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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상과 한국의 현대미술-메타비평을 위한 질문들(Part II)

 

 

III. 기존 논의와의 거리 두기-다시 읽기

 

1. 메타비평을 위한 가치 중립성
많은 지면을 할애했지만, 이런 의문들은 상식적 수준을 벗어나지 않는 것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의문이 충격을 주는 이유는 그간의 논의들이 지닌 허점 때문이지만, 이것이 이유가 있는 허점이 아닐까하는 의구심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이 말은 이 시기의 미술을 본격적으로 논의하기 시작한 시점으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일부 작가들과 일부 이론가들의 정치적 유착관계를 심중에 두고 하는 말이다.
이 관계와 진술들이 문제가 되는 까닭은 이것이 바로 임창섭이 말하는 “당시의 미술을 단층구조로 전락”시키는 일이자, 극히 非현대적인 “서구 미술사조의 신화에 대한 집착의 잠재”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즉 당시의 다양한 시도들과 고민들을 화단의 권력구조에 맞추어 강제적으로 중심과 주변으로 나누고, 특정한 활동만을 집중적으로 부각시킴으로써 수적 ‘대표성’을 중심으로 하는 미술사적 진술을 결과하고 있고, 구체적 연구의 부재 덕분에 서구미술의 수용적 맥락과 문화적 종속의 오명에서 자유롭지 못해 왔다고 생각된다.
다시 말해서 이러한 진술들의 배후에는 한국미술로서의 현대성을 고민해온 당대의 지성들의 노력이 ‘또 하나의 신화’를 위한 뒤틀린 욕망에 함몰된 ‘비극의 역사’로 남아있다는 것이며, 오늘의 역사연구가 이 한계를 기필코 넘어서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2. 메타비평의 당위-미술현장과 비평 및 미술사의 진술이 만드는 그늘들
흔히 당시의 추상/비정형회화들을 ‘뜨거운 추상’이라고 말하지만, 이는 비평적으로 적합하지 않은 수사적 표현인 것이며, 이런 용어들이 일부의 非역사적 진술들과 맞물려 당대의 진정한 열정을 차갑게 식혀놓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앞서 잠시 언급했듯 이 시기의 예술활동은 대단히 열악한 상황 속에서 놀라울 만큼 열정적인 것이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역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후대들은 감히 생각할 수도, 필설로 형용할 수도 없을 질곡을 거치면서 역사적 단절과 비약의 현실을 고민했고, 새로운 문화적 충격에 대응하기 위한 진지한 고뇌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47)
그러나 누군가 이러한 역사를 ‘신화’의 창조 같은 비역사적 드라마에 의해 영웅적으로 각색하거나, 집단화의 논리에 의해 권력과 소외라는 반문화적 질서 속에서 선택적으로 구성된 일그러진 역사의 그늘을 만든다면, 과연 그것이 지닌 역사적 리얼리티를 누가 인정하고 받아들여 줄 것인가? 여기엔 또 다른 피해자들, 예컨대 ‘신화’의 진술과 비평가들의 비호 때문에 다른 생각과 다른 내적 동기를 지녔던 작가들마저 한꺼번에 오해를 받게 될 소지가 있다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때문에 당시의 미술현장을 역사적으로 재구성하는 작업은 당대의 논의들에 대해 좀더 신중한 객관적인 중립성을 확보한 상태에서 진행되어야 할 필요가 있고, 당시의 작품들 속에서 이들이 자신들의 역사경험을 어떻게 반영시켰는가를 구체적으로 찾아내는 긍정적 노력으로부터 다시 시작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한국현대미술의 역사적 특성상, 작가들의 ‘운동’에 의한 역동성은 분명히 긍정적 생산성을 보여주는 측면이 있다. 그러나 미술의 역사를 운동사로 대체할 수는 없는 것이다. 당대의 미술운동이 아무리 거셌고 그 영향이 크다고 하더라도, 미술을 통한 예술의 가치를 운동 속에서 찾는 ‘가치전도’의 결과를 초래할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또한 예술가 개인의 입장에서의 ‘운동’은 상황을 변화시키거나 자신의 이념을 실천하는 하나의 방법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미술운동 속에서, 혹은 그 바깥에서 많은 예술가 개인들이 고독하게 추구했던 미학적 가치를 소홀히 생각할 수는 없는 일이다. 사실 진정한 역사의 변혁은 침묵 속에서도 이루어져 왔으며, 그 고요한 변혁의 외침은 한 세대, 혹은 두 세대를 건너 역사 속에서 얼마든지 되살아나왔던 것이다.
물론 역사현장을 지키고 일구어 온 ‘운동’은 비록 집단화 논리에 의한 부정적 결과를 만들었다 하더라도 역시 중요한 역사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이것은 미술사가 아닌 별도의 운동사로서 수용해야 할 문제인 것이다. 그리고 그동안 운동사가 차지하고 있던 미술사의 자리를 새로운 연구들, 이를테면 작가단위 혹은 작품단위의 구체적이고 각론적인 분석작업을 통해 드러내야 할 실체들로 채워나아가야 한다.

 

3. 오류로 흐르는 비판적 시각들-‘수용론’을 향하여
그동안 일부 이론가들이 당시의 미술현상들을 서구미술의 수용과 문화적 종속의 관점에서 비판해왔지만, 나는 이 비판이 그들 자신들의 좁은 시야의 한계와 나태함을 향해 고스란히 되돌려져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문화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유동적인 영향관계에 의해 만들어지고 파생되는 충격과 간섭의 결과로 나타나며, 예술작품은 극히 개체적인 차원의 복합적 경험에서 비롯되는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현대의 미술은 미술의 존재와 그 가치를 스스로 묻고 답하는, 과정성에 근거하는 까닭에 모방의 원전성originality 자체를 지니고 있지 않은 것이다. 오늘날 미술의 수많은 차용과 알레고리의 전략들은 원전성이라는 근대의 유산이 얼마나 하찮은 가치로 전락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일부 미술사가들은 자신들이 공부한 과거미술 연구의 방법론을 그것을 극복하려는 현재의 미술에 적용시키려는 무모한 시도를 서슴지 않으며, 무엇이 잘못되어 있는지 여전히 모르고 있는 것 같다. 한국미술과 관련된 그간의 ‘근대성’과 ‘현대성’의 기점논의들이 그렇듯, 소위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뜨거운 추상/추상표현주의/앵포르멜과 차가운 추상/기하학적 추상, 전위/아방가르드나 실험 등등의 수사적 표현들이 한결같이 이 땅에서 이루어져 왔던 미술의 실제 현상적 리얼리티와 동떨어진 비평적․미술사적 진술들을 결과함으로써, 역사적․현재적 혼란을 가중시켜 왔다.
물론 학자들의 다양한 견해는 논쟁을 통해 담론의 두께를 생산하게 한다는 점에서 지극히 바람직한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 현실과 유리된 개념을 무리하게 적용시켜 규정하려는 시도는 역사적 쟁점자체를 흩트리고, 왜곡시키는 결과를 낳는다는 점에서 非학술적일 뿐만 아니라 非윤리적이기까지 한 일이다.
과거의 미술현상과 진술들은 한국현대미술이라는 역사진술의 시점에서 ‘지금, 여기에서의’ 현재적 목적을 위한 객관적․보편적 거리 설정과 가치의 중립성이라는 프리즘을 통과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프리즘을 통한 담론의 스펙트럼은 한국미술로서의 ‘현대성’이라는 더욱 중요한 가치에 값하는 ‘생산성’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어야 하는 것이다.

 

4. 예술적 가치의 생산과 소비의 시스템
사실 ‘작품’의 생산과 ‘예술적 가치’의 생산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림 그리는 일과 예술적 가치를 생산하는 일이 반드시 일치한다고는 말할 수 없다. 또한 예술적 가치가 체계적인 교육과정이나 직업적인 예술가의 작업을 통해서만 얻어질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오히려 교육과 직업예술가들의 ‘자기복제’나 ‘나르시시즘’을 ‘예술적 가치’의 생산과 구별해내야 할 필요가 있다고도 생각한다. 이런 의미에서 ‘누구나 예술가일 수 있다’는 말은 매우 의미심장한 것이다. 물론 예술적 가치의 생산에 기여하지 못하는 그림도 수용자의 미적 취향에 따라 가치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 경우의 가치는 ‘문화적 소비’를 향하고 있는 것이다. 예컨대, 미니멀리즘과 미니멀 아트 그리고 미니멀 풍의 디자인은 이데올로기와 작품 그리고 문화적 인프라라는 서로 다른 목적과 방법에 따른 미적 가치의 생산과 소비구조를 갖고 있지 않은가?


5. 미술과 문화정치학
그런데, 이 예술적 가치의 ‘생산’과 그것의 ‘문화적 소비’ 관계는 서로 다른 문화권 사이에서도, 심지어 동시대 미술이라는 문화적 연대 속에서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한국의 현대미술 맥락과 관련된 소위 서구미술의 수용과 모방 혹은 문화적 종속의 우려들은 우리의 ‘예술적 활동’이 경우에 따라, 서구미술의 예술적 가치를 ‘문화적으로 소비’하는 차원에 머무는 일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예술적 가치가 바로 이러한 영향과 간섭의 충격에 대한 문화적 대응의 시도들에 의해 새로운 가치로 거듭나 왔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미국의 초기 현대미술은 유럽의 예술적 가치의 문화적 소비로부터 시작되었고, 이런 측면에서는 일본과 한국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20세기 현대미술 맥락 속에서는 이러한 문화적 소비가 새로운 예술적 가치의 생산으로 역전되는 드라마틱한 상황들이 속속 연출되고 있다. 1951년 MoMA의 《미국의 추상회화 조각전》을 시작으로 미국은 유럽 미술의 전통으로부터 좀 더 자율적인 ‘미국미술로서의 가치’를 실현시켰고, 이에 대응하기 위한 유럽에서의 적지 않은 시도들이 이어졌다. 일본의 모노하 역시 이런 차원에서의 ‘일본적 가치’를 추구한 미술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며, 오늘날 전 세계에서 열리고 있는 백여 개의 비엔날레들이 소위 제3세계권에서 열리고 있다는 사실 또한 이러한 정황을 뒷받침하고 있다.

 


IV. 나서며

결국 이 시점에서 한국의 현대미술이 다시 읽혀야만 하는 까닭은 지금까지의 논의가 한국의 현대미술을 서구미술의 ‘문화적 소비’ 차원에 머물게 만들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주어진 틀에 맞추어 미술의 제 현상들을 들여다보려는 비평적 한계는 실로 헤아릴 수조차 없을 만큼 많지만, 이런 한계를 질타하고 극복하려는 노력은 지극히 미미한 실정이다.
세계는 넓고 미술의 담론적 가치는 무한하며, 경쟁은 치열하지만, 우리는 ‘우물 안의 개구리들’처럼 예술가들과 이론가들이 서로를 과장하고 무시하며 최소한의 양심과 윤리마저 저버린 채, 서로를 비난하는 상호불신 풍조와 무기력증에 빠져 지리멸렬한 미술의 상황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 상황은 최소한 생산적 논쟁을 통한 대립이 아니라 음성적인 소모적 마찰이라는 점에서 서로에게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일 뿐만 아니라 심히 부끄러운 일인 것이다.

나는 네 번째『한국현대미술 다시 읽기』를 통한「초기 추상미술 연구」를 통해 지금 우리에게 결핍되어 있는 많은 문제들을 생각하게 되었다.
이들, 한국현대미술의 초창기 역사를 일군 선배들은 일제에 의한 식민강점과 해방공간, 분단의 현실과 전란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암울한 현실의 고통 속에서 열정하나만으로 한국현대미술의 기초를 닦아 왔다. 이들에게는 오늘과 같은 풍요로운 조건이 결핍되어 있었지만, 자신들의 역사적 정체성과 문화적 충격에 관해 진지하게 고민하면서 오직 열정 하나만으로 우리 현대미술의 토대를 닦아왔다. 그러나 정보와 지식이 넘치고 물질적 풍요를 누리는 현재의 우리들에게는 선배들이 가졌던 치열한 문제의식과 뜨거운 열정이 결핍되어 있다. 나는 이것을 가장 부끄럽게 생각한다.
우리의 초창기 추상미술의 역사는 그 초라한 외형 속에 오늘의 우리에게 역사적 반전을 위한 대단히 중요한 단서를 제시해 주고 있다. 그것은 그들의 역사 속에 찌들어 있는 땀과 인내와 눈물의 모습이지만, 나는 이것이 어떤 보석보다 값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보아야 하는 것은 그들이 고난의 역사 속을 헤쳐 오면서 전통의 단절과 서구문화의 충격 사이에서 무던히도 방황하고 절치부심해 왔던 몸부림의 흔적들이다. 그들이 비록 서구미술로부터 정보와 영향을 받았고, 그들이 남긴 예술작품들이 그 자극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결과가 아닌 동기의 문제였을 뿐이다. 한국현대미술을 다시 읽는 눈은 앞선 세대들이 남긴 ‘또 하나의 미술’ 속에서, 그들의 역사와 정신과 미학 속에서 서구미술과의 문화적․예술적 가치의 차이를 찾고 있다. 그리고 현재 우리가 서 있는 지점 역시 그 차이의 연장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각주

1) 六藝: 중국 주나라 때의 교과로 예禮(예용禮容, 일상규범으로서의 형식)․악樂(음악, 풍류)․사射(궁술弓術)․어御(마술馬術)․서書(서도書道)․수數(수학數學) 등 6종류의 기술을 말한다.

2) 그리스어 techn, 라틴어 ars, 영어 art, 독일어 Kunst, 프랑스어 art.

3) 현실과 유리된 이론만을 추구하는 성리학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조선 후기의 개혁 사상. 실학자들은 농경을 연구(박세당 등)하고, 과학과 기술(정약용 등)을 연구했으며, 지리학(김정호) 등 실제 생활에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 개발했다.

4) 1876년(병자년) 2월 26일 조선왕조와 일본 사이에 체결된 불평등 수호조약. 강화도 조약이라고도 한다. 이 조약이 일제 강점의 시작이었다.

5) 1884년(고종 21년) 김옥균을 비롯한 급진개화파가 개화사상을 바탕으로 조선의 자주독립과 근대화를 목표로 일으킨 정변. 개화파가 위로부터 시도한 최초의 개혁운동으로 청나라와의 종속관계 청산과 조선왕조의 전제주의 정치체제를 입헌군주제로 바꾸려 했다. 사회적으로 문벌의 폐지와 평등권 제정을 통해 신분제를 청산하려 했다. 그러나 수구세력이었던 민씨 정권의 요청으로 개입한 청군에 의해 3일 천하로 끝이 났다. 홍영식, 박영교,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

6) 1894년(고종 31년) 동학농민봉기와 청일전쟁이 배경이 된 개혁운동.

7) 서문, 『한국의 추상미술-20년의 궤적』, 계간미술 편, 중앙일보․동양방송, 1979, p.3.

“(상략) 1957년 처음으로 우리나라에서 《모던아트협회》 창립전이 있었다. 이때부터를 현대미술의 시점이라 보는 데는 이론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때부터 추상미술이 발붙이기 시작한데에는 틀림이 없다.”

8) 이경성, 「한국추상미술 20년의 동향」, 『한국의 추상미술-20년의 궤적』, 중앙일보․동양방송, 1979.

김인환, 「한국추상미술의 여명기」, 같은 책.

9) 이구열, 「뜨거운 추상의 도입과 전개」, 같은 책.

10) 김연희, 「초기 한국현대미술의 단면-1950년대에서 1960년대를 중심으로」, 『한국현대미술의 시원』, 국립현대미술관, 2000.

11) 주경의 <파란>은 야수파적 격동과 미래파적 소음을 느끼게 하며, 이미 1930년에 본격적인 추상작품을 발표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김인환, 「한국추상미술의 여명기」, 『한국의 추상미술-20년의 궤적』, 계간미술 편, 1979, p.25.

 

이구열: 이 그림을 보면 꼭 미래주의적이지. 아주 스피드하고 메카닉한 현대 문명적 구조라든가. 여기 23년으로 싸인은 안되어 있는데, 왜 이런 그림을 그렸냐고 살아있을 때 물어봤더니, 자기 집이 하루아침에 무너졌대요. 상당한 집안인데. 이런 저런 일로 해서 완전히 몰락을 한 거에요. 자기네 집이 몰락하는 상황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런 영감과 표현적인 방법상의 힌트랄지 공감을 미래주의에서 가져온 거지요. 그 사람도 독서를 많이 했기 때문에 그림이라는 게 눈에 보이는 것만 그리는 게 아니지 않느냐고 생각한 거지요. 자신의 심리적인 충격과 환상 같은 것을 그리려고 시도한 거에요. 자기가 현대적으로 하겠다고 한 것이 아니에요. 이후에는 소개가 되지는 않았지만, 몇 해 뒤에 일본으로 유학 가서도 순수 추상화를 여러 점 남겼어요. 그런데 이 사람은 이것저것 관심 폭이 넓어서, 한 사람의 예술가로서 정신적인 면에서 집중성을 가지면서 그 계열로 추구해 들어가야 하는데, 이 사람은 이렇게 저렇게 즐긴 형이야. 그러니까 이런걸 그리다가 또 뜨개질하는 여자를 그리지 않나, 꽃을 그리지 않나. 그러나 다행히 남아있는 것만 해도 순수 추상이라고나 할까 추상회화라고 할 수 있는 소위 Non-title 페인팅이 서너 점 이상 존재하고 있다고요. 그게 얼마나 소중해요. 30년대 그림이거든? 「이구열 대담」, 『한국현대미술 다시 읽기 IV 』, 2003. 4. 15.

12) 앞의 책, 같은 글.

13) 앞서 잠시 언급했듯 우리미술에 있어 ‘근대’가 무엇을 일컫는지 불확실하지만, 대부분의 필자들은 ‘근대’의 개념을 거침없이 적용하여 혼란을 가중시켜왔다. 이런 경우 최소한 자기 글의 문맥 속에서나마 ‘근대’를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지 밝히고 사용해야 하지 않을까? 이경성은 한국의 전통미술과 근대미술을 외형적으로 구분 짓는 가장 뚜렷한 기준은 정신적으로나 기술적으로 서구화, 즉 작품제작의 논리화를 들 수 있다고 기술하고, 한국 근대미술의 연대 설정을 개화기를 기점으로 근대 1기(개화기-1910), 근대 2기(1910-1945), 현대 1기(1945-1960년대)로 나눈 바 있다.

14) 일종의 일제 식민문화의 청산이라는 맥락으로 보인다.

15) 서성록, 「전통의 파괴, 창조의 모험」, 『한국의 현대미술』, 문예출판사, 1994, p.106-142.

윤진섭, 『한국모더니즘 미술연구』, 재원, 2000, p.13-19.

16) 오광수, 「한국추상미술, 그 계보와 동향」, 『한국추상미술 40년』, 재원, 1997, p.11-32.

서성록, 「전통의 파괴, 현대의 모험」, 같은 책, p.33-69.

강선학, 「구조적 과잉과 구조적 궁핍」, 같은 책, p.151-193.

이일, 「한국현대미술의 형성과 전개」, 『현대미술에서의 환원과 확산』, 열화당, 1991.

서성록,「전통의 파괴, 창조의 모험」, 『한국의 현대미술』, 문예출판사, 1994, p.106-142.

윤진섭, 『한국모더니즘 미술연구』, 재원, 2000.

「서문-한국의 추상미술 발간에 붙여」, 『한국의 추상미술-20년의 궤적』, 계간미술 편, 중앙일보․동양방송. 1979, p.3.

이경성,「한국추상미술 20년의 동향」, 같은 책.

이구열,「뜨거운 추상의 도입과 전개」, 같은 책.

윤난지, 「한국추상미술의 태동과 앵포르멜 미술」, 『미술평단』, 1997. 가을호.

17) 1956년 5월 동방문화회관 3층에서 있었던 《4인전》(김충선, 문우식, 김영환, 박서보)의「반국전 선언」, 《국전》의 반시대적 권위주의와 낡은 가치관에 정면으로 도전했다고 전해진다.

“《국전》과의 결별과 기성화단의 아집에 철저한 도전과 항전을 감행할 것과 적극적이며 개방적인 조형활동을 통하여 창조적인 시각개발에 집중적으로 참여한다.” (반국전 선언의 일부) 이마동, 『한국예술지』, 대한민국 예술원, 1966.

18) 윤진섭, 『한국모더니즘 미술연구』, 재원, 2000, p.221-223.

19) 임창섭,「비평으로 본 해방부터 앵포르멜까지」,『비평으로 본 한국미술』, 대원사, 2001.

20) 윤진섭은 『한국모더니즘 미술연구』에서 “이 시기에 또 하나의 계기가 된 것은 유엔군의 군화에 따라온 문화, 이런 것이 직접적인 자극을 주지 않았나 생각해요. 다시 말하자면, 그 무렵의 도식적인 추상은 도무지 체질적으로 맞지 않고 그와 반대되는 것을 해야겠는데 하지 못하고 쩔쩔매는 판에 서구문명의 강렬한 에네르기가 우리에게 직접 부딪혀 온 것이지요. 내적인 표현욕구와 외적인 계기가 일치하여 하나의 환경을 조성한 것이지요.”라는 1967년의 진술(「추상운동 10년 그 유산과 전망, 김영주와의 대담」 중, 『공간』1967년 12월호.)과 “그것은 무슨 거창한 이념 같은 것이 뒷받침돼서 일어난 반감이 아니라, 전쟁체험으로 인한 거의 동물적인 반응이었다. 동물적인 반응이었다는 이 점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한다. 그런데 여기저기 기록된 것을 보면, 그런 상황은 염두에 두지 않고 그 때 ‘유럽에선 앵포르멜이 있었고 미국에선 액션페인팅이 있었다. 그러니 그 영향을 받은 것 같다’고 사실화史實化 하지만, 그렇지 않다. 구체적 영향을 직접 받은 것은 아니었다.”는 박서보의 1997년 주장(「한국현대미술 태동기의 표면과 이면」 좌담 중, 『한국미술』 1997년 4월호. p.81.)이 서로 모순되어 있음을 적시하고, “《제2회 현대전: 1957. 12.》의 반추상으로부터 제4회 《현대전: 1958. 12.》까지의 1년 사이에 진행된 빠른 변화는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21) “당시는 ‘앵포르멜’이란 어휘 자체도 몰랐으며, 다만 그 무렵의 사실주의 묘사에 싫증을 느껴 작품을 하다가는 지우고 물과 숫돌질로서 캔버스를 문지르다 보니… 알지 못하는 새로운 형태를 발견하게 되어…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계속했다. 당시의 지도교수로부터 그것이… 앵포르멜의 추상표현주의적 표현임을 알았다. 그리고 따피에(Michel Tapie)의 ‘또 하나의 예술’이란 책을 읽고부터 그것의 미학이론을 알게 되었다.”는 박서보의 진술을 인용하면서도, “당시 일본의 미술잡지를 통해 외국의 최신 경향들에 관한 정보가 유입되었고 우리나라 작가들도 미셀 타피에나 안토니 타피에스의 일본 방문(1957년) 등등의 내용들을 알게 되었을 것”이라는 점, 그리고 김영나와의 인터뷰에서의 박서보의 진술이 엇갈리고 있음을 들고 있다. 윤난지, 「한국추상미술의 태동과 앵포르멜 미술」, 『미술평단』, 1997년 가을호.

22) 지난 2000년 『한국현대미술 다시 읽기 I』의 세 번째 워크숍(2000. 9. 23. 한국문화예술진흥원 강당)에서 김정희는「1980년대에 나타난 미술단체 운동들의 역사적 의미」라는 발제문을 통해, 《TARA》의 작가들과 《난지도》의 작가들의 작품을 각각 이우환과 아르테 포베라, 다다와 네오 다다의 미학과 형식을 따르고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김관수의 <블랙 박스>에서는 가깝게는 그들의 ‘바이블’의 저자인 이우환의 ‘관계항’의 철학이 읽혀”지고, “오재원과 이훈의 신체 일부분 사진은 아르테 포베라 작가인 질베르토 조이로의 사진들이 연상”되며, “육근병의 <Blocks on side work>, 5회전에 나온 이교준의 <Untitled>(물이 든 드럼통+채색된 니은자 나무막대기+벽에 그려진 십자가 드로잉), 이강하의 <Remains 85+2+8>(흙더미와 돌멩이들 사이에 쌓아 놓은 나뭇가지에 불을 지피기) 등을 보면 이 단체원들의 관심이 이우환, 그의 미술의 출발의 한 근원인 리차드 세라와 아르테 포베라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난 사물성objecthood과 물질성materiality에 대한 관심과 그것의 표현임을 알 수 있다.” (중략) 또한 “《난지도》의 창립전이나 같은 해 6월의 《난지도 4인전》의 도록에 실린 작품들을 보면 그들의 작업방식이 설치보다는 꼴라쥬 방식에 가깝고 신사실주의보다는 오브제와 물질을 혼용한 양식인 아르테 포베라와 더 멀리는 오브제를 조형적으로 사용한 다다와 네오 다다의 아쌍블라쥬의 미학을 따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김정희와 《난지도》의 작가 신영성은 ‘서구미술 정보를 알고 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의 전형적인 논쟁을 벌였다. 그러나 흥미로운 사실은 《난지도》와 아르테 포베라를 연관짓는 김정희의 주장 자체가 양쪽의 미술을 다 모르고 있음을 스스로 고백하는 일이 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 참조: 진휘연, 「후기 식민주의 이론의 비판적 고찰」, 『월간미술』, 1999. 9, 정영목,「한국미술문화의 정체성과 일본, 한국근대미술에 대한 문화식민주의적 해석」, 『월간미술』, 1999. 11, 정무정, 「한국 앵포르멜과 서구미술의 관계」, 『월간미술』, 2000. 4. 등

23) 이경성과 이구열 등 1950년대 말부터 1960년대 중반 당시 평론가 및 기자로 활동했던 미술평론가들은 물론 그 다음 세대인 오광수와 그 이후 세대인 서성록에 이르기까지 적지 않은 미술평론가들이 “뜨거운 추상”과 “차가운 추상”이라는 용어를 쓰고 있다.

24) 오광수와 서성록, 윤진섭, 김홍희 등 많은 미술비평가 및 미술사가들이 한국현대미술 맥락을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분류하여 규정하고 있다.

25) 김병기: 특히 《4인전》의 반《국전》적 선언을 우리 현대미술의 기점 논의의 근거로 삼는 것은 하나의 넌센스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웃기는 얘기예요. 우리는 일제 강점기를 거쳐왔지만 그때도 그런 문제를 다 생각했던 사람이에요. 나만 생각한 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하다가 죽어갔고, 사라져갔어요. (중략)《4인전》을 가지고 역사의 기점을 이야기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얘기예요. 《국전》에 대한 비판적인 의식 같은 것은 그 전부터 다 있어요. 일정 때 선전에 대한 반발, 김용준 같은 사람도 그랬죠? 우리 아버지(김찬영)도 선전에 내지 않았습니다. 참여도 안 했습니다. 이신범, 김인호 뭐 이런 사람들이 참여할 때에도 우리 아버지는 그러지 않았다는 겁니다. (중략) 동경미술학교 출신이고, 정통을 시작한 사람인데…. 어떤 하나의 사건을 가지고 그렇게 구획을 지으려고 하는 미술사가들의 태도는 그럴 수밖에 없겠지만, 그 밑바닥을 흐르고 있는 면면한 정신성을 생각지 않으면 안돼요. 「김병기 대담」, 『한국현대미술 다시 읽기 IV』2003. 2. 28. 평창동 자택.

 

이구열: (상략) 논문 쓰는 학생들도 와서 이걸 그대로 믿어도 되냐는 질문들… 그러면 나는 알아서 믿으라고 그래요. 모든 역사가 책에 나왔든 아니든 그것이 진실이냐 아니냐 하는 의문을 갖는 상태에서 하는 것이 공부하는 자세가 아니겠느냐 생각해요. 이후에 평론가나 미술사가들은 달리 자기 나름대로 할 얘기도 없고, 그 시대 상황을 체험도 안 했고, 누군가의 말을 전적으로 믿고 시작하니까 그런 글을 쓸 수밖에 없는 거죠. 《4인전》같은 것은 박서보가 중요하다, 중요하다 자꾸 그러니까 그런 것처럼 생각하는 거지, 당시 젊은 사람들이 그런 반항적인 그림을 왜 안 그렸겠어요. 다 그렸지. 정작 박서보씨는 《국전》에 출품했었어. 그리고 몇 번 낙선을 했거든?

 

오상길: 그렇습니까?

 

이구열: 예, 한번인가는 입선을 했었는데 특선 같은 것은 하지 못했다고. 자연주의적인 그림들이 많았고, 또 내부의 부패구조도 상당했으니까 박서보처럼 자신감이 넘치고, 의욕이 넘치는 사람한테는 완전히 타도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어요. 그건 그때 상황에서 정당해요. 젊은 학도들이 그런 생각, 반항심을 갖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에요. 이후에 앵포르멜 붐을 이뤘는데, 그러면 그 전에는 현대미술운동이 없었는가 하면 그렇지 않아요. (중략) 기억하기로는 그때 이미 변영원 같은 작가도 거의 추상적이라고 할까? 그런 그림으로 6․25의 처참한 상황을 그린 사실이 있어요. 김흥수도 미인도만 그린 게 아니라 <침략자>라고 해서 마스크 같은 걸 그렸거든? 그리고 어떤 잡지인가 신문에 난 것을 읽은 기억이 나는데, 그때의 대담 같은 것을 보면 추상미술에 대한 논의가 이미 있었어요. 《국전》초기에 《국전》작품을 논하는 좌담회에서 추상이라는 용어가 나오고 그랬는데, 물론 반감을 가지는 사람도 있고, 진보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지요. 시대상황이라는 게 언제나 그렇게 다른 입장들이 공존하는 거니까. 그러다가 57년에 박서보나 김창렬 같은 젊은 작가들이 주축이 되어서 하나의 그룹을 만들었고, 기성 작가로서 같은 해에 나온 것이 《모던아트협회》, 그리고 변영원 선생이 있었던 《신조형파》도 나온 거지요. 난 《신조형파》도 좋은 행적이라고 생각해요. 변영원씨는 이론에 밝았던 사람이에요. 자기가 한 것은 한국의 바우하우스 운동이라고 했어요. 그리고 그걸 목표로 했어요. 그렇기 때문에 화가만 있던 것이 아니라 디자이너도 있고, 무대장치가도 있고, 그렇게 멤버가 구성됩니다. 순수미술만이 문제가 아니라 사회에 미술문화를 폭넓게 발전시켜야한다는 운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거죠. 3회까지는 그래도 용케 했는데, 뭐 각자 생활도 어렵고, 사회적인 호응도 없고 그러니까 그만두게 됐지요. 「이구열 대담」, 『한국현대미술 다시 읽기 IV』, 2003. 4. 15. 한국근대미술연구소.

26) 윤진섭,『한국모더니즘 미술연구』, 도서출판 재원, 2000, p.24.

27) 이마동, 『한국예술지』1권, 대한민국예술원, 1966.

28) 동아일보 1954. 11. 21. 변관식, 《국전》평

동아일보 1955. 10. 28. 변관식, 「국전을 앞두고-그 비공정성에서 파생될 화단의 병」

동아일보 1955. 12. 28. 박고석, 「창조촌전의 진통기」

동아일보 1956. 1. 7, 8, 10, 12, 13, 14 계정식, 고형곤, 이무영, 이상범 등,「迎春 淸談放談」

평화신문 1956. 10. 1. 김철, 「한국화단의 공개장」

한국일보 1956. 10. 18. 「국전을 열어라 무소속 작가들 성명」

한국일보 1956. 10. 21. 이일선, 「미와 조화 - 국전분규에 대한 문외한의 소감」

동아일보 1956. 10. 23. 24. 김응현, 「국전과 작가의 양식」

한국일보 1956. 11. 15. 김영주, 「제5회 국전종합 평」

동아일보 1956. 12. 12. 김청강, 「역류한 국전의 동양미술」

한국일보 1956. 12. 20. 김영주, 「한국은 고도가 아니다, 미술인의 정신적과업을 논함」

29) 정점식: 《모던아트 협회》는 1955년 당시 동화백화점에서의 개인전(1955. 7. 25-7. 31 동화백화점 화랑)에 모였던 김환기, 유영국 선생 등과 함께 우리나라의 모던아트의 폼을 만들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취지에서 발단이 되어 1957년에 창립이 되었습니다. 당시 《국전》을 배격하는 분위기가 일반적이어서 우리도 《국전》과는 얼마간 거리가 있었지만, 《국전》에 대항한다거나 하는 일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상길: 그렇다면 《모던아트협회》가 1956년의 《4인전》「반국전 선언」으로부터 자극을 받아 창립되었다고 할 수 없겠군요?

정점식: 물론이지요. 그때쯤 내가 이봉상 씨 연구소에 가서 박서보의 그림을 본 기억이 있는데요? 당시 박서보는 대학교 3학년 학생이었습니다. 《모던아트협회》는 이미 1955년에 얘기가 되었던 것이었어요.

오상길: 사실 제가 전화를 드린 것도 《모던아트협회》나 《신조형파》의 작가들이 《4인전》의 신예들의 「반국전 선언」에 자극을 받아 단체를 만들었다는 사실이 논리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아서였습니다. 그렇다면 《4인전》의「반국전 선언」을 통해 기성작가들이 《국전》을 거부했던 것이 아니라, 이미 《국전》을 불신하는 분위기가 화단의 보편적 정서였다는 말씀인가요?

정점식: 뭐 특별히 반국전이다 하는 말을 쓰지 않았다 뿐이지, 다들 그랬어요. 지금 김병기씨가 국내에 있나? 김병기씨가 당시 내용들을 잘 알고 있어요. 그때 평론을 했으니까…. 「정점식 전화대담」, 2003. 11. 25.

 

오상길: (상략) 어떤 분은 1956년 《4인전》의 「반국전 선언」이 동기가 되어 1957년에 《모던아트협회》와 《신조형파》 등이 결성되었다고 주장합니다. 선생님께서도 《모던아트협회》나 《신조형파》가 그 「반국전 선언」으로부터 어떤 자극이나 동기를 부여받았다고 생각하십니까?

김병기: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김병기 대담」, 『한국현대미술 다시 읽기 IV』, 2003. 2. 28. 평창동 자택.

30) “적극적이며 개방적인 조형활동을 통하여 (앞으로) 창조적인 시각개발에 집중적으로 참여한다”, 이마동,『한국예술지』, 대한민국 예술원, 1966.

31) 『한국추상미술 40년』, 도서출판 재원, 1997, p.23.

32) 김영주는 1956년 3월 8일자 한국일보「미술문화와 이념의 구상 (下)」에서 이미 앵포르멜(앙훨멜)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를테면 최근 불란서를 중심으로 치열히 논의되는「새로운 표현주의」에 관한 방법이 격동하는 현실에 직접 참여하여 강인한 발언권을 걷잡기 위하여「정적의 고백서」「랄 마직」「추상표현」 「앙훨멜」「야성감」- 등 몇 갈래의 이념의 구상 밑에 의식의 종합을 꾀하며 설화성을 질서와 가치의 뒷받침으로 삼고 있는 경향을 미루어 생각컨대 오늘의 문제의 초점은 개인의 자유와 현재의 형편을 분석하고 유대할 수 있는 목적을 통해서 예술적 의욕을 실현하고자 하는데 있는 것은 분명하다. 말하자면 20세기 초엽에 일으켜진 「어떻게 무엇을 조형하는가」하는 방법에서 오늘날 일으켜진 문제는 「어떻게 무엇을 표현하는가」하는 방법에로 전환했다고 볼 수 있다.”

33) 제3회 《현대전》1958. 5. 15.-22. 화신화랑, 김창렬, 전상수, 김청관, 장성순, 조동훈, 김서봉, 박서보, 나병재 등.

34) 연합신문 1958. 5. 23. 방근택, 「신세대는 뭣을 묻는가-현대미협 제3회전을 보고」

35) 한국일보 1958. 5. 20. 이경성, 「환상과 형상-제3회 현대전평」

36) 동아일보 1958. 5. 24. 정규, 「젊은 정열과 의욕-현대미술가협회 3회전평」

37) 오상길: 《4인전》에 출품된 작품들은 추상이 아니었던 것 같고, 비정형회화가 최초로 선보인 전시가 《현대미협》 3회전이었다고 합니다.

김병기: 기억해요. 덕수궁 석조전에서 김창렬하고 박서보가 각각 다른 방에 큰 대작들을 출품했지요. 그런데 그것은 수백 호 짜리 대작인데, 물감도 정식 물감이 아닌 페인트와 페인트 브러쉬로, 슈나이델이나 슐라주를 연상시키는 앵포르멜의 도입에 불과해요. 그것이 동경 때 김환기 같은 사람들의 딱딱한 추상의 도입과 다른 점이라면 하나는 차가운 추상이고, 앵포르멜은 뜨거운 추상이라는 것 뿐이지 도입이라고 하는 의미에서는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단지 그 집단 운동은 역사적으로 의의는 있어요

오상길: 어떤 측면에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세요?

김병기: 또 도입했다는데서.(웃음) 박서보는 간혹 그런 얘기를 하는 모양인데, 자기도 놀랬다고. 방근택이 어떤 잡지에서 보여준 것이 앵포르멜 그림을 본 첫 기회였는데, 자기의 그림하고 너무나 같은 것을 느꼈다고 말입니다. 참 웃기는 얘기죠? 서보에겐 그런 쇼맨 쉽이 있어요. 박서보가 프랜시스 베이컨 비슷한 그림을 그리다가 갑자기 앵포르멜 같은 것을 했는데, 우연의 일치로 자기 것과 같다… 그건 다른 사람들을 다 바보로 보는 거예요. 박서보도 다 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영향이 나왔을 겁니다. 안심하고 말이에요. 안심하니까 그런 큰 그림이 나오지요. 내가 파리에서 현역 대가들의 초기작을 보았는데, 그렇게 서투를 수가 없어요. 어떻게 이렇게 대가들의 작품이 서투른가 했더니, 암중모색을 하니까 그럴 수밖에. 무인지경으로 가니까 서툴 수밖에 없는 겁니다. 단지 그런 서툰 가운데 자기가 있는 것이지요. 그런 자기를 수십 년 견지해온 사람이 대가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샘플이 있는 경우에는 능란할 수 있는 것이지요. 안심하고 활개칠 수 있는 것입니다.

「김병기 대담」, 『한국현대미술 다시 읽기 IV』, 2003. 2. 28. 평창동 자택.

38) 제4회 《현대전》 1958. 11. 28.-12. 8. 덕수궁德壽宮, 이명의, 안재후 가담.

39) 연합신문 1958. 12. 8. 이경성, 「미의 전투부대-제4회 현대미전 평」

한국일보 1958. 11. 30. 「기성화단에 홍소哄笑하는 이색적 작가군」

40) 박서보, 「한국현대미술 태동기의 표면과 이면」, 『한국미술』, 1997년 4월호.

41) 각주 21), 22) 참조

박서보: (상략) 그때가 안국동 화실 시절인데, 현대미협전에 세울 아치를 만들기 위해, 을지로 화학약품상에 가서 보일류(정제되지 않은 아마인류)와 아연화 안료를 사다 섞어서 물감을 만들었읍니다. 아아치에 다 칠하고도 많이 남았는데, 생각해보니 같은 재료를 기계로 정제해서 만든 것이 오일칼라라는 생각이 들기에 남은 물감을 가지고 작품을 하니까 튜브 물감으로서는 쓸 수 없었던 재료를 풍부하게 쓸 수 있게 되었지요. 튜브에 든 물감을 사용할 때는 붓으로 조심스레 그리던 것과는 달리 나이프로 쳐바르기도 하고 긁어내기도 하고 그러니까 그림이 거칠어지고 체질이 드러나는 일을 하게되었는데 이것이 앙포르멜을 탄생시키는 또하난의 요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지 않아도 형상이 싫었던 중에 물감을 나이프로 바르고 긁고 번지게도 하고 비누칠을 하고 숫돌로 갈아냈더니 한편으로 통쾌하기는 한데 어쩐지 공해 같기도 해서 내동댕이쳐둔 채 김창렬씨와 술을 한잔하러 나갔지요. 그리고 돌아와 불을 켜는 순간, 지르르 흐르고 번져서 구체적 형상들이 묻혀버리고 단순하게 보이는데 바로 저거로구나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한편으로는 이것도 그림이라 할 수 있을까라는 불안을 느끼면서 ’58년 현대미협전 3회전에 발표를 했읍니다. 그런데 방근택씨가 전시회에 와서 보고는 이것이 바로 세계적으로 유행하고 있는 앙포르멜 미술이라고, 미국에서는 액숀페인팅이라 불리우는 것이라 하더군요. 그때 앙포르멜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읍니다.

김영순: 그렇다면 선생님의 앙포르멜의 발생은 외부의 영향이나 자극에 의해서가 아니라, 우연히 자생되었다고 할 수 있을 텐데요. 전개과정은 어떻게 되는지요?

박서보: 3회전에 이세득씨가 전시회를 보러와서 일본의 미술잡지「미즈에」에「또다른 미학에 대해서」라는 미셸 타피에가 쓴 앙포르멜미학이 번역되었다고 알려주었지. 그래서 그때 그것을 서로 베껴서 읽었는데, 4회전에는 현대미협의 전원이 앙포르멜작업을 발표하게 되지요. 그런데, 서구의 앙포르멜이나 액숀페인팅이 미술사적 전통에서 다음단계로 진입하기 위한 자연스런 현상이라 한다면, 우리의 경우 흘리기도 하고 뿌리기도 하고 태우기도 하는 그러한 작업은 표현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의 울분을 폭발시키기 위한 장소로서 캔바스를 선택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표현으로서가 아니라 화면을 공격하는 것이었다고 해야겠지요. 물론 하나의 표현형식상으로 보면 유럽의 그것과 다를 것이 없고, 더구나 그들의 이론을 읽고 나서는 그들의 이념에 공동체의식을 갖게도 되었지만 본질적으로, 그들과는 근원적으로 달라요. 다만 영향이랄 수 있다면 어쩌면 그 시대의 사회문화 분위기 속에 미국의 군화문화에 묻어들어 온 어떤 것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박서보, 체험과 체질․후기 묘법시기」, 『공간』, 1989년 2월호.

42) 박서보는 1962년 7월 5일자 동아일보에 게재된「유사형의 추상화들…62년 상반기의 화단」이라는 글에서 비정형회화 일색이 된 화단에 대해 ‘독창성’의 모방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득의양양한 승리의 쾌거를 즐기고 있다. “5, 6년전 오늘의 몇몇 30대에 의하여 시도되었던 추상회화가 야유와 저주의 대상처럼 생각키웠던 그때와는 달리 현시의 전全 회화의 영역이 의심스러우리만큼 이 추상회화 일색으로 지배되고 있다는 사실을 목격하게 되었다. 역사는 많은 희생에서 비대해졌다고 생각해 본다면 오히려 이 어처구니없는 가장무답假裝舞踏을 미소로나 응수해 보겠지만 그렇기에는 너무도 많은 시체를 보아야만 했다.”

43) 진휘연, 「후기 식민주의 이론의 비판적 고찰, 한국 앵포르멜의 시작과 비판적 정체성」, 『월간미술』, 1999년 9월호.

44) 주지하다시피 이 사이에는 《전미국대학미술학생작품전: 1956. 11. 1.-10.》(서울대학교 미술대학-1956년 11월 5일과 6일 이틀 간 한국일보에 상하로 나뉘어 실린 평문 「미국대학생들의 미술작품전 인상」에서 김영주는 이 전시에 “비형태적인 추상이 가장 많고, 이것이 미국의 현대미술․회화의 경향”을 보여준다고 적고 있다.)과 《현대 미국 회화 조각 8인전: 1957. 4. 덕수궁 국립박물관》(미국 시애틀 박물관이 기획, 미국공보관 후원으로 순회전시. 미국 북서부의 작가들-마크 토비를 비롯한 8명의 추상표현주의 작가들-이 참여한 대규모 전시), 그리고 《미국미술작품전; 1957. 12. 24.-1958. 1. 8. 공보관公報館》(『한국의 추상미술-20년의 궤적』연표참조-그러나 이 전시에 관한 자료는 찾을 수가 없다.) 등의 전시가 열렸고, 이 전시에 관한 다량의 보도들과 평문들이 당시 국내일간지에 제재되었다. 또한 1958년 4월 일본 오사카 국제 페스티벌 《새로운 회화 세계전-앵포르멜과 구체》과 미셀 타피에, 조르쥬 마티유, 샘 프란시스의 일본 방문으로 일본 역시 앵포르멜의 열기에 휩싸였으므로 이에 관한 일본 미술잡지들의 기사들이 있었다. 한편, 1958년 일본의 미술잡지『미즈에』에 실린 미셀 따피에Michel Tapie의「또 하나의 미학」을 읽어주며 앵포르멜 미학을 소개했다고 한 방근택의 증언, 어느 작가의 작업실에서 외국잡지에 실린 추상표현주의 작품사진을 오려 붙여 놓고 있던 것을 보았다는 이구열의 증언 등도 있다. 김창렬 등 당시의 작가들은 대담을 통해서 대부분 외국잡지들을 통해 서구미술의 동향과 정보를 입수했음을 흔쾌히 인정하고 있다.

45) 훗날 박서보는 “나는 내 작업을 앵포르멜이라고 한 적이 없다.”고 말했지만(「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갈망」, 『월간미술』, 2002년 1월호.) 이 역시 사실과 다르다.「체험적 한국 전위미술」, 『공간』, 1966년 11월호, 「박서보, 체험과 체질․후기 묘법시기」, 『공간』, 1989년 2월호 등 참조.

46)알다시피 이 세대들은 1970년대 이후 군사정권 아래서 《미협》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군부세력들에 의해 전쟁기록화 제작에 동원된다.

47)윤형근: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 들어갔을 때는 재료도 없고 그러니까, 장충단 공원 개울가에 가서 버드나무 가지 꺾어다가 껍질을 벗기고 쪼개서 맥주깡통에다가 틈 없이 잔뜩 쑤셔 넣고서 정미소 왕겨를 사다가 하루종일 구웠어요. (중략) 그거 가지고 목탄 뎃생도 하고… 유화는 써보지도 못하고… 대학을 1년 겨우 다니다가 2학년 때는 학생운동에 가담했지요. (중략) 학비도 하나도 없이 올라와서 혜화동, 가회동, 명륜동 집집마다 다니면서 동대문시장에서 광목 한 마를 끊어다가… 그때는 팔 것도 없었어요. 그저 성냥, 빨래비누 같은 걸 가지고 다니면서 집집마다 다니면서 팔았지요. 그렇게 한달 하니까 등록금이 나오더라구. 그때 등록금이 만 천원 정도 했는데 그렇게 혼자서 고학 한 거지요. 사실 그까짓 거 고학도 아니지 뭐 물건 파는 것인데. (중략) 그렇게 대학 1학년은 겨우 뎃생만 하고, 2학년에는 학생운동 하느라고 학교도 안나가고, 3학년에 가서는 재적됐어요. 좌익운동을 하다가 49년 4월인가 중부경찰서에 구금됐지요. 거기서 29일 구류 받는건데 더 연장해서 42일 동안 지하실 감방에 있는 거야. 그러고 나서 청주에 내려왔어요. 스물 두 살에 청주에서 미술교사로 취직해서 8개월인가 다니다가 6․25사변이 일어났어요. 그런데 과거에 좌익운동 했던 사람, 형刑 받았던 사람들을 정부에서 보호한다는 명목 하에 보도연맹이라는 단체를 조직했어요. 거기에 의무적으로 들게 했지요. 6․25가 일어난 다음 다음날 540명을 소집했는데, 그때 예감에 이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서 안 갔더니 그 명단을 보고 날 데리러 왔어요. 끌려가서 무심천이라는 개울가에 섰는데 ‘이제 죽는구나’하는 예감이 들더라구. 내가 열 세 번째에 섰어요. 뒤로 죽 540명이 서있었고, 앞 뒤 사방에 경찰들이 총 들고 있고…. 급하면 저 안에 집어넣고 폭파시키든지 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구. (중략) 이런 상황이면 죽일 거라는 생각이 머리에 스쳤던 거지요. 일단 도망가다 죽더라도 도망쳐야겠다고 결심하고… (중략) 군중 속에 섞여서 천천히 걷다가 숨어서 도망친 거야. (중략) 나머지 사람들은 형무소, 무도관, 경찰서 등에 수용했다가 다음날 묶어서 트럭에 짐짝같이 싣고 어디론가 가서 (중략) 뒤에서 쏴 죽이고 해서 540명을 모두 죽였어요. 정부가 얼마나 무책임하냐 이거야. 자기들이 그렇게 조직해 놓고서 인천에서 보도연맹 놈들이 난동을 부렸다고 무조건 다 죽인 거야. 사람들도 다 순진하지. 설마 하면서 간 건데 다 죽인거라구. 나는 그걸 눈치 채서 살아 남은 거지요. (중략) 그때 내가 좌익운동 한 것은 공산주의가 아니라 하나의 휴머니즘에서였어. 내가 그때도 무슨 공산주의자가 될 사람은 아니에요. (중략) 내가 돈 벌어서 동생들 대학도 보내고….「윤형근 대담」, 『한국현대미술 다시 읽기 III, Vol. 1』, ICAS, 2003, p.337.

 

김차섭: (상략) 친구들에게 밥 얻어먹고 다니던 어려운 시절이었지요. 창신동 빈민굴의 비좁은 방 하나에서 몇 명이 굶으며 지냈으니까…, 움직이면 힘이 빠지니까 누워만 있었는데 강국진씨가 맹물에 간장을 타서 먹으라고 들고 들어와서 이거라도 좀 먹으라고 해서 마셨을 정도니까…. (중략) 그렇게 지내다가 강국진씨가 실크스크린으로 만드는 전차 광고를 얻어내서 그것으로 살아났지요. (중략) 밥은 먹었지만 방을 얻을 형편은 아니어서 건물 옥상에서 담요를 덮고 잤는데, 하루는 아침에 눈을 떠보니 (중략) 그 사람(강국진; 필자 주)은 (중략) 입이 돌아갔어요. 그 사람 얼굴이 이상했던 것이 그 때 그 일 때문이에요. 현대미술이 어쩌고 하는 것이 당시로선 관심이 없었어요. 대신 내가 배운 것은 내 나라가 도대체 어떤 위치에 있었기에 전쟁까지 하고 그 후유증으로 이렇게 살게 되었는지, 현실을 보게 된 것이지요.

「김차섭 대담」, 『한국현대미술 다시 읽기 II, Vol. 2』, ICAS, 2001, p.342.

 

김창렬: (상략) 그러다가 6․25사변이 일어났어요. 그때가 만 스무 살이었지요. 정말 영화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심각하게 처절하고 썰렁한 공간, 뭔가 으실으실한 분위기였죠. 6․25사변이 일어나고서 며칠 후인가 그 다음 날인가 서울에 와서 가족을 찾아다닌다고 헤맸어요. 그러다 서울역 앞에 가니까 전봇대 하나가 기우뚱하게 기울어져 있는데, 무슨 물체가 하나 매달려있어요. 자세히 보니까 여자 나체가 거꾸로 매달려 있는 거예요. 둔부가 하늘로 향하고, 시커멓게 그슬리고… 아무도 쳐다보지도 않아요. 그럴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죠. 대포소리에 총소리… 그렇게 가족을 찾는다고 헤매다가 어느 날 연행이 됐어요. 끌려가서 밤새도록 굴러다니고… 의용군에 끌려가서 그저 많이 굴러다녔다는 기억뿐이에요.

「김창렬 대담」, 『한국현대미술 다시 읽기 IV』, 2003. 8. 29. 평창동 자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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