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한국현대미술 다시 읽기 V 자료집 출간 서문

다섯 번째 한국현대미술 다시 읽기

한국현대미술 다시 읽기 출간서적.PNG

20세기 한국은 일제의 식민강점 이후 격변하는 근현대사로 인해 전통 의 단절과 현대화의 비약이라는 역사적 단층을 겪었지만, 1960년대 산 업화 이후 산업과 경제 분야에서의 눈부신 성장을 이루어냈다.

그러나 미술 분야는 서구미술 수용과 모방이 화단의 주류문화로 자리 잡은 이후 아직까지 한국미술로서의 독자적 성격과 경쟁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한국미술로서의 역사성이나 문화적 정체성 같은 시대의식 보다 서구미술의 스타일을 차용해 동시대미술에 손쉽게 편승해 오면서 스스로 담론 공백을 자초해 온 결과에 다름 아니다.

1930년대 일본유학파 들의 추상미술이나 1960년대 유사 앵포르멜과 유사 기하추상, 일련의 전위적 활동들, 1970년대 백색 단색조미술 등 소위 20세기 한국미술의 주류로 평가되어온 미술들 대부분이 발생적 근거나 타당성, 자생적 맥락, 전조 및 후위현상 없이 일본과 서구미술의 영향을 받아 이슈와 양식 들을 수용하고 추종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결과적으로도 한국미술로서의 역사성과 차별성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20세기 한국미술의 한계는 화단의 주도권을 장악했던 세력들의 미술 운동을 미술사로 진술해온 평론가들과 미술사가들의 오류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술사가 화단의 패권주의에 기초한 미술운동으로 대체되어 있다는 점도 정상이 아니지만, 그로 인해 개별 예술가들의 첨예한 역사현장 경험과 당대의 예술적 성취 같은 중요한 가치들이 매몰되었다는 점이 더 큰 문제다. 즉 화단의 주도권을 중심으로 진술되는 집단 중심의 역사로 인해 개별 예술가들의 예술적 성취와 고뇌 그리고 그에 관한 비평담론이 없는 이상한 미술사이자, 시류에 편승한 ‘알맹이’가 없는 역사가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덕분에 서구의 동시대미술 담론 속에서 제기되어 왔던 미학적, 미술사적 이슈들에 대한 한국예술가들의 고민이나 대안과 거리가 먼, 서구미술의 트렌드를 모방하는 사람들이 주류로 행세하는 기현상이 오랫동안 지속되면서 경쟁력 부재상황이 초래되었다.

이런 지적의 근거들은 국립현대미술관의 한국현대미술 20년의 동향전 도록 『한국의 추상미술-20년의 궤적, 1979』이나 『한국현대미술의 시원, 2000』, 『20세기의 한국미술, 김영나, 2001』, 『한국화단과 현대미술, 김홍희, 2003』, 『한국과 서구의 전후 추상미술, 호암미술관, 2000』, 『60년대의 한국의 현대미술-앵포르멜과 그 주변, 워커힐미술관, 1984』, 『한국모더니즘 미술연구, 윤진섭, 2000』,『한국 추상미술 40년, 오광수, 1997』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한국현대미술 다시 읽기』는 이런 난제들을 풀어가기 위한 메타비평 작업이다. 기형적인 미술문화 현상의 인과관계를 파악할 수 있도록 자료수집과 체계적 정리, 비평적 근거를 토대로 한 문제의식의 구체화 그리고 이 한계들을 넘어서기 위한 전략적 대안의 모색을 위한 일이다. 이것을 위해 필자는 20세기 한국미술을 향한 시선을 확장하여 발상을 전환시킬 필요를 느꼈다. 즉 우리가 겪어온 백여 년간의 역사적 파동을 반만년을 이어온 거대한 역사의 연장선상에서 바라보며 충격과 파열의 시대, 갈등과 혼돈의 여정을 거친 문화혼성(Cultural Hybrid)의 과정으로 정리해 가려는 것이다.

서구미술의 수용과 추종이라는 식민적 관점에서 벗어나 역사를 바라보는 주체적 관점과 해석학의 지평을 확대해 가야 한다는 말이다. 서로 다른 나라들과 민족들 간의 문화혼성을 통해 변화해 온 서구미술이나 몽고침략의 문화혼성 결과물인 색동저고리와 댕기머리처럼, 서구미술의 영향도 환경과 의식을 뒤바꾼 분명한 문화혼성 현상이라는 점에서, 이 100여년의 역사를 어떻게 해석해 갈 것인가의 문제가 중요한 과제인 것이다.

 

20세기 전반에 걸친 사회 변화의 양상과 시각예술 분야의 대응을 어떤 관점에서 어떻게 분석하고 무엇에 집중하여 맥락화해 갈 것 인가에 대한 전략적 연구가 필요하고, 다섯 차례에 걸친『한국현대미술 다시 읽기』의 당위와 방법론이 바로 이 문제들에 맞닿아 있다. 그리고 이 모든 연구의 기초는 한국미술로서의 현대성이란 무엇일까에 값하는 개별 작가들의 예술적 성취에 관한 각론 연구가 되어야 한다. 이 연구를 통해 풍부한 비평적 이슈와 구체적 담론을 구축하고, 이를 미술사 진술의 근거로 삼아야 한다는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본격적인 한국의 현대미술사는 지금껏 단 한 번도 진술된 적이 없는 셈이다.

 

앞선 네 번에 걸친‘다시 읽기’가 연구의 기반을 닦기 위한 토목공사에 해당한다면, 다섯 번째‘다시 읽기’부터는 그 기반 위에 세울 새로운 비전을 구체화해 가는 작업이라고 말할 수 있다. 30여 년간 연인 원 44,000여 명의 작가들이 참여했던 《국전》을 20세기 한국미술사에서 소외시켜왔던 비정상적 현실을 직시하고, 잘못된 점을 극복해 갈 방법적 대안을 제시하려는 것이다. 《국전》의 제도적 한계나 잘못된 점들에 대한 비판과 별개로 《국전》을 통해 활동했던 작가들과 작품들의 잠재력에 주목해야 한다는 말이다.

물론 《국전》의 긍정적 기여 역시 평가해야 한다. 관주도 공모전이었으나 세계 최빈국이었던 시절부터 가난한 예술가들에게 분명한 창작 동기를 제공했고, 신진과 지역예술가들의 등용문이 되었으며 국민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았던 축제 같은 행사였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일부 심사위원들의 불미스런 추태로 인해 세상의 관심에서 멀어졌지만, 30여 년의 장구한 세월에 걸쳐 개별 작가들의 변화의 궤적을 남김으로써 수많은 비평적 연구 의 범례들을 남겨 놓고 있는 것이다.

 

《국전》의 재조명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은 생각보다 많다. 《국전》은 첫째, 그간의 20세기 한국미술사가 화단 패권주의의 소산에 지나지 않음을 입증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근거를 갖고 있고, 둘째 어느 그룹전보다 개별성이 존중될 수 있었던, 실로 다양한 개별 작가들의 예술적 성취를 남겨 놓고 있다. 셋째, 우리는 이 《국전》 30년의 궤적을 통해 개별 작가들의 특성과 성취과정 그리고 당시 미술계의 역량을 면밀히 살펴볼 수 있고, 넷째 이 단서들을 통해 참다운 20세기 한국미술사를 찾아갈 수 있는 여지를 찾을 수 있다. 이런 긍정적 측면들 중 일부가 전시의 기획을 통해 제시되었다. 물론 본격적인 각론연구를 통해 구체화해야 할 적지 않은 과제들이 남겨져 있지만, 적어도 한국작가들의 독특한 특성을 발견하는 일이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님을 밝히는 데는 부족함이 없었다고 생각한다.

 

이번 기획에서도 자료의 수집과 심포지엄, 전시회, 자료집의 발간 작업이 함께 진행되었는데, 미술평론가 이구열 선생님이 오랜 시간에 걸쳐 꼼꼼하게 수집해 오신 《국전》 관련 기사나 메모 등을 리움미술관의 협조를 얻어 구할 수 있게 됨으로써, 자료수집에 필요한 시간을 전시의 기획에 집중할 수 있었다. 이점 이구열 선생님과 리움미술관에 심심한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이번 기획에서 가장 역점을 두었던 일은 역시 전시기획이었다. 《국전》도록을 통해 확보한 수천 점의 작품 이미지들을 무수히 반복해서 살피며, 한국미술로서의 역사적 맥락을 찾고 동시대미술 속에서의 좌표를 구하는 일에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이 과정을 거쳐 한국미술의 특징 적 패턴과 독특한 양상들을 파악했고, 그 흐름을 6개의 카테고리로 묶어 전시회를 구성했다.

 

하지만 작품의 행방을 좇는 일이 생각보다 쉽지 않았고, 대부분의 작가들이 작고한 터라 유족들을 수소문하는 일에도 어려움이 따랐다. 게다가 7월 경 서울시립미술관 측으로부터 갑작스러운 전시 공간 사용불가 통보를 받아 상당 기간 동안 기획추진에 차질을 빚었고, 다행히 금 보성 아트센터의 도움으로 전시공간을 확보한 이후에야 추진을 재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전시에 임박하여 《국전》 수상작들을 다수 소장하고 있는 국립현대미술관의 작품대여 거부라는 벽에 또다시 부딪혔다.

많은 시간과 에너지가 이런 저런 문제들에 부딪혀 낭비되었고, 뒤늦게 작품대여를 요청했던 부산시립미술관과 대구미술관, 광주시립미술관, 전북도립미술관, 이영미술관, 당림미술관, 서울대미술관, 유영국문화재단 그리고 작가 선생님들과 유족들, 소장자님들의 도움으로 전시를 열 수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언론들이 이 전시에 많은 관심을 보여주었고,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2017년 우수전시 순회사업에 선정됨으로써, 경주예술의 전당 알천미술관에서 보다 확장된 스케일의 전시를 다시 열수 있게 되었다.

 

한 해 동안 분주하게 진행했던 전시기획과 자료정리 그리고 자료집 출간준비가 마무리 되었다. 방대한 자료의 수록(수집과 정리)을 위해 스태프들의 고생이 막심했고, 예상보다 늘어난 자료의 양 때문에 서울현대미술연구소의 추가 예산부담이 불가피했다. 당시 신문이나 잡지의 기사들 대부분이 어려운 한자와 오타가 많은 탓에 예상보다 많은 시간과 비용이 요구되었고, 교정도 수차례 진행되면서 서울현대미술연구소의 직원들과 스태프들의 피로가 매우 높아졌다.

하지만 이런 노고 덕분에 한국미 술을 연구하는 분들의 수고가 크게 덜어질 것이고, 그만큼 연구의 접근성이 높아짐으로써 궁극적으로 한국미술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하게 되리라 생각한다. 이런 작업들은 마치 거친 땅을 갈아엎고 씨앗을 심는 일과 같은 것이다. 아직 요원해 보이지만, 언젠가 우리가 뿌린 씨앗이 풍성한 열매를 맺는 날도 있으리라.

 

어려움 많았던 이번 전시와 자료집의 출간은 누가 뭐래도 격려와 성원을 보내주신 여러 분들의 도움으로 가능했던 일이다. 이 기회를 빌려 전시지원을 결정해 준 한국문화예술위원회와 심의위원들, 함께 땀 흘려 일했던 스태프들, 적극적으로 협조해 주신 지역미술관들, 특히 어렵게 공간을 마련해 주신 금보성 아트센터, 연구진 그리고 작가 선배님들과 유족들께도 깊은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13년 만에 다시 시작된『한국 현대미술 다시 읽기』는 왜 이 기획을 시작했었고, 무엇을 이루기 위한 일이었는지를 스스로에게 되묻는 계기가 되었다.

 

2017년 12월 오상길(책임 큐레이터)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