술의 일본적 가치라는 인식론적 자각에 이르는 중요한 전환의 계기를 만들었다고 생각된다. 물론 모노하 역시 그 나름의 역사적 한계와 그에 따르는 평가를 받아 왔지만, 그로 인한 다양한 문제제기와 담론의 활성화는 일본현대미술의 비평적 두께를 한층 두텁게 하고 있는 것이며, 오늘 우리에게 더 배우고 깨우쳐야 하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3. 미술의 한국적 가치와 한국적인 것의 가치-백색 회화
한편 한국의 백색 회화-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지는 않지만 편의상 이렇게 부른다면-는 1972년 앙데팡당전이 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전시를 관람했던 일본 동경화랑의 야마모토 사장은 몇 점의 흰색 회화에서 조선의 백자를 연상시키는 독특한 색조를 보았고, 이것이 훗날 1975년 동경화랑에서 열렸던 ‘한국․5인의 작가 다섯 가지 흰색전’의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9) 이동엽, 서승원, 박서보, 허황, 권영우가 참가한 이 전시의 캐달로그에서 中原佑介는 “…1973년 봄. 처음으로 서울을 방문하고 몇몇 화가들의 작품을 보았을 때, 나는 中間色을 사용하면서 동시에 화면이 지극히 델리케이트하게 마무리져 있는 繪畵가 눈에 띤다는 印象을 받았다. 中間色을 사용한 델리케이트한 畵面이라는 인상은 그후 두 차례에 걸쳐 한국에 들러 화가들의 아틀리에를 방문10)하는 동안, 그것이 단순히 造形 기교가 아니라, 그 어떤 繪畵 사상의 表明이라고 해야 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품기에 이르렀다. 물론 한국의 모든 화가들이 그것을 분명하게 느끼게 하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비록 몇 사람이기는 하나 그러한 特質을 현저하게 보여 주고 있다는 사실은, 그것이 개인 감수성에 의한 것이 아니라 개인을 뛰어넘은 그 무엇인가에 의거하고 있다고 해야할 것이다. 이번 전람회의 다섯 화가들은 그 의도나 방법에 있어 동일하다고는 할 수 없겠으나 그들의 작품에는 개인적인 差를 넘어선 공통성이 느껴진다. 그리고 그 공통점은 「白色」이 작품을 결정짓고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11)라고 밝히고 있다.


이 내용들과 이후의 정황들을 통해 대략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추론을 해볼 수 있는데, 그것은 첫째 적어도 ‘백색’의 개념은 동경화랑에서의 《다섯 가지의 흰색전; 이하 약칭》을 통해 공식적으로는 처음 제시된 개념이라는 것과 둘째, 이러한 소수 한국 작가들의 특성이 中原佑介나 山本孝 등 일본 미술계 인사들에 의해 발견된 것이라는 점, 셋째 이들에게 이러한 특성이 “개인적 감수성에 의한 것이 아니라 개인을 뛰어넘은 그 무엇인가에 의거하고 있다”고 보여졌다는 것 그리고 넷째, 백색이라는 개념이 서로 다른 의도와 방법을 추구하던 다섯 작가를 묶는 하나의 공통된 특성이었으며, 이 전시가 그에 착안되고 있다는 것 등이다.


그러나 1975년 이후 한국현대미술계의 상황은 급격히 ‘백색’의 편평한 회화로 옮겨갔고, 급기야 집단화의 양상을 띠며 몇몇 소수 작가의 특성이 아니라 집단적 특성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1975년은 AG가 해체되고 서울현대미술제와 에꼴 드 서울이 창립되는 해이며, 소위 오브제 미술을 표방하던 다수의 작가들이 갑자기 ‘백색’의 평면회화를 선보인 해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것은 작가들이 오브제라는 매체를 떠나 회화를 제작하기 시작했다는 식으로 간단히 언급하고 지나칠 얘기가 아니다. ‘오브제에서 평면에로’의 변화는 단순한 매체의 선택문제가 아니라 현대미술의 두 얼굴이라고 불리는 아방가르디즘과 모더니즘의 좁혀지지 않는 두 국면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에서 당시 한국미술계의 현대미술에 관한 인식의 단면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이 문제에 관한 현재까지의 비평적 입장들은 1975년을 기점으로 집단화하여 상당한 기간에 걸쳐 한 시대를 풍미한 미술의 담론 어디에서도, 많은 작가들이 그것도 집단적으로 현대미술의 양극 사이를 무시로 넘나드는 현상을 납득할 만한 어떤 근거나 논의조차도 찾아 볼 수 없는데도, 이러한 집단적 전환의 동기가 무엇이었는지에 관한 검증도 없이 한 시대의 미술현상을 단순하게 규정해 왔다.


70년대 백색 회화에로의 집단화 현상은 바로 이러한 한계 위에서의 양상이었으며, “서로 다른 의도와 방법을 추구하던 다섯 작가를 묶는 하나의 공통된 특성”으로서의 백색을 다수의 작가들이 공유하게 되는 현상을 뒷받침할 만한 미학적인 담론을 찾아 볼 수 없다는 점에서, 집단으로써의 힘을 구축하는 대신 그 특성을 희석시켰을 뿐만 아니라, 일본 미술계 소수 인사들의 미적 취향을 한국의 70년대 미술 전반에 깊게 반영하는 결과를 만들었다는 비판도 면할 수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런 한계는 집단화의 역기능, 즉 개별적인 작가단위의 미학과 방법론의 차별화에 실패함으로써 70년대 미술의 미시적 가치들을 방치하는 결과를 만들었다. 다시 말해서 그 운동의 양상에 비해 구체적 미술현상과 작품들에 관한 분석과 연구는 매우 미진했으며, 중요한 쟁점들에 관한 비평적인 심화라는 담론적 가치보다 좋은 작품이라는 권위적인 전근대적 우상주의와 상업주의에 결탁된 세련된 형식이라는 반동적 가치에 빠져듦으로써 더 이상의 진전을 어렵게 하는 일정한 한계를 만들어 왔다고 보는 것이다.

 

 

4. 미술의 한국적 가치와 한국적인 것의 가치-방법론의 고찰
한편 우리는 희고 편평하며, 아무 것도 재현하고 있지 않은 모노톤의 화면들로부터 미니멀 아트와 닮은 일련의 양식적 특성을 보게 된다. 그리고 이 때문에 이 그림들이 과연 현대미술의 어느 맥락에 위치할 수 있는 것인지 고민하게 된다. 사실 70년대 단색조 회화의 편평한 화면은 몇몇 작가에게 있어 구조적인 문제로 연구되기도 했으나, 회화로부터 일체의 재현적 이미지와 음영의 효과 그리고 공간적 환영을 소거하려는 환원의 전략은, 어디까지나 회화가 오직 회화 고유의 본질을 스스로 규명하려는 전제 속에서 유효한 것이었으므로, 평면성의 논리가 그림으로부터 모든 이미지를 제거-탈이미지화 해야 한다12)거나, 나아가 회화에 있어 물성과 질료적 차원의 문제로 발전한다는 논리는 명백한 비약이라는 점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즉, 그림으로부터 액틀을 벗겨냄으로써 캔버스 옆면의 중요성을 대두시킨 것은 새로운 그림들의 개념과 그 존재방식을 제시하는 일종의 코드code이자 어법idiom의 문제였으며, 궁극적으로는 이미 너무나 유명한 모더니스트들과 미니멀리스트들 사이의 논쟁, 예술작품의 관념적인 형이상학적 이원론과 ‘현존’의 대상성이라는 첨예한 대립과 맞물려 있다.


즉 일체의 환영과 문학적 서사를 소거하는 일과 ‘아무 것도 그리지 않는’ 일은 근본적으로 다른 문제이며, 나아가 이 첨예한 쟁점이 한 화면 안에 공존될 수 있는 문제인 것인지 재고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70년대 단색조 회화들이 액틀을 벗고 옆면의 중요성을 제시하고 있다고는 하나, 그것이 캔버스라는 존재에 관한 자기 지시적 개념이나 두께를 가진 물체로서의 개념을 띠고 있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회화의 표면과 관련한-대체로 편평하지만, 제거해야 할 환영 대신 미니멀리즘이 제거하려 했던 비순수한 관념들, 예컨대 한국적 색조라든가 관념적 행위, 혹은 촉각적인 흔적들이나 질료적 차원의 물성 개념 또는 행위의 장소로 대체되어 있으며, 흔히 등장하는 물성의 개념 역시 궁극적으로 미니멀 맥락의 대상성object hood과 전혀 다른 맥락의 문제들인 것이다. 이러한 특성들은 소위 말하는 모더니스트 회화나 미니멀 아트의 서로 다른 환원의 전략적 맥락, 이를테면 각각의 서로 다른 ‘현대성’ 획득의 방법론과 관련되어 있으므로, 이 역시 쉽게 얼버무리고 말 문제가 아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70년대 단색조 회화의 양식적 특성과 담론들은 동시대 미술맥락의 핵심적인 쟁점들, 예컨대 ‘분석적 환원’이니 ‘모더니즘’이니 ‘중성적 구조’니 ‘관계성’이니 하는 서구미술과 일본 모노하의 인식론적 개념들과 차별성을 구축하지 못한 채 불투명한 혼선을 빚고 있다는 점도 비평적으로는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5. 미술의 한국적 가치와 한국적인 것의 가치-비평적 과제
사실 오늘의 시점에서 보는 이러한 비평적 한계는 당시 각 작가들이 추구하던 문제들의 핵심을 빗겨가게 했고, 결국 개체들의 특성마저 ‘백색’을 특징으로 하는 70년대 단색조 회화의 집단논리 속에 함몰되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된다고 생각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소위 집단화 현상은 설사 일부 작가들이 한국적 아이덴티티에의 천착이라는 욕구를 가졌다 하더라도, 정작 미술에 관한 논의보다 일본 무대로의 진출이나 화단의 이니셔티브와 깊이 관련된 일종의 운동논리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70년대 미술의 많은 가능성 중의 하나의 예에 불과하지만, 당시의 비평적 쟁점이 ‘평면성’이나 ‘백색’의 문제보다 中原佑介가 지적하고 있는 “단순히 造形 기교가 아닌…” “그 어떤 繪畵 사상의 表明이라고 해야 할” 각 작가들의 개별적인 미학과 방법론에 집중되었다면, 70년대 미술의 양상은 집단의 함정을 피해 새로운 국면을 만들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측면에서도 70년대 미술은 집단의 논리 속에 함몰된 개별적인 미학의 쟁점들을 남기고 있으며, ‘다시 읽어야 할’ 많은 과제를 남기고 있다. 즉 70년대 미술은 단색조 평면회화라는 집단적 틀로 정리되거나 나아가 규정할 문제가 아니라 그 틀을 헤치고 들어가 당시 미학의 실체가 어떤 것이었고, 그것이 갖는 한국현대미술 맥락에서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밝혀 가는, 각론적이고 미시적인 연구를 통해 오늘의 가치로 재생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지점에 이르러 나는 80년대 중반에 읽었던 한 텍스트13)를 떠올리게 된다. 김복영은 이 텍스트에서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분류를 통해 한국현대미술의 양상을 세분화된 몇 가지의 틀로 구체화하려 했다. 물론 김복영의 분류와 관점에는 적지 않은 논란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미술 읽기와 유형화의 시도는 적어도 한국현대미술의 양상들을 각론적인 관점에서 분류하고 주관적인 비평적 체계화를 시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현재까지의 비평담론 중 눈길을 끈다. 다분히 실험적인 이 비평적 시도는 70년대 단색조 회화 세대의 집단화에 함몰된 개체적인 미학적 성과를 구체적으로 분석하려는 드문 시도였으며, 부분적으로는 충분히 심화시켜갈 만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특히 김복영은 이 유형화 분석의 시도를 통해 당시 작가들이 보이고 있었던 주도적 경향을 도출해 내고 있는 바, 이것을 ‘한국적 특성’의 하나로 보고 있다. 김복영이 유형화하고 있는 분류 중 특히 ‘긋고 긁고 찍는’ 기법의 논리화는 동시대 서구미술에서 발견할 수 없는 특성이라고 보여지므로 일단 어느 정도 수긍이 가는 점이다.


그러나 나는 이와 더불어 독특한 촉각적 화면의 구축과 여백 그리고 침투라는 특수한 평면인식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동시대 서구의 미술맥락이 다분히 개념적인 성향으로 치닫고 있었던 사실을 감안할 때 매우 흥미로운 양상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모더니즘 회화 원리와 전혀 다른 평면회화에 도달하고 있는 일련의 작가들, 예컨대 권영우, 박서보, 하종현, 최명영, 정상화, 정창섭, 이동엽, 윤형근 등등 많은 작가들의 그림들은 각각 다른 맥락에서 읽혀야 할 작업들이지만, 공통적으로 캔버스의 표면을 넘어 화면 속으로 침투하고 확장시켜 가는 독특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즉 이들의 캔버스는 긋고 쌓고 스며드는 층으로서의 독특한 화면이자, 몸의 행위를 통해 무언가 확인하려는 장소로서의 성격을 갖는다. 따라서 이들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평면은 단순한 표면의 문제도 아니요, 회화의 평면성에 관한 원리에의 천착도 아니었다. 또한 촉각적이란 개념 역시 표면의 요철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그리고 보는 일에 있어서의 몸의 개입이라는 중요한 특성을 일컫는다. 사실 이런 특성은 전후 신세대들의 비정형회화들 역시 보다 두터운 질료의 사용으로 인한 두텁고 강렬한 마띠에르를 주조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추상표현주의나 앵포르멜 회화와 다른 특성을 보이고 있고, 또 70년대 미술에 대한 대안적 성격에서 출발했던 80년대 중반 이후의 작가군들의 작업에서도 이러한 촉각적 특성이 두드러지게 발견된다는 측면에서, 매우 흥미로운 연구과제가 아닐 수 없다.


이런 측면에서 이 독특한 양상들을 ‘한국적 특성’의 하나로 본다하더라도 크게 무리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특성들이 한국미술의 현대적 가치라는 본질적인 자각의 인식론적 틀을 구축하지 못한 비평적 상황 속에서는 단편적인 예로서 표류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때문에 나는 서구 모더니즘 회화의 역사적 맥락을 떠나 있을 수밖에 없었던 이들로선, 재현적 이미지의 해체와 평면성의 천착이 ‘선택’될 수밖에 없는 문제였으며, 따라서 그 텅 빈 편평한 캔버스를 메울 ‘그 무엇’이 필요했을 것이라는 가정을 유추해 볼 수 있을 뿐이다. 이를테면 서구의 평면회화가 덧칠을 벗겨내고 마침내 바닥의 빈 표면을 찾았다면, 이들은 그 빈 화면으로부터 시작하여 독특한 지층을 구축할 수 있었다는 식의 귀결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이들의 회화에 담겨있는 미술 읽기의 가능성을 충분히 실현할 수 없는 것이며, 때문에 한국미술 전반에 나타나는 단편적 특성 이상의 것으로 정의하기도 어려운 것이다. 바로 이런 지점에서도 한국미술로서의 문화적 가치가 각 작가 단위 혹은 작품 단위의 각론적이고 미시적인 분석과 연구를 통해 천착되어야 할 당위성을 확인하게 된다.

 

 

글 꼬리


필자는 이런 맥락에서 70년대 미술들에 관한 다음과 같은 엇갈린 해석을 되돌아보게 된다. 그 중 하나는 한국의 예술가들이 서구미술의 자극과 영향을 체계적으로 수용하지 못함으로써 모더니즘과 아방가르디즘에서 이탈한 유사 양식의 미술들을 생산해 왔으며, 때문에 구조적인 문화적 종속과 아류로서의 한계를 만들어 왔다는 비판적 관점이다. 그러나 이 논리는 ‘문화란 일방적인 영향에 의해 동화될 수 있는 것인가’라는 의문과, ‘서구미술의 역사적 맥락이 부재한 곳에서 서구미술 맥락의 체계적인 수용이란 진정 가능한 것인가’라는 반문에 부딪치게 된다. 역설적이지만, 이 간단한 반문을 통해 나는 오히려 그러한 관점이야말로 문화적 추종의 위험을 안고 있는 모순된 시각이며, 이러한 입장들이야말로 적극적인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라는 다소 아이러니한 결론을 얻게 된다.


나에게 있어 한국의 현대미술은 현재까지도 ‘현상’으로만 존재해 온, 그 자체가 문화적 수용과 절충의 과정을 보여주는 살아있는 텍스트이며, 이를 통해 다시 보고 읽어내야 할 가치야말로 이 시대의 생산적 담론을 가능하게 하는 중요한 단서인 것이다. 나는 80년대 중반 김복영의 비평적 시도에서 그 작은 단서를 보았으며, 적어도 이러한 분석적 고찰의 시도가 아직 유효한 것임을 확인하게 된다. 그리고 그 불씨를 현재적 관점으로 되살려내고 더욱 타오르게 하는 일이야말로 지금까지 한국현대미술 맥락에 가장 심각하게 결핍되어 있는 비평적 담론화의 실천적 노력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미술현상은 역사의 한 지점에서 비롯된 사건이지만, ‘현대성’은 그것을 다시 읽고 오늘의 가치로 재생산해내는 비판적 담론에 의해 구축되는 것이므로, 오늘의 비평이 70년대 미술의 우상적 가치를 비호하거나 방치하는 것이야말로 70년대 미술의 참다운 가치를 역사 속에 파묻는 과오를 범하게 되는 것이라는 역설을 확인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오늘 그 작가들은 비록 노쇠했지만 비평적 담론의 새로운 힘은 언제나 현재의 불로 타 올라야 하지 않겠는가? 

 

 

 

각주

1) 한국 추상미술 20년의 동향(이경성), 뜨거운 추상의 도입과 전개(이구열), 현대미술의 위상(신항섭), 한국의 현대미술(서성록, 문예출판사, 1994), 한국현대미술사(오광수, 열화당, 1979), 한국 모더니즘 미술연구(윤진섭, 재원, 2000), 한국추상미술 40년(오광수, 재원 1997) 등등 수많은 미술평론가들과 미술사가들이 이에 동조하고 있다.

2) 70년대 한국미술의 한 단면, 오광수, 「한국미술의 모더니즘: 1970-1979」 展 도록 서문 등 많은 비평가들이 70년대 미술을 ‘한국적 모더니즘’ 미술로 정의하고 있다.

3) 이일은 <회화의 새로운 부상과 기상도 ’76년 -오늘의 한국미술을 생각하면서, 공간 76.9>이라는 기고를 통해 이 한계를 지적하고 있으나, “오늘의 미술이 원천적으로 스스로를 재규정하려는 끈질긴 추구의 표명이요, 나아가서는 예술과의 대결이라면, 우리의 현대미술도 우리라는 꼭지를 뺀 현대미술 그 자체와 대결해야 마땅한 것”이라고 제시함으로써, 서구 현대미술의 역사적 맥락의 수용에 따른 매우 중요한 전제를 간단하게 건너뛰고 있다. 그러나 같은 글에서 74년 이후의 한국미술의 기류를 “이념적 차원에서, 또는 기본적인 발상에 있어, 일련의 문제시되는 작가들의 작품에서 찾아 볼 수 있는 가장 핵심적인 테마는 주체와 객체의 합일이라는 문제로 요약시킬 수 있다”고 적시함으로써 “우리라는 꼭지를 뺀 현대미술 그 자체와 대결해야 마땅”하다는 자신의 논지에 스스로 모순되게 하고 있다. 이어 이일은 우리의 주체와 객체의 합일이란 서구식의 對개념과 다른 “「선험적」으로 존재하며, 「개념작용을 통하지 않는 객체에의 통로」(메를로 퐁티)를 통해 객체와 상응하며 그와 더불어 주체는 <自己>를 현재화한다.”고 밝히고 있다. 이 글을 통해서 이일이 말하는 “선험적으로 존재한다”는 인식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파악하기 어렵고, “개념작용을 통하지 않는 객체에의 통로를 통해 객체와 상응하며 그와 더불어 주체는 <自己>를 현재화한다”는 것이 어떻게 우리의 “주체와 객체의 합일”이라는 사상을 실재화 한다는 말인지, 또 정말 그런 “주체와 객체의 합일”이라는 사상이 우리의 현재적 인식론인 것인지 역시 의문이다. 만일 이일이 말하는 “우리의 주체와 객체의 합일”이 소위 동양사상에 근거하는 개념이라면 이것이 어떻게 해서 메를로 퐁티의 현상학적 맥락에서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 수 천년 전의 역사적 상황에 대응하는 뛰어난 성현들의 철학을 바탕으로 하는 동양사상이 가로놓인 역사의 질곡을 뛰어넘어 현재의 우리 의식과 삶의 태도를 대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이러한 주장은 적어도 명철한 철학적 사유의 과정을 건너 뛴, 다분히 피상적이고 관념적인 思考로 보이며, 심지어 오늘 날 凡人들에게 물려진 유산인 것처럼 소유권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하는 의구심마저 갖게 한다. 그가 스스로 말하는 것처럼 현대미술이 “스스로를 재규정하려는 추구의 표명임”을 신봉했다면, 누구보다 스스로 자신의 논리를 통해 앞서 언급한 내용들을 명쾌하게 규명했어야만 하는 것이 아닐까? 비록 이것이 한국미술에 있어서의 동시대성 획득과 참여라는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고민의 하나라 하더라도, 스스로도 입증할 수 없는 이 주장은 조상들의 거창하고 난해한 담론으로 포장된 논리적 허세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된다.

4) 한국현대미술 다시 읽기 III, 「이동엽과의 대담」 중에서; 2002.8.27 문정동 작업실

이동엽: 창작이라는 것이 일종의 저항의 정신인데 그게 부족했어요. 획일화되었던 것이 손쉬웠다 라는 생각도 들어요. 그 이유는 말씀하신 것처럼 시대의 대응논리로서 의지가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모더니스트로서의 자의식에 급급한 나머지 서구 환원주의에 편승하면 손쉬웠지 않았나 하는 거죠. 말하자면 평면을 하면 모더니스트가 되고 마치 자격증이 부여되는…. 그런 미학적 관점에서 벗어나면 덜 모더니스트로 비평되고, 비평에 더 큰 문제가 있어요.

5) 現代美術 逸脫史/1945-1985, 第三章 「もの派」 p. 120-122, 千葉成夫, 晶文社, 1987

1970年-物質과 知覺,「현대미술에 대한 물음, 물질의 탐구와 모노하를 찾아서 」

岡田 潔, 1995 요미우리 신문사,

“이우환은《위상-대지》에 凹凸의 플러스․마이너스․제로 관계를 독해하고 대지 자체의 增減은 없지만 요철구조를 통하여 대지의 존재가 현재화된다고 생각했다. 그가 배운 동양사상에 의하면 인간의 눈에는 생성소멸이 비치지만 우주 자체는 增加減少가 없다. 또 플러스․마이너스 같은 이항대립 관계는 인간에 의해 설정된 것이고 우주 안에서는 그 모두가 역전될 수 있는 상대적 관계일 뿐이다. 이에 비하여 서양근대철학은 인간의 인식개념과 실재대상의 일치를 전제로 한다. 그 철학은 인간의 개념을 현실화하는 기술․생산 사회를 만들게 되고 그것의 연장선상에서 테크놀로지에 의한 자기 증식적 대상은 사람들의 관념과 분리된다. 이처럼 현대적 존재이유를 갖는 미술은 세계에 인간이 무엇인가를 더하는 것이 아니라 리얼리티인 세계에 사람들의 지각을 유도하는 매체를 설치하자는 것이다. 대략 이런 생각들을 전개시켜 가는 이우환의 미술이론은 유럽과 미국의 근․현대미술과 그 평론을 깎아 내리기보다는 오히려 미술을 포함한 폭넓은 문맥에서 현대미술을 논한 것이다.”

6) 美術手帖, 1970년 2월 호 특집

7) 참석자: 關根伸夫Sekine Nobuo, 이우환, 吉田克朗Yoshida Katsuro, 本田眞吾Honda Shingo, 成田克彦Katsuro Narita, 小淸水漸Susumu Komizu

8) 모노하, 千葉成夫Chiba Shigeo, 공간 1989년 3월호

9) 東京화랑 1975년 5월6일~24일, 「한국․5인의 작가 다섯 가지 흰색」展; 도록, 이일의 서문 중에서,

“…이와 같은 추세 속에서 그간 서울의 明東畵廊의 金文浩씨와 東京의 東京畵廊의 山本孝씨 사이에 韓․日 두 나라의 現代美術 교류전에 대한 꾸준한 교섭이 이루어져 온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하여 그들의 적극적인 이니시아티브에 의해, 그리고 여기에 미술평론가로서 일본의 中原佑介, 한국의 나 자신이 관여하여 마침내 1次的으로 東京畵廊에서의 韓國現代繪畵展의 실현을 보게 되었다.…”

 

한국현대미술 다시 읽기 III, 「이동엽과의 대담」 중에서; 2002.8.27 문정동 작업실

이동엽: 후에야 알게되었지만 야마모토 사장은 우리 나라 고미술에 정통한 사람이었습니다. 동경화랑에 초청 받아서 야마모토 사장 집에서 기거했던 적이 있는데, 야마모토 사장의 부인 얘기로는 야마모토 사장이 오래 전에 한국에 있었다고 그러더라구요. 이런 저런 사실로 유추해보면 그가 우리의 전통미에 연관을 지어서 보았겠구나 하는 추측을 했습니다. 제가 이해하기로는 백색을 여러 번 묽게 칠했을 때 나오는 투명한 맛과 또 그때는 재료가 없다보니 옵셋 잉크를 썼는데, 그 잉크는 아주 투명한 맛이 있어서 그런 우연한 재료의 성질들이 일치했는지 모르겠지만, 그러한 투명한 바탕 위에 그려진 컵의 선이 뭔가 칠해 졌다기보다는 베어든 것 같고, 투명과 반투명의 느낌이 나오는 것에서 야마모토 사장은 도자기의 질감을 느꼈던 것 같아요. 마침 흰색이니까 백자와 연관지어 생각한 것도 같고요. 그리고 컵 시리즈에서의 기법이나 조형을 소박하면서 단순하고, 순박하게 보지 않았을까 생각해요.

오상길: 야마모토 사장에게 직접 들으신 얘긴 없습니까?

이동엽: 심사현장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직접들은 것은 아니고, 이일선생과 명동화랑 김문호 선생을 통해서 들었어요. 허황씨도 같이 출품했기 때문에 같이 연관지어서 말씀을 하셨을 거예요.

<중략>

오상길: 1969년부터 시작된 모노하가 서구미술의 추종과 모방이라는 역사적 콤플렉스로부터 벗어나 미술에 있어서의 일본적 가치를 자각하게 했고, 1975년도 동경화랑에서 열렸던 다섯 가지 흰색전 역시 이와 관련이 없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 전시는 선생님과 허황 선생님의 작품에서 비롯되었다고 들었습니다만…

이동엽: 김문호씨가 ‘당신하고 허황씨 때문에 이 전시가 만들어졌어.’ 라고 하더라구요.

<하략>

10) 한국현대미술 다시 읽기 II, 6,70년대 미술운동의 자료집 Vol. 2, p. 101-102, 「서승원과의 대담」중에서; 2001.2.16 서교동 작업실, 도서출판 ICAS, 2001

서승원: …당시 동경화랑 야마모토 사장이 … 73-74년도 한국에 오셔서 화실을 방문하셨어요. 한국의 젊은 작가를 찾자는 뜻도 있었던 것 같고 한국 화단의 상황도 보겠다는 거였지요. 일본 최고의 화랑 주인이 왔다니까 관심이 많았지요. 그때 작업실에서 작품을 다 보여줬어요. 수치스러운 얘기지만 그때는 100호 캔버스 천이 없어서 다 꼬매 갖고는 100호를 만들어 그림을 그리고 했는데 꿰맨 자국이 보일까봐 밑 작업으로 흰색을 칠했어요. 그 양반이 흰색을 굉장히 매력 있게 보시면서 “그런 걸 숨기면 안 된다, 작품으로 작품성을 해야지…” 한국에서는 이 (큰 캔버스)천이 안나올 때고 물감도 안나온다는 얘기에 그 양반이 기가 막힌 거지. 이러면서 현대미술을 한다고 그림을 그렸구나 격려를 하면서… 사실은 오히려 그 때문에 그네들의 색이 아닌 것을 만들 수 있었던 건데. 독자적인 색을 만들 수 있었던 거라고 보거든요. 웃지 못할 그런 것도 있었는데… 첫 번에 화실을 찾아와서 백색에 대한 것을 보고 갔어요. 그 다음에 한국에 오니까 백색을 쓰는 것이 독특하고 일본에 없는 색상이라고 하더군요. 두 번째 왔을 때 화실에 또 왔고 더 많은 작가들을 보고 싶어했어요. 자기가 백색군을 만들어 동경화랑에서 전시를 하면 되겠다고 일본에 없는 흰색을 그리는 작가들만을 테마를 잡고 그때의 작가들을 모았던 것이죠. 그때 박서보 선생님은 백색을 안 그릴 때였어요. 유전질을 하실 땐데…. 그건 자유 해석을 할께요. 날 중심으로 해서 한국 작가들을 한국어로는 한국의 흰색전이라고 하고, 일본어로는 한국백색전이라고 썼어요. 우리 것을 발견해 준 것이지 일본의 영향과 아무 관련이 없어요.

11) 「韓國 5人의 작가․다섯 가지의 흰색」展 도록 서문, 中原佑介, 1975.5.15 弘大學報

12) 이일은 그의 여러 텍스트들에서 소위 ‘탈 이미지’ 개념을 제시하고 있다.

13) 현대미술연구, p. 179-187, 김복영, 정음문화사, 1985

 

   *별첨*노장사상 老莊思想이 사상은 거금距今 2천 수백 년 전二千數百年前 노자老子와 장자莊子에 의하여 형성된 사상으로 유교儒敎 및 불교佛敎와 더불어 동양 3대사상東洋 三大思想의 하나이다. 노자는 공자孔子와, 장자莊子는 맹자孟子와 거의 연대가 같다는 것이 통설通說이나 노자는 장자보다 훨씬 후세後世의 사람이란 이설異說도 있다. 봉건적 신분제도封建的身分制度를 도덕적道德的으로 확립할 것을 이상理想으로 하는 공맹孔孟의 예치주의禮治主義의 사상과 분분한 물론物論을 일으키는 명묵名墨의 변론적辨論的 지식에 반대하고 자연의 도道, 즉 자연법칙自然法則을 이해하고 번쇄煩瑣한 인위人爲를 초월하여 평이平易한 생활을 주장한 것이 노장 사상이다.

 

[장자莊子의 사상]주周말. 전국戰國시대는 주의 봉건제도가 무너져 사회질서가 극도로 혼란된 시대로서 그 혼란의 타개책과 행동규범行動規範의 수립이 절실히 요구되던 때였다. 당시의 공자와 맹자가 주장한 유교의 도덕은 이상적 행동규범을 세워 봉건질서封建秩序를 회복하고 인간복지人間福祉를 향상하려고 꾀한 것이었으나 그 가르침이 너무나 이상적이라는 세평世評을 면치 못하였다. 장자는 이러한 유가儒家의 입도立道에 반대하고 관도觀道를 주장하여 현실혼란의 원인은 지나친 지식知識에 대한 관심에 있다고 하고 현실적인 행동의 규범規範을 추구할 것을 주장한 현실주의자였다. 그는 말하기를 지식에 대한 지나친 관심은 서로 상반되는 이론의 논쟁밖에 일으키지 못하며 분분한 물론物論을 야기하므로 이것을 제합할 것을 주장한 것이 제물론齊物論이고, 이러한 생활태도는 인간을 실패와 피로疲勞 그리고 회의懷疑에 빠지게 하는 것이니 이러한 지식을 버리고齊物論 지식에 대한 집착을 초월逍遙遊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그리고 그 방법을 심제좌망心齋坐忘에서 구하여 심제는 지식에 대한 심적 요구를 진정하는 일이고, 좌망은 지식에 대한 평가태도評價態度를 망각忘却하는 일이라 하였다. 이리하여 지식을 초월하면 1) 서로 대립되는 이론들은 진리眞理에 대한 상대론에 불과한 양가兩可임을 알 수 있을 것이고, 2) 이론이 서로 상반되는 이유는 절대적일 진리가 하나인데 그것을 언어(말)로 규정하려고 하는 데서 생겨났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사실(진리)을 자각한 자를 진인眞人또는 진군眞君이라 불렀다. 그리고 진인이 되어 야만 주관적 이론의 대립에서 초월한 객관 자체의 진지眞知를 깨달을 수 있다고 하였다. 이 진지는 바로 사실의 올바른 이해를 뜻한다. 3) 다음에 진지를 깨달으면 가치관이 전도轉倒되어 아직까지 무용지재無用之財였던 것이 유용지재有用之財가 되고 생生만 가치 있고 사死는 무가치한 것으로 보았던 인생관이 무너져 죽음도 진리로 보게 된다고 하였다. 4) 또 사실계의 생멸 운동은 천의天意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변自變 자화自化하는 자연自然의 필연적이고 영원한 유전운동에 기인하는 것이며, 이 자연의 운동에는 시비是非와 진위眞僞가 없고 생사동등生死同等․만물일체萬物一體를 이룬다고 보았다. 그리고 5) 지식의 일체규정이 부정된 진의 세계는 무無로서의 비존재非存在가 아니고 무규정적無規定的존재로서의 무無이며 유명有名의 유有에 대한 무명無名의 무無다. 그러나 장자는 무명의 존재는 어떻게 발전하여 현실을 이루었는가 지식이 시비를 야기惹起하는 근거와 지식을 형성하는 의식의 근거는 무엇인가를 밝히지 못하였다(이것은 노자에서 그 해결을 보게 된다). 그리고 6) 인간의 생활 표준이 되는 대종사大宗師는 가치관價値觀과 욕심을 버리고 자연법칙自然法則에 동화同化하여 자연으로 돌아갈 때 비로소 각 개인은 안심입명安心立命하고 자기의 생명을 다함으로써 양생養生하게 된다고 하며, 만인이 모두 그러할 때 사회는 자연적으로 구속 없는 천방무욕天放無欲의 사회질서를 얻을 수 있다고 하여, 개인을 구속하는 정치․도덕적 권위에 무관심하였고, 봉건적 군신관계君臣關係와 또 인의仁義를 무시하였다.현실의 비판에서 출발한 장자는 도리어 현실을 도피하여 관념적 자유를 구했다. 그러나 장자는 현실의 정치․도덕․문화를 파괴하는 허무주의자는 아니었고 단지 기성지식의 평가․시비의 태도를 부정함으로써 문화를 재건할 새로운 터전을 발견하려고 노력하였다. [노자老子의 사상]장자는 지식적 유명계知識的 有名界를 부정하고 초월하여 자연에 의해서 생멸하는 무명無名의 존재계存在界를 발견한 데 그쳤음에 대하여 노자가 추구하려는 주제는 무명의 존재가 유명의 현실존재로 자연 생성하는 길을 해명한데 있었다. 이 해명을 위하여 노자는 지식을 부정․초월하는 장자에서 일보 전진하여 지식을 형성하는 인간의식의 무명 속으로 들어간다. 그에 의하면 인간은 생生의 의욕에 얽매인 의식을 갖고 있으며, 생의 의욕은 생의 수단으로서 감각을 가지고 이 감각은 물욕物欲을 일으켜서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자신을 망각하게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의 의식은 무지無知를 지知로 위장僞裝한 것에 불과하며, 감각적 물욕은 의식의 핵核이며 무지의 암흑으로서 현玄이라 하였다. 그러나 현은 맹목적인 것으로서 자연적으로 발동하여 자기를 형성한다. 이 현 속에서 내동하는 자연성을 파악하는 방법은 현 속으로 들어가는 입현入玄이며 입현의 방법은 무사無思 무위無爲이다.그러나 의식은 감각의 지배를 받아 자기의 무지를 위장하면서까지 외물을 구하려고 하기 때문에 입현할 수 없다. 그러므로 입현하기 위해서는 사유의 위장태도를 포기하고 무사無思 무위無爲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무사 무위의 입현이 정밀할수록 자기의 체험은 깊고 자기의 자연성이 나타난다고 보았다. 장자의 유명有名의 초월은 지식의 상대성의 자각이며, 노자의 무사무위의 무명無名의 초월은 존재의 상대적 반복성을 자각한 도반道反이니 존재의 생멸의 상호전환의 가능성을 자각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유가儒家의 덕德은 비례非禮․불의不義를 거부하는 의덕意德이고 선善이나, 노장은 그 거부할 수 있는 근거를 이해하는 지덕知德이며 입현의 덕, 즉 현덕玄德이라 한다. 비례非禮도 거부할 수 없는 인간의 본성本性이며 비례非禮하므로 예禮를 요청하게 되는 것이니 이 요청도 역시 우리의 본성으로 본다. 거부될 불의不義․비례非禮는 악惡과 같이 보이나 실은 덕德이다. 독선獨善은 자기과시自己誇示의 위장僞裝이므로 비덕非德으로 보고 불인불의不仁不義를 거부拒否․불인不認하는 인의仁義는 무모한 위정僞正이고 가식假飾이라 하였다. 그리고 진정한 덕인 무위의 덕을 실천하는 덕목德目이 자慈․검儉․용勇의 3보三寶라고 하였다. 인간성은 잔인하니까 자애를 요청하며 잔인의 극기克已에서만 자애가 생길 수 있다. 물욕은 소유욕이며 화려한 사치욕이니 무위의 덕목은 그것을 절제하는 것이고, 또한 물욕은 독점 지배욕으로서 과감한 침략을 욕구하니, 이 침략성을 억제하는 용기가 참된 용기이며 부쟁不爭의 덕이라 하였다. 형식적 덕치주의德治主義는 중앙집권적 통일국가 형성에 불과하다고 본 노자는 소국과민주의小國寡民主義에 의하여 강권의 간섭에서 벗어나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나라의 임금王도 위대하기는 하나 전제군주專制君主로서 보다도 무욕의 서민의 지도자로서의 임금으로 보고, 침략전쟁을 부인하며 자위 존립상 부득이한 방어에 한해서만 전쟁을 인정한다. 그는 인욕人慾을 비판하고 인욕의 절제節制를 강조함으로써 탐욕貪慾에 찬 사회개조를 기도한 것이다. 노장老莊이후는 양생養生의 기술론技術論으로 발전하였다. 후한後漢말 때 위백양魏伯陽의《참동계參同契》, 송宋때 장자양張紫陽의 《오진편悟眞篇》, 작자 미상의 《음부경陰符經》등은 그 사상을 전개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고 특히 《참동계》는 획기적인 것이었다. 참參은 외계 물적 자연의 음양이론陰陽理論에의 참가이며, 동同은 노자가 형성한 인간의 유물적 운동전환구조 이론과 외계자연은 동일하다는 인간소우주론人間小宇宙論의 전개이고, 계契는 합合의 뜻으로 천인합일론天人合一論이다. 인간과 외계사물의 생멸운동의 전환구조를 해명하는 목적은 생과 사멸의 원인을 찾고, 생명의 비오秘奧를 열어서 생멸 상호전환의 가능성을 밝히는 데 있으며, 이것은 죽음에로의 노쇠를 방지하는 양생養生, 즉 연명延命의 기술을 구함으로써 불사선인不死仙人의 인간 욕망을 충족시키는 데 있다. 이 기술론을 단학丹學이라는 이름으로서 발전시킨 것이 도가道家이다. 단丹은 불변불괴不變不壞의 적색赤色의 항존恒存을 의미한다. 이론적 영생永生의 기술론技術論을 내포한 노장사상을 대중 속으로 파고 들어가 정치적․토속적土俗的․종교적宗敎的으로 이용한 것이 도교道敎이다.(세계철학대사전, 강영선 外 編著, 교육출판공사, 1988, p. 170-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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