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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가들이여 내 칼을 받아라 #No.4
-윤진섭 『한국 모더니즘 미술연구』(2부)
졸저, 비평가들이여 내 칼을 받아라, ICAS, 2005
윤진섭은 『한국 모더니즘 미술연구』의 제1장을 ‘격정의 대결’이라는 타이틀로 시작하고 있다. 주지의 사실이지만, ‘격정의 대결’은 앵포르멜의 산파 역할을 했던 미셀 타피에의 전시 타이틀이었다. 중요한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이런 용어도 각주 정도는 달아서 출처를 밝혀 주는 것이 공부하는 사람의 태도이고 글쓰는 사람의 아량일 것이다.
어쨌거나 윤진섭은 이글에서 1957년이 추상미술의 원년으로 간주되는, 한국 현대미술사상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지니는 해이며, <현대미술가협회>의 창립을 추상미술의 기점 설정의 근거로 보는 시각이 보편적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어서 그는 1930년대의 추상과 1950년대 앵포르멜 이후의 미술을 나누어 살펴야 한다고 말하고, 그 이유를 전자가 동경화단과의 긴밀한 연관하에 이루어진 반면, 후자는 국내에서 형성된 점이 다르다고 지적한다.1)
흥미로운 점은 윤진섭이 김환기, 유영국 등에 의한 1930년대의 추상미술을 ‘근대미술’로 분류함으로써, 1950년대 후반 이후의 비정형회화와 차별하고 있다는 사실이고, 한국미술의 ‘근대’와 ‘현대’라는 역사적 분기점의 근거를 ‘집단적 운동’에서 찾고 있다는 사실이다. 윤진섭은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1930년대에 태동된 일제하의 추상미술이 몇몇 작가의 개인적인 관심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면, 1950년대 후반의 그것은 이념적 배경을 지닌 집단적 데먼스트레이션에 의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1950년대 후반에서 60년대 중반에 걸쳐 전개된 앵포르멜을 아방가르드 운동의 효시로 간주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2)
윤진섭이 한국의 추상미술을 ‘집단적 운동’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고 1930년대의 추상미술과 1950년대의 그것을 차별화하여 인식하는 것은 실제로 한국의 대다수 미술평론가들과 미술사가들의 입장과 일치하는 것이다. 미술평론가이자 국립 안동대학교 교수인 서성록을 비롯한 대다수의 미술평론가들과 미술사가들은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1930년대의 추상미술을 ‘현대의 이전以前 단계’로 차별화하거나 ‘근대미술’로 분류하고 있고, 심지어 논의의 대상에서 아예 배제하는 방식으로 ‘현대미술’의 기점을 1950년대 후반의 미술로부터 설정하고 있다. 윤진섭은 이것을 근거로 이런 ‘썰’들이 마치 평론가들 사이에서 합의된 비평적 ‘정설’인양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다시 힘주어 말하지만, 이런 문제들은 미술평론가 및 미술사가들 몇이 모여 끼리끼리 담합하는 방식으로 ‘정설화’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미술도 비평도 어설픈 아류들의 다수의 입김, 즉 ‘대세’로 성취할 수 있는 가치가 아니기 때문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주장들을 뒷받침하고 있는 윤진섭의 논리이다.
윤진섭은 1930년대 당시 추상미술 작가들의 활동이 《조선미술전람회; 이하 선전鮮展으로 표기》를 중심으로 한 보수적 색채와 민족미술 및 프롤레타리아 미술의 틈바구니에서 소수로 머물며, 집단화가 아닌 개별적 활동에 그침으로써 당시의 미술을 선도하는 주류가 되지 못했다고 평가하고 있기 때문이다.3)
그러나 이런 사실들로 그 시대의 미술들을 현대의 이전以前 단계로 차별화하거나 ‘근대’로 분류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타당한 것인지 윤진섭에게 되묻지 않을 수 없다. 김환기, 유영국 등이 일본 유학을 통해 추상을 접했고, 때문에 그들의 추상이 내용상 일본미술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는 주장은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지만, 일본미술과의 연관성이 그들의 미술을 ‘근대’로 분류하거나 현대 이전以前의 미술로 차별화하는 근거가 된다는 말은 이치에 닿는 얘기가 아니다.
물론 나는 지금 김환기나 유영국의 작품들이 ‘현대’로 분류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이들의 당시 작품들이 서구의 초기 기하학 추상과 초현실주의에 경도되어 있던 당시 일본미술계의 상황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고, 이들의 작품 중 상당수가 학교수업의 연장선상에서 제작되었다는 점과 추상미술 문맥에로의 이행과 제작의 원리 및 방법상에 일정한 한계들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다분히 스타일리스트적인 측면이 있다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이러한 한계는 서성록과 윤진섭을 포함한 대다수 평론가들과 미술사가들이 ‘현대’로 분류하고 있는 미술들의 경우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문제들이라는 점에서, 차별화의 근거로 설득력이 없다. 이런 맥락에서 일본미술계와 연관되면 ‘근대’이고 서구와 연관되면 ‘현대’라는 식의 논리를 한국미술에 있어서의 ‘근대’ 혹은 ‘현대’의 기점논의 근거로 삼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것만이 아니다. 윤진섭의 주장 중에는 예술가들이 “집단화”를 하지 않고 “소수로 머물며, 개별적 활동”을 한 것과 “미술을 선도하는 주류가 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어, 그의 미술에 관한 인식의 우려할 만한 단면을 들여다 보게 된다. 내가 우려할 만한 단면이라고 말하는 것은 윤진섭이 엉뚱하게도 집단운동을 미술의 역사로 진술하고 있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누누이 강조해 왔듯, 미술과 미술운동은 동기와 발생 그리고 전개와 결과에 있어 전혀 다른 차원의 가치를 생산하고 있으므로, 각각 논의의 관점 및 방법 그리고 역사적 의미부여 등 모든 측면에서 구별되어야 할, 전혀 별개의 문제들이기 때문이다.
윤진섭 외에도 이런 주장과 진술을 늘어 놓고 있는 평론가들과 미술사가들이 너무 많아 일일이 헤아릴 수도 없는 형편이지만, 숫자가 많다고 이런 논리가 정당화되는 것이 아닌 한, 이런 진술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 자체가 한국의 미술 비평계와 미술사학계의 수준을 가늠하는 중요한 척도가 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윤진섭은 예술가들의 집단적인 미술운동이 한국미술의 변화에 긍정적으로만 작용해 온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우리 모두가 지겹도록 겪어 왔고 또 현재까지도 겪고 있듯, 예술가들의 집단적인 미술운동은 때때로 미술계의 패권주의 및 섹트주의를 만들어, 집단에 의한 개인의 소외와 같은 강압적이고 비윤리적 문제들을 발생시켜 온, 반문화적 질서의 뿌리이기도 한 것이다. 이런 문제들을 강도 높게 비판해야 할 입장에 있는 미술평론가가 거꾸로 김환기, 유영국 등이 “집단화”를 피해 “소수로 머물며, 개별적 활동”을 했고, 그래서 세력을 모아 집단을 만들어 미술계를 위협해 왔던 사람들의 틈바구니에서 집단을 통해 “미술을 선도하는 주류가 되지 못했다”는 이유로 차별화를 시도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런 논리는 렘브란트나 폴 세잔의 고독한 삶과 예술적 성취도 집단적 운동이 아니었다는 이유로 미술사에서 차별되어야 한다는 말이고, 이런 식으로 전 세계의 미술사도 다 다시 써져야만 한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이게 말이 되는 논리인가? 세계의 어떤 미술사에서도 ‘집단적 운동’을 예술적 성취로 평가하고 있는 대목을 찾아볼 수 없는 이유를 윤진섭만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인가? 예술이, 예술적 가치가 무엇인지는 알고 있나?
윤진섭의 주장은 미술의 논리도 아니고, 나아가 미술운동의 논리도 아니다. 이런 논리는 깡패사회에서나 통용되는 논리인 것이다. 더욱 한심한 일은 이들이 한 시대의 미술을, 그것도 역사적 분기점을 다루는 지점에서 미술 자체의 쟁점과 이슈 그리고 작품단위의 분석이나 연구의 전제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언급조차 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것이 미술비평이란 말인가?
나는 윤진섭이 보여 주고 있는 김환기와 유영국 등에 대한 차별적 태도나 집단 미술운동 중심의 논리 배후에 한국현대미술사를 향한 일련의 엉뚱한 정치적 ‘의도’가 자리를 잡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비평적 차원에서의 분별이 아니라, 한국현대미술사의 중심설정을 염두에 둔 기획된 정치적 포석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며, 이런 기획의도는 『한국 모더니즘 미술연구』 전체에 걸쳐 민망하리만치 전방위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한국미술의 ‘현대성’이란 몇몇 작가들이 집단운동을 통해 성취할 수 있는 성질의 문제도 아니려니와, 어떤 작가가 서구 추상미술의 어떤 양식을 차용함으로써 가능해지는 것도 아니다. 한국미술의 ‘현대성’은 나를 포함한 모든 예술가들과 우리 미술의 역사 전반의 아이덴티티를 설명해 주는 일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나는 윤진섭의 논리가 다분히 1950년대 후반 이후 비정형회화 운동을 주도한 세대들을 염두에 둔 ‘선택’과 ‘집중’에 근거하고 있으며, 이것이 실로 중요한 가치전도의 한 장면이라고 생각하는 바, 윤진섭에게 그에 관한 명확한 논거나 주장을 다시 정리해서 제시해 주기를 요청한다.
한편, ‘추상’은 서구 전통회화의 ‘재현적 구조’를 해체한 결과이거나 미술의 그러한 시스템 자체를 전복하기 위한 시도로써 등장한- 스타일로서의 양식화 이전의, 역사적 문맥 속에서 구축된 이념의 소산이다. 그리고 이것은 ‘집단적 운동’으로 성취하거나 이해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각 예술가 단위의 지극히 개체적인 미학적 인식의 문제였다. 윤진섭은 이러한 추상미술을 집단적으로 수용했던 <현대미술가협회>의 작가들을 “아방가르드 운동의 효시”라고 치켜 세우고 있는 것이다. 묻건대, 추상미술과 <현대미술가협회> 작가들의 집단적 데먼스트레이션이 도대체 무슨 관계가 있다는 말인가?
앵포르멜Art-Informel의 창시자인 미셀 타피에는 ‘다른 미학에 관하여’라는 글을 통해 고독하게 제작에 몰두하고 있는 각 개별 작가들의 작품에 나타나는 전후의 독특한 정신상황을 ‘다른 미학un art autre’으로 상정하고 ‘앵포르멜’이라 명명하면서, 앵포르멜이 다다나 초현실주의 같은 유파(에콜)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밝히고 있다. 또한 “앵포르멜이란 앵포름informe(부정형, 형을 만들지 않음)이라는 소극적이고 엄밀하지 않은 의미와는 반대로, 피안의 추상적 세계를 나타내는 극히 보편적인 용어”로, “형식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려는 무질서 아카데미즘”이며, “아포리오리한 의미 문제를 제시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4)
다시 말해서 앵포르멜과 추상표현주의는 이념을 공유하는 집단적 실천으로서의 운동이 아니라, 비평가들에 의해 포착된 당대의 특징적인 미술의 현상이었다는 말이다. 또한 흔히 생각하듯 앵포르멜과 추상표현주의는 서로 대응관계에 있는 미술이 아니라, 동시대의 다양한 미술현상을 바라보는 시각 차이에서 비롯된 다른 범주의 틀일 뿐이다. 즉 잭슨 폴록의 작품은 미셀타피에의 관점에서 앵포르멜이었고, 그린버그에게는 Modernist Painting이었으며, 또 다른 이들에게는 추상표현주의 미술로 인식될 수 있다는 말이다.
한국의 미술평론가들과 미술사가라는 위인들은 이런 기초적인 사실조차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이들은 최근까지도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둘러 앉아, 진지한 표정으로 1950년 후반 이후의 한국 비정형회화를 두고 ‘앵포르멜로 보아야 한다’느니, ‘추상표현주의에 더 가깝다’느니 하며 논란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미술평론가들과 미술사가들은 정말 괴기스러운 사람들이 아닌가 말이다.
문제는 이런 동시대적 미술현상이 한국에서는 어느 시점부터 갑자기 ‘집단적’ 양상을 띠면서 일제히 시작되었다는 것이고, 이 사실이 의미하는 것은 당시 비정형회화 열풍이 아방가르드 운동으로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한국에서 이루어진 서구미술의 ‘후위’이자 일종의 Post 현상으로서의 ‘집단적 수용’ 현상이었음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한국의 미술평론가들과 미술사가들은 이런 미술의 ‘후위’현상을 한국현대미술의 기점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고, 이것은 곧바로 한국의 현대미술 맥락 전체를 서구의 일부 미술현상의 수용차원에 종속시키는 논리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전적으로 분별력 없는 미술평론가들과 미술사가들의 엉터리 시나리오일 뿐이다. 이것은 ‘반국전’으로 상징되는 당시 화단의 ‘집단적 운동’과 미술맥락에서의 현상을 한데 뭉뚱그려 동일시하는 평론가들과 미술사가들의 집단적 착각 내지는 혼동의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상당수의 예술가들도 동일한 착각과 혼동에 빠져 있다. 1970년대 단색조 미술과 1980년대 민중미술은 이런 착각과 혼동에서 비롯된 특이한 미술현상을 보여주고 있다. 그 미술운동들은 당대의 이념에 대응하는 예술가 개체의 미학적 실천들이었다기 보다는, 이념 자체를 향한 집단적 운동의 양상을 띠고 나타난, 이른바 ‘대세주의’의 시류에 편승하고 있었던 현상이었기 때문이다. 이들 중 대다수는 당대의 이념이나 쟁점과 이슈에 대응하는 각각의 code와 어법을idioms생산해 낸 것이 아니라, 일부 작가들과 평론가들의 이념과 스타일을 공유하면서, 심지어 ‘강령’에 따라 집단화하는 양상을 연출했고, 그런 운동의 힘으로 집단적 권력을 생산하여 그 힘으로 한 시대의 미술을 강압적으로 지배했다. 이것은 현대미술 문맥 속에서의 참으로 기이하고 특수한 미술의 상황인 것이며, 한국미술계의 反문화적 야만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더욱 끔찍한 일은 미술평론가들과 미술사가라는 사람들이 이러한 미술현상에 한 시대의 대표성을 부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정말 웃기는 말이지만, 이런 현상을 두고 김홍희는 민중미술이 “평론가들이 주도한 본격적인 미술운동이었다는 점에서 평가받을 만하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가당치 않는 논리도 비평적 관점이라고 주장을 하는 것인가?
한마디로 한국의 평론가들과 미술사가들은 미술사를 향해 이렇게 외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패를 지어 싸워서 이긴 놈들의 편이다!’
사족같지만, 이 기회에 한마디 덧붙여두고 싶은 말이 있다. 한국의 일부 작가들과 평론가들 그리고 미술사가들이 종종 ‘역사는 강자의 편’이라는 말들을 하는데, 이것이 얼마나 바보같은 말인지를 지적하려는 것이다. 역사를 조금이라도 이해하는 사람들이라면 역사 속에 진정한 강자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안다. 물론 역사 속에는 당대의 강자들이 등장한다. 그러나 그들의 운명은 더 강한 자들의 화려한 등장을 위해 희생되도록 예정되어 있는 것에 불과하다. 일종의 먹이사슬 구조처럼, 역사는 전대의 한계를 넘기 위해 그 강자들에게 더욱 냉혹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고, 그 강자를 옹호하며 권력을 구축했던 자들의 운명이 더 비참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도 알아야 한다. 나는 이런 점에서 한국 미술계를 종종 ‘동물의 왕국’에 비유해 왔다. 20여년에 걸쳐 동료 작가들과 이론가들 심지어 새카만 후배들로부터의 온갖 견제와 수모와 조롱을 당하면서도 이런 비평적 오류들을, 평론가들이 스스로 교정해 줄 때를 기다려온 이유는, 더 이상 이 미술계가 이런 식의 야만적인 약육강식의 원리를 반복 재생산하지 않아야 한다는 신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내가 패거리를 짓지 않고 홀로 서서 그 패거리들을 상대하려는 까닭이기도 하다.
한국의 미술평론가들과 미술사가들 중에는 일부 미술작품들이 지닌 인테리어 '발포 벽지'수준의 장식적 가치를 ‘쎄련된’ 미적 가치로 높게 평가할 만큼 촌그럽고 해괴한 안목을 가진 자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고, 그런 시기를 가리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시대’라고 치켜 세우며 미술의 가치를 전도시킬만큼 어리석은 자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다. 이들은 내게 한마디로 눈뜬 장님들이고 뇌가 없는 인간들로 보이는 것이다. 책 한권을 써서 설명을 해도 뭐가 뭔지 이해를 하지 못하고, 쥐죽은 듯 엎드려 바람 잘 날만 기다리고 있는 한심한 위인들이 미술의 가치를 논하고 역사를 논하며 엉터리 비평과 미술사를 남발하는 현실, 나는 이런 현실이 실로 개탄스러울 뿐이다. 생각같아서는 이우환의 말처럼 ‘이 미술 사기꾼들을 다 때려 눞히고 그 일그러진 인간들의 얼굴들에 침을 뱉어주고 싶을 뿐’이다.
일본의 미술평론가 도노 요시아키東野芳明는 「하나의 앵포르멜」이라는 글에서 앵포르멜은 큐비즘까지의 오랜 고전주의적 전통과의 결별이자, 다다의 정신적 계승이라는 역사성을 지니고 있음을 밝히면서, 그러나 앵포르멜의 격정은 다다적 허무와 반항의 표현이 아니라 “원자핵적 우주관에 대응하는 새로운 「구조」와 「내용」을 지향”하고 있음을 간파하고 있다.
“20세기 전반의 예술이 고전주의에 대한 반항과 파괴의 신화로 가득했다면, 여기에는 「전제적이지만 안일한, 온갖 반사작용에 대한 완전한 무관심」과 「전인미답의 초복잡성超複雜性에 대한 장대한 모험」이 있다. 또 거기에는 대전 전의 부정과 허무의 극점을 겨냥한 다다이즘에 대한 강렬한 관심과 더불어 이것을 「다량 파괴에서 생기는 풍요로운 허무」 속에 적극 재생시킨다는 자부심이 담긴 것 같다.”5)
도노 요시아키의 글을 소개하는 이유는 간단하고 명료하다. 그 역시 당시 한국의 작가들 및 미술평론가들과 마찬가지로 서구의 앵포르멜을 바라보고 이해한 제3자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이해의 내용에 있어 약 50년 전의 이 글은 현재 한국의 일부 예술가들과 미술평론가들의 그것과 실로 커다란 차이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당시 서구의 앵포르멜 미술을 정확히 독해했던 도노 요시아키는 앵포르멜이라는 말이 유행 상표로 변질되는 것을 경계하여 이것을 “시니피앙 드 랭포르멜」signifiant de l'informel(앵포르멜이 의미하는 것)”로 부르고 있는 것 같다는 말로 그 미술 자체에 대한 신중한 이해의 단면과 그 문화현상으로서의 영향문제를 조심스럽게 피력하고 있다. 특유의 겸양으로 일관된 이 글은 1950년대 후반 한국 미술계에 비정형회화가 등장했던 때부터 현재까지 “뜨거운 추상”이니, “격정의 대결”이니 “앵포르멜 열풍”이니 하는 과장된 언어들로 의미의 과잉을 자초하여, 스스로 허구성을 드러내 왔던 한국의 일부 작가들과 평론가들의 행적들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 것인지, 양국 비교문화의 한 단면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물론 당시 평론가들과 작가들 중에 이런 문제를 정확하게 간파했던 사람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정규, 이봉상 등과 초창기 이경성 그리고 특히 작가이면서 평론활동을 했던 김병기가 남기고 있는 글6)들은 이미 1950년대 말의 시점에서 이 미술의 수용이 지닌 방법적 한계를 정확하게 비판하면서, ‘열풍’으로 번지고 있는 ‘비정형 회화’의 유행현상을 경계하고 있다. 그러나 이 중요한 지적들은 무자비한 운동세력들의 정치적 음모에 의해 역사에서 삭제되어 두터운 먼지 속에 잠들어 버렸다. 그리고 그 결과는 자그만치 약 50년의 세월이 흐른 뒤의 미술평론가인 윤진섭 같은 사람들이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마치 김병기보다 훨씬 이전의 사람인양, “1950년대 후반에서 60년대 중반에 걸쳐 전개된 (한국의) 앵포르멜을 아방가르드 운동의 효시로 간주”하는 비평적 오류를 초래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물론, 확실히 세월은 개인의 재능과 통찰력 그리고 지혜의 개체적 차이를 보정해 줄 수 없으며, 역사는 무능한 자들에 의해 언제든지 그리고 얼마든지 퇴보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어리석은 자들의 정치학이 빚어낸 한국미술 전체의 역사적 손실이 얼마나 크고 뼈아픈 것인지를 다시 확인시켜주고 있는 일이기도 한 것이다. 실로 부질없는 생각이겠지만, 한국의 현대미술이 그 ‘집단적 운동’이 생산한 권력의 힘에 의존하기보다, 김병기 같은 탁월한 예술적 안목을 지닌 분들의 지적에 귀 기울이며 미술 그 자체의 가치 천착에 힘써 왔다면, 지금쯤 우리는 전혀 다른 문제를 놓고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고 있을 것이 아닌가? (3부에서 계속)
각주
1) 윤진섭,「제1장 격정의 대결」13쪽 참조, 『한국 모더니즘 미술연구』, 재원, 2000
2) 같은 책, 같은 글, 19쪽
3) 같은 책, 같은 글, 18쪽
4) 미셀 타피에, 「d’une esthetique autre」, 『미즈에』, 1956년 12월호.
5) 도노 요시아키東野芳明, 「하나의 앵포르멜」, 『미술수첩』, 1957년 12월호.
6) 이경성, 「환상과 형상-제3회 현대전 평」, 1958년 5월 20일자 한국일보
이 글은 이미 여러 사람들에 의해 여러 차례 인용되어 소개된 바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이 글의 전반부 내용은 잘 소개가 되지 않았고, 자주 인용되어 왔던 후반부의 내용과 그 의미가 사뭇 다르다는 사실에서 찾아진다. 말하자면, 이경성은 이 글의 전반부에서 《현대전》의 변화에 대해 신중한 태도로 의문을 제기하고 있고, 주로 인용되어 온 후반부의 글에서는 전반부의 비판을 의식해서인지 개별 작품들에 관해 얼마간 다독이는 듯한 애정을 가지고 진술하고 있었던 것이다. * 원문 참조할 것.
정규, 「젊은 정열과 의욕-현대미술가협회 3회전 평」,1958년 5월 24일자 동아일보
이봉상, 「제4회 현대전 평」1958년 12월 8일자 한국일보
김병기, 「회화의 현대적 설정문제-한국미술과 세계미술」,1959년 5월 30일자 동아일보
이 글에서 김병기는 앵포르멜 미학의 본질과 수용의 한계를 놀라울만큼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다. * 원문 참조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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