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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속의 惡, 예술 속의 善

                                                                                                         Marc Voge(시인)

오상길의 두 비디오 작품은 세련된 방식의 사디즘적 성향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것 때문에 잔인하기보다는 관능적이다. 실제 삶에서의 잔인한 현장은 스캔들이 되지만, 예술에서는 숭고함에 다다른다. 삶의 끔찍함은 결코 아름답지 못하지만 예술에서의 끔찍함은 원래부터 아름다운 것이다. 조금 더 보태자면, 예술에서의 끔찍함을 묘사하기 위해서 새로운 어휘를 찾아내야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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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가 없다면 예술은 존재하지 않는다. 예술의 진실은 그의 가식에 의존한다. 예술의 아름다움은 어제는 유화물감의 붓질이었지만, 오늘은 라텍스 덩어리와 합성수지를 통해 창출된다. 바로 이 가식에서, 속임수에서, 예술의 근본적인 감동과 기쁨이 분출한다. 아니면 관객의 더욱 강도 높은 기쁨 속에서, 또는 오상길의 경우처럼 창조자의 기쁨 속에서 말이다.

 

믿기 어렵겠지만 예술의 끔찍함은 오직 기쁨만을 자아낸다. 손과 발이 못 박히고 면류관이 살을 뚫고 있는 십자가의 예수는 우리에게 기쁨을 준다. 그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죽었다는 사실, 그가 하늘로 승천했다는 사실 그리고 우리의 죄를 사했다는 사실이 기쁨을 주지만, 특히 천재적인 예술의 방식으로 묘사되었다는 사실이 기쁨을 주는 것이다.

십자가에 매달린 그를 알현하기 위해 수많은 거대한 미술관에 몰려드는 사람들만 보아도 그 점은 여실히 드러난다. 악은 특히 미세한 부분에서 우리를 매혹한다.

 

악마는 그 미세한 부분들 속에 있다: 십자가에 매달린 손과 발, 그리고 <제 살 핥기>와 <제 살 뜯기>에서 물리고, 뭉개지고, 쓰다듬어지는 살. 오상길은, 진정한 - '가짜'로서의 - 잔인함은 예술이라는 사실, 그 사실에 대해 숙고하고 실천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인식시킨다. 혀로 살을 핥고, 이빨로 살을 깨무는 매 순간들은, 아름다움과 살의 덧없음, 아름다움의 형태에 복원하지 못하는 살의 그 초라한 능력에 대한 사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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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략>

 

원칙은 이렇다. 오직 삶 속에서만 끔찍함은 존재한다.

예술에서의 끔찍함이란 것은, 자신 앞에 펼쳐지는 끔찍함에 의해 순간적으로 공포를 느끼든지, 아니면 들어서기 전에 이미 그것은 게임일 뿐이라는 것을 인식하든 간에, 단지 관중을 안심시킬 뿐이다.

 

늘 그랬듯이 예술에서의 끔찍함은, 교회의 권위가 기독교 예술에 멍에를 지웠던 것처럼, 음울한 일상의 삶을 해독하고 악을 물리치기 위한 교훈적 도구로서 사용되는 법은 적다.

정면으로 클로즈업된 남자의 얼굴 하반부만을 보게 되는 오상길의 비디오를 보며, 우리는 영상에 담긴 한 사람이 지루한 삶의 고독을 좌절시키려고 몸부림치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불경전>에는 전시되지 않았지만 <침 뱉기>란 비디오 작품에서는 침을 연신 뱉는 남자의 입모습을 볼 수 있다.

이보다 더 정상적일 수는 없다. 그보다 더 평범하고 슬플 정도로 일상적일 수는 없다.

그보다 더 지저분하고 끔찍할 수는 없다.

사람들이 길에 침 뱉는 것을 하루에 몇 번이나 보는가? 반복해서 침을 뱉는 사람의 행위 속에 삶의 어떤 철학이 있으리라고 우리는 몇 번이나 생각했는가? 그 어떤 사유? 그 어떤 권태? 그 어떤 역겨움? 그 어떤 병적 징후? 그 어떤 도전? 죽음에 이르는 그 어떤 방법?

 

작가는 이와 같이, 홀로 있는 사람 특히 그가 외부로부터 보여질 때, 그보다 더 아름답고 더 잔인한 존재는 없음을 보여준다. 인간은 끔찍하건 유쾌하건 예술을 사랑한다. 그들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지옥의 흉악한 악마들에 의해 고문당하는 희생자들, 영화의 모든 고문장면들을 즐긴다.

 

관중은 오상길의 두 비디오 작품에서 두 남자가 자신을 고문하고 - 이 단어가 너무 강하다면 자신을 가학한다는 표현이 낫겠다 - 그 혼자만이 상상할 수 있는 잘못을 질책하기 위해 자학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예술은 삶과 같지 않다. 삶은 우리의 일거수 일투족마다 재난의 모든 가능성을 대면시킨다.

예술은 그것을 선택하든지 아니면 아무 걱정 없이 팽개치든지 하면 된다. 예술을 감상하는 자는 단지 그 자신의 기쁨을 위해 감상할 뿐이며, 이것이 전부이다. 거기에는 어떠한 강요도 없다. 그처럼 끔찍한 영화를 감상한다는 것은, 끔찍할 정도로 평범한 삶에 대한 심리치료의 경우처럼 병적인 것과 관련을 맺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한 이러한 치료를 갈구하는 자는 바로, 다음 전철을 기다리거나 혹은 기다리지 않으면서 홀로 플랫폼에 앉아 다리 사이로 끊임없이 침을 뱉는 바로 그 남자(혹은 여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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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략>

 

손등을 이빨로 물어뜯고 가슴을 쥐어뜯는 오상길의 <제 살 핥기>와 <제 살 뜯기>의 주인공들을 보며, 우리는 예기치 않게 피가 솟구치기를 기대한다. 우리는 물론 잘못 알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삶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심지어 피가 솟구쳐도 그것이 우리를 감동시키기 위한 것이 아닌 그런 다른 세계 속에 있기 때문이다. 시각예술은 삶과는 달리, 영화보다도 훨씬 적은 양의 핏방울만으로도 감동을 준다.

                                                                                         <중략>

 

뛰어난 예술작품은 악에 대한 우리의 반성을 강요하고 그를 향해 나아가게 하며, 우리에게 다소라도 방심하지 않도록 경각심을 일으킨다. 그러나 이러한 결과를 갖기 위해서는 어떤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나는 여기서 철사망과 차가운 푸른빛을 사용한 간략한 설치를 통해 우리에게 홀로코스트 학살에 대한 반성을 촉발시키는 오상길의 또 다른 작품 <우츠 게토 The ŁÓDŹ Ghetto,1996>에 대해 생각한다.

홀로코스트에 관한 반성에 있어 가장 고통스러운 모순 중의 하나는, 그것에 대해 생각하면 할수록, 그것은 논리적 언어의 영역 안으로 편입되어 간다는 것이다. 홀로코스트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것이다.

지고의 참혹함은 원래 같으면 사유의 한계를 지나 지나쳐버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단지 이처럼 이성 속에 영입된다. 악은 인간의 한계를 항상 넘어간다. 그리고 이것이 인간이 항상 악을 만들어내는 이유이다.

인간은 삶 속에서 극단적 범죄를 범할 능력이 있지만, 모순되게도 그러한 범죄를 저지른 후에는 하나의 인간으로서 다시 사유하고, 분석하고, 급기야 그 분석은 죄악의 정당성을 부분적으로 만회시켜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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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략>

 

그러면 마조히즘masochism은? 예술에 마조히즘은 없다.

예술가는 본래 마조히스트masochist기보다 사디스트에 가깝다. 유아적이기도 하고(미니멀 예술가 온 카와라의 유아성과 혼돈하지 말기를) 심지어 무의미하기 짝이 없는 예술로 우리를 폭격해대는 그들의 집념을 사디즘이 아닌 그 외의 방법으로 해석할 수 있을까? 마조히스트적 예술가는 넌센스이며, 차라리 바보에 대해 논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자신을 고문하는 예술가는 실패한 논리학자이다.

 

그러나 <제 살 핥기>와 <제 살 뜯기>에서 오상길은 우리에게 이러한 예술논리의 간략한 예증을 제공한다. 왜냐하면 예술에서의 논리란 마치, 남녀의 2인 무용(pas de deux)이나 홀로 하는 자위행위처럼 이상할 정도로 삶 속의 마조히즘과 닮아있기 때문이다.

 

그처럼 이 주인공들은 그들의 육신과 피부를 사랑하고 아름다움을 보유하며 또 고문한다. <제 살 핥기>에서는 한 남자가 접혀진 살 부위를 혀로 핥으면서 이빨로 손등을 물기도 하고, 가혹하고도 엄중하게 자신의 육신에 대한 반성을 한다.

그는 마치 고문전문가가 그의 직업적 도구를 들고 천천히 예술적으로 숙고하며 고문하듯이 그의 혀와 이빨을 통해 숙고한다. <제 살 뜯기>는 제작에서는 겸손하고 욕망에서는 영웅적이다.

곧 모든 파열이 올 것이며, 주인공은 육체의 나약함을 주장하는 논증들과 다름없는 매우 '정신적'인 고조 속에서 우쭐해 한다.

 

<제 살 핥기>와 <제 살 뜯기>는 사실 육신을 망각하지 않게 하려는, 그리고 정신을 위한 옹호이다. 즉 사려있는 남자나 여자조차도 머리를 쥐어뜯고 살을 찢어내야 할 정도로 절망적인, 이러한 예술 속에서 실패하는 정신을 위한 옹호 말이다. 그리고 모두 알고 있듯이 정신은 악의 시초이다. 정신은 육신보다 더욱 더 삶을 의미한다. 정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고통의 열매인 기쁨을 만끽할 수 있을 것인가? 기쁨의 열매인 고통을 어떻게 느낄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살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살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악을 대면하여 우리는 자문한다: 왜? 혀로 핥고 살을 찢는 매 번의 움직임은 하나의 질문 같은 것이다: 왜? 누구라도 공중목욕탕에서 절차에 맞추어 때를 밀어보았다면 - 참을 수 있을 만큼 고통스럽다라는 의미로 읽기 바란다 - 살과 삶이 주는 기쁨의 이유에 대해 사유해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삶의 기쁨은 화창한 날씨와 동일한 이유 속에서 존재한다: 즉 자신을 고문하기 위해서. 아마 인간이 왜 존재하느냐 하는 질문(악을 감내하기 위해서? 괴물이 되기 위해서?)을 제외한다면, 그 어떤 질문도 그만큼 우리의 사유를 괴롭히지는 못할 것이다.

 

 

악의 존재이유는 모든 창조와 또 모든 크고 작은 파괴들의 근원에 숨 쉬고 있다. 그것은 삶을 감지하기 위한 접촉의 욕망이며, 오상길의 비디오 속 영웅과 나아가 다른 이에게 악을 겪게 할 책임이 있으면서도 그럴 능력이 없는 모든 남녀의 방식에 따라 삶을 생각하려는 욕망이다. 악을 지향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악을 거부하든 창조하든 간에, 창조가 아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점은, 예술은 그 자체가 자신에 대한 대답이라는 것이다. 왜 창조하는가 라는 질문의 대답은 그 자체가 창조이다. 예술은 악에 대한 결정적 대답일 뿐이지만, 삶 속에 악이 지속하는 한 끝없이 반복되어야 할 운명을 가진다.*

                                                                                             <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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