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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La fountain, 1917>에 관한 이야기들

Marcel Duchamp, La fountain, 1917

1917년 뉴욕의 앙데팡당展Independents에서 별스러운 일이 일어났다. 앙데팡당展은 일종의 무심사 미술제로 누구나 소정의 출품료를 내면 작품을 출품하고 전시를 할 수 있도록 보장된-미술작품에 대한 평가를 거부한다는 측면에서 당시로서는 대단히 혁신적인 제도였다. 문제는 이 전시회에 출품된 <샘>이라는 작품 때문에 일어났는데, 이 작품의 전시를 두고 운영위원들 간의 논란이 빚어졌고, 결국 주죄측은 이 작품의 전시불가를 결정했다. 사실 출품된 작품은 미술작품이라고 볼 수 없는 남성용 소변기로 흔히 볼 수 있는 기성제품ready-made에 불과했다. 다른 점은 이 소변기에 R. Mutt라는 서명이 되어 있었다는 점이었는데, 이것도 실은 변기제작 회사의 이름이었을 뿐이다. 따라서 당시 주최 측의 결정은 무리한 것으로 보이지 않았고, 그렇게 <샘>은 전시기간 내내 그림을 거는 칸막이들에 둘러 싸여 감상(?)되어지지 않았다.

 

얼마 뒤 The Blind Man이라는 잡지에 '미국인들에게 보내는 공개장'이라는 글이 실렸고, 이것이 당시 뉴욕의 미술계를 들끓게 함으로써 <샘>과 관련한 일련의 논란이 첨예하게 부상되었다. 이 글을 썼던 마르셀 뒤샹은 주최 측을 향해 <샘>의 전시를 거부한 근거를 집요하게 추궁했는데, 이 이슈들이 훗날 현대미술의 흐름을 크게 바꾸어 놓게 된다. 뒤샹은 이 글을 통해 미술작품에 대한 예술적 가치의 판단에 관한 주최측의 통념을 비판하며, 미술의 존재와 존재의 방식에 관한 대단히 중요한 문제들을 피력했다.

 

“어떤 이들은 그것을 부도덕하고 상스럽다고 말하지만, <샘>은 부도덕한 것이 아니다. R. Mutt가 그것을 직접 제작했는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는 기성제품에 새로운 이름을 붙이고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으며, 그것의 본래 기능과 의미를 소거하여 제시했다. 그는 이 사물을 통해 새로운 개념을 제시한 것이다.”

 

이 사건은 당시 뉴욕의 미술계를 논란으로 들끓게 했지만, 이것이 미술의 역사 전체를 변화시켜갈 중요한 전환점이 될 것이라는 사실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사실 여기에는 소변기의 출품과 거부라는 사건보다 더 중요한 문제들이 숨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마르셀 뒤샹의 전략이었다. 마르셀 뒤샹은 앙데팡당의 운영위원이었고, <샘>을 출품한 당사자였으며, 이 논란의 중심이 된 The Blind Man의 편집인이기도 했다. 다시 말해서 <샘>과 관련한 논란은 처음부터 끝까지 마르셀 뒤샹의 1인 자작극이었고, 궁극적 목표는 ‘논란’ 그 자체에 있었던 것이다.이 사건 자체는 일종의 해프닝에 불과하지만, 그로 인한 미술의 변화는 대단히 큰 것이었다. 마르셀 뒤샹은 현대미술 맥락 속에서 신화적인 존재가 되었으며, 그에 관한 전문가들의 연구논문만도 1980년대 중반 당시 이미 400여권이 넘을 만큼 풍부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뒤샹의 1인 4역이 지닌 문제에 관해서는 별로 관심들을 보이지 않았던 것 같다. 지면의 제약으로 그에 관한 수많은 이야기들을 다 할 수는 없지만, 나는 무엇보다도 앙데팡당의 운영위원이자 <샘>의 작가이며, The Blind Man의 편집인이면서 이 모든 각본의 연출자이기도 한 마르셀 뒤샹의 1인 4역이 지닌 의미에 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가 이 배역을 통해 예술과 예술가의 존재, 그리고 예술작품의 존재방식을 바꾸어 놓았다고 생각한다. 그는 예술가를 단순한 미술작품의 제작자에서 미술이라는 종합적인 가치의 생산자로 바꾸어 놓았고, 미술작품을 감상의 대상에서 사유와 판단 그리고 담론의 경계 속으로, 다시 정신의 영역으로 끌어 들이는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고 보는 것이다. 이후 대다수의 예술가들은 마르셀 뒤샹의 신드롬을 의식할 만큼 그에게 영향을 받았으며, 그 결과가 미술의 지형도를 크게 바꾸어 놓았다.

 

그러나 전통이 일천한, 그래서 더욱 진취적일 수밖에 없었던 미국의 미술계조차 이 탁월한 전략가를 받아들이기까지에는 47년이라는 실로 긴 시간이 걸렸다. 1964년은, 그러니까 <샘>의 논란이 있었던 1917년 이후, 1923년 작품의 제작 중단을 선언할 때까지 수많은 쟁점과 이슈를 제공했던 이 작가의 전시가 열렸던 해였다. 그러나 그 전시는 미술의 중심지인 뉴욕에서 성대하게 열렸던 것이 아니라 필라델피아라는 지방도시의 한 미술관에서 실로 초라하게 열렸고, 그로부터 4년 뒤인 1968년에 마르셀 뒤샹은 81세를 일기로 삶을 마감했다. 그가 오늘의 현대미술에 끼친 영향은 가히 압도적이지만, 정작 세상은 그가 평생 불어강사로 생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을 만큼 냉혹했었다.

 

Marcel Duchamp, 샘, 1917, 원작 소실로 재현된 기성품, 필라델피아 미술관 소장물론 이런 불행한 일들이 마르셀 뒤샹에게만 일어났던 것은 아니다. 위대한 렘브란트와 열정으로 삶을 불태워버린 빈센트 반 고흐와 칠흑같은 고독의 심연 속에서 평생 홀로 새로운 미술의 역사를 일구었던 폴 세잔의 삶이 그랬듯, 역사 속의 탁월한 예술가들의 삶은 필설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초라하고 비참한 것이었다. 세상은 이런 비극이 비일비재할 수밖에 없는 속성과 이치들을 감추고 있는데, 어떤 예술가들은 이것을 모르고 실낱같은 희망을 안고 살았으며, 또 어떤 이들은 이것을 숙명으로 받아들였다. 세상은 그렇게 탁월한 예술가들을 죽이고 그 죄의식의 보상심리로 그들을 천재로 떠받들며 엄청난 돈으로 그들의 그림을 사고팔지만, 그것이 그 예술가들의 불행한 삶을 보상하는 방편이 될 수 없음을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세상과 진정한 예술가들 사이에는 넘어 설 수 없는 벽이 존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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