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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글은 세 번째로 수정해서 싣는 것이다. 항상 글 쓰기와 읽기의 강박에 시달리지만, 유난히 이 글에는 마음이 더 쓰였다. 그것은 아마도 존경했던 선배예술가에 관한 착잡한 마음 때문일 것이다. 처음 글을 쓰기 시작할 때부터 감정을 억누르기 위해 많이 노력했지만, 시간이 가면서 더 절제했어야만 한다는 반성이 인다.



열정熱情을 잃은 '만남'의 수사학修辭學

 

 


아침의 산책

코끝을 스치는 찬 공기에 문득 가을이 깊어 있음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숲이 청록의 반투명한 빛을 잃은 것은 이미 오래 전의 일인 듯 하다. 세상은 '스스로自 그러하게然' 나고 스러지며 변하고 있고, 나는 저만큼의 거리보다 훨씬 더 떨어져 있는 이 간격을 결코 좁히지 못한다. 노란 은행잎들이 우수수 떨어져 흩날리는 이 거리에 서서, 이미 많이 깊어 있는 가을을 느끼는 일도 나에겐 더없이 참혹한 자기동일화自己同一化의 혼돈에 지나지 않는다.
산다는 것은 한 순간 천 길의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져 버릴 하찮고 서러운 연명延命의 순간들에 지나지 않으며, 이 좁디좁은 머리 속 한가득 차있는 삶에 관한 생각들은, 온 몸과 마음을 번뇌煩惱로 채우고, 끝내 타고난 분별分別의 초라함을 되새김질시킨다.

앞서 세상의 '스스로 그러한' 이치를 깨달은 이들은 지금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이 풍경 속에 숨겨진, 결코 풀리지 않을 절대적 배리背理의 간극間隙을 넘어 갔을까? 노승의 형형한 눈빛을 한사코 뿌리쳤던 그 순간부터 내 삶은 이미 절망적인 것이 되어 버렸는지도 모른다.
서구의 근대철학이나 공맹孔孟과 노장老莊의 가르침이 수많은 삶의 성찰을 남겨 놓았어도, 나로선 그 궁극의 의지만을 감득感得할 뿐 한 발도 더 다가설 수가 없다.

싸르트르는 우리가 처음부터 세상에 내 던져진 방임放任된 존재에 지나지 않으며, 이 참담한 대상화對象化의 구조를 끝까지 응시할 수밖에 없는 저주받은 존재들이라고 말했지만, 나는 이것을 철학적으로 좌절하고 있는 한 명석한 철학자의 탄식으로 이해했다. 결국 세속世俗의 인식론적 판단은 그것의 궁극적 가치를 고민하는 가치판단價値判斷의 윤리적倫理的 문제일 수밖에 없고, 이것이 회의懷疑하는 정신 그 자체만이 숭고한 것임을 다시 일깨우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만남'의 어긋난 마주침

'있는 그대로의 세계' 속의 인간은 '스스로 그러한'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여 나고 사라짐을 받아들이는 무명無名의 존재이다. 이 세계에는 '내'가 없고 '너'도 없으며,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이 그대로인 충족된 세계이므로, 이 세계를 사는 인간은 당연히 예술을 통해 성취할 아무런 목적을 갖지 않는다. 노·장의 무위자연無爲自然 개념이 그렇듯, 동양의 정신문화 속에 근대적 개념의 '예술'이 존재하지 않는 이유도 이러한 세계관과 무관하지 않다.

반면 '있는 그대로의 세계' 바깥의 인간은 어떤 경우에도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볼 수가 없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세계'는 오직 '스스로 그러할 뿐', 인간은 어떤 식으로든 세계의 대상화 구조를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는 것'과 '안다고 생각하는 것' 사이에는 무수한 미시적 혼란과 착각이 있고, '알 수 있음'과 '알 수 없음'의 절대적 간극은 결코 벗어날 수 없을 주체로서의 한계와 본질적으로 모순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지'에 관한 판단은 결국 볼 수 있는 것을 보고, 느낄 수 있는 것만을 느낄 수밖에 없는 절대적 한계의 끊임없는 자기확인일 뿐이며, 감각과 사유는 '언제나 저기에 존재'하는 그 무엇을 향한 동시적 결단이자 혼돈의 연속에 지나지 않는다.
'만남'은 이미 서로 다른 지점에서 출발한 숙명적 관계들 간의 '마주침'이며, 그 때문에 언제나 낯선 경험을 동반할 수는 있겠지만, '있는 그대로'와의 만남은 '있는 그대로의 세계' 속에서는 물론, '있는 그대로의 세계' 밖에서도 불가능한 일인 것이다.




의식의 위치이탈位置離脫

세계는 매순간 전방위로 방치되어 있고, 이 세계를 온전히 받아들일 유일한 방법은 결국 '나'를 잡고 있는 모든 것들을 한 순간에 놓아 버리는 일이다. 그러나 이것은 찰나적 경험도 관념적 상상도 아니다. 오직 그렇게 다른 세계로 접어들어, '나'도 없고 '너'도 없는 세상을 살며 풍화되고 스러질 뿐이다. 이 한없이 평범하고 보잘것없는 낙엽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 길은 궁극의 깨우침을 향해 범속한 세상의 껍질을 벗는 숭고한 구도의 길이다.

또 다른 길은 무릎을 꿇고 '스스로 그러한' 세계에 관한 더 이상의 사유를 단념하는 것이다. 투명한 의식은 한갓 봄밤의 꿈에 지나지 않으며, 삶은 지속적으로 세속의 길에 머물 뿐이다. 이제 경험되는 세상은 원천적으로 그 세상의 실체와 다른 그 무엇이며, 어떤 식으로의 마주침이든 '낯선 그 무엇'에 대한 대상화의 경험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경험 속에서의 유일한 탈출은 비록 진지한 탐색과 성찰을 지향한다 하더라도 본질적으로 예측할 수 없는 곳으로 튕겨 나가는 불규칙 바운드와 같은, 낯선 곳으로의 지속적인 일탈에 불과하다.
같은 것으로부터 다른 모습을 찾았던 수많은 예술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이 일탈은 '스스로 그러한' 세상에 동화될 수 없었던, 천겁의 불안을 견뎌내는 의식의 순간적인 위치이탈인 것이다. 어느 순간 문득 마주서는 생경한 낯설음, 상처하나 없이 무한히 피를 쏟아내듯, 죽음에 이를듯한 지독한 통증 속에서 비로소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을 것만 같은, 타자他者와의 마주침은 바로 그런 것이다. 하지만 이 순간에도 아름다움은 느끼는 자들의 감상일 뿐, 정작 '스스로 그러한' 세상에는 아름다움도 추함도 끔찍함도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그런 것들은 스스로 생각함으로써 반성해야할 감상자의 몫일 뿐이다. 다가서려 애쓰면서도 마주침의 고뇌를 두려워하는 자者의 감정, 하지만 그것도 근본적으로 벗어날 수 없는 굴레 속에서의 경험일 뿐이며, 언제나 다음 순간에 제자리로 돌아와야만 할 세속적 경험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철학을 논하는 예술가들

물론 어떤 예술도 나쁠 수는 없다. 그러나 예술 그 자체가 숭고하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이다. 그리고 예술을 통해 투명한 의식에 다다를 수 있다는 식의 주장도 위선적이다. 나는 이런 식의 본말전도本末顚倒를 참아내기가 힘겹다. 숭고함을 가장한 거짓된 진정성의 不도덕과 非윤리보다 더 나쁜 것은 없기 때문이다.

광기와 혼돈과 좌절을 보듬는 한낮의 따사로운 햇살을 염원하면서도 칼날 위에 선 듯, 폭풍 속에 몸을 일으켜 세우듯 휘청거리며 살아가려는 이유는 자명한 것이다. 언젠가 생生의 마지막 순간을 맞아 평생의 피로를 안고 그 햇살아래 보잘것없이 늙고 병든 몸뚱이를 눕히면서, 위선과 거짓으로 찌든 삶의 회한悔恨을 돌아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참다운 예술가들은 말을 말로서 되게 하고, 그림을 그림처럼 그리기를 꺼리는 것이며, 유명有名과 세속世俗의 그늘을 멀리한 채 방임된 무명無明
1)의 존재로 살다 가기를 마다하지 않는 것이다.

적지 않은 예술가들이 핏대를 올려가며 철학을 논하고 무엇인가를 논증하려 애쓰지만, 누구도 그들에게 철학적 판단의 엄격함과 과학적인 사유의 윤리를 요구하지 않는다. 철학과 예술은 각각의 서로 다른 인식론적 경계 안에서의 사유와 실천을 필요로 하며, 설령 예술이 철학의 인식론적 틀을 빌어 장황한 논리를 펼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결국 예술을 철학적으로 논증하려는 무모한 시도일 뿐이기 때문이다. 한때 일단의 예술가들이 논증적 텍스트 쓰기에 매달려 왔으나, 이 역시 예술 자체를 철학적으로 논증하기 위한 노력은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의심 없이 그러하다고 믿어 왔던 미적 질서의 가치체계에 대한 회의이자, 스스로를 비판적으로 검증하기 위한 특수한 상황에의 대응이었을 뿐이다.
가령, 미니멀리즘의 대상성에 관한 논증도 예술이라는 전통적인 형이상학적 가치에 관한 회의懷疑의 결과였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그야말로 맥락상 판단의 논증에 지나지 않았다. 다시 말해서 미니멀리즘의 새로움은 예술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 가는 길이 아니라, 비판적 오류의 한쪽 끝을 닫아 놓는 '낯설음'의 경험이었을 뿐이다. 때문에 미니멀리즘의 청교도적 윤리성은 정작 예술적 실천의 차원에서 실패할 수밖에 없는 원천적 모순을 안고 있는 것이며, 단 한 작품만으로도 충분한 '날고기'였던 것이다.
2)

사실 예술가에게는 당연한 사변의 결과를 논리적으로 규명해야할 어떤 이유도 없다. 오히려 그들은 철학적 사유의 틀 바깥에서 낯선 곳으로의 부단한 여행을 즐기며 삶의 동기動機를 구해 왔고, 이 매혹적인 활동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에 의해 꽃을 피울 수 있었다. 현대미술이 이름 없는 장인匠人의 손을 빌어 모습을 드러낸 자기磁器의 푸른 빛깔을 도려내고, 기꺼이 스스로 혐오의 외피를 뒤집어쓴 까닭은 이 극렬한 패덕敗德의 윤리야말로 오늘날의 예술가들에게 남겨진 유일한 정직성일 것이기 때문이다.

회고回顧가 준 깊은 회의懷疑

사실 이 글은 오랜 망설임 끝에 힘겹게 쓰여지는 것이다. 한때 무명의 미술학도를 들뜨게 했던 분, 무릇 사이비 예술가들 사이에서 '예술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실천해야 할 것인지'를 진지하게 고민하며 땀 냄새나는 작업들을 보여준 분이었기에, 논리의 옳고 그름이나 형태의 문제는 결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이 한 예술가의 정신을 드러내는 방법이라면 그런 건 어때도 좋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예술가가 한때 당대의 미학적 쟁점에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젊은 날 그가 거침없이 내어 뱉었던 글들은 용기 있는 젊은 예술가의 야심에 찬 도전의 거친 호흡을 느낄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한 때의 시도로 충분했던 것이다. 세인世人들의 기대와 세속적인 성취에의 욕망은 번민하면서 고통스러워야 할 예술가의 영혼을 좀먹고, 처절해야 할 실존적 상황을 미화함으로써 삶을 지탱할 최후의 성실성마저 앗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의 작업과 글 곳곳에 숨어 있는 방어적 표현들 속에서, 이젠 그가 받아들인 것들로부터 스스로 살아 남으려는 고통의 흔적을 보았다.
그러나 차라리 침묵했어야 할 문제들에 관하여 말을 말로써 말이 되게 말하고, 문학적 감성에 기대어 기회를 연장하는 일 따위는 그 자신을 강하게 만드는 일에 결코 도움이 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그 아슬아슬한 두뇌게임에서 살아 남았다고 믿는 순간, 그는 치열한 의식의 열정을 잃고, 장황한 언설言舌로 '그런 것'과 '그럴 듯한 것'의 차이를 교란하며 스스로 거창한 역사주의에 빠져들 것이기 때문이다. 거장의 꿈. 내가 본 젊은 날의 그분은 최소한 그런 미망迷妄에 사로잡힐 예술가가 아니었다.

하지만 오늘, 그 특유의 땀 냄새를 잃어버린 회고가 우리로 하여금 처음으로 돌아가 '예술이 무엇인지' 다시 물음을 시작하게 한다. 그리고 미술의 새로운 존재방식을 찾아 땀 흘리던 진지한 모습과 그 열정이 식어버린 현재의 초라한 뒷모습에서 착잡한 감정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가 발표했던 수많은 텍스트들이 그를 문장가로 이론가로 떠받쳐 주었는지 몰라도, 그런 것들은 내게 결코 중요한 의미로 다가 서지 못했다. 그는 나에게 처음부터 지금까지 늘 예술가일 뿐인 것이다. 때문에 나의 이 물음에, 그의 위치와 업적 그리고 철학적·문학적 소양들은 전시장에 펼쳐진 돌과 철판 그리고 캔버스에 얹혀진 붓질들이나 제스처들처럼 더 이상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런 디테일들은 이미 치열한 의식이 사라진 자리를 메우고 있는, 보여주기 위해 재구성된 기념비적 증거들의 하찮은 흔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가 세상 곳곳에 너무 많은 '철판 위의 돌'들을 깔아 왔다고 생각해 왔다. 그는 세속적 성취를 위해 예술가로서 지켜야 할 위치를 스스로 잃어버렸고, 그 때문에 늘 힘주어 설득해 온 '장소성場所性'의 긴장은 이젠 차라리 작가의 트레이드마크라고 불러야 할 오브제들의, 그야말로 정보화된 구성상의 세련된 '장소 찾기'로 전락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텅 비인 캔버스 위의 사치스러운 붓 자국이 남기는 여운은 참기 어려운 멀미를 느끼게 만든다. 고도의 긴장 연출을 위한 신중한 '위치 찾기'와 절제된 붓질의 제스처들, 마치 득도得道를 자처하는 사이비 도사가 기氣를 모아 부적을 그려대듯, 따블로 위에서의 치열한 정신적 긴장을 잃고 탐미적 속성에 젖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절묘한 위치를 찾아 붓 자국을 얹어놓은 들, 묽은 먹빛의 두툼한 석채石彩가 조명 속에서 아무리 반짝인들, 이 호사스러움은 기껏해야 눈먼 사람들을 미혹할 절제된 세련미 밖에는 보여주지 못한다. 나의 멀미는 그저 망막 위에서 머물다 사라질 이 하찮은 세련의 잔영들이, 작가의 행위를 손에 의해 남겨진 죽은 신체성의 흔적이자 표상表象으로 변질시키고, 조응의 긴장을 흔한 구도상의 균형에 머물게 만들고 있음을 깨닫는 순간의 어지러움 때문이었다.

 

그 옛날 내가 보았던 점들의 흐트러짐과 선들의 순간적 떨림은 찍고 내려긋는 순간의 순진한 긴장을 담고 있었기에 무엇보다 마음에 먼저 다가 설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동풍>, <바람과 함께>의 문학적 서정抒情을 거쳐 <조응>에 이르러서는 출구를 찾는 몸부림으로서의 인고忍苦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그에게 예술가로서의 진정한 고뇌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기에, 그 옛날 선의 '긴장'과 <조응>의 '울림' 사이에는 너무도 근본적인 차이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그에게 무수한 '자기복제'와 '미학적 성취' 사이의 윤리적 모순관계를 되물어야 한다. 유럽과 일본 그리고 한국을 오가며, 틈새를 찾아 이미 거둘 만큼 거두어들인 그이기에 스스로를 연민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일도 더 이상 참기 힘든 일이다. 더구나 그는 회고의 시점에서마저 미술관과 상업화랑의 장사 속 사이를 동시에 오가는, 비록 不도덕한 일이 아니라 하더라도 최소한 非윤리적인 문제들을 만들고 있기에 더욱 실망스럽기 그지없다.

만일 예술가가 삶의 진정성reality을 잃고 '준비된 무無'의 '냉정冷情과 열정熱情' 사이를 오가며, 궁극적으로도 정신의 숭고함을 지향하지 않는다면, 과연 무엇을 위해 평생 이토록 배회해야만 하는 것일까?

 

2003년 늦가을,

 

 

 

각주

1) 나는 앞서 무명無名의 개념을 썼고, 여기에 다시 무명無明의 개념을 썼다. 혼돈을 피하기 위해 보완설명이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되어 몇 마디를 곁들 인다. 무명無名의 존재는 '스스로自 그러한然' 세계 속의 존재로, 이미 무명無名임을 인식할 필요조차 없는 상태에 있으며, 무명無明은 세속의 세계, 그러니까 존재와의 대상적 구조 속에서 빛을 발하지 않는/못하는 상태를 말한다. 다시 말해서 무명無名이 의지意志의 부재상태를 말한다면, 무명無明은 유명有名의 상태에 대응하는 의지를 전제로 하는 개념이라고 말할 수 있다.

2) 나는 모든 이데올로기와 실천이 그렇듯 미니멀리즘과 미니멀 아트 사이에도 극복할 수 없는 원천적 모순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미니멀리즘의 모순은 그 이데올로기의 지향성으로 인해 더욱 절대적인 간극이 되어 버렸다. 많은 오해에도 불구하고 미니멀리즘은 '사물'의 대상성에 관한 근본적인 인식을 갖게 했다는 분명한 역사적 공헌을 했다. 나는 이것을 온갖 양념과 향신료로 범벅이 된 요리를 즐겨온 미술애호가들의 식탁 위에 피가 뚝뚝 떨어지는 '날고기'를 던져 놓는 일에 비유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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