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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현대미술 다시 읽기 III』의 기획을 마치며

-자료집 서문을 대신하여-

 

 

 

글머리에

 

1863년 落選展에 출품된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현대미술의 성격을 이해하는데 있어 시사적인 작품이다. 이 작품은 구도와 색채 그리고 기법 등이 지닌 소위 회화작품으로서의 예술적 가치보다, 이 작품이 등장하는 시대적 배경과 작가의 도발적 전략 그리고 이 작품을 수용한 후대의 비평적 담론 때문에 종종 언급된다. 이 작품이 당대의 미술 담론에 논란의 동기를 제공했고, 그 담론의 결과가 미술을 변화시켰다고 보기 때문이다. 미술작품의 예술성을 가늠하는 당대의 미적 규범이 하나의 전형으로 존재하던 시대의 예술가들은 남들보다 더 잘 그리는 일에 전념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전형이 붕괴된 후의 예술가들은 ‘예술이란 무엇이며, 무엇이 예술적으로 가치 있는 성취인 것인가’를 고민하는 일부터 시작해야만 하게 되었다. 예술가들은 소위 ‘천재’라 불리던 우상의 자리를 ‘담론’에 물려주었고, 대신 비평이 미술담론의 생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현장을 함께 일구어 가게 된 것이다. 이제 중요한 것은 예술작품으로서의 ‘우상적 가치’가 아니라 예술로서의 ‘가치 판단’에 있으므로, 작품의 제작과 감상이 더 이상 일방적인 시스템으로 작용하지 않는 구조를 갖게 된 것이다.

물론 마네의 도발에는 충분히 설득력 있는 배후가 있다. 19세기 중반의 유럽은 자연과학의 발전과 산업혁명 그리고 합리주의 철학의 대두와 종교개혁, 정치제도의 혁명 등으로부터 영향받는 변화의 급물살을 타고 있었다. 이러한 양상은 물론 미술에도 큰 영향을 주고 있었다. 이를테면 사진기술의 발전으로, 기록으로서의 재현적 가치를 상실한 회화와 조각은 살아남아야 할 절대절명의 위기를 맞았고, 뭔가 사진이 해낼 수 없는 ‘가치’를 생산하기 위해 절치부심 해야 했다. ‘Il faut etre moderne’, ‘Il faut vivre!’ (생명감이 있어야 한다)를 외쳤던 소위 ‘彫像狂’(stuatemania) 시대1)의 연출도 이와 무관하지 않으며, 마네의 도발은 이들의 애국심과 계몽의 광기 어린 집단적 위선과 관련되어 있었다. 많은 젊은 예술가들이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에 열광했고, 이 도발이 새로운 시대의 모럴로 수용됨으로써, 회화는 전통과 결별하고 전혀 낯선 길로 접어들게 된 것이다.

그린버그의 모더니즘 이론은 바로 이러한 마네의 의도적인 전략과 회화에 관한 일련의 자기 비판적 자각에 근거하고 있으며, 이 이론이 현대미술의 새로운 담론으로 자리 잡음으로써 명실공히 새로운 전통의 한 축을 형성하게 만들었다. 그린버그의 모더니즘 이론에 한정된 현대미술의 이념과 양식은 군더더기 없는 명료한 관계를 맺고 있으나, 그 이론을 ‘말씀Word’으로 삼아 그 극단까지 몰고 갔던 미니멀리스트들의 이론이 결과적으로 그 ‘말씀’에 대한 반란으로 대두된 것은 흥미로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세 번째 한국현대미술 다시 읽기를 위해

 

한편, 한국현대미술 담론 속에서는 70년대 한국의 단색조 회화를 그린버그 식 모더니즘과 미니멀리즘의 맥락에서 설명하는 담론들을 수없이 만나게 된다. 70년대 미술은 대다수의 미술평론가들과 미술사가들, 심지어 일부 작가들에 의해서도 소위 ‘한국적 모더니즘’의 전형으로 주장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70년대 단색조 회화가 모더니즘과 미니멀리즘의 맥락에 속하느냐 아니냐의 문제를 넘어, 이 미술이 「우리의 파란 많은 근․현대사의 역사적 질곡에 대응하는 ‘현대’로서의 자각과 그로 인한 담론적 가치를 제시하고 있다는 것인지」의 문제와 맞닿아 있다.

나는 지난 2000년 한국현대미술 다시 읽기를 시작하면서 “이것이 회고가 아니라 ‘지금, 여기의’ 문제”이며, 따라서 이것이 “현재적 시점에서 요구되는 비평적 담론을 생산”하기 위한 노력임을 밝힌 바 있다.2) 그리고 이 다시 읽기가 과거의 미술들에 관한 역사적 공과를 따지고 섣부른 평가를 제시하기 보다, 오늘의 문제를 역사로부터 발견하고 현재를 다지는 일을 위한 역사적 거리 설정과 가치의 중립성을 확보하는 방법적 전제를 견실하게 구축해야 하는 일임을 다짐했다.

 

비판은 가치를 얻기 위한 첫 번째 실천이다. 때문에 많은 것들 중에서 ‘차이’를 드러내고 ‘가치’의 인식에 도달하기 위한 비판은 날카롭고 예리할수록 좋은 것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런 가혹한 비판을 통해서도 우리는 정작 아무 것도 잃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파헤쳐지고 파괴되는 것은 과거이며, 그것이 설령 자신을 향하고 있다 하더라도 언제나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서는 자에겐 오히려 새로운 도전의 기회가 되어줄 것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비판의 본질은 소모가 아니라 생산에 있는 것이며, 같은 의미에서 새로움을 찾기 위한 도전은 과감하고 강력할수록 좋은 것이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이러한 도전과 응전이 활발했던 시대의 역동성을 보게되며, 이것을 통해 역사는 새로운 장을 열어오지 않았던가?3)

 

 

《70년대 단색조 회화의 비평적 재조명》을 위해

 

2000년의 첫 번째 다시 읽기는 《80년대의 소그룹 운동의 비평적 재조명》을 위해 기획되었고, 2001년의 두 번째 다시 읽기는 《6,70년대 미술운동의 비평적 재조명》을 위한 것이었다. 이 두 번의 기획들은 한국현대미술의 특성상 거대집단의 운동에 가려져 그 온전한 담론적 가치가 간과되어 온 미술들을 재조명함으로써, 소위 집단적 대세에 의존해 온 현 단계 미술비평 문화에 새로운 관점을 제시해 가기 위한 노력이었다. 반면 2002년의 세 번째 다시 읽기는 《70년대 단색조 회화의 비평적 재조명》을 목표로 했으며, 2003년의 네 번째 다시 읽기를 《추상미술 유입기의 비평적 재조명》으로 설정함으로써, 앞선 두 번의 기획과 달리 소위 화단의 주류로 자리잡아 왔던 미술들에 관한 메타비평적 접근을 시도하려는 것이었다. 지난 세 차례의 다시 읽기를 위해 흘린 땀을 토대로 연구자들은 기존의 비평담론들에 대한 비판적 논의를 개진해 왔고, 그 결과 무시할 수 없는 담론들을 생산해 왔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은 올해의 네 번째 한국현대미술 다시 읽기의 기획으로 이어져 한층 구체화될 것이며, 이런 노력들이 쌓여 내일의 한국현대미술 문화를 기약해 줄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번 기획의 특징은 70년대 한국의 현대미술 담론과 동시대 일본현대미술의 모노하 담론 사이의 미학적 연계를 검토했던 점이라고 할 수 있다. 소위 70년대 백색 단색조 신드롬이 1975년 동경화랑의 《한국․5인의 작가 다섯 가지의 흰색 1975.5.6-24》전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고, 일본 미술계의 한국미술에 관한 관심이 당시 일본 모노하 담론들과 많은 부분에서 관련이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물론 그 이전, 그러니까 60년대 말부터 이우환의 이론들과 모노하 미술의 정보가 이미 한국미술에 상당한 영향을 주고 있었다. 1972년 제 1회 앙데팡당을 주변으로 한국현대미술에 관심을 가졌던 야마모토 다카시를 비롯한 일본의 미술계 인사들이 한국에 드나들면서 적극적인 관심을 보였던 바, 이러한 주변적 정황들 역시 70년대 중반 이후의 한국 미술계의 양상변화와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된다.

1975년 동경화랑의 《한국․5인의 작가 다섯 가지 흰색》전 이후 소위 단색조 회화들을 중심으로 동경 센트럴 미술관의 《한국현대미술의 단면 1977.8.16-8.28》전과 《한국현대미술의 위상 1982. 3.22-3.28》전 등을 비롯한 크고 작은 전시들이 잇달아 일본에서 열렸고, 이는 한국현대미술을 일본무대에 인상적으로 어필시키는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는 점을 입증하고 있다. 사실 지금까지의 70년대 미술의 비평담론들은 주로 이러한 성취에 초점을 맞추어 왔다.

그러나 이미 수없이 반복되며 평가된 성취는 다시 읽는 차원에서 더 이상 새로운 연구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그것은 70년대 미술에 대한 그간의 평가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의도이기보다는 현재 우리가 안고 있는 비평적 과제에 더 충실하기 위함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한국의 70년대 단색조 미술은 어떤 측면에서 이미 충분히 평가되었다고 보아지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 과도한 포장이 거꾸로 작가들에게 부담이 되고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때문에 다시 읽기는 그동안 간과되어 왔던 이면의, 깊이 숙고해야 할 문제들에 초점을 맞추었다.

 

우선 지금까지 확인된 70년대 미술과 관련된 자료들 중에 왜 일본의 미술계 인사들이 한국의 현대미술에 많은 관심을 가졌는지에 관한 분석을 찾아 볼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마땅히 생각해 보았어야 할 여러 문제들이 현상적인 성취의 자족에 빠져 간과되어 왔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는 이유는, 한국현대미술 전반에 나타나는 현대미술의 인식론적 가치자각의 부재, 즉 예술작품과 비평적 담론들이 ‘예술이란 무엇이며, 무엇이 예술적으로 가치 있는 성취인 것인가’를 고민하는 궁극적 문제들로부터 유리되어 있으면서도, 지속적인 변화를 통해 세속적 가치를 성취하려는 강한 욕구만 표출하는 현상의 원인이 되고 있다고 보여지기 때문이다.4)

일본 미술계 인사들의 관심을 긍정적 측면에서 인정한다 하더라도, 작가들과 비평가들은 그들의 칭찬에 들떠 자신들의 성취에 자족하기보다는, 그들이 주목한 한국미술로서의 가치와 현대미술로서의 가능성이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는지를 성찰하는 일에 더 매진했어야만 했다고 생각된다. 비슷한 시기의 일본 모노하 미술은 미술에 있어서의 일본적 가치 자각이라는 궁극적 담론을 통해 현상적 방법론을 심화시킬 수 있었고, 그것을 토대로 미니멀 아트나 아르테 포베라, 대지예술 등에 구체적으로 대응하는 미학을 구축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당시의 많은 한국작가들이 모노하의 담론에 토대를 두고 있는 용어들과 명제를 손쉽게 차용하고 있고, 심지어 일부 작가들은 모노하 스타일의 양식들을 거리낌없이 모방하여 구사하고 있기까지 하다. 하기는 어떤 작가가 자기 혼자 그러던 말든 문제나 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이 문제의 심각성은 이러한 현상들이 한국현대미술의 비평담론 속에서 아무런 비판도 없이 주류미술로 수용되어 왔을 뿐 아니라, 대외적으로도 한국의 미술계를 대표해 왔다는 사실에 있다.5) 이것을 문화정치학적 관점에서 역으로 보면, 남의 미술담론을 추종하고 그 양식을 모방하며, 그들의 눈에 들기 위해 애쓰는 작가들을 그들이 인정해 주는 결과는 아닌 것인가? 비슷한 것과 그것, 그리고 그럴듯한 것과 그런 것 사이의 차이는 근본적인 것이다. 특히 현대미술에 있어 이 차이는 ‘서로 다른 것’만큼 절대적이며, 어떠한 경우에도 동일시될 수 없는 가치의 차이를 갖는다.

일본 미술계 인사들의 70년대 한국미술에의 관심을 순수하게 평가한다 하더라도, 일제 강점기 하의 야나기 무네요시의 식민미학으로서의 백색개념과의 관련성으로부터 자유로울만한 어떤 근거도 찾아 볼 수 없다는 점에서 문화정치학적으로도 생각해 보아야할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 관점에서 보면, 70년대 한국의 작가들이 자발적으로 집단적 백색주의를 표방함으로써 야나기나 야마모토 등의 미적 취향을 우리 현대미술 전반에 깊이 반영했다는 사실은 깊이 생각해 보아야만 할 매우 민감한 사안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다시피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이래 현재까지 아시아 공영권 노선을 견지하고 있고, 우리는 일제 강점기하에서 왜곡된 근대화의 과정을 거친 치욕의 역사 때문에, 아직도 상당부분에 있어 윤리적 가치의 부재와 도덕성의 타락 등 심각한 사회적 혼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 번째 한국현대미술 다시 읽기를 위해 일본 모노하의 담론들을 공부하려는 것은 한국 70년대 단색조 회화 전반에 걸친 일련의 미학적 담론들이 나름대로의 성취 이면에 모노하의 그것과 얼마간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며, 나아가 수용과 추종을 위해서가 아니라 극복과 대안을 위해 연구해야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상 조사된 모노하의 자료들은 생각보다 훨씬 방대한 것이었다. 자료의 수집과 번역에도 많은 어려움이 있었고, 많은 노력과 비용과 시간이 소요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들은 여전히 만족스러울 만큼 충분치 못하다. 하지만 이 자료들을 통해 최소한 모노하란 무엇이고, 현대미술에 있어서의 일본적 가치 자각과 그 방법론이 지니는 의미와 성취가 우리의 그것과 어떻게 다른 것이며, 결과적으로 이 차이가 70년대 이후 양국의 현대미술 문화를 어떻게 다른 양상으로 만들어왔는지를 이해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

 

또한 기획된 두 번의 학술 세미나 중 2002년 11월 23일에 있었던 두 번째 학술세미나를 《70년대 한국 단색조 회화와 일본 모노하의 미학적 연계와 차이》로 정하고, 일본 미술평론가인 미네무라 도시아키와 치바 시게오 두 분을 초청하여 구체적 논의의 장을 열었다. 원래의 계획은 아르테 포베라와 미니멀 아트의 담론들을 함께 다루는 것이었지만, 준비된 예산으로는 턱없는 일이었다. 이런 시도가 낯설지 모르지만, 적지 않은 사람들이 지금까지 주장해왔던 바대로 70년대 미술이 한국적 정체성을 획득했다면, 그 차별성은 서구 미니멀 아트나 아르테 포베라 그리고 일본 모노하 미술 등 동시대 미술들과의 연계 속에서 상대적으로 찾아져야 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비록 원안과 달리 그 규모와 범위가 축소되었지만, 이번 기획은 아쉬운 대로 큰 예산 없이도 한국미술과 일본미술간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확인해 가는 첫 번째 기회가 되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그리고 이것을 계기로 일본 모노하의 비평담론들이 우리의 그것과 상당한 수위의 차이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 역시 큰 소득이었다. 동시대 미술 담론과 우리 미술의 담론 차이가 얼마나 벌어져 있는지 구체적으로 확인해가야 하는 이유는, 두말할 것도 없이 그것이 우리 미술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의 잣대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이 기획의 본 행사인 《Monotone에 가려진 70년대 평면의 미학들》展의 기획은 소위 한국적 모더니즘이라는 동시대적 유사개념의 범주 속에서 다루어져온 기존 담론들의 한계를 넘어, 현대미술이 한국이라는 지역의 역사적 특수성 속에서 또 다른 문화적 가치를 생산할 수 있을 것인지,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어떤 방식으로 가능한 것인지 등의 당면과제와 맞닿아 있는 현재적인 담론으로서의 가치를 찾기 위해 기획되었다. 이를 위해 이 전시는 70년대 평면회화 작품들에 관한 기존의 유형화를 과감하게 해체하고, 구체적인 미학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방법론을 찾아 《1부: 또 하나의 드로잉, 층과 폭으로서의 여백: 2002.11.5-11.14》, 《2부: 침투되는 표면, 또 하나의 전면회화: 2002.11.19- 11.28》, 《3부: 또 하나의 평면해석: 2002.12.3-12.12》의 3부로 나뉘어 기획되었다. 이 전시의 특징은 지난해 《또 하나의 국면-한국현대미술의 동시대성》展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구체적인 작품들을 지명하여 초대 전시를 만든 것이다. 이 전시기획에 관한 자세한 내용들은 전시서문에 자세히 밝히고 있다.

다만, 이번 전시와 관련한 유감스러운 일이 있었던 바, 그 하나는 박서보, 하종현 두 작가의 출품거부였다. 물론 작품의 출품은 작가의 판단에 따른 것이므로, 작가가 출품거부 의사를 분명히 한 이상 종용을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또 다른 유감은 같은 시기에 국립현대미술관의 《사유와 감성의 시대》展이 이 미술을 회고하는 차원에서 기획되어 좋은 대조를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쟁점에 관한 토론 제의가 국립현대미술관 측에 의해 거부되었던 점이다. 이에 필자는 중앙일간지와 미술전문지에 국립현대미술관의 전시에 대한 비판적 논의를 게재했으나, 이 시도 역시 침묵으로 일관하는 현대미술관의 태도로 무산되고 말았다.

한국현대미술 다시 읽기 III, 김창렬 대담

한국현대미술 다시 읽기 III, 윤형근 대담

다시 읽기의 방법론

 

한국현대미술 다시 읽기를 위한 이 일련의 기획들을 단순한 회고적 정리의 차원을 넘어, ‘현재적 담론’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다양한 방법론이 필요했고, 그 기초 자료를 만들기 위해서 수천 종의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하여 분석하고 데이터화하는 일이 선행되었어야만 했다. 그러나 분석된 자료들 대부분이 한국현대미술 맥락의 소위 주류들에 집중되어 있었으므로, 이 제한된 시각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뭔가 다른 형태의 자료가 보완되어야 했다. 이것을 위해 준비된 것이 그간 마흔 두 분의 작가들과 가졌던 장시간의 대담이었다. 이 대담은 바람직하지 못한 화단의 풍토와 일천한 비평적 역량 그리고 균형을 못 잡아온 저널리즘의 한계로 인해 주변부로 소외되어 왔던 작가들의 활동과 경험담을 담고 있을 뿐 아니라, 작가 개인의 시각을 통해 한국현대미술의 맥락을 볼 수 있는, 어떤 자료보다 소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작가들과 나눈 모든 대담내용들이 디지털 비디오 카메라로 촬영되었으며, 그 테이프만도 백여 개에 이른다. 내용 중 민감한 내용들은 작가들과의 의견절충을 통해 자료집에 공개되지 않았으나, 훗날 한국현대미술 맥락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위해 후진들에게 생생한 모습으로 증언하는 작가들의 모습과 육성이 전해지게 될 것이다.

이 자료들 중 상당수의 자료가 학술세미나를 준비했던 연구자들에게 제공되었고, 자료집에 실렸다. 그것은 한국미술에 관한 지속적인 연구를 독려하기 위한 배려로, 향후 보다 많은 작가들과 이론가들이 한국현대미술 연구에 박차를 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지금까지 총 여덟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던 학술 연구발표 세미나들에는 총 스물 여덟 분의 이론가들과 작가들이 참여했고, 마흔 여덟 편의 논문이 생산되었다. 또한 총 세 차례 일곱 파트의 전시가 기획되었고, 예순 다섯 분 작가들이 백 칠십 일곱 점의 작품을 출품했다. 비록 한 사람의 기획자에 의해 3년 간에 걸쳐 기획된 전시들이었지만, 그것은 적어도 기존의 한국현대미술 비평들과 미술사적 진술들에 대한 비판적 대안을 제시하는 메타비평적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이었다.

물론 지난 삼 년 간의 기획으로 축적되고 생산된 자료의 양도 엄청나지만, 이 자료들을 토대로 진행된 연구들과 전시의 기획을 통한 성과 또한 만만치 않은 것이다. 이 연구들은 대체로 기존의 담론에 대해 비판적이지만, 그 대안적 방향을 모색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생산적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글 꼬리에

 

물론 이런 노력은 궁극적으로 한국현대미술의 올바른 위상정립과 활발한 담론의 생산을 목적하고 있지만, 현재까지 누적되어온 수많은 문제들과 맞서야 하는 부담을 피할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예컨대, 이중섭이 19세기 중반 이후 사라져 버린 천재화가로 부활되어 국민화가로 추앙을 받고있는 풍토에서, 전위와 권위를 한 얼굴에 지닌 일부 선배들의 위압적 권위에 대한 심적 부담과 그들의 활동과 성취를 한사코 비호하거나 혹은 무자비하게 매도하려는 비평적 무리들 사이에서, 제 3의 대안으로서의 다시 읽기의 가능성을 입증하는 일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새삼스러운 말이지만, 우리는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현대화’의 역사 대신, 수용과 절충이라는 충격과 혼란의 과정을 거쳤다. 사실 앞서 언급한 따위의 한계는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 한국 현대사회 자체가 얼마나 많은 모순을 내재시키고 있고, 미술분야에는 또 얼마나 많은 문제들이 겹겹이 도사리고 있는가? 오천만 국민들의 의식과 관습 속에 자리잡고 있는 비합리적이고 부조리한 통념들이 그렇듯, 예술가들이나 비평가들도 그러한 한계 속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참 살기 힘든 사회이기는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상대적으로 더 살기 좋은 사회의 조상들이 뿌리고 흘렸던 땀과 피와 눈물을, 역사가 지금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개발도상국들에게 주어진 유일한 이점은 선진국들의 사회적 변화에 수반되었던 역사적 오류를 경계로 삼을 수 있다는 점이다. 이렇게 보면 이 사회는 진정한 ‘현대화’를 추구하는 진보적인 사람들에게 무한한 가능성을 제공해 주는 기회의 장소이기도 한 것이다.

우리가 끊임없이 역사를 다시 읽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리고 그 실천을 위해 인내하며 땀을 흘려야 하는 이유도 그것만이 현재를 열어 가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며, 결국 이 길을 통해 미래로 나아가야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역사를 스스로 비판하는 일에는 어떤 식으로든 아픔이 따르고, 이것이 아무리 숭고한 일이라 해도 통증은 수반되기 마련이다.

 

이번 기획에도 역시 많은 분들의 뜻깊은 참여와 도움이 있었다. 한 시대를 풍미했고 현재도 왕성한 활동을 보이고 있는 선배 작가들과의 교감은 70년대 미술담론의 한계를 뛰어 넘을 수 있을 만큼 의미 있는 것이었고, 이분들로부터의 격려와 따뜻한 배려는 이 힘들고 고달픈 다시 읽기를 계속해야 할 충분한 이유를 다시 확인하게 해 주었다. 그리고 예술가로서는 결코 늙지 않을 선배들과의 끈끈한 유대감에 긍지를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그들이 온갖 어려움을 겪으면서 일구어온 한국현대미술을 사랑하며, 그만큼 그들을 아끼고 존경한다. 모진 세파에 시달리면서도 예술가로서의 순수한 길을 걸어온 그들이야말로 이 역사의 산 증인들이요, 진정한 의미에서의 주역들이기 때문이다.

한편 한국현대미술 다시 읽기 Ⅲ은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의 우수기획전 사업으로 선정되어 의미 있는 지원을 받았다. 공공성을 띤 문화예술활동 지원이 인색한 우리 사회에 문예진흥원의 지원은 매우 소중한 것이었다. 이 지원이 없었다면 이 일련의 다시 읽기는 애당초 실현될 수 없는 공상에 그치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이 기획의 성과는 전적으로 문예진흥원의 도움에 기초한 것이기에 이 자리를 빌어 관계자들께 다시 한번 머리 숙여 감사한다.

또한 어려운 가운데도 학술세미나에 참여해 주신 일곱 분의 선생님들께도 감사한다. 특히 부산에서부터 번번이 비행기를 타고 와주셨던 강선학 선생님과 부족한 대우에도 마다 않고 일본에서부터 날아와 주었고, 세미나가 끝난 뒤 서면으로 진행된 토론에까지 성실하게 임해 주셨던 미네무라 선생님, 치바 선생님께도 심심한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한편, 짧은 일본방문 일정 중에 짬을 내어 자료를 구입해준 강재영씨와 기꺼이 학술행사 자료의 번역감수 등 자문을 해준 기다에미꼬씨, 그리고 특히 많은 양의 일본 자료들을 번역해 주느라 달콤한 방학을 다 보내버린 안원찬 선생에게도 깊이 감사한다.

늘 그랬듯, 이번에도 자료의 수집과 정리 그리고 학술행사와 전시의 진행에는 눈에 잘 뜨이지 않는 분들의 커다란 수고가 있었다. 첫 번째 다시 읽기부터 지금까지 언제나 곁에서 엄청난 격무에도 불구하고, 복잡하고 난해한 일들을 불평 없이 소화해 준 큐레이터 전상민님께 뭐라 말할 수 없이 감사한다. 그리고 다행히도 이제는 한 식구로 일하게 된 이태한 군이 흘린 땀과 열정에도 감사한다. 이 자료집은 편집과 교정을 위해 연일 밤늦도록 애를 썼던 이 두 사람의 공로에 힘입어 만들어졌다. 뿐만 아니라 번번이 학술행사 준비와 전시준비를 도와주었던 박혜연 양과 최선, 최영학, 양혁진, 이아름 군들 그리고 먼길을 마다 않고 작품의 안전한 운송에 힘써 주신 김형태님과 김영관님, 또 작품 대여에 수고를 아끼지 않았던 서울시립미술관의 관계자들께도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원래 한국현대미술 다시 읽기 II 자료집에 실으려 했던 서울 비엔나레, 에스쁘리 자료와 작가대담이 사정상 올해 자료집에 보완되었다. 올해의 70년대 단색조 회화와 관련된 자료들도 수집과 정리에 미진한 점이 있어, 부족한 자료들이 구해지는 대로 이를 다음 자료집에 보완하여 싣도록 할 예정이다.

 

올해의 자료집 발간은 여느 해보다 많이 늦어졌다. 일본 모노하 자료들을 수집하고 번역하는 일과 2차 세미나 후 진행된 서면 질의와 답변을 진행하는 일이 생각보다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며칠은 매섭게 춥더니 오늘은 봄날처럼 따사로운 햇살이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온다. 지난 한해의 묶은 숙제를 해치우고 나른한 눈으로 책상 위에 어지럽게 널린 자료들을 바라보면서, 이젠 치워도 좋은 것들인지 습관처럼 재차 묻는다.

남은 날들도 많은데, 자! 오늘만은 용감하게, 오늘의 할 일을 내일로 미루고, 위용을 자랑하는 북한산에 올라 北岳의 정기를 온 몸으로 받아볼까?

 

2003년의 새달에

오상길(작가, MIA 관장)

『한국현대미술 다시 읽기 Ⅲ』, 《70년대 단색조 회화의 비평적 재조명》

《70년대 한국의 단색조 회화와 일본 모노하의 미학적 연계와 차이》

《Monotone에 가려진 70년대 평면의 미학들》 기획자

 

 

 

각주

1) 現代彫刻의 樣式規定과 Modernity의 基礎槪念 :19c.後期에서 20c.前期에 이르는 西洋彫刻의 變遷을 중심으로 白文基(彫刻家), 金福榮(哲學搏士). 1988 藝術院 硏究論文

2) 한국현대미술 다시 읽기 Ⅱ, Vol. 1 서문, 도서출판 ICAS, 2002

3) 졸고, 「현실의 외곽에선 중심의 이데올로기」,

한원미술관 기획 초대전 《깃털 위의 몸통》展 도록 서문, 2001. 10. 9-18

4) 미술작품의 스타일들이 이토록 많은데도 정작 주체적인 미술의 담론을 위한 논의는 매우 부실하고, 미술 작품의 양식들이 다양하게 차용되고 있지만 정작 그 속에 숨겨진 idiom과 code의 문제들에는 무관심한, 실로 기괴한 미술문화를 양산해 왔다. 이것은 미술과 담론의 가치에 대한 비판과 검증보다, 좋은 작품이라는 전근대적 평가에 의존된 가치와 위대한 작가로 대우받으려는 망상 같은, 표면적 성취에 매달려온 일련의 웃지 못할 풍경 연출의 원인이 되어 왔다. 이런 사정은 미술비평과 미술제도 전반을 뿌리 없는, 문화의 표면과 이면의 내용이 모순되고 미술의 현장과 제도가 부조리하게 어긋나며, 끝없이 서로를 소모시키는 비합리적 구조를 만들게 했다. 예컨대 수많은 자칭 미술평론가들과 학자들 그리고 미술관들과 큐레이터들, 저널리즘과 기자들, 화랑들이 버젓이 간판은 내어 걸고 있지만, 정작 현대미술의 담론과 그 가치를 감당해갈 역량도 의지도 없는 사람들 간의 同病相憐의 심리와 이해관계에 따라 야합하여 뭉쳐진, 실로 개탄할만한 풍토를 만들고 있다. 병든 조막손 권력을 휘두르며, 남대문식 가짜 브랜드로서의 기이한 미술문화를 양산하는 이들은 공통적으로 공부하기를 싫어하고, 생각하는 일을 귀찮아하며, 따라서 당연히 논의와 논쟁이라는 토론문화를 기초로 하는 담론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인다는 일정한 특징을 띤다. 이 한심하기 짝이 없는 ‘더듬이 문화’는 결국 현대적 자각의 뿌리가 없는 제도적 풍토를 만들어, 독버섯들과 해로운 곰팡이들에게 최상의 서식처를 제공해 온 것이다. 무수한 해외정보와 지식의 단편들이 오독과 오역의 위험을 안고 살포되고 있으나, 토론도 진지한 성찰도 없는 이런 문화적 풍토 속에서 정작 그러한 지식과 문화적 현상이 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며, 무엇 때문에 이런 문화를 공유해야 하는 것인지를 이해하는 일 자체가 요원해 보인다. 결국 첨단의 미술작품 양식을 일종의 유행성 트렌드로 인식하고, 그 스타일만 차용하여 소비함으로써 미술문화 자체를 끝도 없는 소모적 양상으로 치닫게 하는 것이다. 글은 그저 읽는다고 지식으로 소화되는 것이 아니다. 글을 쓰고 읽는 일은 공히 그 참 뜻을 어디까지 참조해가야 할 것인지를 생각하고 결정해 가는 판단의 문제이다. 그렇듯, 현대미술의 가치는 소위 작품의 스타일이 좋고 나쁨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작품이 지닌 ‘지금 그리고 여기의’ 담론적 가치에 있는 것이다. 결국 현대미술의 중요한 가치는 ‘예술이란 무엇이고, 무엇이 예술적으로 가치 있는 성취인 것인가’라는 본질적 자문과 그에 관한 대응의 자답 형태로 주고받아지는 ‘담론’과 그 ‘문화’에 있다. 그러나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왜 저드의 상자들이 청담동 어느 카페의 세련된 미니멀 분위기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고, 자신의 작품이 인테리어 장식과 무엇이 어떻게 다른 것인지도 설명할 길이 없는 것이다.

5) 이 점은 단순한 비평적 역량의 부재라는 한계를 넘어 비평적 유기 혹은 미술현장과 비평의 유착이라는 윤리적 문제를 발생시킨다. 우리의 미술비평이 신뢰를 받지 못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여기에 있는바, 80년대 이후의 비평가들 역시 한국현대미술 비평에 관한 메타 비평작업을 기피해 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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