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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길 : 그의 사유과정과 작업을 바라보며

 

Exhibition review 전시 리뷰(미술평단, 2001) / 김미경(강남대 교수/미술사학)

 

 

 

나는 오상길의 사유과정과 작업을 어떤 명사noun로 끝낼 수가 없다. 그것들을 통합적으로 말해 줄 그 어떤 결정적인 명사도 나의 좁은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기 때문이다. 카뮈가 말했던 부조리absurd? 그런데 일반적인 부조리란 단어는 적절치 않다. 왜냐하면 그것은 조리가 없다는 단정적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카뮈가 말한 absurd란 단어는 가능성이 있다. ab는 떨어져 나감, 빗겨남away from, off, apart으로, surd는 수학용어로 무리수이듯 불합리함과 그에 따른 침묵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의 작업은 그의 던져진 삶의 과정에 대한 치열한 대면이자 스스로의 불완전한 의식 활동의 표출이다.

 

… 나와 세계의 관계에 관한 끊임없는 사유와 체험의 진동을 느끼려 하는 사고자, 그리고 광의의 표현자이고자 하는 내 의지를 뜻한다. 내가 나의 사유 속에서 맞닥뜨리는 가장 큰 벽은 나의 사유가 결국에는 모순되어 있으며, 나의 존재는 사유되는 것에 한정되지 않는다는, 사색으로는 결코 풀리지 않는 알 수 없음과 모호함에 대한 무수한 좌절이며, 그러면서도 끝내 포기할 수 없는 굴레에 관한 자각이다….(오상길, 1990)

 

그는 “위대한 작품을 남기기 위해 예술적 실천을 노정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삶 자체에 충실하려는 몸부림의 흔적, 또는 그 주변의 부스러기를 실천의 결과물로 남기고 싶어 하는 것(1993)”이라고 말 했다. 왜냐하면 그가 거부하는바 현대미술에서 위대한 작품이란 매번 새롭게 우상화되는 불가사의한 존재이며 그 허구성에 배신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 처하는 세상의 경험들은 확고하게 검증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검증될 수 없는 세상의 경험들은 그의 몸부림의 흔적으로, 실천의 결과물로서 예술이란 이름으로 불릴 수 있을 것인가. 그가 소위 이제까지의 예술이란 이름으로 자신의 작업이 불리길 거부한다면, 그렇다면 그는 예술과 결별해야 하는가. 그런데 예술이란 무엇인가.

 

 

-인간 : 카뮈, 그리고 시지프스적 태도

 

카뮈에게 있어 삶이란 기나긴 순례나 짜임새 있는 계획이 아니라, 세계를 향한 마음가짐이다. 삶은 짜여진 플롯plot이 아니라, 셀 수 없는 장면들scenes이며 살아가고 있는 지금, 현재의 이 시각인 것이다. 그리고 신화에서 시지프스는 자신이 처한 상황의 비극에 대한 뚜렷하고 투명한 의식을 갖고 있다. 왜냐 하면 그가 굴러 떨어진 돌을 다시 산꼭대기로 굴려 올라가기 위해 산을 내려오는 순간에도 여전히 자신이 성공하리라는 희망을 품었기에 오히려 그 끝없는 노동은 자신의 고통을 감수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설령 이 낙원이 현존하지 않는 봄밤의 꿈에 지나지 않아, 결국 가도 가도 아득한 사막의 작렬하는 햇살 아래 갈증과 탈진으로 거친 숨을 몰아쉬며 서있을 수밖에 없다 하더라도, 나는 이 희망을 버릴 수 없는 영혼의 존재인 것이다.(오상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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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프스의 고뇌를 승리로 뒤바꾸는 힘은 다름 아닌 자신의 운명에 대한 이 명쾌한 인식이자 사유이다. 카뮈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이 칠흑의 우주가 우리가 느끼는 것처럼 안전하고 중요하며, 의미있고, 합리적인 세계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반대로 세계는 미세하고 무한한 우주공간 안에서 놓여 있으며 카뮈는 그 저 모든 어둠의 비이성적인 힘의 지배 아래 놓여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명백한 것으로 확인했던 것이다. 공포 속에서 죽어가든 무의미함과 좌절 속에서 살든 우리는 현재 이 시각을 살아가야 하며 인간의 존재에 주어진 사실들, 그 실제적으로 드러나 있는 현실을 찾고자 노력해야만 한다. 그것을 찾기 위해서는 우리는 그 모든 것들과 직면해야 하며 그것들과 함께 살아가려 힘써야 한다. 카뮈에게 있어 삶에는 절대적인 의미 가 없다. 불합리에 직면한, 갈망하는 인간의 마음과 이 무관심한 우주 사이에서 결국 부조리란 개념을 이끌어 내기에 충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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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길l, 덩덩덩더쿵, single channel video instal

-5개의 비디오

그는 이번에 5개의 비디오를 보여주었다. <Lick! Lick! Ass!>, <도리도리>, <덩 덩 덩더 쿵>, <기회주의자의 눈>, <공기놀이>이다. 모두 인간의 신체를 다루고 있으며 “비디오 편집상 속도를 줄이거나 이미지를 역동적으로 재구성해 반복시키고 비디오 트랙Track을 추가해 시간적, 공간적 축소와 교란을 일으키고자 한 것들”(오상길)이다. 시간적, 공간적 축소와 교란은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세계이자 인식적 혼돈이다.

   

신체는 그에게 역설적인 도구가 된다. 끊임없는 그의 사유를 배반하는 신체이다(그가 써 왔던 글들을 읽어 보라). 그러나 꼭 신체가 아니어도 상관없다. 신체로서, 사유로서 그가 대면하는 세계의 시간과 공간과 그가 처해진 장소 모두 그 자신이 직면하는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의 관심은“테크놀로지 자체가 아니라 테크놀로지를 통해 예술의 존재와 예술작품의 존재방식을 묻는 일”이라고 했다. 그것은 소위 예술작품의 존재방식에 의문하고 소위 예술의 존재를 재고해 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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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임없이 핥는 혀, 옆으로, 위아래로, 계속되는 고갯짓, 수없이 반복되는 눈동자의 굴림, 시도하고 또 시도해도 실패하는 공기놀이. 우선 인간의 문제로서 나는 카뮈의 시지프스를 떠올렸다. 신들의 조작에 의해 무관심한 우주 속에서 자신만의 일로서 끝없이 돌을 굴려야 하는, 그러나 그 불합리에 직면하면서도 끝없이 희망을 품는…. 그리고는 예술의 문제로서 뒤샹M.Duchamp을 생각했다. 뒤샹이 물었던 예술의 존재와 예술작품의 존재방식을…. 또 왜 그가 뒤샹을 어떤 방식으로든 인용하곤 하는지를….   

 

그가 소위 예술 속에 있기를 자처하는가 아니면 예술밖에 있는 것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그는 자신이 처한 세계를 직면하고 있음을 치열하게 보여줄 뿐이다. 그런데 그것이 괴리다. 어떤 식으로든 현대미술은 우상화와 상업주의에 맞물려 있다. 그의 작업을 현대미술이라는 이름으로 보겠다면 이 점을 직면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예술을 포기함으로써 예술 밖에서 세계에 직면하는 인간으로서, 시지프스로서 살아가야 하거나 예술이라 불리고 있는 그 어떤 구조를 또 한 번 바꿔버려야 한다. 뒤샹처럼. 그리고 뒤샹의 작업의 의미를 무기력하게 오류에 빠지게 한 소위 현대미술의 구조를 생각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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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조리는 본질적으로 하나의 괴리다. 그것은 서로 비교되는 요소 중의 어느 것에도 있지 않다. 그것은 그 요소의 대치에서 생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계는 허망한 것이 아니고 오직 비합리적일 뿐이다. 인간의 세계에서 합리란 인간이 만든 하나의 도식이자 구조일 뿐이다. 그러므로 오히려 허망한 것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은 한사코 명증을 요구하는 의식과 그 비합리와의 대치인 것이다.

카뮈는 인간을 통제하고 지배하는 신들에게 맞서 끝없이 시도하는 시지프스를 썼다. 그러나 시지프스의 사유만큼은 절대로 신들에게 지배되지 않는다. 신들은 시지프스의 신체를 통제할 권력을 지니고 있을 뿐이다. 카뮈는 시지프스를 비합리적이고 부조리absurd한 세계 속에 위치시켰으나 그의 사유의 자유를 말했다. 그러나 시지프스를 지배하는 신들이 놓여있는 자리들을 모두 운행하는 절대자의 존재를 알지 못하고 죽었다. 오상길의 작업과 사유과정은 시지프스의 그것인가. 우리는 비트켄슈타인Wittgenstein이 철학적 사유과정을 통해 절대성 앞에서 침묵해야 한다고 했던 말을 기억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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