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현대미술 다시 읽기 II』의 기획을 마치며
글머리에
역사는 과거를 다루지만 현재적 가치를 제시하는 작업이라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과거를 다시 읽는 일이다. 때문에 『다시 읽기』는 현재를 과거와 구별하려는 새로운 해석의 관점을 제시해 감으로써, 현재와 미래의 대안적 문화를 구축해가려는 생산적인 노력이라고 말할 수 있다. 더구나 이것이 한국현대미술에 관한 것일 때, 사실상 본격적인 역사 쓰기를 위한 전초작업이 되리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다시 읽는 작업은 현재의 미술문화가 안고 있는 심각한 한계를 직시하고 그 구조적인 문제들을 정공법으로 타개해 나아가려는 현재적 고민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비록 현대미술이 오랫동안 순수적 가치를 추구해 왔다하더라도 결코 역사적 맥락에서조차 벗어나 있는 것은 아니었으며, 그 순수함이 어떤 미적 전형이나 양식을 수용하고 천착해 감으로써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과거의 미적 전형과 결연히 단절하고, 오직 예술 그 자체의 본질과 존재방식을 스스로 묻고 답해 가려는 현재적 비판의 궁극적 귀결이었으므로, ‘순수’는 지속적인 비판과 대안적 방법론의 제시에 의해 유지될 수 있는 가치라는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문제의식이 없다면 고민도 없고, 비판적 가치가 없다면 대안적 문화도 있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서구미술의 수용문화와 종속적 구조를 비판해 왔지만, 나는 그 비판이 정작 무엇을 향한 것인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우려할만한 현실에 대한 비판은 당연한 것이지만, 그 비판은 구조적이고 치밀하게, 단호하고도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언제나 대안적 가치를 함께 제시해야 하기 때문이다. 미술활동과 작품들에 관한 분석과 연구, 그리고 논의와 담론이 없는 문화 속에서 과연 어떤 비판이 현재적 생산성을 담보할 수 있겠는가? 나는 이러한 저변에서도 우리의 문화적 역량의 한계를 목도하게 된다.
문화는 개인, 혹은 소수들의 삶에 관한 철학과 감성, 그리고 태도를 반영하는 일종의 집단적 의식이자 관습이다. 때문에 우리는 한 사회의 문화적 양상을 통해 많은 것을 이해하고 파악할 수 있다. 왜냐하면 사회란 단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공간일 뿐만 아니라 그 사람들의 의식과 감성이 공존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문화를 통해 그 사회의 단면을 파악할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 사회 속에서 사람들이 어떤 삶을 살게 되는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겠는가? 신앙과 철학, 이념과 권력 같은 것들은 존중할 만한 의식들이지만, 어떤 식으로든 개체들 간의 ‘다름’과 ‘차이’를 억압하게 된다는 점에서 예술의 자유로움과 뚜렷이 구분된다. 때문에 예술과 문화의 품안에서만큼은 각 개체들이 갖는 서로 ‘다름’의 ‘차이’와 ‘같음’의 ‘동질성’이 세심하게 배려되고 받아들여져야 한다. 생각해 보면 우린 이런 태도 안에서 ‘나’와 ‘우리’를 엮어줄 근본적인 문화의식을 공유할 수 있는 것일 테니까 말이다. 나는 예술과 문화가 시간과 공간, 그리고 문화적 이질감과 언어적 간극을 넘어 ‘우리’의 존재에 관한 기쁨을 준다는 사실을 믿고 있다.
『다시 읽기』의 주변에 관하여
현대미술은 천재라는 우상을 밀어낸 자리를 담론의 장소로 만들어 왔으며, 그 난해함의 호된 질책에도 불구하고 누구나 누릴 수 있는 풍요로운 문화적 가치를 생산해 왔다. 미술의 현장과 비평적 해석은 현대미술의 문화적 담론을 지탱해 온 양팔과 같은 것이었으나, 한국의 현대미술과 그 주변의 문화는 상호간의 깊은 불신의 골을 파오면서 극심한 소모적 문화성향을 수십 년간이나 연출해 왔다. 혹자는 이것을 짧은 현대미술 역사의 한계라고 말하지만, 나는 이것이 결코 미술문화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님을 알고 있다. 주변을 돌아보면 어디 한 군데 제대로 된 가치와 온전한 삶을 꾸려갈 여지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다만 건너면 아주 확연히 다른 사회를 접할 수 있고, 생각이 그곳에 이를 때 나는 이러한 문화적 양상이 지난했던 과거 백년의 역사를 딛고 일어서려는 시대적 여망에 역행하는 퇴행적 문화현상이라는 뼈아픈 반성을 갖게 되었다.
지난 해 나는 『한국현대미술 다시 읽기』를 시작하며, 이것이 회고가 아니라 ‘지금’ ‘여기의’ 문제임을 밝힌 바 있다. 그리고 나아가 현재적 시점에서 요구되는 비평적 담론을 생산적으로 구축해 가기 위해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고자 하는 방법론도 제시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연대를 거꾸로 읽어 가는 일이 아니라, 각 시대 미술의 역사적 연계를 찾아 그 영향관계를 함께 밝혀가고자 하는 것이다. 지난 해 기획의 대상이었던 80년대 소그룹 운동은 비록 그 외형적 양상에 있어 민중미술이라는 거대집단의 그늘에 가려진 듯 했으나, 현재적 시점에서 밝혀지고 있듯이, 관념적인 단색조 회화집단과 민중미술을 표방했던 도전 세력 간의 힘겨루기를 넘어 대안으로서의 새로운 미술문화를 제시한, 현재 진행형의 역사라는 점에서 첫 번째 비평적 재조명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이어 그 두 번째 기획 대상으로 60년대 말부터 7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의 실험적 경향의 미술운동을 그 비평적 재조명의 대상으로 설정했다. 80년대의 소그룹운동과 6,70년대의 실험적 경향의 미술운동은 비록 20여 년이라는 세월의 차이를 갖고 있고, 그 사이에 단색조 회화와 민중미술의 거대집단이 자리 잡고 있으나 여러 가지 면에서 닮아있는 격세 유전적 성격을 띠고 있다. 그것은 우선 소그룹과 개인들을 중심으로 하는 활발한 실험적 성격을 띠고 있다는 점 외에도 거대집단화 된 미술계에 대한 비판적 대안의식과 행동윤리, 그리고 다같이 우리 현대미술 맥락의 대세주의에 휩쓸려 그 참다운 가치가 인식되어 오지 못해 왔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특성들이야말로 한국현대미술의 성격에 관한 비판적 해석과 진정한 의미의 미술사 쓰기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할 수 있는 점이라고 생각된다.
『다시 읽기』의 쟁점과 방법론
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 중반까지의 미술은 동시대미술의 수용과 해석이 거칠지만 활발하게 이루어졌던 초반기 역사라는 점 외에도, 역사적 현실이 예술 활동 속에 어떻게 반영되고 있는지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간 이 미술들은 흔히 서구미술의 맹목적 수용과 모방, 무차별적인 양식의 차용 등으로 과도기적인 성격의 미술로 매도되면서, 그 전후 미술들의 집단논리와 그릇된 문화인식에서 비롯하는 역사논리에 의해 두터운 먼지 속에 30여 년간 잠들어 왔다. 이것은 아직도 근대적인 신화의식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한국현대미술의 문화인식, 그리고 비판적 해석과 담론의 부재로 말미암은 화단의 패권주의1)에 의한 전형적인 역사의 오독과 해석의 오류에 다름 아니다. 현대미술은 절대적인 미적 가치를 부정하고 모든 우상화의 음모를 해체시키며, 스스로 예술의 본질과 역사적 존재방식을 실험적이고 과정적인 방법을 통해 찾아 왔다. 따라서 현대미술 맥락 속에서의 참다운 가치는 ‘담론’과 ‘문화’인 것이며, 그 안에서 천재적이거나 위대한 우상적 가치를 추구하는 일은 일종의 자기 배반적인 모순인 것이다. 또 이러한 시대적인 인식으로부터 발현되는 대안적 미술은 결국 개체적 대응에 의해 모색될 수밖에 없는 방법적 특성을 갖는다는 점에서, 한국현대미술의 맥락마다 등장하는 수많은 그룹들과 단체들, 그리고 그 사이를 분주히 오가는 예술가들의 이합집산이 연출하는 집단화는 미술의 논리이기보다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의 논리인 것이다.
그러나 당대의 주도적 흐름을 형성해 왔던 패권주의는 결과적으로 한 시대의 미술문화를 단순화시키고 그 담론을 빈약하게 만듦으로써 스스로 역사적 평가의 대상이 된다는 점에서 결과적으로 주류세력들 자신에게 부담으로 작용하게 되기 마련이다. 현대미술 맥락 속에서의 집단화는 그 자체만으로도 기현상이지만 화단의 주도권을 둘러싼 불신과 반목, 그리고 권력과 억압이라는 전근대적이고 반문화적인 질서를 구축함으로써, 결과적으로 한국미술의 발전에 걸림돌이 되어 왔다. 뿐만 아니라 미술의 논리에 있어서도 이러한 집단적 양상은 예술가 개인들의 발언과 예술적 실천들이 그 집단논리 속에 함몰되거나, 해석되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더더욱 바람직한 문화가 될 수 없는 것이다. 특히 6,70년대에는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경향의 미술활동들이 어느 때보다 활발하게 나타났지만, 그 활동들과 작품들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연구는 매우 미흡한 상태에 있으며, 논의와 평가의 과정을 건너뛴 주류중심의 연대기적 진술로 역사를 대체해 왔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현대미술에는 주류와 주변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음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때문에 한국현대미술 맥락에서 보게 되는 집단논리를 미술의 역사라는 맥락에서 이해하려는 시도들이 무모해 보이기조차 한다.
문제는 미술작품과 활동들에 대한 각론적 연구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결여되어 있을 때 역사는 표면적인 현상과 사건을 중심으로 구성되며, 미술의 내용과 상관없는 화단의 대세주의에 의한 중심과 주변을 구성하게 되어, 결과적으로 서구미술의 수용과 종속을 더욱 구조화시키게 되는 것이다. 때문에 나는 『다시 읽기』의 비평적 지평을 열어가기 위해서 지금까지의 주류 중심적 관점을 경계할 필요가 있다는 점에 동의하지만, 그보다는 주류 중심적 관점에서 소외되어 왔던 다양한 주변의 가치를 회복시키는 일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예컨대, 비정형회화와 단색조 평면회화의 주류 중심적 집단논리에 가려져 왔던 6,70년대의 미술운동의 역사적 의미와 작업들에 관한 지속적인 연구를 위한 기초자료의 수집과 분류, 그리고 데이터화, 그리고 자료집의 출간 등의 노력이 그것이다. 또한 6,70년대의 미술활동 안에서도 <청년작가연립전>으로부터 <AG>와 <ST>에 이르는 집단적 성향의 운동사에 가려 그 빛을 보아오지 못한 개인들의 발언과 구체적인 작업들, 그리고 그 배경의 이념과 실질적인 현상들, 그 현상들에 영향을 미쳤던 주변적 요소들의 성격과 내용을 꼼꼼히 밝혀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아가 이 시기의 미술활동들을 전후로 한 역사적 연계의 의미와 가치 역시 밝혀져야 할 것이므로, 당시 활동의 주역들과 장시간의 대담을 진행하고 이를 자료집 담았다. 물론 이 자료들은 이미 <6,70년대 미술운동의 비평적 재조명>의 학술연구를 위해 제공되었으며, 그 결과 역시 자료집에 포함시킴으로써 다음의 역사를 위해 스스로 평가대상이 되고자 했다.
한편, 보다 구체적인 미술의 담론을 위한 작품의 분석과 재조명을 위한 전시를 기획하여 논의의 장을 열고자 했다. <또 하나의 국면-한국현대미술의 동시대성>展은 소위 기하학 추상, 혹은 차가운 추상으로 불려졌던 일련의 정형적 추상회화의 성격과 담론이 정작 서구의 그것과 같은 용어와 개념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인지를 검증하기 위한 1부 전시 <정형의 추상 속에 감춰진 감성>과 동시대 오브제와 해프닝 작업들 역시 서구미술 맥락의 그것과 판이한 양상과 담론을 형성해 왔다는 점을 제시하려는 <시대의식으로서의 오브제와 해프닝>을 2부 전시로 기획했다. 또한, 당시 동시대미술의 핵심적인 쟁점의 하나였으며, 현대미술 맥락의 이해가 심화되면서 나타난 일련의 개념적 성향의 작업들의 독특한 성격에 관한 새로운 해석을 위해 준비된 전시가 3부의 「개념화, 그리고 비물질화」이다.
이 전시들은 물론 소위 ‘뜨거운 추상’ 과 ‘차가운 추상, 혹은 앵포르멜’이나 ‘기하학추상’ 등의 개념정립과 서로간의 변증적 관계설정, ‘실험’과 ‘운동’의 개념 등등의 인식론들과 ‘방법론’들에 관한 구체적인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 것이었다. 물론 나는 한국의 비정형회화 경향을 ‘뜨거운 추상’이라고 부르고 정형적 추상회화 경향을 ‘차가운 추상’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도 회의적이지만, 이런 식의 변증적 관계설정이 한국의 비정형회화와 정형적 추상회화가 미학적 측면에서 사실상의 어떤 대응적 관계를 성립시키고 있다는 것인지, 또 직선으로 화면을 분할하고 편평한 색면으로 캔버스를 덮으면 기하학적 추상이 된다는 것인지, 한국의 정형적 추상회화가 어떤 기하학적 조형원리를 갖는다는 말인지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오브제와 해프닝, 개념미술 등의 용어와 개념설정 역시 미술 양식의 미학적 배경과 방법론을 떠난 단순 유형화의 한계를 안고 있으며, 이런 문제들이 담론이 부재한 유행성 기류를 부채질함으로써 거꾸로 수용미학, 혹은 한국현대미술의 서구미술에 대한 종속화의 우려를 만들어 온 요인이 아닌지 되묻고 있다는 말이다.
달리 말해서 한국현대미술이 동시대적 흐름에 주체적으로 동참하지 못하고 번번이 유행현상에 편승하는 소모적 문화현상을 반복해 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앞선 시대의 예술과 문화를 비판적으로 되새기며 담론화해 오지 못했기 때문2)이 아닌지 생각하는 것이며, 이 점을 오늘까지의 한국의 미술비평과 미술사에 묻고 있는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한국현대미술에 볼 것이 별로 없다는 식의 냉소적인 태도를 보여 온 일단의 비평적 무리들을 적지 않게 보아왔다. 그러나 한국현대미술에 대해 공부하려는 것은 동시대미술 전반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것이다. 6,70년대의 미술계에서는 그 전후의 양상에 비해 비교적 개인들과 소그룹들의 건강한 발언과 운동성이 다양하게 펼쳐졌다. 때문에 실질적인 연구의 대상과 내용이 풍부하고, 그 성과 역시 적지 않은 의미를 지니게 될 것으로 생각된다. 바로 이 점이 한국현대사의 생생한 현장을 역동적으로 재현할 수 있는 역사적 가능성을 지닌 부분이기 때문이다.
또한 6,70년대는 국제적으로도 많은 전위적 경향들이 등장했고 활발한 비평적 활동이 개진되었던 시기였으므로 그 미술문화들 간의 상대적 영향관계를 잘 살펴볼 수 있다. 특히 이 시기의 우리나라의 미술과 담론들은 동시대미술의 정보와 지식을 수용하기 위한 적극적인 노력을 담고 있으므로 그 안에서 문화적 충격과 절충, 그리고 혼성의 구체적 흔적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다. 이를테면 일본의 미술전문지인 미술수첩 등을 통한 정보의 수용과정에서 나타나는 일련의 양식과 재료의 공유 등은 그 비평적 접근의 관점과 방법에 따라 동시대미술 양식의 동질성과 더불어, 역사적 문화의식의 ‘다름’과 ‘차이’를 변별해낼 수 있는 중요한 열쇠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글 후미에
앞서 밝혔듯 나는 『한국현대미술 다시 읽기』의 기획을 위해 열여덟 분의 현장의 주역들과 긴 대담을 진행했다. 참으로 많은 이야기가 있었으나 그 중에서도 지난 시대가 얼마나 깊고 굵은 주름살을 남기고 있는가를 느낄 수 있었던 점이 무엇보다 중요한 소득이었다고 생각한다. 몸소 경험하지 못한 시대의 질곡에 대해 무엇을 감히 말할 수 있을까마는, 다만 그 주름살 사이로 찾아야 하고 다시 읽어내야 할 많은 문제들이 있으며, 그 그늘의 의미를 이해함으로써 진정한 현재적 역사의식을 구축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점만은 분명히 깨달을 수 있었다. 흔히 역사는 승자의 논리라고 말하지만 누가 역사 속에서 끝끝내 승자가 될 수 있을까? 다시 읽히고 되새김되어야 할 역사의 굴레는 언제나 현재를 사는 자들의 논리를 대변할 뿐이다. 오늘 우리가 한국의 현대미술을 다시 읽음으로써 역사는 다시 현재의 가치로 재현될 것이며, 이렇게 다시 읽는 역사 또한 언젠가 또 다시 읽혀야 할 역사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역사의 한 지점에 서서 이곳으로부터 부단히 낯선 길로 접어들려는 우리의 노력은 지나온 길 어느 지점에선가 지금의 우리처럼 새로움을 찾아 나섰던 선배들의 그것과 닮아 있는 것이다. 한국현대미술을 다시 읽으려는 이 어설픈 몸짓을 가상하게 여겨 성가신 요청에 기꺼이 응해 주셨던 선배들의 흰 머리카락 사이로 한 시대를 빈손으로 일궈온 열정과 자애로움을 깊이 느낄 수 있었으며, 그분들께 깊은 존경과 사랑을 전하고 싶다. 더불어 학술연구와 발표에 애쓰신 강태희 선생님, 김미경 선생님, 송미숙 선생님, 그리고 윤진섭 선생님께 감사드리고, 이번에도 자료집 출간에 밤낮을 가리지 않고 큰 역할을 해 주신 전상민 님께도 깊이 감사하는 마음을 전하고 싶다. 또한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의 지원은 이 기획에 있어 결정적인 도움이 되었음을 밝힌다.
해질녘, 노란 은행잎이 우수수 날리며 남산 길을 수놓고 있었다. 이젠 가을도 많이 깊어 있는 것이다.
2001년 11월
오상길(작가, 한원미술관장, 『한국현대미술 다시 읽기』 기획자)
각주
1) 한국현대미술 맥락의 뿌리 깊은 불신은 역사적 질곡으로 인한 생존의 위협 속에서 과도하게 증폭된 개인적 욕망들과 이것을 제어할 수 없었던 비판적 힘의 부재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유난히 많은 단체들의 난립과 그 사이를 분주히 오가는 예술가들의 이합집산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 것일까? 이해관계를 둘러싼 집단논리와 반목은 미술문화의 소산이 아니며, 논의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틈바구니 속에서의 비평은 너무도 무력해 보인다.
2) 많은 작가들은 작업의 발상과 관련하여 역사적 현실로부터 동떨어진 일종의 신화적 진술들을 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자신들이 천명하고 있던 아방가르드적 태도와 근본적으로 거리가 먼 것이다. 또한 이들은 전위와 권위를 한 얼굴 속에 공존시키면서 담론화를 위한 문화적 비판과 도전 자체를 허용하지 않으려는 보수적 완강함을 보임으로써 건강한 담론 자체를 허용할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해 왔던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그들이 추구했던 전위적 정신과 모순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필경은 그들 자신을 역사 속에 함몰시키는 결과로 되돌아 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