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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오상길 VS 김미경(월간미술2000년 11월)

 

 

 

 

김미경: 한원미술관에서 기획한 ‘한국현대미술 다시 읽기 I' <현장의 미술, 열정의 작가들>전이 주목받고 있다. 1980년대 등장했던 소그룹 중 12개 그룹과 60여 편의 관련 비평문에 대한 메타크리틱(Meta Critic)을 시도하는 것에서 출발했지만 이는 시작일 뿐이라고 이해한다. 이번 전시 및 워크숍의 기획 취지는?

 

오상길: 한국현대미술의 맥락이 미술 내적 논리에 근거하기보다 화단에서의 주도권 흐름에 의존해 평가되어온 경향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서구미술의 수용과정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지만, 한국현대미술에 관한 그간의 비평적 해석들은 서로 간의 견제와 검증이라는 중요한 측면이 부재했기 때문에 시대적 상황과 미술에 대한 비평적 해석에 많은 문제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1980년대 소그룹 운동은 그동안 당시 제도권 미술과 민중미술의 대립이라는 덩치 큰 세력 간의 갈등에 가려져 의미와 가치가 간과되어 왔다. 그렇다고 해서 이 기획이 1980년대 소그룹들의 활동을 재평가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넓은 시각에서 현재의 미술현장을 위한 생산적인 비평적 담론을 형성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1980년대에는 실로 많은 그룹이 활동하였지만 내가 주목한 그룹들은 기존의 미술풍토나 이념을 거부하고 새로운 기반을 구축하려 했던 측면에서 흐름을 같이한 9개의 단체였다. 이들은 그동안 일부 비평가들이 모더니즘, 혹은 포스트모더니즘 담론과 관련하여 평가해 왔지만 정작 작가들은 매우 다른 입장을 보여 왔고, 세 차례의 워크숍과 한 차례의 세미나, 그리고 <현장의 미술, 열정의 작가들>전을 통해 상당한 성과를 얻고 있다는 점에서 향후 지속적인 연구 작업의 길을 열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김미경: 1980년대 소그룹들이 ‘유파’가 아니라 ‘운동’이라고 했는데, 그것은 다다(Dada)를 운동으로 이해하는 맥락과 같은 것이며 일관된 미학적 구심점을 거론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또한 그런 맥락에서 이들의 조형적 미학적 측면은 개인적으로 접근해야 하고 한국 현대미술계의 구조 및 제도적 측면에 대한 전략적 성격은 집단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그런 취지를 내포하고 있던 그룹에 대해 설명을 부탁한다.

 

오상길: 1980년대 소그룹들의 운동성은 기존 미술계에 대응하는 다분히 전략적인 측면에서 비롯되고 있다. 소그룹의 주요 작가들과 가진 인터뷰에서 작가들이 밝히고 있듯이 이들은 당시의 상황에 대한 대응적 혹은 대안적 방법으로 소그룹 운동을 펼쳤다. 일부 그룹들은 제도권에 대해 비교적 강경한 태도를 보였지만, 침묵과 단절이라는 중요한 방법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런 측면에서 이 그룹들은 시대적 상황에 대응하는 그 나름의 역할을 해냈다고 본다.

 

김미경: 오관장은 1980년대 소그룹운동의 전략적 성격상 이중적인 작업을 수행해 왔다. 소그룹 활동에서는 탈 모노톤의 맥락에서 오브제와 설치 및 평면의 해체작업을 보여 주었지만 그보다 자신에게 솔직한 작업들은 개인적인 작업이었던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4개의 변기-85앙데팡당을 위해>(1985)와 고깃덩어리를 매단 <습작88-11>(1988), 그리고 한국근대사 되돌아보기 1-지혜 저항 초월>(1990)과 <한국근대사 되돌아보기 2-드로잉, 전통회화로부터>(1992), 그밖에 90년대 초까지의 작업 중 주목하고 싶은 작업에 대해 말해 달라.

 

오상길: Meta-vox의 창립과 활동은 극히 전략적인 측면에서 이루어졌다. 당시의 미술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Meta-vox의 성격과 전략이 필요했지만, 작가로서의 관심사가 Meta-vox의 성격과 많이 달랐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크게 부담스러웠던 것이 사실이다. 이때부터 Meta-vox와 관련된 전시에 출품하는 작품 따로, 개인적으로 발표하는 작품 따로 하는 식의 이중적 활동을 했다. 특히 1987년 <한국현대미술의 최전선전>의 기획과정에 동세대 작가들과 심각한 갈등을 겪고 난 후, 온갖 정이 다 떨어져서 Meta-vox와 관련된 작품을 제작 발표하는 것이 너무 고역스러워졌다. 그 후 몇 년간이 가장 고통스러웠던 시기였던 것 같다. 당시 발표하지 않고 기록으로만 남아 있는 작품들이 꽤 많다. 1989년 들어 그룹해체를 결심하고 나서 그동안 숨겨왔던 일련의 작품들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4개의 변기-85앙데팡당을 위해>(1985)는 제11회 앙데팡당에 마르셀 뒤샹의 이름으로 출품되었다. 나는 뒤샹이 <샘>을 통해 비록 레디메이드 오브제를 제시했지만 실은 ‘변기’라는 개념을 제시하기 위해 오브제를 사용했고, 그의 무차별적 선택은 이 개념을 성립시키기 위한 제스처라고 생각했다.

즉 그의 이러한 방법은 오브제를 단순하게 개념화하는 모순을 갖는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나는 너무나 유명한 <샘>을 차용하고 이를 복수화시켜 같은 맥락에서 역설적인 비판을 의도했고, 다른 한편 서울의 앙데팡당의 양상을 동시에 비판하고자 했다.

 

김미경: <작가론>(1990)에서 “좁은 의미에서의 예술가 혹은 직업인으로서의 미술이기를 포기한지 오래다”라고 밝혔다. 그러나 여전히 자신을 표현하고 자신의 신체로 작업을 진행하고 있는 양상은 예술의 맥락에 있다. 마치 뒤샹이 오브제를 이해한 방식과 유사하다고 할까. 이와 관련해서 최근의 비디오 작업<Scream>(1999)에서 보인 관객 소외의 측면과 공격성, <Skin licks & Torn flesh>(1999)의 자기 집중, 그리고 <Finger III-hand play>(1997>와 <Untitled97-7>(1997), <Spitting>(1997)에서 보여준 ‘사적 은밀함’의 공개가 어떤 의미를 갖는가?

 

오상길: 그 <작가론>(1990)은 내 자신에 대해 쓴 첫 번째 글이었지만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미술품 생산자에 한정되기보다는 깨어있는 의식을 소유한 전방위 작가를 지향하는 내 입장을 밝힌 것이었다. 최근 들어 내가 비디오 작업에 치중하고 있는 것은 비물질적인 방식으로 관람자와 적극적으로 소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관람자를 소외시키거나 공격하는 것 역시 심리적 반응을 유도해 내어 소통하려는 것이다.

나는 예술행위나 그 결과의 작품의 가치는 감흥이라는 관람자의 반응에 있는 것이지, 작품에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나의 작업은 관람자에게 어떤 자극을 주어 반응을 얻어냄으로써 관람자의 감상행위가 수동적 한계를 넘어서 예술작품의 해석에 개입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김미경: 마지막으로 ‘예술’에 대한 생각과 다양한 자신의 작업이 갖는 중심 의미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 달라.

 

오상길: 내가 해석하는 현대미술은 우리가 함께 맞이하는 이 시대의 인식론과 감성의 토대위에서 부단히 새로움의 가치를 일깨우는 것이다. 앞선 많은 이들이 현대미술의 성격과 가치를 나에게 가르쳐 왔지만 나의 눈에는 여전히, 혹은 끊임없이 많은 예술가들과 그들의 작품들이 우상화되고 있다. 예술가들과 작품들의 우상화는 예술가들 자신에게 도움이 되거나 관람자들에게 봉사하기보다는 주변의 제도를 살찌우는 일에 기여할 뿐이라고 생각한다. 내겐 나의 정신적 물리적 환경에 적극적으로 대응해 가는 열정과 그 치열한 현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래서 난 제도에 포박당하지 않기 위해 유명한 작가가 되고 싶지 않다. 그보다는 현대미술의 ‘광적인 수용자’이자, ‘충동적인 작가’이며, ‘급진적인 이론가’로서 충실하게 대응해 가고 싶다. (정리: 김미경, 미술사가, 강남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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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ntasy, mixed media, on the canvas 176 x  532cm, 1986, Meta-Vox 기획 전시 'Exodus' 출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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