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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포지엄: 한국현대미술 다시 읽기 V - 《국전을 통해 읽는 한국의 현대미술》 발제문

 

 

20세기 한국미술사 속의 《국전》 부재가 의미하는 것

 

 

1979년 국립현대미술관과 한국미술협회는 『한국현대미술 20년의 동향』展을 공동기획하고, 1957년부터 1977년에 이르는 추상미술의 흐름을 4부로 나눠 다뤘다. 이 전시는 한국현대미술의 태동을 1957년으로 잡고, 근거를 “추상미술이 발붙이기 시작”했음에서 찾고 있다.

필자는 2004년 네 번째 『한국현대미술 다시 읽기』를 수행하며 한국현대미술의 기점 논의가 왜 서구의 전후 추상미술의 수용맥락에서 이루어지고 있는지 의문을 제기한 바 있다. 이 의문은 두 가지 배경에서 비롯되었는데, 그 하나는 서구 추상미술의 양식 차용으로 한국의 현대미술이라는 역사적 가치와 정체성을 설명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추상은 서구미술의 역사적 전통을 극복해가는 과정에서 대두된 미술이념이자 양식이었는데, 이것의 표피적 수용을 한국현대미술의 기점에 위치시킴으로써 서구미술에 대한 한국미술의 문화종속을 구조화하게 되는 건 아닌지 묻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이런 식의 접근으로 일제의 강점과 분단, 전쟁과 경제개발을 거쳐 오늘에 이른 파란만장한 현대사를 미술의 역사에 반영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다.

 

역사란 ‘역사가의 관점과 가치관에 따라 재구성’된 진술이라는 점에서, 과거에 대한 현재의 평가이자 미래로의 교두보를 마련하는 일이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현대미술의 기점논의는 한국미술로서의 ‘현대적 의미’와 ‘역사적 맥락’을 찾는 일이 돼야 한다.

1950년대 후반은 UN과 미국의 원조에 기대어 전란의 폐허를 복구하던 시점이었고, 서구미술의 정보나 영어독해 능력이 중요한 경쟁력이었을 만큼 서구문화가 절대적 우위에 있었던 시대였다. 서구 추상미술의 집단적 수용이 당시로선 두드러진 변화로 보였겠지만, 미술사란 그런 일시적 현상을 단순 기록하는 일이 아니라, 서구화에 의한 전통의 단절과 역사적 비약의 ‘의미’와 ‘맥락’을 정리해내는 작업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20세기 한국미술사는 아직도 예술적 가치의 평가나 역사인식과 동떨어진 사건사 또는 미술운동사의 수준에 머물러 있고, 이 정치성 짙은 진술들이 미술계의 광범위한 불신과 가치전도 현상의 주요한 원인 중 하나였다고 생각한다. 아울러 이 미술사들은 서구미술의 영향이라는 표면적 문화현상에 집착한 나머지, 당대의 예술 활동에 내재된 역사적 의미와 가치들을 간과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수용 문화적 측면을 더 부각시켜 온 측면도 있다. 이것은 20세기 한국미술에 관한 실체적 연구는 찾아보기 어렵고, 작가 및 작품 단위의 각론 연구 역시 매우 부실한 상태에서 앞선 세대의 주장을 무비판적으로 인용해서 대체해 왔던 비평과 미술사의 바람직하지 못한 관행을 통해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한국미술로서의 예술적 성취와 비평담론을 토대로 진술되어야 할 미술사가 서구미술의 트렌드를 수용했던 미술현상과 세력들의 집단운동사로 대체됨으로써, 화단의 패권을 장악해 온 집단적 헤게모니가 미술의 역사로 전도되고 서구미술의 수용문화가 한국미술의 현대적 가치로 둔갑하는 배경이 되어 왔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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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포지엄-국전으로 읽는 한국의 현대미술, 2017.11.24 아르코미술관 3층 세미나실

왜 《국전》 재조명인가?

 

 1. 제도로서의 《국전》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이하 ‘국전’》은 1949년부터 1981년까지 정부가 공모전 형식으로 개최했던 전시행사로 30여 년 간 총 44,000여 명의 예술가들이 참여했다. 나라살림이 어려워 발표의 장이 없던 시절, 청년예술가들과 지역예술가들의 등용문이었고 신진에서 원로들까지 한 자리에 모여서 다양한 기량을 선보였던 전람회였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의 《조선미술전람회, 이하 ‘선전’》를 모방한 제도적 한계와 《선전》 출신 작가들의 영향력 행사로 인해 ‘친일’과 ‘왜색’ 논란이 있었다. 또 석연치 않은 심사결과로 잡음도 자주 일었고, 서구 추상미술을 추종했던 일부 청년작가들로부터 좌상파 아카데미즘 미술의 본산으로 지목당하기도 했다.

 

 

 2. 《국전》에 관한 오해들

이상한 일은 30년 간 미술계의 중심이었던 《국전》이 20세기 한국미술의 역사 속에는 등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국전》을 주무대로 활동했던 작가들과 예술적 성취도 찾아보기 어렵다.

 

   가. 《국전》의 태생적 한계?

역사 속의 《국전》은 주로 추상미술의 등장을 촉발시킨 문제 많은 ‘기성’의 악역이다. 일부 필자들은 1950년대 추상미술의 등장 배경으로 ‘반국전’ 운동을 언급하지만, 《국전》에 대한 반발로 서구 추상미술의 수용을 합리화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주장이다.

일제 강점기의 《선전》을 모델로 한 《국전》의 태생적 한계는 《선전》의 모델이었던 일본의 관전 《문부성전람회, 이하 ‘문전’》을 의식한 지적이고, ‘친일청산’의 필요와 맞물려 일견 설득력 있는 비판처럼 보였다. 그러나 해방 후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이 사회적 혼란을 수습하고 안정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일제 강점기의 운영체제들을 대부분 물려받았다는 점에서, 유독 《국전》의 태생적 한계만 부각시켜 비판하는 일이 타당한 일인지 생각해 봐야 한다. 이런 비판을 하려면 최소한 제도적 유사성과 예술적 성취 간의 영향관계 정도는 분석해서 밝혀야 하는 것이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런 연구는 본 적이 없다.

 

   나. 국전 아카데미즘

미술 아카데미즘은 르네상스 예술가들이 예술의 정신적인 기반을 전승하기 위해 구축한 과학적 체계들로부터, 17세기 프랑스의 미술교육과 미술정책, 전람회 개최 등 제도적 체계의 확립과 르네상스 미학의 계승 규칙을 마련하기 위한 ‘왕실 회화조각 아카데미’에 기초해 있다. 미술 아카데미즘은 이후 시대의 변화에 따라 그 의미와 역사성, 범주가 달라졌지만, 어디서도 ‘국전 풍의 미술’ 같은 것을 지칭한다는 근거는 찾을 수 없다.

 

한편 일본 군국주의자들은 자국의 문화경제 부흥을 목적으로 《문전》을 통해 ‘미술의 표준’이라는 기능적 측면을 강조하는 정책으로 미술 아카데미즘을 장려했다. 이에 반해 《선전》은 3.1운동 이후 조선총독부의 문화통치 수단이었다는 점에서 일본의 《문전》 같은 미술산업 정책이나 문화경제 부흥을 위해 개최된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선전》 또는 《국전》의 제도적 유사성을 근거로 《국전》을 아카데미즘의 본산으로 규정하는 건 넌센스이자, 《국전》과 미술 아카데미즘 양쪽을 다 잘못 이해하는 일이다.

 

또 《국전》에 출품된 작품들이 다 '좌상파' 미술이었던 것도 아니다. 물론 좌상파가 20세기 한국미술사에서 배제될 이유도 없다. ‘좌상’이라는 모티브를 아카데미즘의 근거로 규정한다면, 평생 사과와 생 빅투아르를 그렸던 폴 세잔이 그 원조가 되어야 한다. 초점은 ‘좌상’이라는 모티브가 아니라 ‘어떻게 그렸느냐’의 방법론인 만큼 좌상파 아카데미즘은 미술의 논리에서 비롯된 비판이 아니며, 이런 비판을 주도했던 청년세력들과 평론가들에 의한 《국전》의 역사 소외는 매우 잘못된 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국전》이 좌상파 그림들로 채워졌던 것도 아니고 아카데미즘 미술도 아니었다는 점은 당시 전시되었던 《국전》 수상작들의 작품을 통해서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다. 심사결과를 둘러싼 잡음

사실 《국전》은 거의 해마다 잡음을 일으켰고, <대한미협>과 <한국미협>의 분리대립을 비롯한 분규와 공정성 시비가 일간지를 장식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국전》의 문제가 아니라 일부 심사위원들의 불미스런 행태였으므로 구체적 내용을 조사해서 정리하면 될 일이다. 그런 문제들이 30여 년간 수많은 예술가들의 예술적 성취를 역사에서 소외시킨 근거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국전》의 참여자들 대다수가 피해자인데, 일부 문제인사들의 행태를 이유로 싸잡아 폄훼하고 역사에서 소외시키는 일 역시 옳지 못한 일이다.

 

 3. 《국전으로 본 한국의 현대미술》

20세기 한국미술을 특징짓는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서구와의 ‘문화혼성cultural hybrid’일 것이다. 일반적으로 문화혼성은 정치사회적 변동성 속에서 이루어지고, 문화적 충격과 갈등, 혼돈을 거쳐 서서히 고유문화로 자리 잡는다. 20세기 한국미술을 문화혼성의 관점에서 보려는 것은 ‘미술의 관점에서 역사를 바라보는 일’이자, 한국현대미술의 역사적 맥락과 좌표를 구하는 일이 될 수 있다. 또한 21세기 동시대 미술 속에서의 경쟁력 확보와 문화권력 재편에 따른 시장변화에 선제적으로 대처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것은 20세기 한국미술을 보다 큰 역사의 궤도 속에서 바라보려는 거시적 관점과 서구미술과의 문화혼성에 따른 변화의 실체들을 규명해 가는 미시적, 각론적 연구를 통해 가능해 질 것이다. 이 관점은 미술의 역사를 사건사 또는 미술운동사로 전도시켜 왔던 그간의 진술들과 명백한 차이를 만들 것이며, 향후 21세기 동시대미술의 새로운 agenda에 중요한 모멘텀을 제공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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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전을 통해 본 한국의 현대미술전, 2017.10.18-11.2 금보성아트센터 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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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전시순회전; 국전을 통해 본 한국의 현대미술전, 2017.12.21-2018.1.31

경주예술의전당 알천미술관

4. 연구과제 - 회화적 DNA 추출작업

이번 다시 읽기의 성과 중 특기할만한 것은 일부 작가들의 30여 년에 걸친 변화의 궤적을 찾아볼 수 있었던 점이다. 특히 남관, 이봉열, 류경채 등 비교적 초기부터 일관된 변화의 과정을 드러내고 있는 작가의 작품들을 연대별로 배열 후, 양식변화를 뒷받침하는 특유의 회화적 code와 어법idiom들을 관찰할 수 있었는데, 이 과정을 통해 특징적인 변화의 패턴을 추출해 낼 수 있었다. 이것은 비평작업을 뒷받침해 줄 통계자료가 될 수 있는, 일종의 회화적 DNA 분석 작업이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남관의 예

남관(1911-1990)은 14세부터 일본에서 성장하며 동경 다이헤이요(太平洋) 미술학교를 졸업했고, 광복 전까지 일본에서 기반을 닦았다. 이런 성장 배경이 그의 일관된 예술적 성취와 연관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일본은 일찍부터 서구문명을 수용하며 문화적 기반을 축적했고, 특히 예술분야는 우리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 차이를 가지고 있었다.

 

남관의 초기작 <향원정, 1947>은 대상묘사나 풍광 재현의도를 배제하고, 실루엣으로 경계 지어진 깊고 서늘한 청색조 중심의 편평한 색면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이 신비로운 청색계열의 변주는 이후 평생 지속된 추상작업을 뒷받침하는 가장 중요한 색채로 특징지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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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관, 향원정, 1947

남관, 정물, 89.1 x 71.3cm, 캔버스에 유채, 1950년대,

남관, 정물, 195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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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관, 콤포지션, 1955

<정물, 1950>은 젊은 시절의 남관이 폴 세잔의 다시점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확인시켜 주며, <콤포지션, 1955>은 그 관심이 변형된 큐비즘적 형태의 해체로 옮겨와 있음을 보여준다. 흥미로운 것은 이 형태의 해체가 <시장, 1955>과 <파리야경, 1955>, <정물, 1956>과 <봄, 1956> 그리고 <파리에서, 1957>로 이어지며, 화면 전체의 해체양상을 보이면서 특유의 격자형 구성으로 발전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그가 문화적 후위의 전형적 특성을 띤 큐비즘과 구성주의의 절충된 학습과정을 거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보이며, 이후 문자추상의 구조적 근간이 된 것으로 판단된다. 한때 이응노가 제기했던 문자추상 표절논란은 남관의 조형적 실험과정을 잘 알지 못했던 이응노나 김흥수의 오해에서 비롯된 것임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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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관, 시장,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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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관, 파리야경,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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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관, 정물, 1956

남관의 격자형 구성은 <낙조, 1958>나 <풍경, 1961>, <흰 그림자, 1962>, <환상, 1962>, <역사의 흔적, 1963>으로 이어지며 점차 일련의 패턴을 형성해 가는 것을 관찰할 수 있고, 이 과정에서 그의 색채 감수성이나 특유의 마티에르, 구성적 특성이 반복적으로 나타나고 있음도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남관의 예술적 성취를 논함에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 즉 그에게 있어 ‘추상’은 무슨 의미이고, ‘왜’ 그리고 ‘어떻게’ 추상에 도달했는가의 내적 필연을 밝혀내는 일이기 때문이거니와, 이 문제가 서양의 추상미술과 남관의 추상을 경계 짓는 결정적 근거이고, 나아가 20세기 한국미술이 생산해 온 문화적 후위로서의 ‘가치’와 ‘존재방식’을 설명해 줄 키워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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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관, 낙조,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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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관, 파리야경,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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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관, 역사의 흔적, 1963

다행스럽게도 몇몇 작가들은 나름의 내적 필연을 규명해 줄 일련의 근거들을 비교적 분명하게 제시해 주고 있어 연구의 전망을 밝게 해주고 있다. 지면상 모두 밝히긴 어려우나 이런 작업이 21세기 한국미술의 진로모색과 세계미술 시장 안에서의 경쟁력 제고를 위해 매우 절실한 일임은 분명해 보인다.

 

 

  5. 다섯 번째 한국현대미술 다시 읽기를 마치며

『한국현대미술 다시 읽기』는 한눈에 넣기 힘들 만큼 큰 설계도를 가지고 시작한 사업이다. 앞선 네 번의 다시 읽기가 그 토대를 구축하기 위한 토목공사였다면, 이제부터의 다시 읽기는 ‘다시 쓰기’를 위한 본격적인 건설공사가 될 것이다. 요즘 미술계는 쓰나미가 할퀴고 간 폐허처럼 을씨년스럽기 짝이 없지만, 다른 각도에서 보면 미술계를 reset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하다. 이런 맥락에서 『한국현대미술 다시 읽기』는 미래로 나갈 길을 닦기 위해 과거를 정리하는 작업이자, 미래를 열어갈 방법을 모색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국전》은 이 전환의 계기를 만들기 위해 매우 유용한 교두보인 것이다.

 

이제 우리는 고개를 들어 주변을 돌아보며 새로운 좌표를 찾아야 한다. 한국 미술로서의 역사적 맥락을 구축하고 세계 미술시장 속에서의 경쟁력을 마련할 방안을 모색하며, 동시대미술의 새로운 제안과 시장운영 전략, 문화예술정책을 제시해 가야 한다. 《국전》을 포함한 모든 역사가 우리의 자산이고 자원이며, 이것을 가공할 대안과 전략이 핵심적 열쇠라는 점에서 오늘의 연구 작업과 고민 그리고 토론과 비판적 논쟁은 의미심장한 일이 될 것이다. 세계 자본시장의 재편이 가져올 문화지형도의 변화는 21세기 한국미술의 전망을 매우 밝게 해주고 있다. 단지 누가 이 새로운 시대의 주역이 될 것인가의 문제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오상길(한국현대미술 다시 읽기 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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