非물질화 - 미술의 그 온전한 존재방식을 찾아서
그려지지 않는 그림들-이승택論
I. 현대미술과 한국의 현대미술 사이에서
현대미술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숙고할 가치가 있는 것은 그 난삽한 외피 속에서도 삶과 예술에 관한 근본적인 성찰을 지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미술이 ‘미술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라고 규정할 수 없는 유동적 상태에 놓이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미술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자각에서 비롯되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현대미술이란 ‘미술은 무엇이고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를 지속적으로 묻고 답해 가는 과정의 미술이며, 이것의 담론화는 미술의 가치가 작품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가치를 인식하는 우리의 정신에 있음을 깨닫게 했다.
현대미술의 낯설고 유동적이며 과정적인 성격들은 이런 동시대적 의식의 진행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에 다름 아니다. 많은 현대미술 작품들이 낯설음으로부터의 충격과 혼란을 동반하고 있는 이유 역시, 기존의 질서와 가치를 뒤틀고 어긋나게 함으로써, 발상의 전환과 인식의 변화를 이끌어 내려 하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은 모든 사람들이 추구하는 가치이지만 정작 개별적인 취향과 개체적인 감성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므로, ‘아름다움’을 감상하고 즐기는 일은 어떤 의미에서 이미 알고있는, 그래서 익숙한 미적 가치를 재확인하며 소비하는 일이라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오늘날의 예술이 추구할 목표가 아니다. 이 때문에 현대미술 애호가들은 미술로부터 이 ‘전형적 아름다움’의 소비 대신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풍요로운 문화적 가치를 만끽할 수 있게 된다. 나아가 오늘날 예술의 ‘감상 활동’은 예술가가 일방적으로 제시하는 미적 가치를 수용하고 소비하는 소극적 차원을 넘어, 현대미술 문화의 주체로서 담론에 참여하며 그 문화적 가치를 함께 생산해 가는 일이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한국의 현대미술에 관해 논하지만, 이상한 일은 정작 한국미술이 지닌 ‘현대성’의 본질을 설득력 있게 피력하는 담론이 없다는 사실이다. 한국미술의 ‘현대성’ 담론은 물론 근․현대화 과정에 관한 주체적 역사관과 문화적 대응으로서의 정체성 논의로부터 비롯되어야 하지만, 그간의 한국현대미술은 서구 동시대 미술의 자극과 충격에 대응하는 문화적 갈등과 절충의 현장적 가치를 간과하고, 소위 미술 운동을 주도해 온 세력들의 입장들을 검증 없이 옹호하는 진술에 그치고 있을 뿐이다. 이 맥락에서 보면 엄밀한 의미에서 한국 미술문화에 있어서의 본격적인 ‘현대성’ 논의는 아직 본 궤도에 들어서지도 못한 셈이다.
한국의 현대미술을 ‘현대적 자각’ 이전단계로 본다면, 지난 한 세기의 미술현상들에 대한 이해가 훨씬 명쾌하게 이루어질 수 있다. 역사상 유례 없이 많은 단체들이 난립하고, 그 단체들 사이로 수많은 예술가들이 이합집산離合集散하는, 그 많은 운동사를 납득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맥락에서라면 고희동이래 이중섭과 같은 이상한 천재들과 어쭙잖은 자칭 거장들에 의해 그늘에 가려진 진정한 한국의 미술문화를 설명할 수 있고, 미술계의 반문화적 행태들과 권위의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해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에는 현대미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해야 하는 것일까? 그러나 이것은 엄연히 다른 문제이다. ‘현대’라는 주체적 역사관의 부재가 ‘현대화’ 과정에 해당하는 일련의 역사적 과정과 이것을 체험한 주체들의 역사의식 부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며, 오히려 현상적으로 존재해 온 역사적 과정에 대한 미시적 연구를 통해 비로소 ‘현대성’의 본격적인 담론이 가능해 질 것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II. 작가 이승택의 현대미술
사실 한 예술가가 50여 년 가까이 예술의 궁극적인 문제들에 관한 일관된 자문과 실험을 줄기차게 실천해 왔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그는 일제의 식민통치 기에 출생하여, 파란 많은 우리 근․현대사를 두루 체험한 작가이기에, 그의 예술적 실천은 서구미술의 정보 유입에 따라 변모해온 우리 문화의 현실-전통의 단절과 문화이식에 따른 갖가지 통증들과 맞물려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서구 문화와 제도의 이식을 경험했던 제3세계 문화권의 역사적 현실인식과 문화적 담론의 구체적인 실체 중 하나일 터이다.
예술가로서의 이승택이 지닌 가장 큰 매력은 파란만장한 세월을 살아오면서도, 변하지 않는 가치를 일관되게 추구해 왔다는 점에 있다. 그리고 그의 삶을 고독하게 만들어 온 안팎의 수많은 요인들이 오히려 이 작가의 생애와 예술적 성취들을 더욱 독보적인 것으로 만들어 왔다는 점은 매우 흥미로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공식적으로 발표된 이승택의 첫 작업 <역사와 시간, 1957>에서 볼 수 있듯 그는 초창기부터 ‘조형’의 문제를 의식적으로 거부하고 있다. 즉 기존 예술형식으로서의 ‘조형’이라는 통념과 방법 그리고 그 존재방식에 대해 회의懷疑하고, 무엇이 오늘날의 예술에 있어 가치 있는 인식이며, 예술이 어떻게 존재해야 할 것인지 자문해 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는 나아가 그의 작업이 통념적 미술의 존재방식을 의도적으로 거스르고, 전혀 생경한 형태로 존재하도록, 손에 잡히는 것이면 무엇이든-경우에 따라 손에 쥘 수 없는 것들도- 상관없다는 식의 거침없는 방법을 선택하는 것으로 구체화되었다.
통념을 의도적으로 거스른다는 것은 일종의 반항이지만, 이 저항의 힘은 통념으로 충족되지 않는 정신의 결핍으로부터 비롯하며, 이러한 반항에 수반된 마찰을 충분히 감당해 갈 수 있는 힘을 스스로 자각했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익숙한 것들과 맞서거나 과감히 버리고 낯선 것들을 찾아 기꺼이 함께 변화하려는 태도 역시, 예술가 특유의 호기심과 도전의식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정작 그의 놀라운 힘은 동시대 미술의 흐름을 읽는 통찰력과 그에 독립적으로 대응하려는 열정에 있다. 그가 문화와 제도의 이식과정에서 보고 깨달은 것은 서구예술의 정보 속에 담긴 동시대 예술에 관한 인식과 태도였고, 그가 의도한 것은 그러한 맥락에 자신의 재능을 담보로 대응하려는 전략이었으며, 그가 남긴 것은 역사적인 현장의 체험을 그만의 방식으로 거침없이 소화해낸 대안적 예술이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가. ‘非조각’ '反개념'의 전략
이승택의 작업에 관해 가장 많이 언급되어온 개념 중에 ‘非조각’이란 개념이 있다. 물론 이승택 자신도 ‘非조각’ 혹은 ‘反개념’이란 용어를 즐겨 사용해 왔고, 그래서인지 대부분의 비평가들이 그의 작업을 ‘非조각’ 혹은 ‘反개념’의 맥락에서 풀이하고 있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의 ‘非조각’과 ‘反개념’은 “기존의 질서와 고정관념의 거부”의사 표명일 뿐, 실제 그의 작업들은 애당초 ‘조형’을 목표로 하는 일체의 조각개념과 관계가 없는 것이다. 때문에 그의 ‘非조각’ 개념은 조각이란 기존의 예술영역에 대한 反anti 혹은 非non의 성격이 아니라 전격적 거부라는 일종의 단절개념으로 해석되어야 하며, 같은 맥락에서 ‘非조각’ 혹은 ‘反개념’을 본질적인 부정의식과 구별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가 비록 기존의 미술에 대해 강한 비판적 단절을 표명해 왔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한국미술이라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의 기존의 질서와 고정관념에 대한 불신과 단절의 선언으로, 궁극적이기보다는 전략적인 차원에서의 부정으로 이해되어야 하며, 이런 맥락에서 이승택은 오히려 동시대 한국작가들 중 드물게 현대미술의 원리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그 code들과 어법idioms들을 독자적으로 구사한 작가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나. '非물질화'의 Code와 Idiom들
반면, ‘非물질화’의 개념은 그의 미학적 지향을 설득력 있게 뒷받침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非물질화’의 개념이 그가 다루어 온 매체들, 예컨대 바람이나 물, 불 등 소위 ‘형체가 없는 작품’에 한정된 것은 아니다. ‘非물질화’는 현대미술 맥락 전반에 걸쳐 나타난 동시대적 현상이자 핵심적인 개념이며, 미술작품의 존재와 다양한 형태의 존재방식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방법론이었다. 다시 말해서 작품이 지닌 예술성이란 무엇이며,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포착하는 것인지, 또한 예술작품의 가치가 우리의 삶에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의 담론 속에서 지속적으로 묻고 답해 온 결과인 것이다. 현대미술은 기존의 미술에 대한 대안적 존재방식으로서의 유동성과 과정적인 성격을 띤, 사물의 차원을 넘어선 개념적인 활동으로 나타나 왔고, 이승택의 ‘非물질화’ 개념 역시 이런 점에서 첨예한 동시대성을 띠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승택에 의한 非물질화는 동시대 서구 예술가들에게서 드러난 개념화 현상과 달리, 독특한 상상력과 물리적 현상에 개입하는 의도된 우연성 그리고 민속적인 문화적 감성 등으로 인해, 그의 미학적 성취를 서구 작가들의 그것과 뚜렷이 구별되게 하고 있다. 이 때문에 그의 작업은 동시대 미술 문맥에서 흔히 나타나는 일반적인 code와 어법들idioms로 해독되지 않는다. 대신 우리는 그의 작품들 속에서 그만의 고유한 code와 어법들idioms을 만나게 되는데, 이것이 수많은 다양한 형태의 작업들을 일관되게 아우르는 이승택의 미학을 구성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물론 이러한 미학적 code와 어법들idioms은 그의 독특한 DNA적 특성과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을 것이다. 이승택은 주변, 혹은 역사로부터 적지 않은 motive들을 빌어 왔지만, 그 motive들은 언제나 이승택이 아니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그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소화되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나는 이 작가가 무속巫俗의 기운氣運으로부터 얻은 motive들과 <바람>이 그리는 장면들, <화제火祭> 등에서 소위 예술 外的 조건들을 독특한 방식으로 code화하여 작업에 끌어들임으로써, 근대적 예술개념과 예술가라는 주체의식을 동시에 해체시키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점을 뒷받침하는 또 하나의 예로 그가 그저 발견하고 선택했을 뿐인 어떤 장면을 작품으로 제시한 <태양열 畵> <목구 놀이> 등 일련의 작업들을 제시할 수 있다. 이 작업들에서도 우리는 제작이라는 전통적인 방법을 벗어 던진 이승택의 脫근대적 작가의식을 보게 되는데, 그 이유는 이 작업들이 제작이라는 전형적인 방법에서 벗어나 있음으로 해서 작가와 관람자 사이에 일방적으로 이루어져 왔던 감상이라는 구조를, 무엇이 작품이고 ‘예술성’인지 다시 생각하게 하는 일로 바꾸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이 지점에서 그가 ‘선택’과 ‘제시’라는 非전통적 방법을 통해 작가가 작품에 어떻게 개입하고 있는 것인지, 그리고 그 개입의 의미가 무엇인지 매우 구체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이승택이 제시하는 장면들에서 예술성을 찾으려고 노력하기보다는, ‘그렇다면 무엇이 이 시대의 예술적 가치이고, 그 가치는 어떻게 구해지는 것인지’에 관한 맥락의 이해가 더 중요한 문제임을 간파할 수 있고, 이러한 노력을 통해 현재 우리의 정신적 상황과 문화적 code를 이해하는 일이야말로, 기존의 예술적 가치를 대체할 현재적 담론에 접근하는 지름길임을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즉, 그에게 있어서의 창작행위란 예술작품이라는 근대의 우상적 가치를 생산하는 일이 아니라, 매체에 개입하여 그것들의 다양한 code를 독자적인 방식으로 조합하고 제시하는 ‘작업’이며, 그에게 있어 작품의 제작은 근대적 예술의 창조Creation개념과는 구별해야 할 다양한 문화적 code들의 중층적 재통합Reconstruction 개념으로 해석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그의 ‘非물질화’ 개념은 이승택이라는 작가의 위상을 근대적 개념으로서의 그것과 분명히 구별짓게 하는 핵심 개념이며, 그 어법/방법들이 이 작가의 미학을 가장 첨예한 현대미술의 전위에 서게 하고 있는 것이다.
이승택, 바람, 1971
III. 이승택의 미학적 성취와 작품 읽기 - 바람이 그려내는 그림들
이승택은 강인한 정신과 뜨거운 열정을 지닌 작가임에도, 내게는 왠지 그려도, 그려도 그려지지 않는 물 위의 그림처럼 ‘그릴 수 없는 그림’을 그리는 작가처럼 생각된다. 이것은 필경 나에 의해 그려진 그의 모습이겠으나, 아마도 그가 ‘알고 있는 것’과 ‘알 수 없는 것’ 사이를 오가며,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에서 예술의 ‘존재’와 그에 관한 ‘인식’의 새로운 국면을 제시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인 것 같다. 예술이 지닌 매력은 분석의 지평 바깥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저 무모하고 무용한 그래서 한편 지극히 소모적일 수도 있는 아름다움에 있고, 끝도 없을 부정Negative을 향한 참다운 긍정Positive의 지향이 갖는 정신의 가치에 있다. 바로 이점 때문에 역대의 뛰어난 예술가들이 한결같이 ‘합리적 사고’보다 ‘시적 광기’ 속에 살면서, 이것이 지닌 힘에 매료되어 오지 않았던가?
마르셀 뒤샹의 레디메이드가 예술작품에 관한 통념을 전복시키려는 전략의 산물이었다면, 도널드 저드는 작품의 제작을 거부하고 공장에서 제품의 형태로 생산하게 함으로써, 예술작품에 드리워진 통념적 아우라Aura가 배제되도록 하여, 예술작품의 관념적인 형이상학을 해체하고 그것의 대상적 차원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이승택의 <바람>은 붉거나 흰 천 조각들을 나뭇가지 혹은 공중에 매달아 놓음으로써, 기압의 차이에서 비롯된 공기의 이동(바람)이라는 자연의 현상이 작가의 손으로 그려낼 수 없는, 숨이 차 오도록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도록 하고 있다. 펄럭이는 깃발을 통해 바람이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의 힘과 현상 그리고 아름다움을 가시화(可視化)하고 있는 이 작품은 바람이 그리고 있는 그림이라 더 아름다우며, 어느 순간 그리고 어느 장소의 조건 속에서만 이루어지는 현상이라 더 호소력이 있다.
바람의 힘을 빌어 예술적 호소력을 현상화해 내는 의식의 가뿐함과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동여매며 벌이는 치열한 자신과의 싸움, 그 정직함과 순수함 그리고 붉은 열정이 빚어내는 모순되고 부조리한 의식의 세계야말로 오늘을 숨쉬고 살아가는 정신의 현재가 아닐까?
IV. 현대미술- 그 海圖없는 항해의 지평에 서서
이 시대의 진보적 예술가들은 한사코 현재를 과거와 구별짓고 정해진 해도도 없이 새로움을 향한 끝없는 항해를 계속하고 있다. 현대미술의 탁월한 가치는 과거의 전통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음을 깨달았을 때, 하나하나 처음부터 다시 숙고해야만 한다는 사실도 함께 자각했다는 점에 있다. 그 때문에 현대미술가들은 이 시대의 예술적 가치를 다른 미적 규범으로 대체하려는 시도의 무모함을 인정하고, 대신 개체적 대안의 제시와 담론의 문화적 보편성을 통해 그 차이와 동질성을 이해하고 공존시키는 문화적 지평을 지속적으로 확장해 왔다.
나는 이승택이 특유의 고립노선과 Negative 전략들로 예술의 가치가 예술작품이라는 구체적 사물의 차원에서 발현되는 것이 아니며, 예술작품이라는 가시적인 구조를 통해 제도 속에서 실현되는 것도 아님을 분명히 해 왔다고 생각한다. 예술의 참다운 가치는 진리 혹은 그에 준하는 가치를 향한 우리의 숭고한 정신에 있음을 말하는 것이리라.
사실 바로 이러한 老선배의 신념이 오늘 나의 『작가 이승택 다시 읽기』에 강한 동기를 부여했을 뿐 아니라, 이 시도가 한국이라는 지역적․문화적․역사적 현실에 대응하는 한국미술로서의 ‘현대성’ 제고의 가능성과 그 방법을 검증하려는 비평적 시도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지도록 하고 있다.
한국의 현대미술에는 역사적 변혁기의 문화적 충격과 절충의 과정이 생생하게 살아있으나, 그 혼돈의 시기를 메웠던 집단 운동사 중심의 담론한계로 말미암아, 비판적 극복의 선명한 과제들과 새로이 쓰여질 담론의 여백을 오늘에 남겨놓고 있다. 결국 이 변화의 시기에 관한 진정한 역사 쓰기는 주역들의 예술적 실천과 미학적 성취의 분석과 연구를 기반으로, 우리는 누구이며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지 그 뿌리로부터의 본격적인 논의를 시작함으로써 가능해 질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승택과 같은 앞선 선각자들과의 깊고 내밀한 대화가 지닌 의미를 조용히 되새기려는 이유이기도 하다.
오상길(작가, MIA 관장)
각주
1) “나의 反개념 정신이란 다름이 아니라 지루한 기존의 질서와 고정관념을 거부하는 사고로서, 또 하나의 벽을 뛰어넘는 새로운 예술을 개척하기 위한 실험예술을 말한다.” 「나의 反개념 정신과 방정식」, 작가의 글, 가나아트 1989
2) <무제, 나무+오브제, 5m x 4.5m x 4m, 1980> 등 수많은 노끈작업들과 <돌탑, 1965-1986> 시리즈들, 그리고 <바람> 등 대다수의 작업들에서 형태와 색채 그리고 표현의 방법들을 무속의 motive로부터 얻고 있거나, 토대로 제시하고 있다.
3) 나는 헝겊이나 종이를 꽁꽁 동여맨 일련의 설치 작업들로부터 민속 문화의 편린들과 함께 일종의 강박적 사디즘sadism을 느끼곤 한다. 이것을 이 작가가 보고 느끼고 겪었던 정신적 공황을 스스로 치유하려는 본능적 반응이라고 해석하면 지나친 것일까?
“각목에 노끈이나 새끼줄을 둘둘 감는다. 흙을 붙이고 또 둘둘 감으며 시작한 내 업(業)이 어느새 감으며 묶는 것이 되어버렸다. 아무 하잘 것 없는 이 줄(개념)은 현대의 진통을 감으며, 묶으며 부질없는 탄생을 위해 맹세도 했지만, 물체와 이미지는 늘 나를 배반하고 실망과 노여움만 키워왔다. 그래도 견디는 길은 이 길뿐이고 보면, 자괴(自壞)의 속성에서 벗어나려는 이 작업은 진한 고통을 찾기 위해서 시대의 모든 절망을 다 묶고, 속고 속이며 매어져 오늘에 이르렀다.(중략) 나의 줄 작업은 한 매듭 한 매듭 덩어리의 응결을 위하여 묶고, 감으며, 풀어주면서, 애를 태울 것이며 이러한 도전은 금방 새 것을 토해낼 것 같은 기쁨과 슬픔이 엉켜 있는 채찍에 쫓기며 아무도 가지 않은 공허한 길을 향해갈 것이다.” 「내 非조각의 근원」, 이승택, 공간 1980. 5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