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한국현대미술 다시 읽기』
<6,70년대 미술운동의 비평적 재조명>


 

 

삶과 예술 사이에서

모든 욕망은 결핍으로부터 시작되지만 정작 결핍은 존재의 불완전한 상태에서 비롯되는 일종의 근원적인 불안 심리이다. 그래서 자아는 어떤 식으로든 욕망을 충족시키려 하지만, 먹어도, 먹어도 채울 수 없는 허기처럼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지지 않는다. 우리가 먹고 잠자고 배설하려는 생리적 욕구와 다른 종류의 결핍에 시달리고 있는 것 역시 분열된 의식의 불안정한 상태를 스스로 다스릴 수 없기 때문이다. 신앙과 철학이 이 근본적인 의식의 균열을 결코 봉합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이미 이러한 정신의 부조리 상황을 해결하려는 노력이 한갓 덧없고 무모한 일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우리가 세계를 어떻게 인식하고 삶을 받아들여야 할 것인지, 어떠한 태도로 살아야 할지 선택의 길은 사실 그리 많지가 않다. 그저 세상이 흘러가는 대로 살거나, 다시 신에게로 귀의하거나 아니면 스스로 득도의 길을 찾아 해탈하거나, 그도 저도 아니라면 이 고뇌에 맞서 처절하게 실존해 가는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마주치는 사람들의 눈빛에서 욕망과 좌절사이에 드리워진 슬픈 그늘을 보며, 점차 가중되는 무한대의 결핍과 불안을 어떤 식으로든 해결해 가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도 그 그늘에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기 때문이 아닐까?
모든 창의적 사고는 결핍을 해소하려는 욕망과 완전한 상태에 도달할 수 없다는 절망적인 자각 사이의 혼돈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리고 예술은 이 결핍을 해소하려는 욕망들에 의해 시작되고 불안한 심리에 의해 공유되며, 결핍의 외연을 지속적으로 확장해 감으로써 그 해결을 지연시켜 가거나, 욕망의 본질 자체를 순화시킴으로써 분열로부터의 불안을 해소해 가는 것이다.

 

 

현재적 다시 보기

한국 현대사의 질곡은 결국 거시적 관점에서 변화의 역사적 과정이라고 정리되겠지만, 현재의 미시적 관점에선 수많은 개체들의 절대적 결핍과 겉잡을 수 없는 불안으로 가득 찬 정신적 파열의 시기로 진술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자존의 상실감으로 인한 극단적인 분열 상태 속에서도 매순간 생존을 위한 선택과 결단을 내려야만 하고, 상처들은 오직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 아물어 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스스로를 치유해 가는 과정과는 다른 종류의 회복이므로 외형적인 흉터의 끔찍한 모습보다 더 일그러진 정신적 균열이 내면 깊이 자리 잡게 되었을 것이다. 사실 우리 사회의 추한 모습들과 수많은 병적 징후들은 이러한 내면의 상태들이 부분적으로 노출되고 있는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나는 한국 현대사의 굵은 주름살에 드리워진 그늘
1)의 의미를 이해함으로써 진정한 현재적 역사의식을 구축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혹자는 역사가 승자의 것이라고 말하지만 내가 아는 한 진정한 역사의식 속에서는 누구도 승자가 될 수 없다. 우리가 현재를 충실히 살고자 하듯 그들도 그들의 현실을 살아냈을 뿐이며, 언제나 오직 현재적 의미를 충족시키는 역사만이 부단히 재현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다시 읽기는 현재와 이어진 과거를 이해함으로써 미래를 향하려는 역사적 치유와 회복의 의미를 갖는다.

 


다시 보기와 다시 읽기

나는 앞선 워크숍의 발제를 통해 다시 읽기의 당위와 몇 가지 방법적 전제를 제시한 바 있다. 그것은 한국의 현대미술이 ‘역사적 현실의 기반 위에 서있는 문화적 대응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의 문제와 ‘서구미술의 주변부 문화로 인식되어온 한계를 어떻게 극복해 갈 수 있을까’의 문제로 요약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제는 역사적 파편들을 바라보는 관점의 수정과 비판적 담론의 활성화를 통해, 한국현대미술이란 텍스트에 현재적 시각의 새로운 각주들을 추가해 감으로써 구체화해 갈 수 있을 것이라는 입장을 제시했다. 그러나 이에 앞서 한국현대미술의 흐름을 정리하고 평가하기 위한 광범위한 기초작업을 수행해야만 한다. 한국현대미술에 관한 현재까지의 진술들은 미술사라고 보기 힘든 연대기적 성격에 머물고 있는데, 그것은 미술작품과 활동에 관한 구체적인 분석과 비평, 그리고 담론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미술의 흐름을 구성하고 있는 내용들의 부재로 말미암아 사건들과 작품들의 표면적인 양상들을 중심으로 다룰 수밖에 없으며, 그 결과가 주류 중심의 흐름을 구성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는 것이다. 한국의 현대미술을 다시 읽기 위해서는 우선 당시의 활동들과 작품들에 관한 다각적이고 심도 있는 분석과 연구가 개별적 단위로 지속될 필요가 있고, 그 내용들을 토대로 비로소 다양한 비평적 논의를 개진해 갈 수 있을 것이다.

사실 한국현대미술에 대해 공부하려는 것은 동시대미술 전반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우리는 우리의 현재를 밝히고 미래를 열어갈 준비로서 역사라는 대상을 필요로 하는 것이며, 때문에 대단하다거나 보잘 것 없다는 식의 평가는 이러한 공부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특히 6, 70년대 실험적 경향2)의 미술운동3)은 동시대미술의 수용과 해석이 비록 거칠지만 활발하게 이루어졌던 초반기 역사라는 점 외에도, 역사적 현실이 예술활동 속에 어떻게 반영되고 있는지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역사적 의미가 있다. 따라서 나는 지금까지 가려지고 덮여온 역사적 현실의 단편들을 찾아보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역사의 현재적 해석이란 그 시대의 이해관계를 떠난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시각에서의 공시적이고 통시적인 분석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며, 이러한 노력이 역사적 경험이라는 절대적 조건을 배제한 채 단순히 지금의 관점과 가치관으로 과거를 평가하는 오류에 빠지는 것 또한 경계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 시기의 미술활동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작품은 물론, 당시를 경험한 작가들의 증언과 충분한 자료들의 수집, 분석이 절대로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아직 대다수의 작가들이 생존해 있어 이분들과 함께 연구를 진행할 수 있었고, 그 도움으로 어느 시대보다 비교적 충실한 역사적 재현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신중한 접근과 세심한 배려, 그리고 상당한 인내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4)

60년대 말부터 7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의 미술현상들을 부분적으로나마 재현하고 해석하는 일은 생각처럼 간단하지 않다. 왜냐하면 이러한 역사적 재현과 해석에 있어 정작 중요한 것은 이 재현을 통해 밝히고자 하는 바가 무엇이며, 따라서 왜, 지금, 그리고 어떻게 다시 볼 것인가의 선명한 현재적 관점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한국현대미술 다시 읽기가 현재적 해석의 당위성을 스스로 천명할 수 있는 것은 그간의 한국현대미술 읽기가 역사적 현실을 떠난 수용미술의 관점에서 이해되어 왔다는 점과, 현장논리를 중심으로 하는 주류 중심적 관점에 의존해 진술되어 왔다는 사실에 대한 비판적 관점과 그 대안적 해석을 동시에 제시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한국현대미술에 관한 수용미학으로서의 평가논리가 문화의 속성과 예술 본연의 특성을 간과한 기계적 해석
5)이라는 점을 우선 밝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바로 어떻게 다시 보려는 것인지에 해당하는 현재적 관점일 뿐 아니라 어떻게 재현할 것인가라는 방법론의 기초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현대미술 다시 읽기 세미나, 김미경 교수

한국현대미술 다시 읽기 II 이승택 대담

다시 읽기의 방법적 전제

문화라는 것은 오랜 시간에 걸쳐 광범위하게 자리잡은 집단적 의식이자 관습이므로, 어떤 식으로든 일방적으로 동화된다거나 종속되지 않는다.6) 문화종속에 관한 일부의 우려는 미시적 상황들에 관한 비판적 시각이라는 점에서 납득이 가지만, 거시적 관점에선 지나친 해석이 된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려의 수위를 넘어 판단의 관점으로 제시될 때, 문화적 영향이 지역적인 특성들과 물리적 혹은 화학적 결합으로 반응되어 나타나는, 새로운 문화적 양상에 대한 해석에 대해서조차 경직된 태도를 가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실 한국의 근, 현대사는 역사라는 거시적 관점에서 문화적 충돌과 갈등, 그리고 절충의 과정으로 보아져야 하며, 이러한 양상에 관한 미시적 관점에서의 구체적인 접근과 해석을 통해 역사적 가치로 재현해 가려는 노력이 훨씬 더 생산적인 일이 되지 않겠는가?


더구나 예술작품은 개체의 의식과 감성에 의해 주관적으로 이해되고 표현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의 선에 대한 관념과 그려진 선 사이에는 무수한 차이가 존재하며, 그렇게 수많은 선이 그어지고 하나의 그림으로 드러날 때까지는, 실로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의 표현의 욕구와 실현 사이의 충동과 좌절이 거듭된다. 때문에 한 작품과 또 다른 작품의 수용과 모방의 관계를 밝히기 위해 우선 ‘유사하다’는 개념을 어떻게 범주화시킬 것인가의 문제부터 해결해야 하지만, 정작 문화와 예술의 특성을 개념적으로 범주화하는 일이 실현 가능한 것인지 의문스럽다. ‘모방’과 ‘유사성’은 예술의 근대적 신화의식 속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개념7)이며, 어떻게도 입증할 수 없고 아무런 결론도 소득도 얻을 수 없는 극히 소모적인 비판의 방법적 개념인 것이다.

한국현대미술 맥락의 주류의식은 미술계의 권력구조를 반영하고 있는 일종의 패권주의에 다름 아니며, 정작 아방가르드들이 전력을 다해 해체시키려 했던 권력을 궁극적 목적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동시대 미술문화의 소산이라고 볼 수 없다. 그것은 오직 열악한 환경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현장의 생존논리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서구의 경우에도 예술가들의 집단적 활동은 대부분 선언적인 시위형식으로 나타났을 뿐, 한국에 있어서의 그것처럼 주류를 형성한 예도 없거니와, 형성할 수도 없는 논리를 스스로 내포하고 있다. 역사적 아방가르드들이 집단적 히스테리를 일으킨 것도 시대적인 상황에 대한 일시적인 사건이었을 뿐이다. 때문에 한국현대미술 맥락에서 보게되는 집단논리를 미술의 역사로 이해하려는 것은 무모해 보이기조차 한다. 더구나 그러한 집단적 양상으로 인하여 각 예술가들의 발언과 예술적 실천들이 그 집단논리로 해석됨으로써, 그 속에 함몰되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더더욱 바람직하지 않다. 때문에 우리의 관심은 한국현대미술 맥락에 등장하는 집단적 활동 너머의 숨겨진 개인들의 작업과 발언들을 재현하는 일과 이것을 담론으로 활성화하는 것에 모아져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집단적 활동 역시 건강한 운동사로서의 재해석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므로, 개체적 시각에서 집단적 활동을 재해석해 보는 시도 또한 의미가 있을 것이다.

나는 6, 70년대의 실험적 경향의 작업을 추구했던 일단의 작가들에게서 당시의 문화적 갈등과 혼성의 흔적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 낼 수 있었다. 특히 당시의 문화적 충격에 예민하게 반응했던 작가들 중에는 서구미술의 담론에 앞서 그 외연의 양상에 반사적인 대응을 보였던 작가들도 적지 않았으며, 그들의 작업 속에서는 서구미술에 관한 감각적인 이해와 지역적이고 문화적인 대응의 혼성적 양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 작가들은 서구미술을 극히 제한된 주관적 관점에서 이해하려 했고, 그 때문에 현대미술의 담론적 가치보다 근대적 신화의식에 근거한 다소 혼란스러운 의식을 보이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현대사의 질곡을 역사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선명한 단서들을 제공해 주고 있는 것이다.

 

 

현대미술 다시 읽기-마르셀 뒤샹의 전략과 그 의미

마르셀 뒤샹은 ‘그려진’ 것도 ‘만들어진’ 것도 아닌 단지 ‘선택된’ 것을 미술작품으로 ‘제시’함으로써 ‘표현’하지 않고 예술의 본질과 그 존재의 방식에 대한 근원적인 의문을 제기했다. 이것은 당시의 예술 관념과 그 존재방식에 대한 전면적이면서도 본질적인 비판적 도전이었고, 뒤샹은 치밀하게 계산된 공격적인 전략을 효과적으로 수행함으로써 그 충격을 더욱 가중시킬 수 있었다.
 

특히 「샘la fountain」과 「L.H.O.O.Q」의 전략은 전통적 예술관념의 모순을 드러냄으로써 새로움의 가능성을 여는, 그러니까 기존의 가치체계를 비판적으로 검증함으로써 새로움을 얻는 역설을 성립시켰고, 이후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은 이것을 예술의 새로운 전략과 실천의 방법론으로 받아들였다. 뒤샹이 전통적인 ‘그리기’ 대신 단지 ‘선택’하고 ‘제시’만 해서 가치를 전도시킬 수 있었던 것은 물론 치밀한 전략8)속에 숨겨진 개념화의 방법론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뒤샹은 목적을 위해서 ‘그리기’ 보다 ‘선택’하여 ‘제시’하는 방법을 취했고, 이것을 통해 ‘예술적 표현’보다 ‘개념적 논리’가 더 실천적인 방법임을 입증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논리적 맥락은 뒤샹 자신이 제작이라는 구체적 활동에 개입하지 않음으로써 더 명쾌하게 성립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의 무관심, 혹은 무차별적 선택은 이러한 개념을 성립시키기 위한 전략에서 비롯된 계산된 제스처였을 뿐, 우연과는 근본적으로 거리가 먼 것이다. 다만 그러한 무관심하고 무차별적인 우연의 제스처가 비판과 역설의 공격성을 더욱 충격적이게 만드는 효과를 갖게 했기 때문에 이후 아방가르드 미술의 전형적 특성이 될 만큼 효과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뒤샹의 레디메이드 오브제가 선택되어 장소를 이동함으로써 효과적인 매체로 사용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어디까지나 관념적 범주 속에서의 일이었을 뿐이라는 점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샘’의 그 소변기는 수많은 변기 가운데서 특별히 선택될 필요가 없는 것이었으므로 무심히 골라졌지만, 이때 골라진 것은 변기가 아니라 ‘변기’라는 개념이었으며, 그 개념은 ‘변기’라는 사물에 씌워진 ‘통념’이자 하나의 ‘관념’이었으므로 사물 그 자체와는 엄연한 경계가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샘’에서 변기라는 흔해빠진 사물의 외연을 넘어 사물로서의 그 ‘무엇’과 뒤샹의 전략적 개념으로서의 ‘변기’의 두 모습을 보게 되며, 세상 모든 곳의 남자화장실에서 볼일을 볼 때마다 앞에 놓은 그 물건을 보면서 뒤샹의 전략적 개념으로서의 ‘변기’를 떠올리게 된다.
때문에 필라델피아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샘’의 변기가 1917년의 뉴욕 앙데팡당에 출품되어 전시가 거절되었던 그 ‘변기’가 아니어도 정작 별 상관이 없는 것이며, 오히려 소장된 ‘변기’는 뒤샹의 신화 속에 등장하는 그 ‘샘’의 아우라가 존재하는 일종의 근대적인 박물관적 가치가 부여된, 죽은 변기인 셈이다. 다시 바꾸어 말한다면 ‘샘’은 실존하지 않음으로써 더욱 실존적인 작품이며, 보지 않아도 얼마든지 어디든지 존재하는 개념인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뒤샹은 그 대단한 신화에도 불구하고 개념을 위해 오브제의 즉물적 차원을 희생시킨 모순을 안고 있는 것이며, 적어도 ‘존재’와 ‘관념’ 사이의 혼돈을 명쾌하게 해결하지 못한 일종의 ‘관념적 유희’를 제시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현대미술 다시 읽기-예술작품의 비물질화

그러나 이러한 모순은 사실 언제나 존재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모순은 사물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관념이 일으키는 혼돈이자 한계이기 때문이다. 일찍이 칸트도 사물의 알지 못할 불가해한 ‘물 자체의 세계’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던가? 여기에서 중요한 문제는 존재와 인식간의 모순이 아니라 그 모순된 관계로부터 파생되는 ‘관념적 유희’나 ‘개념적 언어’로서의 미술의 존재방식이 결과적으로 예술작품의 ‘비물질화’라는 새로운 국면을 만들어 왔다는 사실이다.


미술작품으로부터 받는 예술적 감흥이란 예술작품이 지닌 고유한 미적 가치로부터 발현되는 것일까? 아니면 우리가 그 작품을 매개로 우리 자신의 잠재된 감수성과 미적 가치를 발견하고 구축하는 것일까? 만일 어떤 예술작품이 ‘개념적 언어’로 존재하는 것이라면 그 작품의 고유한 미적 가치 때문에 소통되는 것일까? 아니면 그 언어적 소통의 가능성 속에 미적 가치가 존재하는 것일까? 예술의 본질에 관한 근원적 의문을 던지는 뒤샹을 위시로 한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의 전략은 물론 예술작품이 지니고 있다고 믿어져 왔던 고유한 미적 가치를 철저히 파괴하려는 인식론적 테러를 통해, 새로움의 가치를 무한히 생산해 가려는 발상과 인식의 전환을 지속적으로 기도하려는데 있다. 또한 그러한 맥락에서 예술은 숭배해야할 대상이 아니라 함께 생각하고 변화시켜 가야할 문화적 담론 속에 자리잡게 되는 것이며, 현대미술은 절대적인 미의 구현이라는 궁극적인 종착점을 향한 것이 아니라 변화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유동적이고 과정적인 성격을 띠게 되는 것이다. 이들의 저항적 태도와 충격적이고 자극적인 방법이 비록 뒤틀리고 일그러진 양상으로 나타난다 하더라도 그 역시 새로운 미술의 윤리에 다름 아니다. 이들이야말로 근대적 개념의 ‘천재’들을 우상의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스스로 예술을 둘러싼 우상화에 맞서 싸워온 진정한 공로자들이 아닌가?

 


한국현대미술 다시 읽기-그 새로운 담론을 열기 위한 하나의 시도

나는 그 동안 흔히 별 것 없다는 식의 음성적 통념으로 가볍게 묵살되어 왔던 6, 70년대의 실험적 경향의 작업들 중에 상당한 담론적 가치가 있는 작품들이 있다고 생각해 왔다. 물론 이런 작업은 개별적인 작가나 구체적인 작품에 관한 지속적인 연구를 통해 밝혀가야 하겠지만, 지금껏 이러한 연구가 얼마나 미진했고 또 절실한 것인지를 밝히기 위해 한 작품을 선정하여 분석해 봄으로써 그 실재적 가능성을 제시하고자 했다.

김구림의 「현상에서 흔적으로」는 세 개의 붉은 색 용기 안에 크기가 다른 세 덩어리의 얼음을 각각 넣고 각 얼음들의 윗면에 트레이싱 페이퍼를 같은 크기로 잘라 올려놓은 채 전시장에 설치하여, 얼음이 녹아 물이 되고 증발되어 사라지는 과정을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보지 않아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것처럼, 이 세 덩어리의 얼음들은 각각 다른 속도와 형태로 허물어져 녹아 없어졌고, 그 윗면의 크기를 짐작하게 하는 트레이싱 페이퍼만 물위에 떠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 얼음이 녹은 물마저 다 증발하게 되면 용기의 바닥에 제멋대로 남아 그 흔적을 보여주게 될 것이었다. 얼음이 녹는 것은 물질 자체의 속성이고, 상온에서 녹는 것이나 얼음이 녹은 물이 증발하는 것 역시 자연현상이므로 얼음이라는 오브제는 비교적 짧은 시간 안에 존재와 변질, 그리고 궁극적으로 소멸해 가는 부재의 과정을 시각적으로 드러내기에 적절한 매체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얼음이 녹는 현상이 아니라 이 현상을 작품으로 제시하는 작가의 의도에 관한 몇 가지 의문들과 그 사이에 자리잡는 미묘한 감정들이다. 죽음과 매순간 직면해 살아가는 존재로서의 우리는 소멸에 관한 한 언제나 특별한 감정을 갖게 마련이며, 사라져 가는 과정은 당연하게 이해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단지 자연스러운 현상으로만 받아들일 수 없는 존재에의 집착을 갖게 한다. 이런 점에서 「현상에서 흔적으로」는 존재와 부재에 관한 격렬한 감정의 충돌과 존재가 사라진 흔적에 대한 끝없는 연민을 갖게 만드는 개념적이지만 사색적인 작품이다.


김구림, 현상에서 흔적으로, 1970
「현상에서 흔적으로」9)는 물론 고체상태의 얼음에서 액체상태의 물로, 다시 기체상태인 수증기로 증발하는 물질의 속성과 이 현상을 가능하게 하는 시간과 온도, 그리고 이 과정을 지켜보거나 최소한 연상하는 감상을 전제조건으로 성립한다. 그러나 사실 작가가 이 현상을 제시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아이디어 차원의 일이고, 또한 이런 현상들은 일상 속에서 수없이 일어나는 지극히 평범한 일이므로, 이런 현상의 제시가 어떻게 예술작품이 될 수 있는 것인지 생각하게 된다.


작가는 얼음이 녹는 조건과 상황을 선택하고 제시하는 것만으로 제작의 개념을 한정시킴으로써 그 변질의 과정에 개입하지 않고도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변화, 즉 물질에서 비물질로, 혹은 존재로부터 부재로의 과정을 보여준다. 이를테면 이 현상은 미술관이라는 장소 속에서 이미 특별한 의미를 획득하고 있으며, 관람자는 작가의 ‘표현’ 대신 순수한 ‘현상의 변화’를 목격하고 그 의도를 생각하는 감상활동을 통해 이 작업의 성립에 개입하게 된다는 것이다. 더구나 김구림의 「현상에서 흔적으로」에서는 얼음만 소멸된 것이 아니다. 그는 얼음이라는 구체적 사물을 시간과 공간이라는 가장 원초적인 현상적 조건 속에 포함시킴으로써 녹여 없앴지만, 이러한 현상을 작업에 도입함으로써 예술작품을 제작한다는 전통적 개념과 예술작품이라는 결과물을 동시에 완전히 소거해 버린 것이다. 때문에 흔적으로 남아있는 붉은 색의 용기들과 트레이싱 페이퍼는 작품으로서가 아니라 그 위에 얹혀진 먼지처럼 풍화되어 퇴색한 사물의 외연으로만 존재한다. 이것은 뒤샹이 ‘변기’라는 사물로부터 ‘변기라는 개념’만을 취함으로써 사물의 존재를 남겨 놓고 있는 것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10)


그러나 나는 이 작업이 작품이라는 결과물을 제거함으로써 감상이라는 활동을 작품의 제작과정에 더욱 깊이 개입시키고, 나아가 작품으로 성립하는 일에 자연스럽게 참여하도록 만듦으로써, 예술작품이 작가와 감상자 사이의 보이지 않는 개념 속에 존재하도록 하여, 그 개념적 소통의 운동을 통해 어떤 미적 감흥을 전달하고 자각하게 하고 있다는 점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작가와 현상의 관계와 그 현상과 관람자의 관계가 그려내는 삼각구도 안에서 아이디어와 원리간의 관계가 성립하고, 그 사이엔 ‘의도’와 그 ‘개념’에 관한 일련의 사색이 자리잡게 되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방법론은 예술의 본질을 묻고 그 새로운 존재방식을 탐구하는 아방가르드 미술의 전형적인 형태, 그러니까 ‘개념적 언어’로서 충분한 소통의 방식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지점에 이르러 얼음과 함께 개념 속으로 사라져 버린 「현상에서 흔적으로」의 의미를 되새기게 된다. 그에게 있어 이제 작품이라는 결과물은 더 이상 남아서 존재하지 않아도 좋은 것이기 때문이다.


매듭짓기

서구의 현대미술이 자신들의 문화적 전통에 대한 역사적 비판과 극복의 과정에서 비롯된 문화적 대응이라면, 어떻게 문화적 전통과 역사적 배경이 다른 한국에 서구 동시대미술의 이념과 양식이 공존할 수 있는 것일까? 그리고 이러한 한계는 과연 극복될 수 있는 것인가?
이런 자문은 역사적 비판으로서의 성격을 갖지만 정작 그 비판은 현재의 우리 자신을 향하고 있는 것이므로 어떤 경우에도 피해갈 수 없는 절대적 명제인 것이다. 말하자면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며, 왜,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인지 생각하지 않는다면 단지 유행을 쫓는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도 없는 것이려니와, 그것이 예술의 본질과 존재방식을 묻는 현대미술과 근본적으로 성격이 다른, 무늬만 비슷하고 내용은 괴상한, 예술일 수조차 없는 그 무엇이 아니라고 말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현대미술은 남들이 예술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예술이 되는 것이 아니며, 어떤 사람은 보아도 알 수 없고 그 본질을 아는 사람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다. 결국 현대미술의 맥락을 모르면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무엇을 해도 아무 것도 아닐 수 있다는 말이다. 현대미술이 본질을 향한 도전을 계속하고 있는 이상, 누가 이 과정을 가벼운 태도로 이해할 여유를 가질 수 있을까?

 

나는 한국의 예술가들이 서구의 동시대미술의 양식과 이념을 공유하고 있는 사실에 관한 비판적 자문으로부터 곤혹스러움을 느낀다. 그것은 명쾌한 대답을 찾을 수가 없어서가 아니라 바로 우리의 현대화 과정이 이식된 문화의식과 제도 위에서 이루어져 왔고, 어떤 식으로도 그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실 바꿀 수 없는 역사적 현실이므로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은 이 역사를 어떻게 해석하고 현재를 열어 갈 것인가를 고민하는 일이다.
하지만 이 곤혹스러운 도전에 대응해 가는 일이 정작 중요한 것은, 한국현대미술이 역사적 질곡으로부터 비롯된 문화이식 과정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나아갈 방향과 그 담론의 차이를 만들어 낼 수도 있는 것이며, 이를 통해 동시대미술의 ‘다른’ 성격을 구축해 낼 수도 있다는 점에 있다. 문화적 다원주의는 비록 서구 사회가 자신들을 중심으로 하는 독단주의의 한계를 자각하면서 대두되었지만, 소위 주변부로 소외되어 왔던 제 3세계들의 눈부신 성장에 따르는 새로운 시대적 조건이 되고 있다는 점에서 상당한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정작 무엇으로 어떻게 다원화해 갈 것인가의 대안적 문화는 바로 그 제 3세계들의 몫이며, 한국현대미술이 현대사의 질곡에 대한 문화적 대응으로서의 맥락을 구축함으로써 안으로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현대성을 확립하고, 밖으로는 문화적 다원주의의 한 축을 구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점이 다시 읽기가 갖는 현재적 가치라고 말할 수 있는 부분이고, 바로 이런 다시 읽기가 과거를 통해 미래로 나아가려는 진취적인 생산성을 갖는다고 말할 수 있다.

사실 한국현대미술 다시 읽기는 그 역사적 해석의 당위와 연구의 방법을 모색하는 기회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부분적인 성과도 있고, 분명히 중요한 계기를 만들게 되겠지만 정작 다시 읽기는 무제한의 지속성을 가짐으로써 비로소 의미를 획득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얼마나 구체적이고 어느 정도의 생산성을 갖게 될 것인지는 다시 읽고자 하는 의지와 열정에 달려있는 것이며, 그 가치는 참된 독해의 역량과 미래에 관한 어떤 실천적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가에 달려 있다고 하겠다. 우리는 이제 한 발을 더 내어 딛은 것에 불과한 것이다.


오상길(기획자․작가)

 

 

각주

 

1) 그동안 이따금 ‘그늘’과 ‘주름살’에 관해 언급해 오곤 했는데, 원조는 문학평론가 임우기 선생이다. 그분의 책을 읽으며 크게 공감했던 표현인데, 그동안 짐짝 속에 갖혀 있던 이 책을 찾을 수 없어서 원조를 밝히지 못했다. 임우기, 그늘에 대하여 도서출판 강, 1996

2) 일반적으로 현대미술에 있어서의 ‘실험experiment’이란 전통적인 미적 가치를 거부하고 예술의 본질과 존재방식을 묻는 새로운 방법론의 시도를 일컫지만, 한국에서의 그 개념은 다분히 동시대미술의 양상과 trend 현상으로 이해된 감이 있다. 말하자면 동시대 미술맥락 속에서 왜 실험적인 작업이 대두되는 것인지, 혹은 그 실험이 무엇을 향한 것인지, 또 어떻게 실험될 수 있는 것인지가 선명하지 않았으므로 포괄적 개념으로 이해되었으며, 따라서 ‘실험’은 현대미술의 특정한 스타일로 해석되는가 하면 그 개념이 개인적 발전과정을 일컫는 개념으로도 사용되었던 것 같다.

3) 서구의 경우에는 작가들에 의한 집단적 움직임이나 단체, ‘운동’은 많지 않다. 그러나 나는 한국현대미술 맥락 속에서 ‘운동’이라고 부를만한 작가들의 활동을 유난히 많이 보게 되는데, 이것을 한국의 역사적 상황논리 속에서 이해되어야 할 특수한 성격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예술가들의 발언과 활동이 받아들여질 만한 문화적 환경이 조성되어있지 않은 상태에서 작가들이 자신들의 입장을 스스로 밝히고 이념을 실현해 가기 위해 선택한 집단논리였다는 점에서 서구미술사에 등장하는 ‘운동’의 개념과는 구별되어 이해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4) 이 시기를 경험한 많은 작가들이 영웅적이고 우상적인 환상을 추구하고 심한 자기 현시욕을 보이고 있지만 비평적 시각에서 그러한 욕구들을 수용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최소한 이들의 역사적 현실을 이해하기 위한 노력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5)사실 우리는 보고 싶은 것만 보려하고, 알고 있는 것만큼만 보며, 그만큼만 이해하려는 일에 너무 길들여져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은 이런 태도들은 알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아는 척을 하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대상에 쉽게 접근하고 단순하게 파악하여 단호하게 평가를 내리는 것은 물론 오만한 태도이지만, 정작 이 오만함의 문제는 자신의 무지와 무모함을 깨닫지 못하여 부끄러움조차 알지 못하게 한다는데 있다.

6) 일제는 36년의 식민통치를 통해 강제적으로 민족사관을 바꾸려 했지만 가능하지 않은 일이었지 않은가?

7) ‘모방’과 ‘유사’의 개념은 원전origin의 가치를 절대적으로 설정하고 그 원전에 대한 그 상대적 가치를 평가하는 것이다. 때문에 원전의 절대적 가치를 인정할 수 없는 상태에서는 성립되지 않는 개념이 된다. 또한 현대미술에 있어 작품의 가치는 독창성, 혹은 개성이라는 우상적 신화의식에 있지 않으며, 그 맥락context의 담론적 가치에 있을 뿐이다.

8) 그러나 이러한 뒤샹의 시도는 뒤샹 자신도 경계했듯 반복해서는 목적을 달성할 수 없는 것이었으므로, 오직 자신의 작업 안에서도 극히 한정된 영역을 신화로 남게 만드는 또 하나의 역설을 만들게 되었다.

9) 1970년 5월 1일부터 7일까지 중앙공보관에서 있었던 AG 1회전에 출품

10) 사실 ‘샘’에서의 사물로서의 변기는 뒤샹의 뻔뻔스러움을 한층 더 부추기고 있기는 하다.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