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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디에서 어디로 가고 있는가?
< 고난 속에서 피어난 추상>展
글에 들어서며-한국현대미술 다시 읽기
지난 한 세기 동안 미술Art은 스스로의 존재이유에 관한 끈질긴 비판적 자문을 통해, 예술의 문제를 미추의 판단 이전의 보다 원천적인 정신의 형이상학으로 변화시켰다. 미술에 있어서의 이념과 형식은 방법론으로 대체되었으며, ‘천재성’으로 상징되는 항구적인 미의식은 박물관 유리장 속의 우상적 가치로 남았다. 오늘의 미술은 “미술이란 무엇이고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가”의 자문과 그에 관한 대안의 제시를 통해 존재하면서, 기꺼이 스스로 혐오의 외피를 뒤집어쓰면서까지 전통적 가치를 향한 패덕을 윤리로 삼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현대미술이란 한국이라는 특정한 지역사회의 미술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다. 미술과 국가는 문화와 정치라는 서로 다른 차원의 가치영역이며, 문화정치학적 목적에서 관계 지어지는 것이다. 결국 한국의 현대미술이란 한국이라는 지역사회의 역사경험과 문화의식에 근거한 동시대미술 문맥에서의 대안문화인 셈이다.
이런 까닭에 한국의 현대미술은 서구미술과의 소모적인 유사성 논쟁보다 문화적 ‘차이’의 가치규명을 통해 생산적으로 논의되어야 한다. 서구미술과의 사이에서 상당한 혼선을 빚게 했던 ‘닮은 외형들 속의 다른 내용’들에 관한 수많은 의문들은 오히려 어떤 지식보다 구체적인 연구의 방향과 절박한 비평적 동기를 제공해 주고 있는 것이다.
‘차이’는 어디서나 자연스럽게 발생되지만, 그 ‘차이’의 인과관계를 밝히기 위해서는 연구자의 지속적인 관심과 의지가 절대로 필요하다. 연구주체의 ‘차이’에 관한 궁극적 의문이 지식보다 더 중요한 하다는 말이다. 나는 지난 50여 년간 한국의 현대미술이 근․현대사의 문화적 현실에 관한 ‘숱한 의문의 부재’ 속에서 논의되어 왔고, 그 결과 참다운 문화적 의미와 가치들이 그 빛을 잃어 왔다고 생각한다.
누누이 강조해 왔듯, ‘읽기/보기’는 ‘글쓰기/그림그리기’처럼 ‘어디까지 확대하여 참조할 것인가’의 해석학과 창의성을 요구하는 작업인 것이다. 물론 이 점 때문에 우리는 종종 ‘읽기’와 ‘쓰기’의 강박에 시달리게 되지만, 바로 이 강박으로 인해 ‘차이’의 문제에 조금씩 더 접근할 수 있고, 같은 이치로 다른 필자들의 진술에 대한 의문들로 인해 그들과 다른 해석을 진술할 욕구를 갖게 되지 않는가?
한국현대미술의 역사에 관해 관심을 갖는 것은 이 길이 바로 우리가 헤쳐 나아가야 할 동시대미술 속의 우리 ‘현실’이며 ‘미래’이기 때문이다.
왜, 그리고 어떻게 다시 읽을 것인가?
모든 미술의 현상 이면에는 다양한 의도들이 있게 마련이다. 그리고 이것을 밝혀내는 일이 가치를 판단하는 일보다 더 중요하다. 아니 미학적 성취를 판단하고 평가하는 일이야말로 현상과 그 이면에 관한 면밀한 분석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
물론 우리 미술문맥을 어떻게 읽어 갈 것인가의 비평적 방법론 역시 서구미술 수용맥락에서의 논의를 넘어설 새로운 원리와 틀을 필요로 한다. 서구미술로부터의 ‘새로운 경험’을 주체적인 역사경험의 맥락에서 이해할 것인지, 문화적 수용의 맥락에서 이해할 것인지는 같은 문화에 관한 전혀 다른 해석의 결과를 초래할 매우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한국현대미술에 관한 기존의 논의들 속에서 ‘우리에게 있어 미술이란 무엇’이고 ‘우리 미술에 있어서의 현대성이란 어떤 의미인가’의 핵심적 의문들에 관한, 예술가들 및 비평가들의 진지한 고민과 해석을 찾아보기 쉽지 않다.
나는 지난 2001년 <또 하나의 국면-한국현대미술의 동시대성>展을 기획하면서 소위 ‘차가운 추상’이라고 일컬어져 온 60년대 후반의 미술과 서구의 기하학 추상 간의 몰관계성을 밝히면서, 이른바 ‘뜨거운 추상’으로 일컬어져 왔던 앞선 시기의 비정형미술과의 ‘뜨거움’대 ‘차가움’ 식의 변증적 관계해석이 무리한 논리임을 지적한 바 있다. 물론 이것은 각 미술들의 발생배경 및 미술의 원리와 방법론 전반에 걸친 판단에 근거하고 있다. 물론 문제의 심각성은 그 미술이 정말 ‘차가운 가’ 혹은 ‘뜨거운 가’에 있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이런 식의 비평적․미술사적 오류가 한국미술의 서구 주변부화의 결정적 원인을 제공해 왔고, 나아가 한국현대미술의 기점 논의와 역사적 조명작업들 역시 동일한 한계를 반복 확인해 온데 있다.
이와 아울러 제기된 또 하나의 문제가 한국현대미술 맥락에 관한 그간의 비평적․미술사적 진술들이 미술운동사 혹은 미술계사건사의 수준에 머물러 왔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이런 논의방식으로 인해 한국의 현대미술은 예술가들의 지속적인 성취에 관한 비평적 연구와 거리가 먼 표면적인 양식의 유행사로 전락되었으며, 이에 따라 예술가들 역시 한 시대의 미술운동과 사건, 그리고 유행양식의 변화에 따라 그 수명이 빠르게 단축되어졌다. 그리고 그 때문에 한국현대미술의 역사는 근․현대사의 다층적이고 광범위한 역사성의 검토 작업과 유리된 채, 예술가들의 문제의식이나 미학적 성취 같은 핵심적인 문제들에 관한 각론적 연구나 비평작업 없이, 이합집산하며 명멸해 온 단체들의 역사와 이 역사 속에서 강자로 살아남은 작가들의 입장에 의존하며 진술되어 온 것이다. 사실 이것은 한국현대미술의 뿌리를 통째로 뒤 흔들어 놓을 만큼 대단히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런 문제들에 관한 위기의식에서 기획된 전시가 2002년 세 번째로 기획되었던 <모노톤Monotone에 가려진 70년대 평면의 미학들>展이었다. 70년대의 단색조 평면미술은 많은 이론가들이 우리 현대미술 맥락상 가장 높은 미학적 성취를 이루었다고 평가해 온 대표적인 미술현상이었다. 그러나 나는 서구의 평면추상과 미니멀리즘, 그리고 일본 모노하物派의 미학적 배경들과의 영향관계 및 현상적 차이에 관한 연구를 통해 이 미술에 관한 적지 않은 비평적 의문들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 전시는 서구미술 및 일본 모노하와의 ‘방법적’ 차이에 맞추어졌다.
왜 추상인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적지 않은 논자들이 한국미술의 ‘현대성’을 ‘추상’양식의 출현과 연관짓고 있다. 그러나 이미 잘 알려져 있다시피 ‘추상’은 서구의 전통적인 재현미술을 극복하려는 역사적 비판과정에서 등장한 ‘이념’이자 ‘양식’이었다. 바꾸어 말해서 서구의 추상은 스타일로서의 양식화 이전의, 역사적 문맥 속에서 구축된 이념의 소산인 것이다.
‘추상’은 ‘대상의 재현적 구조’를 해체한 결과이거나 미술의 시스템 자체를 전복하기 위한 시도로써 등장했다. 추상이 현대화로의 이행과정으로 이해되는 것은 순전히 서구 모더니즘 미술을 뒷받침하는 일련의 이데올로기들 때문이며, ‘추상’이 ‘재현적 리얼리티’보다 현대적이라는 인식은 ‘환영Illusion’이라는 회화적 방법에 관한 강박적인 비판의 결과일 뿐, 이 순서는 추상 이데올로기의 역사적 시위에 의한 것에 불과하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회화적 가치로 인식하는가의 문제이며, 이런 관점에서의 추상은 회화예술의 영역을 조금 더 확장해 놓고 있을 뿐이다.
금세기 최고의 비평가로 추앙받았던 클레멘트 그린버그는 분석적이고 논리적이며 과학적인 자기비판과 검증을 통해 비대상적non-objective이고 비구상적non-figurative이며 비재현적non-representational인 순수 추상회화의 조건을 제시했으나, 그 비판적 제거의 대상을 문학적이고 조각적인 환영주의로 삼음으로써, 비록 명료하지만 ‘예술작품을 만든다는 것은 도대체 어떤 의미를 갖는가?’ 그리고 ‘그림이란 무엇인가?’의 궁극적인 의문을 회화의 형식조건 문제로 단순화해 버렸다.
그러나 ‘환영’은 유럽 전통회화의 형식적 특성에 불과하다. 정작 그리스 조각들로부터 중세의 Icon회화, 렘브란트, 세잔과 반 고흐 그림들의 ‘예술적 가치’들은 ‘환영’이라는 재현의 회화적 방법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각 그림의 ‘reality’라는 대단히 복잡하고 미묘한 방법론적 인식 속에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즉 그린버그의 변증법적 긴장은 엄밀한 의미에서 전통회화의 본질적 가치에 대한 비판적 극복이 아니라, 기껏해야 ‘환영’이라는 형식의 문제에 국한되어 있다는 말이다. 결국 그린버그의 강령Words에 따라 소거되었던 회화의 환영주의는 전면적으로 복권되었으며, 모더니스트들의 청교도적 논리들은 희대의 강박적 윤리의식을 껴안고 미술사에 흡수되고 말았다.
한편, 유럽의 전후추상, 즉 앵포르멜Art-Informel 역시 적지 않은 오해에도 불구하고, 큐비즘까지의 오랜 고전주의적 전통과의 결별이자, 다다의 정신적 계승이라는 역사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앵포르멜의 격정은 다다적 허무와 반항의 표현이 아니라 “원자핵적 우주관에 대응하는 새로운「구조」와「내용」을 지향”하고 있는 것이었다.1)
미셀 타피에는 고독하게 제작에 몰두하고 있는 각 개별 작가들의 작품에 나타나는 전후의 독특한 정신상황을 ‘다른 미학Un art autre’으로 상정하고 ‘앵포르멜’이라 명명하면서, 다다나 초현실주의 같은 유파(에콜)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밝힌 바 있다. “앵포르멜이란 앵포름informe(부정형, 형을 만들지 않음)이라는 소극적이고 엄밀하지 않은 의미와는 반대로, 피안의 추상적 세계를 나타내는 극히 보편적인 용어”로, “형식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려는 무질서 아카데미즘”이며, “아포리오리한 의미 문제를 제시하지 않는다.”2)
한국의 초기 추상미술 다시 읽기
한국미술에 있어서의 ‘추상’은 이미 기성화된 서구미술의 방법을 답습하는 아카데미 차원에서 수용되기 시작하여, 전통의 단절과 역사적 비약이라는 절대적 시대상황 속에서 확산되었다. 일부 작가들과 비평가들은 비정형 미술양식의 공유와 관련하여, 6․25의 참혹한 경험과 그로 인한 허무와 절망이라는 시대적 경험을 서구의 전후 상황과 유비시키면서, 일종의 자생론을 주장해왔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것은 새로운 미술양식에 공감하고 수용했던 당시의 논리를 더욱 강하게 뒷받침해주고 있을 뿐이다. 아니 그런 주장은 이념과 양식의 공유가 오히려 당시의 역사현실 속에서 잉태되었을 치열한 경험의 실체, 그러니까 당시 작가들의 정신 내부에 존재했을 훨씬 더 크고 강렬했을 혼란과 격정을, ‘앵포르멜’이라는 서구미술의 형식과 이념의 공유를 통해 손쉽게 순화시켜 버리는 역기능으로 작용했다는 비판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나는 한국 비정형회화의 시작과 전개 그리고 결말의 과정에서 드러나고 있는 급작스러운 양식의 출현과 집단적 공유, 격렬한 선언의 과잉들, 그리고 일체의 post 현상 없이 소멸해버린 비정형 미술양식의 시대적 운명 등이 바로 이런 점들을 뒷받침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결국 중요한 것은 ‘왜 추상인지’ 그리고 그것이 ‘우리들에게 요구되는 이유가 무엇인지’ 등에 관한 비평적 의문과 그 답을 구해가려는 담론화의 노력이다. 한국의 초기 추상작가들은 역사상 가장 처절했던 시대경험을 지닌 증인들이자, 불확실한 생존의 현실에 맞서 격렬하게 몸부림치며 그 경험을 내면화해 온 예술가들이다. 때문에 이들의 작업들은 서구미술의 이념과 원리 그리고 방법론적 틀에 기대어 ‘유사미술’로 손쉽게 평가되고 정리될 수 없는 중요한 역사적 위상을 가지고 있다.
그동안 적지 않은 이론가들이 이 시기의 미술을 서구미술의 모방 혹은 변용 따위의 유사미술로 매도해 왔으나, 이런 비평적 시각이야말로 심각한 서구 중심적 식민의식에 빠진 전형적인 종속적 관점이 아닐 수 없다. 이들은 서구미술 자체가 광범위한 문화권 사이에서 이루어진 전형적인 혼성 문화임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문화적 동기와 결과로서의 현상을 동일시하는 따위의 기초적인 판단조차 혼동하고 있다. 서구미술의 영향은 문화충격으로서의 도전이자 동기부여였으며, 각 예술가들의 작품은 문화적 절충의 결과로 생산된 ‘또 하나의 혼성 문화’인 것이다.
결국 문제는 서구미술의 영향과 그 결과로서의 미술문화를 검증할 주체적인 비평적 원리와 방법론의 부재에 있는 것이다.
< 고난 속에서 피어난 추상>
이 전시는 당시 미술양상 속에 숨겨진 독특한 문화적 특성들에 관한 새로운 비평적 관점을 위해 준비되었고, 따라서 당시의 작품들을 망라해 놓았던 기존 전시들의 관행에서 탈피하여, 비평적 쟁점의 제시를 위해 필요한 주요 작품들을 초대하는 방식으로 구체화 되었다.
전시의 쟁점은 크게 두 가지로 설명될 수 있다.
그 하나는 당시의 미술이 미술운동사 관점을 통해 진술되어 왔던 것보다 훨씬 다양한 양상을 띠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른바 추상 1세대였던 주경, 김환기, 김병기, 유영국 등을 비롯하여, 변영원, 이응노, 남관, 전혁림, 정규, 정점식, 전성우, 황용엽, 정문규, 김구림 등의 작업들은 이 시기가 서구미술의 강한 영향 속에서도 왕성한 개별적인 조형실험이 이루어진 매우 중요했던 때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당시의 집단운동에서 벗어나 있었다는 이유로 소외되어 왔던 전성우, 황용엽, 정문규 세 작가의 개인전은 그간의 비평적 논의나 미술사 진술들이 얼마나 큰 맹점을 지니고 있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또 하나의 쟁점은 이른바 앵포르멜 혹은 추상표현주의, 뜨거운 추상 등으로 묘사되어 왔던 ’50년대 후반부터 ’60년대 중반까지의 미술이 내용적으로도 서구미술 문맥과 매우 상이하다는 점을 밝히려는 것이었다. 조용익, 김창렬, 박서보, 정상화, 장성순, 윤명로 등 상당수 작가들은 수년간 계속된 작업을 통해 ‘앵포름’에서 ‘포름’으로 점진적인 이행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는 ‘포름’에서 ‘앵포름’으로 진행된 서구미술의 흐름과 역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 결과 이들의 화면은 각 예술가들의 심미적 취향과 문화적 감성을 통해 독특한 미의식으로 대체되어 구조화되었는데, 이것은 한국미술 맥락에서의 비정형성이 서구에 있어서의 재현대상의 해체라는 문맥에서 이탈되어 있으며, 서구의 앵포르멜 또는 추상표현주의가 새로운 양식으로서의 충격으로 받아들여져, 한국의 문화적 색채와 절충됨으로써 서구미술과 전혀 다른 결과에 이르고 있음을 뒷받침하고 있다.(2005.2)
다시 돌아보아야 할 미술의 문제들
역사는 비약하지 않는다. 그리고 다시 확인하는 바이지만, 지금까지의 한국현대미술 맥락에 관한 진술들은 사건사 혹은 미술운동사에 관한 일종의 사건일지에 지나지 않는다.3) 다시 말해서 진정한 한국현대미술의 역사는 아직 공란으로 남겨져 있고, 이 빈 공간이 ‘무엇으로 어떻게 채워갈 것인가’의 새로운 현재적 고민을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이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해 우리는 그 역사의 현장에 가능한 한 가까이 다가서서, 다양한 개체적 경험의 진술과 성취들을 충실히 확보해내야만 한다. 그리고 현재까지의 사건사 혹은 주류 중심적 미술운동사가 드리운 그늘을 살피며, 그 역사적 체험의 진정성과 이것을 뒷받침하고 있는 갈등과 혼란 그리고 고민들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예술가 개인들의 고민과 내적 불안이 싹틔운 성취의 실체를 찾아내고, 그것의 의미를 비평적으로 담론화함으로써 비로소 당대의 예술적 가치가 무엇이었는지 논의해 갈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한국현대미술에 관한 기존의 진술에 대응하는 나의 문제의식이자 관점이다. 즉 기존의 진술들을 비판하고 뒤엎는 일에 앞서, 그 진술들을 대체할 역사에 관한 문제의식 자체를 최대한 신중하게 검토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위해 근․현대사를 비롯한 광범위한 주변 인문사회과학 전반에 걸친 활발한 논의가 필요하고, 이 과정에서 ‘역사성’이라고 인식할만한 가치를 그 경험의 실체로부터 발견하고 재해석하려는 일련의 시도들을 통해 ‘시대적 공백’을 채워가야 한다.
나는 이런 노력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 지루하고도 힘겨운 작업과정이 바로 서구의 틀에서 벗어나는 새로운 역사적 시각에 눈뜰 기회와 서구 근․현대미술 맥락에 대응하는 또 하나의 이데올로기, 말하자면 동시대미술 맥락에 대응해 갈 한국현대미술로서의 위상구축을 가능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각주
1) “20세기 전반의 예술이 고전주의에 대한 반항과 파괴의 신화로 가득했다면, 여기에는 「전제적이지만 안일한, 온갖 반사작용에 대한 완전한 무관심」과 「전인미답의 초복잡성超複雜性에 대한 장대한 모험」이 있다. 또 거기에는 대전 전의 부정과 허무의 극점을 겨냥한 다다이즘에 대한 강렬한 관심과 더불어 이것을「다량 파괴에서 생기는 풍요로운 허무」속에 적극 재생시킨다는 자부심이 담긴 것 같다.” 東野芳明, 「하나의 앵포르멜」, 미술수첩, 1957년 12월호.
2) 미셀 타피에, 「d'une esthetique autre」, 미즈에, 1956년 12월호.
3) 미술운동과 유파는 존재이유와 방법 그리고 결과에 있어 전혀 다른 것이지만, 적지 않은 이론가들이 미술운동 그룹과 유파를 혼동하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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