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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가들이여 내 칼을 받아라 #No.5
- 윤진섭 『한국 모더니즘 미술연구』(3부)
졸저, 비평가들이여 내 칼을 받아라, ICAS, 2005
역사는 과거 그 자체가 아니라 과거에 대한 현재의 인식이다. 그것은 ‘진실truth’이 아니라 ‘사실fact’에 기초한 현재적 인식의 ‘진정성reality’을 담는 일이자,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이어 놓는 다양한 인식론적 해석학인 것이다. 때문에 역사에는 늘 ‘선택’과 ‘집중’ 그리고 ‘해석’의 문제들이 따르며, 역사적 거리유지를 위한 중립성과 가치판단에 있어서의 객관성 등의 전제들이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우리의 삶이 매순간의 선택과 집중에 의해 결정되어 가듯, 역사는 옛사람들의 선택과 실천에 의한 가치실현의 무수한 범례들을 담고 있다. 나는 이런 의미에서 탁월한 역사학자는 우리를 과거라는 가치의 보물창고로 인도하는 항해사라고 생각해 왔고, 종종 그들의 힘을 빌려 흥미진진한 과거로의 여행을 즐겨 왔다. 그리고 그때마다 이 여행은 내게 ‘익숙한 것’들로부터 ‘낯설음’을 발견하는 ‘새로움’의 경험을 제공해 주었으며, 여행이 계속됨에 따라 점차 시간의 벽도 허물 수 있게 되었다.
이 여행에서 중요한 것은 역사를 바라보는 여행자의 주체적 인식이다. 우리 주변에는 항상 신뢰할 수 있는 역사만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컨대 최근 일본의 극우파들이 보여 주고 있는 일련의 역사의식은 그릇된 ‘긍지’에의 집착이 빚어내는 우매한 역사정치학의 전형이 아닐 수 없다. 세상에는 이런 정치학들이 생산해 내는 어리석은 역사들이 적지 않고, 이런 측면에서 나는 우리의 역사와 현실 속에서도, 심지어는 미술의 역사와 현장 속에서마저 그릇된 ‘긍지’와 ‘수치심’의 은폐를 위해 구축된 수많은 범례들을 본다.
차차 밝혀 가겠지만, 실제 우리 미술계에는 어리석은 신화화의 욕망 따위에 사로잡혀 역사 앞에 자신을 과장하거나 거짓된 진술을 서슴없이 늘어 놓는 사람들이 있고, 이들에게 휘둘려 몰가치한 비평과 미술사를 남발해 온 무능하고 기회주의적인 이론가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이들은 이런 식의 ‘조작’과 ‘은폐’ 그리고 ‘삭제’와 ‘과장’ 같은 반反역사적 가치들이 이미 처음부터 그들이 목적했던 ‘긍지’에의 집착에 역기능하도록 예정되어 있는 것이라는 점을 모르고 있다. 그들은 그릇된 역사의식을 통해 한여름 밤의 꿈과 같은 ‘순간의 달콤함’을 얻고, 그 대신 실로 엄청난 대가를 영원히 지불해 가야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생각해 보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나름의 정치학으로 무장되어 있고, 그 중에는 놀라운 수준의 정치학을 구사하는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진실 혹은 정직보다 훌륭한 정치학은 없다. 마음을 얻는 것보다 큰 일이 없기 때문이다. 반면, 거짓과 위선보다 어리석은 정치학도 없다. 마음을 잃고 분노를 사며 비판적 명분까지 제공하는 전형적인 자충수인 까닭이다.
현실의 문제들을 논하기 위해 역사를 다루는 것이 자연스러운 수순이듯, 그 방법이 비판적일 수밖에 없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나는 비판이 가치를 얻기 위한 첫 번째 실천이라고 생각한다. 때문에 많은 것들 중에서 ‘차이’를 드러내고 ‘가치’의 인식에 도달하기 위한 비판은 날카롭고 예리할수록 좋다. 흥미로운 것은 가혹한 비판을 통해서도 정작 잃는 것이 없다는 사실이다. 파괴되고 파헤쳐지는 것은 과거일 뿐이며, 그것이 설령 자신을 향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부단히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삶이라면 두려울 것이 없기 때문이다. 비판의 본질은 ‘소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생산’적 대안을 얻기 위한 작업이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나는 이런 맥락에서 새로움을 찾기 위한 비판적 도전은 과감하고 강력할수록 좋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이러한 도전과 응전이 활발했던 시기의 역동성을 볼 수 있고, 이것이 역사의 새로운 장을 열어 온 진정한 힘이었음을 또한 알고 있기 때문이다.
* * *
1918년 서화협회를 시작으로 우리 미술계에는 무릇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단체들이 난립해 왔고, 수많은 예술가들이 각각의 이념과 이해관계에 따라 이 단체, 저 단체를 옮겨 다니며 특수한 역사를 만들어 왔다. 이것은 비록 세계미술의 어느 역사 속에서도 발견되지 않는 매우 기이하고 이례적인 현상이지만, 그 현상 속에 한국미술로서의 아이덴티티를 설명할 중요한 역사적 진정성reality들이 살아 숨쉬고 있다. 물론 수많은 단체들의 난립과 그들이 펼쳤던 미술운동들이 모두 미술 그 자체를 목적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 대신 이 역사는 그 시대를 살았던 예술가들의 생존환경이 얼마나 열악했었는지를 말해주고 있고, 예술가로서의 삶과 실천이 얼마나 고단하고 절박했었던 것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 역사는 일제에 의한 식민강점과 남북의 분단 그리고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으며 전통의 단절과 현대화의 비약이라는 처절한 역사경험 속에서, 예술과 사회적 생존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쫓으며 난제에 맞서 왔던 당대 예술가들의 문화적 대응이자 정치적 실천이었으며, 생존의 전략 및 전술이기도 했다. 때문에 나는 이 역사를 난마처럼 얽히고설킨, 실로 광범위하고도 복잡한, 대단히 까다로운 난제들과 맞물려 있는 살아있는 과거이며, ‘현재’ 미술상황의 배후이자 그 뿌리라고 이해하고 있다. 20세기 한국사를 바라보는 역사학자들과 사회학자들의 시각도 이것이 미술영역의 문제만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20세기 한국사도 역사학자들과 사회학자들 간의 분분한 의견으로 난맥상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경험해 왔고 또 경험하고 있는 현실들이 필설로 형용할 수 없는 고통 그 자체이기 때문에, 역사의 진술과 현 상황의 사회학적 진단도 진통을 겪을 수밖에 없는 것이리라. 지금 현실에서 수시로 겪고 느끼고 있는 진통만큼이나, 아니 그보다 더 고통스러운 역사적 과제들도 쌓여왔을 것이기 때문이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다만, 나는 한국의 역사학자들이 왜 서구와 전혀 다른 역사경험을 가진 20세기 한국사를 ‘근대’ 혹은 ‘현대’라는 서구 역사개념의 틀 속에서 정리하려고 애를 쓰고 있는 것인지가 답답할 따름이다.
그리고 그 답답함은 미술의 역사를 논하는 맥락 이르러 그 차원이 달라지며 더욱 극심해진다. 윤진섭을 비롯한 대부분의 미술평론가들과 미술사가들이 한국의 현대미술 역사라고 진술하고 있는 내용들은 ‘미술’이라는 가치의 역사이기 보다는, 특정한 ‘미술운동’ 혹은 ‘사건들’을 ‘선택’하고 ‘집중’한 결과일 뿐이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앞서 언급했듯 미술운동이 한국미술의 가장 두드러진 특성이고 또 그것이 미술 그 자체보다 더 중요한 한국미술로서의 아이덴티티를 보여 준다고 하더라도, 그 진술들은 잘못된 인식이고 논리인 것이다. 윤진섭 등이 진술하고 있는 한국의 미술사에서는 ‘미술’로서의 가치와 의미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고 허무한 일인가? 그 많은 예술가들이 고민하고 방황하며 찾아 내었던, 눈물과 고뇌와 땀으로 얼룩진 성취들이 운동들과 사건들의 그늘에 가려 종적을 감추고 있고, 우리는 그 많은 미술평론가들과 미술사가들의 글 속에서 ‘무엇이 한국미술로서의 가치’인 것인지를 찾아볼 수 없으니 말이다. 구체적인 단위의 미술작품 혹은 미술현상에 관한 비평가들의 분석적 담론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 현재까지의 비평적․미술사적 진술들의 결정적인 문제이자 한계가 되고 있다는 말이다.
결국 각 시대의 미술운동에 관한 ‘썰’들만이 분분할 뿐, 정작 중요한 각 시대의 미술적 가치에 관한 핵심적인 쟁점과 이슈, 그리고 생산적 논쟁이 부재하다는 것이다. 이러니 한국의 현대미술이 그저 서구미술의 수용이고 문화적 종속의 결과일 뿐이라고 몰아붙여 온, 시덥지 않은 자들의 비판에 시달려 온 것이 아닌가?
하지만 그보다 더욱 중요한 문제는 이런 식의 수박 겉 핥기식 진술과 미술로서의 가치를 천착해 갈 쟁점과 이슈의 부재 상황, 즉 미술로서의 담론부재 상황이 서구미술의 충격과 자극으로부터 시작된 지난 100년의 역사적 경험을 통해서도 여전히 한국미술 스스로가 주체적인 담론을 이끌어 낼 수 없는 현실적 한계가 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이 현재 한국의 미술비평이 안고 있는 궁극적인 문제이고, 우리가 이런 비평적 한계들을 비판적으로 해체시키고 대안적 담론을 활성화해 가야만 하는 이유이다. 자꾸 반복되는 말이지만, ‘미술’은 예술가 혹은 비평가라는 구체적인 개체 단위에서 생산되고 문화적으로 공유되는 가치이며, 여러 사람들이 모여서 ‘운동’을 통해 성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미술운동’이란 예술가 혹은 비평가 개인 차원에서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집단적인 움직임일 뿐이며, 그 속성은 미술이 아니라 정치성에 있는 것이다. 때문에 미술운동은 설사 그 집단이 어떤 이념과 양식을 공유했다고 하더라도 근본적으로 미술사의 문맥에 등장하는 ‘유파’들과도 구별되어야 하는 것이다. 또한 아이러니컬하게도 그 모든 미술운동들이 역사적 가치를 획득할 수 있는 길도 결국 개체 단위의 예술가들과 비평가들이 생산한 ‘한국미술’로서의 가치가 전제될 때에만 가능해 지는 것이다. 운동만 있고 미술로서의 가치가 없는 현상이 어떻게 역사성을 획득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윤진섭은 뜬끔없이 ‘한국 모더니즘 미술’의 존재를 기정사실화하고, 일군의 작가들을 밑도 끝도 없이 ‘아방가르드들’이라고 치켜세우는가 하면, 역사적 분기점도 엿장수가 엿가락 끊어내듯 제맘대로 구분짓고 있는 것이다. 윤진섭의 이런 주장들은 내게 그야말로 ‘쌩뚱맞기’ 짝이 없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식의 ‘썰’로 미술비평을 하고 미술의 역사를 정리한다면 누군들, 무슨 짓인들 못하겠는가? 그리고 이런 수준의 인물이 미술평론가로, 대학교수로, 한국미술평론가협회의 회장으로 활동하며, 미술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현실, 나는 이 현실이 개탄스러울 따름이다. 미술판이 바로 개판이 아닌가 말이다.
물론 윤진섭이 『한국 모더니즘 미술연구』 전체를 통해 의도하고 있는 바가 무엇을 위한 기획의 사전포석인지를 간파하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 책에는 마치 그가 이 의도를 누군가에게 어필하려고 했던 것처럼, 민망하리만치 대대적으로 노골적이다. 때문에 비록 유치하고 성가신 일이지만, 나는 땅에 떨어진 한국 미술비평의 중립적 가치를 제고시키기 위해, 얼마가 걸리더라도 윤진섭 같은 평론가들의 비평적 관점의 실체를 밝혀 논쟁의 회피를 차단하고, 조악한 정치적 포석들을 하나 하나 분쇄해 갈 것이다.
우선, 윤진섭이 규정하고 있는 한국사와 미술문맥의 ‘근대’와 ‘현대’에 값하는 논거가 무엇인지를 다시 묻고 싶다. 덧붙여 서구와 역사경험이 전혀 다른 우리 사회의 역사를 왜 서구의 ‘근대’와 ‘현대’의 역사개념 틀에 끼워 맞추는 것인지에 관해서도 대답을 듣고 싶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윤진섭이 제시한 ‘근대’와 ‘현대’의 역사구분 개념의 실체와 방법 그리고 타당성을 검토하기 위한 일이자, 윤진섭과 나의 견해 차이라는 지엽적인 논점을 넘어, 한국미술의 ‘근대’와 ‘현대’라는 역사적 경계설정의 필요와 의미 그리고 근거와 방법이라는, 오랜 숙제에 접근하는 기회로 만들어 가보자는 취지이다. 그동안 대다수의 평론가들과 미술사가들이 지난 한 세기 동안 진행된 한국미술의 역사에 관해 실로 납득하기 어려운 진술들을 해 왔고, 이 기회가 이 해묵은 난제들을 한꺼번에 검증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짚고 넘어갈 또 하나의 ‘썰’들이 있다. 박서보가 주장해 온 비정형성의 ‘자생론’과 그것을 둘러싼 윤진섭과 이화여대 교수이자 미술사가인 윤난지의 진술이다. 사실 이들의 진술들은 한마디로 ‘웃기는 소리들’에 지나지 않는다. 가벼운 웃음거리 밖에 안되는 이 논란을 문제 삼는 것은, 이 논란들이 비평적으로 가치가 있어서가 아니라, 박서보라는 일개 작가의 영향력에 휘둘리며 한국의 미술비평 및 미술사의 위상을 땅에 떨어뜨려온,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런 비평과 미술사를 만들어 온 자들의 실체를 검증하기 위한 것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따르면 한국 비정형회화의 양식출현과 관련한 ‘자생론’은 칸딘스키의 일화와 너무도 흡사한, 그러나 결코 납득할 수 없는 박서보 한 사람의 주장에 따른 것일 뿐이다. 나는 지난 2003년부터 2004년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자료조사와 함께 당시의 상황을 잘 알고 있는 미술평론가들 및 작가들과의 대담을 통해, 이 문제에 관한 정황적 증거들과 신빙성 있는 증언을 다수 확보했다. 흔히 ‘무시하면 그만’이라는 식으로 안이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겠지만, 그것은 그들의 실체를 잘 알지 못하고 하는 말이다. 박서보의 ‘자생론’은 앞뒤가 맞지 않는 실로 괴이한 주장이지만, 지금껏 그를 추종하는 일단의 비평적 무리들이, 아무런 비평적 제재없이 전문서적과 미술전문지에 이 주장을 소개하고 옹호하거나 추정하는 따위의 의심을 통해 논란을 만들어 옴으로써, 많은 후학들의 한국현대미술의 이해에 심각한 위협이 되어 왔다. 나는 이 논란 속에 용납할 수 없는 실로 부도덕한 역사화의 기도들이 숨어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아래의 글은 미술전문지『공간』, 1989년 2월호에 실린 박서보와 미술평론가 김영순의 대담내용이다.
박서보: (…) 그때가 안국동 화실 시절인데, 현대미협전에 세울 아치를 만들기 위해, 을지로 화학약품상에 가서 보일류(정제되지 않은 아마인류)와 아연화 안료를 사다 섞어서 물감을 만들었읍니다. 아치에 다 칠하고도 많이 남았는데, 생각해 보니 같은 재료를 기계로 정제해서 만든 것이 오일칼라라는 생각이 들기에 남은 물감을 가지고 작품을 하니까 튜브 물감으로서는 쓸 수 없었던 재료를 풍부하게 쓸 수 있게 되었지요. 튜브에 든 물감을 사용할 때는 붓으로 조심스레 그리던 것과는 달리 나이프로 처바르기도 하고 긁어내기도 하고 그러니까 그림이 거칠어지고 체질이 드러나는 일을 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앙포르멜을 탄생시키는 또 하나의 요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지 않아도 형상이 싫었던 중에 물감을 나이프로 바르고 긁고 번지게도 하고 비누칠을 하고 숫돌로 갈아냈더니 한편으로 통쾌하기는 한데 어쩐지 공해 같기도 해서 내동댕이쳐 둔 채 김창렬씨와 술을 한잔하러 나갔지요. 그리고 돌아와 불을 켜는 순간, 지르르 흐르고 번져서 구체적 형상들이 묻혀버리고 단순하게 보이는데 바로 저거로구나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한편으로는 이것도 그림이라 할 수 있을까라는 불안을 느끼면서 ’58년 현대미협전 3회전에 발표를 했습니다. 그런데 방근택씨가 전시회에 와서 보고는 이것이 바로 세계적으로 유행하고 있는 앙포르멜 미술이라고, 미국에서는 액숀페인팅이라 불리우는 것이라 하더군요. 그때 앙포르멜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습니다.
김영순: 그렇다면 선생님의 앙포르멜의 발생은 외부의 영향이나 자극에 의해서가 아니라, 우연히 자생되었다고 할 수 있을 텐데요. 전개과정은 어떻게 되는지요?
박서보: 3회전에 이세득씨가 전시회를 보러 와서 일본의 미술잡지 『미즈에』에 「또 다른 미학에 대해서」라는 미셸 타피에가 쓴 앙포르멜 미학이 번역되었다고 알려주었지. 그래서 그때 그것을 서로 베껴서 읽었는데, 4회전에는 현대미협의 전원이 앙포르멜 작업을 발표하게 되지요. 그런데, 서구의 앙포르멜이나 액숀페인팅이 미술사적 전통에서 다음 단계로 진입하기 위한 자연스런 현상이라 한다면, 우리의 경우 흘리기도 하고 뿌리기도 하고 태우기도 하는 그러한 작업은 표현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의 울분을 폭발시키기 위한 장소로서 캔바스를 선택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표현으로서가 아니라 화면을 공격하는 것이었다고 해야겠지요. 물론 하나의 표현형식상으로 보면 유럽의 그것과 다를 것이 없고, 더구나 그들의 이론을 읽고 나서는 그들의 이념에 공동체의식을 갖게도 되었지만 본질적으로, 그들과는 근원적으로 달라요. 다만 영향이랄 수 있다면 어쩌면 그 시대의 사회문화 분위기 속에 미국의 군화문화에 묻어들어 온 어떤 것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윤진섭은 『한국모더니즘 미술 연구』에서 같은 미술전문지『공간』 1967년 12월호에 실린 「추상운동 10년 그 유산과 전망」 중 김영주와 박서보의 대담 일부를 다음과 같이 인용하고 있다.
“이런 시기에 또 하나의 계기가 된 것은 유엔군의 군화에 따라온 문화, 이런 것이 직접적인 자극을 주지 않았나 생각해요. 다시 말하자면, 그 무렵의 도식적인 추상은 도무지 체질적으로 맞지 않고 그와 반대되는 것을 해야겠는데 하지 못하고 쩔쩔매는 판에 서구문명의 강렬한 에네르기가 우리에게 직접 부딪혀온 것이지요. 내적인 표현욕구와 외적인 계기가 일치하여 하나의 환경을 조성한 것이지요.”
그리고 『한국미술』 1997년 4월호에 실린 박서보의 다음과 같은 주장을 인용하고 있다.
“그것은 무슨 거창한 이념같은 것이 뒷받침돼서 일어난 반감이 아니라, 전쟁체험으로 인한 거의 동물적인 반응이었다. 동물적인 반응이었다는 이 점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한다. 그런데 여기저기 기록된 것을 보면, 그런 상황은 염두에 두지 않고 그때 ‘유럽에선 앵포르멜이 있었고 미국에선 액션페인팅이 있었다. 그러니 그 영향을 받은 것 같다’고 사실화史實化 하지만, 그렇지 않다. 구체적 영향을 직접 받은 것은 아니었다.”
윤진섭은 이 배치되는 두 발언 사이의 모순에 대해서는 “당시에는 당사자들에게 있어서조차 앵포르멜의 개념이 분명하지 않았음을 시사”한다는 정도로 얼버무리고, “반추상이 주류를 이루었던 2회 현대미협전(1957.12)에서 완전한 비정형이 나타나는 4회 현대미협전(1958.12)까지의 1년 사이에 진행된 빠른 변화는 과연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하는 의문”만을 제기하고 있다.1) 그러나 사실은 좀 다르다. 박서보가 비정형회화를 발표한 것은 제3회 《현대전》(1958.5)이었고, 그 사이의 시간은 발표된 시점을 기준으로 본다해도 불과 5개월이었을 뿐이다. 따라서 실제의 그 변화는 발표된 시점보다 빠를 것이고, 윤진섭이 말하고 있는 것보다는 훨씬 더 빠른 것이었다. 그런데 윤진섭은 이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이었을까? 그렇지가 않다. 윤진섭은 같은 책의 4쪽 뒤인 38쪽에 《현대미협》 작가였던 하인두의 진술을 다음과 같이 인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1958년 화신화랑에서의 3회 <현대전>에서 본격적 앵포르멜 회화는 박서보가 선도하였다. (…)”
또한 윤진섭이 인용하고 있는 박서보의 두 진술 사이에는 “앵포르멜의 개념이 분명하지 않았음을 시사”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모순이 드러나 있다. 즉 박서보는 1967년, 김영주와의 대담에서 “유엔군의 군화에 따라온 문화”가 “직접적인 자극”이었다고 말했다가, 1997년에는 서구미술로부터의 영향을 전면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 엄연한 두 발언간의 모순을 제쳐두고 윤진섭이 엉뚱한 말을 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물론 그 이유는 그의 책 『한국모더니즘 미술 연구』 전반에 걸쳐 펼쳐지고 있는 박서보에 대한 과도한 집중을 통해 민망하리만치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다. 윤진섭에게는 박서보가 한국의 미술문맥을 독해하는 결정적인 기준인 것일까? 아니면 1985년의 김복영이 공교롭게도 『현대미술연구』라는 책을 출간하고 나서 홍익대학교의 교수로 들어갔던 것처럼, 윤진섭에게도 미술평론가로서의 자존심을 버리고 박서보에게 이런 처절한 충성심을 보여야 할 무슨 이유가 따로 있는 것일까?
‘당시에 이미 앵포르멜을 알았고 그것을 참조해서 그렸을 것이다’, ‘아니다, 나는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우연히 그렸다’는 일부 이론가들과 박서보 사이의 논란은 『미술평단』 1997년 가을호에 실린 윤난지의 「한국추상미술의 태동과 앵포르멜 미술」에서 다시 다루어지고 있다.
“당시는 ‘앵포르멜’이란 어휘 자체도 몰랐으며, 다만 그 무렵의 사실주의 묘사에 싫증을 느껴 작품을 하다가는 지우고 물과 숫돌질로서 캔버스를 문지르다 보니… 알지 못하는 새로운 형태를 발견하게 되어…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계속했다. 당시의 지도교수로부터 그것이… 앵포르멜의 추상표현주의적 표현임을 알았다. 그리고 따피에(Michel Tapie)의 ‘또 하나의 예술’이란 책을 읽고부터 그것의 미학이론을 알게 되었다.”
윤난지는 유근준의 책에 실렸다는 이 인용과 출처를 알 수 없는 발언 중 박서보가 1958년 늦가을에 『미즈에』에 실린 미셀 타피에의 「또 하나의 미학에 관하여」2)를 보고 앵포르멜을 알았다고 했다는 점, 또 김영나와의 인터뷰에서 진술이 엇갈리고 있음을 예로 들어가며, “어쩌면 미리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도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다.3) 그러나 박서보가 1958년 늦가을에 미셀 타피에의 글을 읽었다는 사실을 의심의 근거로 삼는다면, 이 시점은 그가 이미 비정형 작품을 발표하고 난 다음이므로, 이것은 박서보의 주장에 의문을 제기할만한 근거가 못된다.
사실 이 발언에는 ‘알고 그렸고 모르고 그렸고’의 논란보다 훨씬 더 중요한 비정형회화로의 전이동기轉移動機가 무심결에 언급되고 있다. 박서보가 “사실주의 묘사에 싫증을 느껴”라고 진술하고 있는 부분이 바로 그것이다. 비정형성이 “사실주의 묘사에 싫증을 느껴” 우연히 도달한 형태로 가능한 미술인 것일까? 잘 알려져 있다시피 앵포르멜 회화는 서구미술의 오랜 회화적 전통과 존재방식에 대한 회의와 전복이라는 문맥상의 역사성 때문에 가치를 획득하고 있는 미술이다. 즉 비정형성이라는 형태적 특징 자체를 미적 가치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전통회화에 대한 대응으로서의 발상의 동기와 방법으로 평가되고 있는 것이다. 일상의 주변에서 흔히 발견되는 곰팡이나 갈라지고 얼룩진 벽면 등의 비정형적 형태를 예술로 인식하지 않는 이유를 생각해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사실 비정형성 그 자체는 서구 앵포르멜 회화의 문맥을 떠나 예술적 성취로 간주될 이유가 없다. 그것은 앵포르멜이라는 서구 미술의 문맥 속에서 비로소 의미를 갖는 회화적 방법이자 새로운 회화로서의 존재방식인 것이며, ‘왜 그래야만 하는가’의 회의와 대안으로서의 전제 및 전조현상 없이, 우연히 성취된 결과로 어물쩍 대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윤난지는 ‘독창성’을 주장하기 위해-서구미술 문맥과의 관련성을 부정하기 위해 준비된 박서보의 이 발언이,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의 비정형성의 아이덴티티를 스스로 부정하는 발언이 되고 있음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 서구미술의 영향을 전면 부정하면서 서구미술의 문맥 속에서만 좌표를 찾을 수 있는 미학의 그림을 우연히 그렸다고 주장하는 것, 이것이 이 발언에 숨겨진 앞뒤가 전혀 맞지 않는 모순인데도 말이다.
그러나 더 심각한 문제는 따로 숨겨져 있다. 이 문제를 밝히기 위해 박서보의 이 주장을 조금 다른 측면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나는 이 문제가 박서보라는 작가의 예술가로서의 윤리의식 및 자질과 더불어, 한국의 미술평론가들 및 미술사가들의 역량과 자존심을 검증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박서보의 이 짧은 발언과 그 발언에 대응하는 이론가들의 입장이 곧 한국현대미술 담론 속에 감추어진 역사적 진정성reality의 한 단면을 다시 한번 적나라하게 확인시켜 줄 것이라는 말이다.
우리는 박서보가 스스로 주장하고 있듯, 1958년 당시 서구미술에 관한 정보도 없고 아는 것도 없었던 이 대학을 갓 졸업한 약관의 이십대 젊은 친구가 앞 뒤 문맥과 그 어떤 전조현상도 없이, 기이하게도 칸딘스키와 너무나도 흡사한 경험을 통해 얻었다는, 말 그대로 우연하게 만들어진 얼룩들을 선뜻 전시회에 내어 놓는 당돌한 행태를 보였다는 점에 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서 그는 이것이 예술작품일 수 있는지 조차를 판단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반국전’을 부르짖으며 미술전시회에 출품을 했다는 말인데, 이것은 비록 젊은 혈기에서 비롯된 ‘치기’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앞뒤가 전혀 맞지 않는, 실로 방자한 태도가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문제는 한국의 미술계와 미술비평계 그리고 미술사학계가 고작 이런 근거도 없는 ‘얼룩그림’을 지금까지 역사성을 지닌 중요한 미술작품으로 받아들이고 용인해 왔다는 사실이고, 이것 하나만으로도 한국의 미술비평가들과 미술사가들의 위상은 땅바닥에 나뒹구는 형편이 되고도 남음이 있다는 사실이다. 이 말은 결국 한국에서는 미술대학 졸업한 사람이 캔버스에 물감으로 그려서 발표하면 무조건 예술작품으로 간주한다는 말이 되는 것이 아닌가?
이런 상황에서는 한국의 미술평론가들과 미술사가들이 어쩌다 우연히 만들어진 그 얼룩들을 어떤 이유에서 미술작품으로 받아들여온 것인지에 관해 대답을 해야만 한다. 그의 주장대로라면 그것이 미술작품일 수 있는 근거가 전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평론가들과 미술사가들은 그것이 서구의 앵포르멜 회화들과 형태가 비슷하다는 이유만으로 수용해 왔다는 말이 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이런 것을 놓고 서구 미술작품들에나 해당될 양식적 비평의 틀을 빌어, ‘뭐가 어쩌니’ 해가며 분석하고 평가하면서 한국현대미술의 기점 운운하는 ‘골 때리는’ 상황을 연출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그것도 모자라서 이런 그림도 아닌 그림에 ‘최초의 앵포르멜 회화’라는 유치한 역사적 지위를 부여하려 몸부림들을 치고 있으니, 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상황인 것인가?
사실 박서보의 이 주장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면, 미술비평과 미술사는 이 주장을 논란으로 발전시킬 것이 아니라, 그 ‘그림도 아닌 그림’과 더불어, 가증스러운 논리로 이것을 옹호해 온 비평가들 및 미술사가들을 역사 속에서 가차없이 베어 내어 축출해 버려야만 하는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비평정신이고 역사를 진술하는 자들에게 맡겨진 사명인 것이다.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다. 수십년이 지난 시점에서의 박서보의 이 발언이 지닌 또 다른 의미는 많은 사람들이 함께 운동으로 일으켜 만든 권력을 손에 쥔 뒤, 자신의 신화를 만들기 위해 자신을 도와준 사람들의 뒷통수를 때리는 비열한 배신행위라는 점에서, 윤리적으로도 가혹하게 응징을 해야만 할 사안이 아닐 수 없다. 다시 말해서 그의 주장은 당시 이 당돌한 젊은 친구에게 애정과 기대를 가지고 비평문을 썼던 당시의 평론가들과, 한국현대미술의 기점논의를 둘러싸고 왈가왈부하고 있는 현재의 미술평론가들 및 미술사가들의 위상을 동시에 ‘멍청한 바보들’로 만들어 놓고 있는 것이다.
미술평론가 및 미술사가들은 이 점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해 보아야만 한다. 그의 영향력이 무서워 제대로 말도 못할만큼 비겁하고 기회주의적인 위인들이 가방끈 짧은 작가들 앞에서는 어째 그렇게 권위적인 것인가? 뒤통수를 맞고도 천연덕스럽게 다닐 수 있는 비위와 무한히 내려 앉아도 상처하나 입지 않는 기이한 자존심들이 부럽기는 하지만, 이런 일들이 바로 스스로의 역사적 함정을 파는 일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아둔함이 또한 딱하기도 하다. 내가 왜 이 말 같지도 않는 그 주장을 문제삼고 있는지 이제 이해들이 되는가? 내 생각에 불과하지만, 박서보는 현대미술의 문맥 속에서 더 이상 존재할 수가 없는 괴이한 천재임에 틀림없으며, 그가 그 자신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을 바보로 알고 있는 것임에 틀림이 없는 것이다.
윤난지는 박서보의 이 발언에 담긴 결정적인 단서들과 비평적․미술사적 위기감에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알고 그렸고/모르고 그렸다’의 문제에만 집착하면서, ‘어쩌면 알고 그렸을지도 모른다.’는 ‘돌리고 돌리는’ 식의 추정만을 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동안 이런 평론가들과 미술사가들의 한계들을 주목해 왔고, 그렇게 관찰되고 분석된 내용들의 일부를 지금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윤난지를 비롯한 미술평론가들과 미술사가들은 이 비판이 궁극적으로 무엇을 향하고 있는 것인지에 관해 곰곰히 되새겨 보아야만 하는 것이다.
윤진섭이나 윤난지가 박서보의 엇갈린 발언에 날카롭게(?) 의문을 제기하고 “어쩌면 미리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예리하게(?) 추측하는 것은 좋은데, 문제는 왜 이들이 중요한 문제들은 다 제쳐 두고, 가볍게 무시해도 좋을 모순들에 그토록 집착하고 있는가에 있다. 어차피 박서보의 이런 주장은 상당수의 동세대 미술평론가들과 《현대미협》의 동료작가들마저 부정하고 있는 내용들이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핵심을 피해 의문이나 제기하고 추측밖에 할 수 없는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박서보의 엇갈린 발언에 ‘집중’을 보이고 있는 것일까?
또한 당시의 비정형회화 운동의 주역이 박서보 혼자가 아니었음에도, 왜 이들은 다른 작가들의 입장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일까? 한국의 현대미술을 박서보 혼자서 다 이루어 왔다는 말인가? 이 문제는 뒤에 다시 더 보강하여 다룰 것이므로 더 이상 언급하지 않겠지만, 이런 발언에 집착하면서도 핵심을 회피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자신들의 아이덴티티를 잘 보여 주고 있다는 점과 이런 태도들이 바로 이런 소모적인 논란을 확대 생산시켜 온 것이라는 점만 짚고 넘어가도록 하겠다.
비록 당시의 자료들이 충분하지 못하고 망실된 작품들이 있다고는 하나, 미술평론가들과 미술사가들이 특정작가의 불투명한 구술에 근거하여 당시의 미술상황을 추정하고, 진술의 진실성을 캐어 묻는 정도의 의문제기 차원에서 비평과 미술사를 진술할 만큼, 그렇게 오래된 일도 아닌 것은 물론이거니와 자료와 작품이 부재한 것도 아니다.
사실 자료나 작품보다 훨씬 더 부족한 것은 미술평론가와 미술사가들의 전문성과 성실성 그리고 열정 따위의 기초적인 소양과 전문인으로서의 자존심 및 지식인으로서의 윤리의식일지도 모른다.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의 미술상황이라는 것이 기껏해야 40-50년 전의 일들이고, 당시 활동의 주역들 대부분이 아직 건재하므로 종합적인 진술의 기회가 남아 있으며, 작품들 및 도판과 기사 등의 보충자료들도 결코 적지가 않다. 그 자료들 모두를 놓고서도 자신들의 연구작업에 불충분하다고 불평할지도 모르겠지만, 그 내용들은 특정작가의 기억과 진술에 의존하여 진실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추정하는 일 정도로 지면을 메울 만큼 부족한 것이 아니다.
상당수의 연구자들이 박서보 등의 예를 들어 구술진술의 진실성과 역사적 가치에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구술진술 채록의 방법적인 결함 때문에 생겨나는 문제일 뿐이다. 모든 예술가들이 정직하지 못한 것도 아니거니와, 필요하다면 당시 경험을 공유하고 있는 동세대의 작가들 및 평론가들에게 같은 질문을 던지고, 그 내용들을 수합하여 분석해 ‘누가 거짓말쟁이인지’를 어렵지 않게 판단할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렇게 분석되고 종합된 근거자료들을 확인하고, 또 동일한 발언의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박서보에게 수차례에 걸쳐 대담을 요청했지만, 그는 단호하게 이것을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기획전시에의 출품의뢰마저도 거절했다. 물론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이었고, 그 때문에 대담과 전시에 일말의 아쉬움이 남았다. 그러나 그가 아무리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는 내게 수많은 당대의 작가들 중 한 사람일 뿐이며, 나는 한국현대미술의 역사 전체를 일개 작가 한사람에게 의존해서 연구하고 진술할만큼 어리석고 무모하지는 않다. 또한 이런 식의 회피가 박서보 자신을 위해서도 결코 유리하게 작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 역시 자명하다. 두 말할 나위도 없이 역사는 박서보 개인의 사유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저간의 사정들은 오히려 그의 역사의식과 그동안 한국현대미술에 관해 나름대로 언급을 해 왔던 미술평론가들과 미술사가들의 역량과 소양 자체에 관해 큰 의문을 갖기에 충분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실로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한마디로 이들은 역사가 얼마나 엄격하고 준엄한 가치인 것인지를 아직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여러 번 밝혔듯, 나는 지난 1999년부터 2004년에 이르기까지 네 번에 걸쳐 『한국현대미술 다시 읽기』 프로젝트를 진행했고, 이 과정에서 약 1만 2천여 종의 자료들과 53분의 작가 및 평론가 대담을 수집하고 채록했다. 이 작업을 통해 생각보다 훨씬 많은 자료들이 있고, 그 자료들 중에는 앞에 소개한 구술채록 방법으로 교차검증한 내용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어, 이것을 토대로 일부 작가들의 진술에 관한 의혹의 실체를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었다. 책으로 출간되어 나와 있으니 직접 눈으로 확인해 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결국 미술평론가들과 미술사가들은 나태해서든 말 못할 숨겨진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든, 기초자료의 조사라는 가장 기본적인 연구과정에도 충실하지 않았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앞서 언급했듯,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의 자료들 중에는 당대의 미술현상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날카로운 시각의 중요한 자료들이 있었음에도, 단 한번도 인용되거나 언급된 바가 없는 것으로 확인되었다.3) 이것은 또 다른 측면에서 미술평론가들과 미술사가들이 부족한 자료 타령을 하면서도 특정 진술들을 의도적으로 ‘배제’하거나 ‘삭제’하고, 많은 작가들 중 유독 특정작가의 진술에만 의존해 왔던 이유가 무엇인지를 잘 설명해 주고 있으며, 이런 맥락에서 미술평론가들과 미술사가들이 나태하고 편파적이라는 작가들의 윤리적 비난은 충분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누가 한국에서 최초로 앵포르멜 양식을 구사했든, 그것을 앵포르멜로 보든 추상표현주의로 보든, 서구의 미술경향을 미리 ‘알았건 몰랐건’은 전혀 중요한 쟁점도 아니거니와 그것을 토대로 미술을 논하고 한국미술의 역사를 진술할 아무런 이유도 없다. 미술이 한국 내에서만 이루어지는 것도 아닌데, 우물 안 개구리들처럼 혹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 듯, 한국에서 ‘누가 최초’라거나 ‘알고 그리고 모르고 그리고’를 왈가왈부하는 일이 현대미술의 담론에 비추어 너무도 유치한 다툼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심각한 문제는 오히려 이런 소모성 논란으로 인해 핵심적인 쟁점들-무엇을 한국미술로서의 ‘현대성’의 근거로 볼 것인가라는 보다 포괄적이면서도 궁극적인 질문들이 덮여져 왔다는데 있다. ‘미술에 있어서의 현대’는 미술로서의 현대적 자각이 무엇인가에서 찾아져야 하지만, 그동안의 논의들 대부분이 정작 그 실체를 밝히는 일보다, 사건의 표면들에서 근거를 찾고 기점을 설정하기에 급급하고 있는 형편인 것이다. 때문에 한국현대미술의 역사에 관한 진정한 연구와 담론들은 기존의 진술들을 메타비평하는 차원에서야 비로소 시작될 수 있는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다. (4부에서 계속)
각주
1) 윤진섭, 『한국 모더니즘 미술 연구』, 재원, 2000, pp.32-34.
2) 이 글에서 언급된 「또 하나의 미학에 관하여」는 이 글에 앞서 게재했던 비평가들이여 내 칼을 받아라#No.4 -윤진섭,『한국 모더니즘 미술 연구』(2부)에 소개한 미셀타피에의 글 「다른 미학에 관하여d’une esthetique autre」와 같은 글이다.
3) 윤난지, 「한국추상미술의 태동과 앵포르멜 미술」, 『미술평단』, 1997년 가을호, p.54.
4) 『한국현대미술 다시 읽기 IV』- 초기 추상미술의 비평적 재조명, Vol. 1의 해당 기사자료들 및 Vol. 3의 김병기, 이구열, 김창열, 장성순, 조용익 등과의 대담내용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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