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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미술의 이해

예술은 우리 삶에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

Marce Duchamp, L.H.O.O.Q,1919, pencil on the print

몇 년 전 내 혈족 중 한사람이 “노동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가난하지만 건강하다, 하지만 예술한다는 것들은 하나같이 쌀 한 톨 생산하지 못하는 소모적인 인간들”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나는 물론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정확히 알아들었고, 뭐라고 말해도 이해할 의지가 없어 보이는 그를 위해 ‘듣고 보니 그렇다’고 대답해 주었다. 그리고 속으로 혼자 이렇게 되 뇌였다. ‘먹고 사는 일이 삶의 전부라면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 그렇지만 삶이 어디 그런 것인가?’
 

결코 일치할 수 없는 일인 양 현실과 이상의 괴리를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평생 그런 분들에게 귀에 못이 박히도록 현실에 관한 충고를 들어 왔지만, 과연 그런 것일까? 창밖 거리에서 벌어지고 있는 각박한 세상살이, 돈 몇 푼 때문에 이마에 핏대를 세워가며 싸우고, 좀더 큰 집에서 좀더 호사스러운 승용차를 타고 과시하며 사는 일이 현실이란 말일까? 가끔 나는 이런 풍경이 더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뭔가에 홀린 듯, 집단적으로 자아를 상실하고 상대적 빈곤 같은 소외와 열등감의 강박에 빠져 맹목적으로 치열하게 살며, 돈, 돈, 돈만 찾고 사는 사람들이야말로 삶의 궤도를 이탈한, 진정으로 의식이 빈한貧寒한 사람들이 아닐까?

 

나는 의지와 태도가 삶을 결정짓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무엇을 아끼고 사랑하며 무엇에 집중할 것인가에 따라 삶과 그 삶을 통한 성취가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권력과 명예를 추구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돈에 집착하지만, 내게는 그런 것들이 종종 뒤집어져서 이해된다. 절박함이 그 사람의 정신적 실체를 보여 주는 것이다. 허영이나 권위도 그 중의 하나일 뿐, 그런 것들은 모두 정반대의 상태, 즉 결핍과 그것을 채우려는 욕망에 급급한 그의 존재를 말해 주고 있을 뿐이다.
어떤 이들은 이런 말을 듣고, 나를 순진한 이상주의자라고 비웃을지도 모른다. 사실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들이 ‘이상理想’의 비현실성을 말하기 전에 참뜻을 이해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이상’은 이미 그 자체가 ‘상태’가 아니라 ‘지향’인 까닭이다. 중요한 것은 ‘이상’의 현실성을 따지는 일이 아니라 그것이 현실을 바꾸는 힘의 원천임을 깨닫는 일이며, 무수한 좌절 속에서도 결코 굴복할 수 없는 의지의 문제임을 이해하는 일이다. 세상은 ‘이상’을 향해 가려던 사람들이 찾은 현실적 대안으로 변화되어 오지 않았는가 말이다.

 

아름다움이란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느낌으로써 구하는 것이다. 아름다움을 느끼는 사람, 그의 마음과 영혼이 아름다운 것이다.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생각하며, 현재의 좌표를 뜨고 지향에 관해 생각하는 사람들이 진정 아름다운 것이다. Arcy Hayman이라는 사람이 말했듯, 예술은 우리의 정신을 향한 무한한 열정과 탐구심으로 가득 찬 역사의 증언이자 해석이며, 질서와 혼란 그 자체이자 상상력과 현실 그리고 감각적 통합으로서의 그 무엇이다.

 

나는 지난번의 기고에서 현대미술이 ‘미술을 회의懷疑하는 미술’이라고 말한 바 있다. 현대미술은 조형적으로 아름다운 미술이 아니다. 시각적 아름다움이란 익숙함의 틀을 확인하며 소비하는 가치일 뿐이다. 현대 예술가들의 미술에 대한 회의는 바로 그 아름답다는 통념의 틀 자체를 향해 있다. 그것을 충분히 신뢰해도 좋은 것일까를 묻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현대미술의 기괴한 형태와 존재방식을 이해할 수 있는 결정적인 열쇠가 된다.

 

오늘날의 현대미술에 큰 영향을 준 마르셀 뒤샹이라는 작가가 있다. 그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예술가로 추앙 받아왔던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 복사본에 수염을 그려 넣고 <L.H.O.O.Q.>라는 망측한 제목을 붙여 정신의 숭고함을 유린함으로써, 예술로 하여금 다시 오늘의 정신에 봉사하도록 만들었다.

뒤샹은 <모나리자>를 근대예술의 상징으로 선택하여, 근대인들의 정신적 어머니의 얼굴에 수염을 그려 넣음으로써 그 미적 전형의 숭고함을 훼손하고, <L.H.O.O.Q.>라는 제목-불어로 읽을 경우 ‘그녀는 뜨거운 엉덩이를 가졌다’는 의미-을 통해 <모나리자>를 음란한 여성으로 비하해 버리는 도발을 감행한 것이다. 이것은 뒤샹 특유의 가벼운 위트이자 냉소였지만, 서구인들에게는 어머니만큼이나 숭고한 존재로 받아들여져 온 예술작품을 윤간하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패륜의 극치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그 분노는 <모나리자>를 정신적 어머니로 떠받들어 온 대중들 자신의 통념을 향하고 있는 것에 불과했다. 즉 뒤샹이 유린하고자 했던 것은 <모나리자>를 향한 대중들의 맹목적 숭고함의 통념이었고, 그 분노는 곧 그 통념의 모순을 스스로 통렬하게 반성하는 일에 다름 아니었던 것이다.

뒤샹은 ‘미술’의 가치를 정제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순수라는 통념’이 아니라 미술에 관한 비판적 사유이고 전략적인 회의라는 점을 분명히 했고, ‘순진’은 결백이 아니라 그 자체가 죄악일 수밖에 없음을 극명하게 드러냈다. 그리고 이런 전략은 확실히 예술의 가치가 캔버스 위에 두텁게 발라진 물감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술적 가치를 인식하는 감상자의 정신 속에 자리 잡고 있음을 확인시켰다. ‘순수’란 ‘순진’과 달리 비판적 성찰을 통해 구해져야 할 궁극의 가치라는 사실을, 뒤샹은 놀라울 만큼 가뿐한 방법으로 드러냈다. 복사본을 ‘선택’하는 일로 전통적인 창작행위를 대신하는 일은 예술을 위해 ‘그리는 일’이 필요하지 않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나는 뒤샹을 역사상 가장 절묘한 정신적 테크니션으로 평가하며, <L.H.O.O.Q.>를 현대미술의 본질을 가장 잘 설명해 주고 있는 작품의 하나로 꼽는 일에 주저하지 않는다. 그의 전략은 놀라울 만큼 치밀했지만, 그 힘은 논리가 아니라 비판적 통찰에서 비롯되고 있고, 예술을 숙련된 기술로부터 완전히 해방시키고 있다. 예술은 순전히 정신적인 가치인 것이다.
 
우리는 이 문제를 두고 고민을 계속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기존의 예술 범주에서 벗어나 있는 이 <L.H.O.O.Q.>를 예술의 범주를 확장시켜 예술작품으로 받아들일 것인지, 아니면 비非예술로 규정할 것인지에 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겠는가? 이렇게 예술작품에 관한 감상자로서의 생각을 확장하는 것이 현대미술의 담론에 참여하는 길이다.
뒤샹 이후 수많은 현대의 예술가들과 애호가들이 그의 의견에 공감했고 그에 따라 현대미술은 커다란 변화를 맞이했다. 그들은 기꺼이 과거의 예술들을 파괴했고 무참히 유린했으며, 나아가 예술의 경계 자체를 무너뜨렸다. 사실상 뒤샹의 <L.H.O.O.Q.>가 예술인가 아닌가의 문제는 더 이상 중요한 문제가 아니게 되어 버린 것이다. 굳이 말하자면 그것은 예술과 예술이 아닌 것 사이의 경계에 놓여 있지만, 그렇게 보자면 현대미술 전체가 그 경계 위에 놓여 있는 셈이고, 그것은 곧 그 경계의 의미 자체가 사라져 버렸음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의문을 더 확장해 보자. 그렇다면 예술이 아닌 것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예술과 예술이 아닌 것 사이의 경계가 사라진다면, 이것은 바꾸어 말해서 예술의 존재 자체를 망실시키는 결과가 되는 것이 아닌가? 사실 그렇다. 현대미술은 ‘무엇이든 가능한 지점’에 서 있고, 이것은 거꾸로 현대미술이란 ‘어떻게 해도 이것을 예술이라고 규명하기가 불가능’하다는 점을 말해 주고 있는 것에 다름 아니다. 혹자의 말처럼 현대미술에는 ‘사기의 가능성이 도처에 산재’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문화적 현실은 현대미술의 이해를 상당히 혼란스럽게 만드는 측면이 있지만, 비평적으로는 오히려 미술로 하여금 스스로의 가치를 규명하도록 만듦으로써 미술을 더 투명한 담론의 문화 속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그리고 바로 이 점 때문에 대중은 단순히 주어진 예술의 가치를 감상하는 일방적인 위치에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담론에 참여하게 되고, 이러한 참여를 통해 미술문화의 생산에 직접 개입함으로써 현대미술의 주체로 변화할 수 있게 된다. 감상이라는 활동이 곧 창작의 연장선상에 있게 되는 것이다.


뒤샹은 미술의 전통적 가치와 그것을 향한 대중의 통념을 냉소적으로 비판했지만, 대중과 예술가들로 하여금 근대미술의 절대적인 가치의 우상숭배에서 벗어나, 미술문화의 주체가 될 것을 촉구하고 있다. 많은 예술가들이 뒤샹의 새로운 미술 읽기에 영향을 받았고, 그 때문에 뒤샹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런 현상은 근대의 천재들 대신 뒤샹을 우상화하는 또 하나의 함정이 된다. 뒤샹의 발상과 인식의 전환은 미술의 존재와 존재의 방식에 관해 다시 생각하게 하는 계기를 만들었지만, 그 가치를 인식하고 미술을 적극적으로 변화시킬 가능성은 그것을 받아들이고 미술을 새로운 지평 위에서 펼쳐 갈 사람들의 정신 속에 있는 것이다. 뒤샹은 미술을 새털처럼 가볍고 바람처럼 유동적인 것으로 만들고 있고, 미술은 그런 정신의 가뿐함 속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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