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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가들이여 내 칼을 받아라 #No.3
-윤진섭의 『한국 모더니즘 미술연구』(1부)
졸저, 비평가들이여 내 칼을 받아라, ICAS, 2005
일찍이 레오나르도 다반치는 ‘예술을 정신적인 것’으로 인식했고, 마르셀 뒤샹은 예술로 하여금 다시 한번 정신에 봉사하도록 하고 싶다고 말한 바 있다. 이 말들은 작금에 이르러 당연시되고 있지만, 당시로서는 범상치 않은 발언이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시대에는 신앙이라는 절대적인 가치로부터 인간 정신의 독립을 선언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었고, 뒤샹의 시대에는 전통적 예술이 지닌 숭고함을 땅바닥에 패대기치며 그 본질을 원천적으로 회의할 것을 촉구하는 발언이었기 때문이다.그리고 이 말들은 다시 오늘에 이르러 무엇이 이러한 예술의 역사에 값하는 ‘정신’이며, 거꾸로 이러한 정신을 통해 어떤 예술을 구현해 왔는가의 물음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지금 그 발언이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것인가에 관해 숙고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나는 이 회의와 숙고의 과정이 우리의 ‘정신’과 ‘예술’에 관한 생각들을 구체화해 주리라고 믿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의 시대를 과거와 구분짓고 미래를 향해 우리 자신을 한정짓는 일이 될 것이며, 그런 인식의 진정성을 담는 일이 바로 역사의식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것이 비평담론이 지닌 참다운 가치이며 의미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 * *
윤진섭의 책 『한국 모더니즘 미술연구』에는 사실과 다르거나 임의로 부풀려지고 배제되며 왜곡․변색되는 경우가 너무 많아 이 점을 지적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그의 진술에 상당부분 사실과 다른 점들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그런 각색의 배후에 도사리고 있는 일련의 기획된 정치성이 작용하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나는 그의 진술들 중 상당수가 미술비평이라기 보다는 ‘썰’에 가까우며, 그 ‘썰’들이 미술과 미술현상이 지닌 가치와 의미들을 전도시키고, 급기야 문제의식 자체를 혼탁하게 흐려 놓고 있다고 판단했다. 더욱이 그는 현직 대학교수이자 한국미술평론가협회의 회장이라는 비중있는 직함을 가지고 눈부신(?) 활약을 펼치고 있어, 교육적 측면에서도 후학들에게 상당히 심각한 악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나는 지금까지 윤진섭의 글들을 적지 않게 읽어 왔는데, 그 이유는 순전히 그의 글쓰기에 나타나고 있는 심각한 수준의 문제들을 구체적으로 분석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한국의 미술평론가들 중에 이런 ‘썰 푸는’ 수준의 글쓰기를 하면서 자칭 평론가입네 하고 다니는 자들이 하나 둘인 것은 아니다. 미리 밝혀두지만, 나는 그런 자들을 미술계의 공적公敵으로 규정한다.
물론 윤진섭에 관한 나의 비판들 중에는 그야말로 사안에 대한 이해의 차이에 따라 발생할 수 있는 이견異見이 포함되어 있을 수 있다. 앞서 김홍희의 『한국화단과 현대미술』에 관한 비판에서도 밝혔듯, ‘차이’는 당연한 것이다. 문제는 이 차이를 좁혀가기 위한 대화의 의지가 있는가에 있고, 이것이 전제된다면 그 대화가 치열한 공방을 주고 받는 논쟁으로 발전되어도 좋을 것이다. 우리의 미술비평이 안고 있는 가장 심각한 문제 중의 하나가 메타비평의 결여로 인한 비평의 저항력 부재에 있고, 나는 이것이 한국의 미술비평을 본연의 기능과 가치로부터 멀어지게 해 왔다고 생각한다.따라서 이 논쟁은 그동안 비평적 대립을 회피하는 수단으로 악용되어온 소위 비평적 관점의 차이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그 실체를 밝혀내는 일로부터 시작하여, 비판적 논쟁이 지닌 충돌과 파열의 생산적 국면을 새롭게 인식시키는 계기를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새삼 다시 말할 나위도 없이 비평은 예술작품 혹은 예술현상들을 전제로 무엇이 이 시대 예술의 의미와 가치인 것인지를 논하고 분별하는 작업이므로, 상호간의 인식차이를 좁히려는 비판적 논쟁없이 비평문화의 생산성을 기대할 수는 없는 일이다. 어쨌든 이 장황한 언설들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윤진섭은 링 위로 올라오라는 것이다.『한국 모더니즘 미술연구』를 읽으며 발견한 문제점들을 크게 세 가지 정도의 범주로 분류해 보았는데, 그 첫째가 미술에 관한 윤진섭의 인식문제이고, 둘째는 비평의 방법이 지닌 문제들이며, 셋째는 책의 전반에 펼쳐지고 있는 기획된 정치성의 문제들이다. 나는 이글을 통해 이 세 개의 범주로 나눈 문제들을 각각의 하위구조에 해당하는 구체적 사례들을 통해 지적하고 비판하거나 의문을 제기할 것이다.윤진섭의 미술에 관한 인식을 문제삼게 되는 것은 미술현장이 생산하는 미술의 문화적 가치와 소위 화단의 상황, 그러니까 미술현상 내지는 미술작품을 통한 가치의 생산이 진술에서 배제되어 있거나 미술이라는 문화가 지닌 역량과 가치의 문제가 한국 미술계만의 특수한 상황논리와 동일시되고 있고, 한국미술 맥락에서 생산된 미술의 가치와 서구미술 맥락에서 생산된 미술의 가치를 동일시함으로써 발생하는 각각의 혼란들과 그에 따른 의미의 전도현상들이 두드러지고 있기 때문이다.
윤진섭은 『한국 모더니즘 미술연구』의 머리말을 다음과 같이 시작하고 있다.
“이 책은 한국 모더니즘 미술(Korean Modernism)에 관한 연구이다. 근본적으로 서구적 개념인 모더니즘이 어떤 과정을 거쳐 한국에 이식되고 토착되었는가 하는 점을 전위 운동(Avant-Garde Movement)의 관점에서 파악해 보자는 것이 본 도서의 취지이다.”1) 이어서 윤진섭은 이 취지를 뒷받침하기 위해 “모더니즘의 범주는 20세기 미술을 반성과 존재론적인 탐구의 견지에서 파악할 때 포착된다.”는 피터 웰렌(Peter Wollen)의 지적과 클레멘트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의 “근대주의 회화(Modernist Painting) 이론”을 제시하고 있다.2)
그런데 이 머리말의 짧은 글 속에는 다음과 같은 문제들이 포함되어 있다. 즉 윤진섭은 ‘한국 모더니즘 미술(Korean Modernism)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기정사실화 하고 있고, 이것이 ‘토착되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서구 모더니즘 미술의 이식과정을 ‘전위 운동(Avant-Garde Movement)’으로 규정하고 있기까지 하다.3)
사실 그동안 일부 평론가들이 끼리끼리 모여 “한국적 모더니즘” 운운했던 적이 있기는 했었다. 하지만 평론가 몇이 모여 앉아, 말도 되지 않고 이치에 닿지도 않는 엉터리 논리들로 수군수군 공모하고 담합하면 “한국적 모더니즘”이라는 것이 만들어지고, 그렇게 몇 년 지나면 그것의 존재가 기정사실화되는 것인가? 도대체 “한국적 모더니즘”이란 무엇이고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이라는 말인지, 나는 그것을 공모하고 담합했던 미술평론가들에게 고스란히 되물을 수밖에 없다. 소위 미술판의 대세를 등에 업고 이치에 닿지 않는 주장들을 강변하는 무리들에 대한 가장 적절한 대응은 냉소적인 침묵이다. ‘잘들 해 보라’는 말인 것이다. 그런 일들은 보다 적절한 기회에 얼마든지 한꺼번에 뒤집어 버릴 수 있는 일들이므로, 그런 냉소적 침묵의 배후에는 언제나 느긋한 여유가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다.
당시 그 주장들에 관한 나의 대답은 “웃기고들 있네!”였다. 박정희 군사정권의 유신체제가 내세웠던 “한국적 민주주의”와 어딘가 많이 닮아 있던 “한국적 모더니즘”은, 박정희 정권과 많이 닮아 있던 당시 미술계의 패권주의자들을 옹호하는 설익은 논리일 뿐이다.서구의 모더니즘은 자연과학의 발전과 산업화에 따른 급격한 사회변화에 수반되었던 문화적 위기상황을 극복하려는 대응의 이데올로기들로, 역사적이고 맥락적인 담론이며 당대 예술가들의 문화적 실천이기도 하다. 한국의 미술평론가들이 말하는 모더니즘 미술은 그러한 역사적 대응의 결과로 생산된 미술현상들과 작품들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논리들에 지나지 않으며, 그런 문화를 역사적 대응이라는 문제의식과 방법없이 스타일과 이론으로 수용하는 과정을 ‘전위 운동(Avant-Garde Movement)’이라고 규정하고, 그런 미술들을 ‘한국 모더니즘 미술(Korean Modernism)’이라고 말하는 것이 윤진섭의 인식수준인 것이다.
이 짧은 문장 속에 숨겨진 윤진섭의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다. 즉 그가 ‘한국 모더니즘 미술’이라고 주장하는 미술들을 서구 모더니즘 미술의 논리를 차용하여 옹호함으로써, 한국의 미술현상과 그 현상을 통해 생산된 미술작품들을 서구의 그것과 동일한 맥락에 위치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좋게 말해서 설익은 것이고, 나쁘게 말해서 ‘남의 것을 날로 벗겨 먹으려는 수작’에 지나지 않는다. 이 논리는 윤리적 측면에서도 매우 옳지 못한 것이지만, 그보다 더 나쁜 것은 모더니즘과 아방가르드의 문화적이고 역사적인 가치를 희석시켜 몰가치하게 만들고, 수많은 한국의 예술가들이 서구문화와 제도의 이식과정에서 고민하고 방황하며 생산해 놓은 한국미술로서의 주체적 가치들을 실종시켜 놓고 있다는 점이다.
윤진섭의 『한국 모더니즘 미술연구』라는 책 전반에 걸쳐 수없이 발견되는 이런 가치와 의미 전도 현상들은 내가 아는 한 최악의 비평적 역기능인 것이다. 사실 이런 문제들이 너무 많아 열거하기조차 벅차지만 구체적 사례를 제시하기 위해 몇 가지만 더 지적하고자 한다.
윤진섭은 같은 머리말 글에서 1909년 고희동이 일본에 유학하여 서양미술을 배워 귀국한 사실을 들어, “그 자체(가) 하나의 문화적 충격을 상징하는 사건으로써, 조선 왕조 중심의 구체제에서 근대로 이행하는 ‘패러다임 이동(shift of paradigm)'의 한 예를 보여준다.”고 적고 있다.5) 실소를 금할 수 없는 이 주장은 이 글의 서두에서 언급했던 그야말로 “썰푸는” 수준의 발언이다. 일개 화가 한사람이 “그림이나 그려야겠다”며 일본으로 유학을 가서 어설픈 서양화 기법을 배워온 사건이 “조선 왕조 중심의 구체제에서 근대로 이행하는 ‘패러다임 이동(shift of paradigm)’의 한 예”라니 ‘뻥’을 까도 정도가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도대체 윤진섭은 ‘패러다임 이동(shift of paradigm)’이라는 것이 무엇인줄 알고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인가? 루이 다비드가 로마유학에서 돌아와 세계 미술의 중심지가 파리로 바뀌었다는 말이 있고, 윤진섭이 이것을 의식하고 그런 ‘썰’을 푸는지 모르겠으나, 뭘 알려면 똑바로 알아야 한다. 고희동이 무엇을 했고, 이후 한국의 미술계가 무엇을 어떻게 했다고 그 사건이 ‘패러다임 이동(shift of paradigm)’이란 말인가? 이런 책을 읽고 미술을 이해하게 될 후학들을 생각하면 눈 앞이 캄캄해 질 따름이다.
필경 윤진섭이 말하고 싶은 바는 고희동 이래 많은 사람들이 유학을 통해 서양화를 배웠고, 그 인구가 점차 늘어 한국의 미술상황이 서양화가들 중심으로 바뀌었다는 현상적 변화정도일 것이다. 상황이 판이하게 바뀌지 않았느냐는 것인데, 윤진섭이 알아야 할 것은 모든 사회적 변화가 곧바로 역사적 가치를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조선 말기로부터 시작되어 일제 강점기를 거쳐, 해방후 미 군정과 이승만 정권 속에서 이루어진 사회적 변화들은 강요되거나 몰체계적으로 수용된 문화와 제도의 이식과정에 해당하는 일종의 진통과정인 것으로, 그 진통들의 여파가 현재까지 이어지며 한국현대사의 역사적 질곡이 되어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역사적 주체를 상실한 채 이루어진 파편적인 사회적 변화를 ‘패러다임 이동(shift of paradigm)’이라니 어불성설도 분수가 있어야 하지를 않겠는가 말이다.
윤진섭은 이어서 1956년 김충선, 김영환, 문우식, 박서보 등에 의한 《4인전》의 반(反)국전 선언과 1957년 창립되어 1958년 5월부터 소위 비정형회화를 선보이고, 이후 이 미술을 확산시켜 소위 ‘앵포르멜 열풍’으로 몰아간 <현대미술가협회>를 본격적인 “아방가르드 세력의 등장”이라고 주장한다.6) 윤진섭이 이들을 아방가르드라고 주장하는 바는 아마도 이들의 반(反)국전 활동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둔 말일 것이고, 이들이 “본질적으로 니힐리스틱한 속성을 지닌 아방가르드적 태도를 취함으로써 전통과 제도를 부정하고 새로운 창조를 위해 노력”7)했다고 보기 때문인 것 같다.물론 <현대미술가협회>의 작가들이 국전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이었던 것도 사실이고 서구의 추상표현주의와 앵포르멜을 받아들여 확산시키는 역할을 한 것도 사실이며, 그런 현상이 그 시대의 특징으로 부각되는 것도 사실이다. 또한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이 니힐리즘적인 성향을 갖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국전의 미술들이 과연 우리 미술의 역사에 있어 전통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지부터가 의문이다. 그들이 일제 강점기 하에서 선전을 중심으로 활동했고, 해방후 국전이라는 유일한 미술제도를 장악했다고 해서 그들이 전통이라고 할만한 ‘정통성’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이런 국전 미술과 제도 운영의 파행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던 사람들은 <현대미술가협회>의 작가들만이 아니었으며, 1956년 《4인전》의 반(反)국전 선언보다 훨씬 앞선 1955년부터 이미 당시 일간지들의 지면을 메울 만큼 보편적인 정서였으므로, 이것을 《4인전》과 <현대미술가협회> 작가들의 전유물처럼 주장하는 것은 사실을 왜곡하는 일이 된다.
1950년대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 실로 눈부신 글들을 남겼던 김병기가 말하고 있듯, 한국의 예술가들 중에는 일제 강점기 때부터 선전과 국전 따위를 처음부터 아랑곳하지 않았던 분들이 있다.8) 반면 《4인전》과 <현대미술가협회>의 작가들 중에는 국전에서 상을 받아 출세해 보려고 노력했던 사람들이 있다.9) 도대체 뭘 알고나 그런 말을 해야 할 것이 아닌가?
또한 앞서 모더니즘에 관한 인식의 문제를 지적했듯,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이 니힐리즘적이었고 <현대미술가협회>의 선언문들이 그런 성향을 담고 있다고 해서, 그 작가들을 아방가르드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실 그 선언들은 지나친 의미의 과잉으로 인해 그 진정성을 의심케 하는 내용들로, 당시 미셀 타피에나 일본의 걸출한 미술평론가 도노 요시아키의 글 등등에서 발견되는 격렬한 표현들로 점철되어 있다. 다만 이 문제는 미셀 타피에와 도노 요시아키 등 일본의 미술수첩과 미즈에 등등에 실린 글들과 이 선언문들을 비교분석하는 작업을 남겨 놓고 있는 관계로, 별도의 지면을 통해 추후 논의하기로 한다.
문제는 <현대미술가협회>의 활동이 결코 니힐리스틱한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며, 이들의 비정형성이 발상의 동기와 전조현상들을 동반하고 있지 못한 수용문화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미학적 측면에서나 미술사적 측면에서 서구 앵포르멜과 추상표현주의의 ‘후위’ 또는 일종의 ‘Post 현상’에 속한다는 사실이다. 다만, 이 ‘후위’와 ‘Post현상’들은 흔히 생각하듯 모방과 수용의 맥락에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문화적 절충과 혼성화의 맥락에서 분석되고 연구되어야 할 과제라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주지의 사실이지만, <현대미술가협회>의 일부 작가들은 1960년대 초반부터 국제전에 출품하기 위해 동분서주했고, 이후 80년대 중반까지의 역사를 통해 화단의 패권을 장악한 뒤, 국제전 출품기회를 거의 독점하다시피 했으며, 개선 내지는 개혁이라는 명분으로 국전에 개입하고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이들이 한국미술계에 드리운 깊은 그늘은 실로 필설로 형용하기 어려울만큼 심각한 것이다.
사정이 이런데, 과연 윤진섭을 제외한 한국미술계의 누가 이들을 니힐리스트들이라고 말하겠는가?앞서 언급했듯 윤진섭은 서구의 역사적 아방가르드 개념을 차용하여 <현대미술가협회>의 일부 작가들에게 덧씌우는 방식으로 또 다시 역사적 아방가르드의 의미와 가치를 전도시키고, 아방가르드와 당시 <현대미술가협회> 작가들의 미학적 성취를 양쪽 다 희석시켜 훼손해 놓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와 가치 전도를 뒷받침이나 하듯 윤진섭은 글의 바로 다음 맥락에서 “본 논문은 이처럼 전통과 기성의 제도를 부정함으로써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고자 노력했던 1세대 전위작가들의 활동과정과 그들이 다시 기성작가가 되어 훗날 새로운 아방가르드 세력에 의해 도전을 받게 되는 연속적인 상황을 그리고 있다. 마치 미국의 근대주의 회화(Modernist Painting)와 미니멀 아트(Minimal Art)의 관계가 그런 것처럼, 한국 전위미술의 역사도(…)”라고 말하고 있다.10) 윤진섭의 논리라는 것은 늘 이런 식인 것이다. 물론 윤진섭의 글들 속에 숨겨진 이런 문제들은 일차적으로 논리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것들이지만,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런 식의 미술용어들과 가치의 남용 및 남발들이 그 미술들이 가지고 있는 의미와 가치의 진정성들을 탈각 내지는 탈색시킴으로써, ‘진짜’와 ‘가짜’의 분별 자체를 난맥상으로 몰아 넣는다는 점에 있다.11)
윤진섭의 그럴듯한 그러나 결코 그런 것이 아닌 ‘썰’들이 미술문화가 지니고 있어야 할 정신적 가치를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 버리고 있고, 이에 따라 한국의 수많은 예술가들이 땀으로 쌓아 올린 성취들이 지닌 한국미술로서의 역사적 가치가 상실되고 있다는 말이다.그리고 이 문제는 다시 윤진섭이 미술평론가로 등단한 뒤 글쓰기를 통해 이런 문제들을 수없이 노출해 왔음에도, 지금껏 어느 누구도 이런 심각한 문제들을 지적하고 비판하지 않았다는 사실로 이어지며, 윤진섭이 아무런 비평적 제재를 받지 않고 눈부신(?) 활약을 펼칠 수 있었던 한국미술계 및 비평계의 지적 환경 및 정치성의 문제들과 관련하여, 그 무능과 기회주의 그리고 담합의 추악한 정치성을 여지 없이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의식은 이제 우리가 이런 비평적 무기력과 불신의 역사와 단호하게 결별하는 비판적 선긋기를 통해, 그 잔재들을 가차없이 몰아내는 일로부터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야만 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다시 확인시키는 일이 되고 있는 것이다. (2부에서 계속)
각주:
1) 윤진섭,「머리말」,『한국 모더니즘 미술연구』, 재원, 2000
2) 앞의 책, 같은 글 참조
3) 앞의 책, 같은 글 참조
4) 앞의 책, 같은 글 참조
5) 앞의 책, 같은 글 참조
6) 앞의 책, 같은 글 참조
7) 앞의 책, 같은 글
8) 한국현대미술 다시 읽기 IV, Vol. 3, 김병기 대담 참조
9) 한국현대미술 다시 읽기 IV, Vol. 3, 이구열 대담 참조
10) 앞의 책, 같은 글 참조
11) 이 글의 취지와 달라 구체적 언급을 하지 않겠지만, 당시 <현대미술가협회> 작가들을 비롯한 예술가들의 활동이 지닌 진정한 역사적 가치는 전혀 다른 맥락에 있다.
이에 관해서는 이미 발표했던 <고난 속에서 피어난 추상> 전의 서문과 세미나 발제문을 참조해 주기를 바란다. 한국현대미술 다시 읽기 IV, Vol. 3, 고난 속에서 피어난 추상전 자료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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