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추상과 한국의 현대미술-메타비평을 위한 질문들(Part I)

 

 

 

목  차


I. 들어서며
   1. 그림 그리기와 예술 사이의 거리
   2. 우리의 근․현대사를 바라보는 입장들

II. ‘추상’과 한국현대미술의 기점논의를 향한 질문
   1. 질문의 배경
   2. 기존 논의 중의 몇몇 입장들
      가.《한국현대미술 20년의 동향》展
      나.《한국현대미술의 시원》展
      다. 일부 미술평론가들의 입장
   3. 현대미술의 기점설정과 관련된 새로운 논의들
   4. 논란 속에서 찾아야 할 핵심적 쟁점들
      가. 한국현대미술의 기점논의에 대한 의문들
      나. 구체적으로 규명되어야 할 문제들
          1) 1956년 주장에 관하여
          2) ‘뜨거운 추상’을 바라보는 또 하나의 눈
          3) 그동안 가려져 온 당시의 비평적 논의들-이경성의 시각
          4) 그동안 가려져 온 당시의 비평적 논의들-정규의 시각
          5) 그동안 가려져 온 당시의 비평적 논의들-이봉상의 시각
          6) 그동안 가려져 온 당시의 비평적 논의들-김병기의 시각
      다. 다시 연속되는 의문들- ‘자생론’을 향하여

III. 기존 논의와의 거리 두기-다시 읽기
   1. 메타비평을 위한 가치 중립성
   2. 메타비평의 당위-미술현장과 비평 및 미술사의 진술이 만드는 그늘들
   3. 오류로 흐르는 비판적 시각들-‘수용론’을 향하여
   4. 예술적 가치의 생산과 소비의 시스템
   5. 미술과 문화정치학

IV. 나서며

한국현대미술 다시 읽기IV, <고난 속에서 피어난 추상>, 2004 MIA

I. 들어서며

 

  1. 그림 그리기와 예술 사이의 거리

그림은 성취욕구만 있으면 누구나 그릴 수 있지만, 그림 그리기가 곧 예술적 가치를 생산하는 일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예술이 ‘예술이란 무엇이고, 우리 삶에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의 감각적․인식론적 가치의 추구라면, 미적 취향은 개인의 경험적 미의식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예술의 역사는 예술 활동에 의해 생산된 가치가 문화적으로 어떻게 소비되어 왔는지를 보여주고 있고, 이 시스템의 변화를 연구하는 일은 우리 시대가 요구하는 예술적 가치가 무엇인지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오래 전, 동양의 선비들은 인격수양을 위해 갖추어야 할 덕목으로 예藝1)를 꼽았고, 서구에서도 18세기 이전에는 수공적 기술2)을 의미했었던 만큼, 예술이 fine art라는 개념으로 이해되기 전까지는 그림 그리기와 감상이 상대적으로 단순하고 자연스러운 일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근대의 예술은 학문의 이론적 체계에 대응하는 직관적 경험으로서의 표현기술이자 지적활동으로 이해되었고, 감상자의 미의 추창조追創造(I. Kant) 과정을 통한 개성적이면서도 보편성을 지닌 가치로 추구되었다. 근대의 예술가들은 주어진 틀 속에서 미적 이념을 찾고, 표현의 질서를 부여하는 천재성을 기반으로 미적 가치를 보편화했는데, 이 본질 자체에의 천착은 결과적으로 예술의 형이상학적 개념을 강화했다.

 

오늘날 미술에 있어서의 현대성은 본능과 취향, 기술과 미의 보편적인 질서와 추창조의 전반에 걸친 근대예술의 형이상학 전반을 의심하며, 보다 원론적인 의문, 즉 ‘예술이란 무엇이고,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지’ 자체를 회의하는 부정성으로부터 시작되고 있다.

 


  2. 우리의 근․현대사를 바라보는 입장들

 

한편, 우리 역사에 있어서의 근대의 기점은 역사학자들 간에도 그 입장과 견해가 분분하다. 18세기 실학사상3)의 대두를 그 기점으로 보아야 한다는 입장과 문호개방을 결과했던 병자수호조약4) 체결을 기점으로 보는 관점, 갑신정변5)설, 갑오농민 혁명과 갑오개혁6)설 등등이 그것이다. 역사학자들이 근대의 기점 설정에 어려움을 겪는 것은 일제에 의한 조선의 망국과 식민통치, 분단과 전쟁 등으로 이어진 역사적 단절과 비약 때문일 것이다.
 

물론 ‘근대’의 역사성 기반 위에서 찾아져야 할 현대의 기점 또한 마찬가지 사정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아직까지도, 우리에게 있어서의 ‘현대’는 36년에 걸친 일제의 강점과 남북의 분단, 그리고 참혹한 전란으로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폐허 위에서, 오직 살아남기 위한 생존의 절대적 명제로 다급하게 제시되고 받아들여진 개념이라고 말할 수 있다. 결국 우리 역사의 근․현대사는 서구의 그것과 본질적으로 다른 역사경험이며, 따라서 역사진술의 관점과 방법에 있어서의 주체적인 역사․문화의식을 필요로 하게 될 것이다.

 

미술에 있어서의 ‘근대’의 개념 역시 서구문화의 수입이전 설, 개항전후 설, 서구미술 수용 이후 설 등으로 분분하며, ‘현대’의 개념 역시 해방이후 설, 6․25 이후 설, 1957년 설 등등 미술평론가들과 미술사가들 사이에서도 시각의 차이에 따라 복잡하게 엇갈리고 있다. 이는 크게 나누어 미술에 있어서의 ‘근대성’과 ‘현대성’을 근․현대사 전반의 역사적 과정 속에서 찾아야 한다는 입장과 미술 내적 맥락 속에서 찾아야 한다는 입장의 차이들로 보이지만, 대부분 우리 미술문화의 역사를 정리하고 규정하는 학문적 준거의 틀을 서구의 방법론에 입각해 논의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인 것 같다.

 

 

II. ‘추상’과 한국현대미술의 기점논의를 향한 질문

 

  1. 질문의 배경

이 글은 한국현대미술에 관한 그간의 기점논의들을 살펴봄으로써, 우리 미술에 있어서의 ‘근대성’과 ‘현대성’이란 무엇인가라는 보다 궁극적 의문에 접근하기 위해 쓰여졌다. 그러나 이것이 아무리 의문 자체를 목적하고 있다 하더라도, 한국미술에 있어서의 ‘근대성’과 ‘현대성’이라는 다층적이고 광범위한 역사성의 개념망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지나친 거대담론에 함몰될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즉, 몇 가지 역사적 단편의 참조와 제한된 시점만으로 질곡의 역사를 가늠하는 오류를 경계해야 한다는 의미이며, 나아가 우리의 현재가 과거를 역사화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성숙되어 있지 않다는, 말하자면 아직까지는 진행형의 역사의식을 필요로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의문은 한국의 현대미술을 다시 읽고자 하는 문제의식에서 비롯되는 극히 제한된 사변적 질문이자, 비평적 문제제기의 차원에서 준비되고 있다고 바꾸어 말할 수도 있다. 즉, 한국의 현대미술이 앞서 언급한 미술에 있어서의 ‘현대성’ 논의에 값하는, 질곡의 역사에 관한 문화적 대응차원에서의 미술문화의 소산인지, 아니면 단지 현대적 미술양식의 수용을 일컫는 말인지에 관한 비판적 검증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이 의문을 구체화하기 위해 제한적이나마 그간의 미술활동과 작품들 그리고 그에 관한 비평적․미술사적 진술들에 접근할 필요를 느꼈으며, 그에 관한 메타 비평적 문제제기를 일차적인 목표로 삼고자 했다.

 


  2. 기존 논의 중의 몇몇 입장들

 가. 《한국현대미술 20년의 동향》展
1979년 국립현대미술관과 한국미술협회가 공동 기획한 《한국현대미술 20년의 동향》전은 한국현대미술의 태동을 1957년으로 잡고, 이 시점에 이론이 있을 수 있으나 추상미술이 발붙이기 시작한데에는 틀림이 없다고 우회적인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7) 그러나 이 서문에는 왜 추상미술이 한국현대미술의 기점 근거가 되어야 하는지에 관해서는 구체적 언급이 없다.
다만, 여섯 사람의 미술평론가들이 1957년부터 1977년에 이르는 추상미술의 흐름을 4부로 나누어 다루고 있으며, 그 중「개관槪觀」
8)과 제1부 (1957-1965)「뜨거운 추상운동의 도입과 전개」9)에서 어느 정도 그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이경성과 이구열은 1950년대 후반에서 1960년대에 걸친 한국의 앵포르멜 집단화를 젊은 세대들의 6․25 전쟁체험과 전근대적인 체제에 대한 반발로 보고 있고, 그 반발과 앵포르멜이라는 회화적 양식의 관계를 구미歐美의 새로운 회화사조의 자극과 영향의 결과로 설명하고 있다. 이 글이 쓰여진 시점이 1979년이기는 하지만, 이들 역시 동시대의 역사적 체험과 한계를 공유하고 있는 동同세대라는 점에서, 경험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진술로서의 성격을 띠고 있는 중요한 텍스트이다. 이들은 생존자체가 불투명한 당시의 상황 속에서 열정적인 활동과 진지한 고민을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후대에게 충분한 감동을 안겨 주지만, 내용적으로도 깊이 음미해볼 중요한 문제들을 적지 않게 제시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나. 《한국현대미술의 시원》展 
한편, 2000년 국립현대미술관의 《한국현대미술의 시원》전의 전시도록에는 「초기 한국현대미술의 단면」이라는 제목의 글이 실려 있다. 이 글을 쓴 김연희는 전시의 기획배경을 소개하면서 다음과 같은 인상적인 고민을 토로하고 있다. 김연희는 이 전시가 비록 “한국현대미술사 정립에 일조하고자 기획된 것”이지만, 기획의 성격과 그 시점의 문제를 두고 고민을 했고, 결국 미술사학자들 간에도 명확한 준거의 틀이 주어져 있지 않은 문제를 피해 “논쟁의 중심에 서기보다 일반적 통념을 벗어나지 않는 범위에서” 전시의 목적을 설정했다고 적고 있다.

“이번 결정(통념을 벗어나지 않는 범위; 필자 주)에는 ‘현대미술의 시원’이라는 전시명에 걸 맞는 개념설정을 위해 선결되어야 할 수많은 문제들에 대한 나름대로의 고민과정이 깔려있었음도 아울러 밝혀두고 싶다. 그 물음들은 대단히 원론적이고 미술사뿐만 아니라 문화사 전체 그리고 미학적 가치판단까지를 조망해야 하는 문제들이었다. 그 문제들이란 우선 ‘현대’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그것을 ‘모던modern’으로 보아야 하나 ‘컨템퍼러리contemporary’로 보아야 하나? 그것에 일종의 정신상태로서 철학적․문화적 해석을 부여할 것인가 아니면 그것을 역사개념으로 해석할 것인가? 그리고 그 ‘현대’와 ‘미술’이라는 예술장르와의 해후를 정신사적 개념으로 해석할 것인가 아니면 양식사적 개념으로 해석할 것인가? 그리고 일반적으로 ‘모더니티’를 둘러싼 논의의 종주국인 서구열강에서는 그 이념이 제국주의라는 형태로 발현되었지만 제국주의 열강의 피해 당사자의 입장에서 식민지시대라는 특수한 역사적 상황을 겪으며 근․현대사를 이룰 수밖에 없었던 ‘한국’이란 특수한 공간에서 ‘현대’와 ‘현대미술’ 그리고 ‘현대성modernity’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즉 서구미술과 동일한 개념으로 한국 ‘현대미술’이 ‘현대성’을 가늠할 수 있는가? 게다가 어디에 어떤 방식으로 그 ‘시원’으로서의 의미를 부여할 것인가? 등등 수 없는 물음들이다.”10)

김연희의 이런 고민들이 비록 결과적으로 주어진 주제에 관한 고민의 단계에서 그치고 있고, 그 고민의 결과들을 전시를 통해 구체적으로 확인하기 어렵다는 아쉬움을 남기고 있기는 하지만, 1979년의 《한국현대미술 20년의 동향》전의 기획배경과 상당한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을 끈다. 왜냐하면 김연희가 말하는 고민은 사실 우리의 미술과 역사를 바라보는 현재적 시각의 실체이자 역사적 거리에 값하는, 가치중립성을 확보하는 방법적 단서일 것이기 때문이다. 즉 이런 고민이야말로 서구의 미술이념과 양식 등 시대사조들의 틀을 빌어 한국미술의 ‘근대’와 ‘현대’를 설정하는 그릇된 방법론에 대응할 대안모색의 가능성이라는 것이다.


《한국현대미술 20년의 동향》전은 1979년의 시점에서 20여 년의 미술동향을 돌아보려는 시도라는 점에서는 설득력을 갖고 있지만, 그 시점에서 한국현대미술의 기점을 규정하는 일은 지나치게 성급한 시도였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김연희의 고민에도 불구하고, 2000년의 《한국현대미술의 시원》전에서의 기점설정도 여전히 무리한 논리(일반적 통념)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현대미술의 태동시점이 왜 추상미술의 집단화 양상과 관련하여 제시되고 있는 것인지의 문제 역시 불투명하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다. 일부 미술평론가들의 입장
왜인지 정확히는 모르겠으나, 대부분의 논자들이 한국미술에 있어서의 ‘현대성’과 관련하여 ‘추상’ 양식의 출현을 근거로 든다. 일단 이 논의를 전제로 할 때,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1923년 주경의 <파란波瀾>
11) 이후 1930년대 후반 일본에서 활동했던 김환기, 유영국 등에 의한 추상양식의 시도가 가장 이른 것이다.12)
그러나 1930년대의 추상미술들에 관해서는 대부분의 평자들이 소극적인 언급에 그치고 있거나 심지어 ‘근대미술’로 분류하기도 한다.13) 그 이유는 대체로, 일본 미술계와의 긴밀한 연관성14)과 활동의 소극성-이들의 활동이 당시 《선전鮮展》을 중심으로 한 보수적 색채와 민족미술 및 프롤레타리아 미술의 틈바구니에서 소수로 머물며, 집단화가 아닌 개별적 활동에 그침으로써 당시의 미술을 선도하는 주류가 되지 못했다고 평가하는 것 등이다.15) 그러나 이런 사실들이 미술에 있어 근대성의 한계가 된다는 논리도 이해가 가지 않지만, 미술이념과 양식의 측면에서도 김환기, 유영국 등의 추상이 근대로 분류된다는 사실은 납득이 가지 않는다. 어쨌든 이 부분은 구체적인 작품의 분석을 통해 연구가 심화되어야 할 문제이므로, 이 글에서는 일단 논외의 문제로 유보하기로 했다.


3. 현대미술의 기점설정과 관련된 새로운 논의들


현재까지의 한국현대미술 기점논의는 대체로 《모던아트협회》와 《창작미술협회》, 《현대미술가협회》, 《신조형파》, 《백양회》 등이 창립되는 1957년과 비정형회화 양식의 출현을 근거로 보는 1958년(제3회 현대전)의 주변에서 이루어져 왔다.16) 물론 논자에 따라 미시적인 차이가 있지만, 대부분 그 근거를 ‘추상/비정형’의 등장과 집단화의 운동논리에서 찾고 있다.


한편, 최근 들어 몇몇 미술평론가들 사이에서 기존의 논의와 다소 거리가 있는 주장들이 나와 눈길을 끈 바 있다. 가령, 미술평론가 윤진섭의 경우, 1957년의 기점 설에 대응하여 1956년 설을 제시하고 있는데, 1956년에 있었던 《4인전》의「反국전 선언」17)을 아방가르드로서의 상징적 의미로 보아 높게 평가하고, 이에 근거하여 기존의 1957년 설을 1년 더 앞당길 수 있음18)을 시사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미술평론가 임창섭은 기존의 1957년 설과 관련한 그간의 논의가 앵포르멜과 《현대미협》을 결합시킴으로써, 당시의 미술을 단층구조로 전락시켰음을 지적하고, 앵포르멜이라는 서구 미술사조의 신화에 대한 집착이 잠재해있다고 분석했다.19)


물론 이 외에도 이 시기의 미술들에 관한 크고 작은 논란이 끊이지 않아 왔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추상양식의 ‘자생론’과 ‘수용론’에 관한 논란이며, 작가들 사이에서 자주 빚어지는 ‘내가 최초’론論(?)이나 ‘서구의 미술동향을 보고/알고 그렸을 것’이라는 이론가들과 ‘나는 못 봤고 내 작품은 독창적인 것이다’는 작가들 사이의 줄다리기식 소모성 논란들이 그것이다.


이런 문제들이 논란거리가 된다는 것 자체가 정말 이상하지만, 이것도 외면할 수만은 없는 특수한 역사적․문화적 환경의 부산물일 수 있다. 사실 이런 논란의 배후에는 당시 미술의 상황을 과학적으로 재현해낼 수 없는 명백한 물리적․심리적 한계들이 있다. 1950년대 후반의 미술상황 자체가 대부분의 작품들이 보존될 수 없었을 만큼 어려운 것이었고, 따라서 활동자료들은 물론 사진 등에 의한 기록조차 보존되어있지 못한 경우가 허다하다.

때문에 이 시기의 미술들에 관한 연구는, 현존하는 부실한 자료들과 활동 주역들의 기억에 의존한 진술에 근거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극히 제한적이다. 대부분의 작품들이 소실된 상태에서 진술을 토대로 당시의 역사를 재구성하는 작업에는 기억의 불확실성과 의도된 연출 따위의 위험이 만들어내는 공백이 불가피하게 생겨나는 것이다.

그러나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미술의 현상규명은 단지 ‘증거’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미술평론가 윤진섭은 비정형회화의 출현과 관련하여 한 작가의 모순된 증언에 의문을 제기한 바 있고20), 미술사가 윤난지도 이 문제와 관련하여 박서보의 엇갈린 진술에 의문을 던지며, “어쩌면 (유럽과 미국의 새로운 미술경향을; 필자 주) 미리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21)

 

4. 논란 속에서 찾아야 할 핵심적 쟁점들


사실 이런 경우는 얼마든지 있겠지만, 누가 한국에서 최초이든 서구의 미술경향을 미리 ‘알고 했건’ ‘모르고 했건’의 문제가 중요한 쟁점이 아니다. 미술이 한국 내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진대, 우물안 개구리들처럼 혹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듯 한국에서 ‘누가 최초’ 또는 ‘알고 모르고’를 논하는 것이 현대미술의 담론적 성격에 비추어 너무도 유치한 경쟁이라고 생각지 않는가?

설사 이것을 규명해야 할 필요가 있다 해도 이런 문제들은 작은 디테일의 문제이자 참고할 사안에 지나지 않는다. 더구나 상호간에 신뢰가 의심되는 진술이라면 이것을 시비하기보다는 보다 궁극적인 내용들을 밝히기 위한 대안적 방법을 찾는 일이 더 생산적이고, 그 가능성은 아직도 얼마든지 있기 때문에, 이런 사실을 밝혀내는 일은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니다.


심각한 문제는 오히려 이런 소모성 논란을 통해 핵심적인 쟁점들-무엇을 한국미술로서의 ‘현대성’의 근거로 볼 것인가라는 보다 포괄적인 질문이 덮여져 왔다는데 있다. ‘미술에 있어서의 현대’는 미술로서의 현대적 자각이 무엇인가에서 찾아져야 하지만, 그동안의 논의들 대부분이 정작 그 실체를 밝히는 일에 앞서 사건들을 근거로 기점을 설정하기에 급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시도들은 예술가와 예술작품이라는 구체적 실체의 분석을 통해 역사적 사건과의 관련을 찾아 나아가는 당연한 연구방법에서 벗어나, ‘개화기’ 혹은 ‘6․25 이후’ 식의 정치․사회적 사건이나 단체의 활동 등을 토대로 ‘근대미술’과 ‘현대미술’ 나누고 있다는 점에서도 확인된다.

역사의 기술記述은 기술자記述者의 시각에 따라 동일한 사건과 상황에 대해서도 인식의 차이를 드러낼 수 있다. 특히 미술은 일반적인 인문학적 체계에 한정하여 해석할 수 없는 특수성을 지니고 있고, 바로 이 점이 미술사라는 독립적인 역사진술의 당위성을 보장해줄 수 있는 근거가 된다. 말하자면 한국의 현대미술은 미술에 있어서의 ‘현대성’이라는 특수한 인식이 무엇인지에 관한 연구와 논의를 통해서 다루어져야 하고, 예술작품 속에 나타나는 ‘현대적’인 차별적 가치가 무엇인지를 따지는 구체적 차원에서 연구되어야 하는 문제인 것이다. 사건이 예술가 개인에게 영향을 줄 수 있듯이, 예술가 개인의 발상적 전환이 미술이념과 유파 혹은 미술운동의 발단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비평적 혹은 미술사적 연구는 현상적으로 나타난 결과를 역逆추적함으로써, 이 관계와 의미를 구체적으로 밝혀내는 일이 되어야 한다.

그간 한국의 미술비평과 미술사의 연구들은 대부분 예술가와 예술작품이라는 구체적 대상에 관한 비판적 가치를 규명하는 일보다, 안이한 문학적 수사修辭들과 서구미술의 비평적․미술사적 틀과 개념에 기대어 상대적인 비교평가 방식에 의존하거나, 심지어 강제적으로 끼워 맞추려는 무리를 범해 왔고, 이것이 피상적 연구들의 한계와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된다.22) 예컨대 1950년대 후반부터 시작되어 순식간에 집단적으로 공유된 비정형회화 양식을 ‘뜨거운 추상’으로, 196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일련의 집단적인 딱딱한 추상양식을 ‘차가운 추상’으로 분류23)한다거나, 다층적 의미를 지닌 미술의 현상 혹은 작품들을 비평적 분석이나 검증 없이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등의 포괄적인 문화사적 개념으로 손쉽게 분류24)하여 기정사실화해버리는 식의 비평적 오류는 그야말로 여기저기에서 무수히 발견되고 있다.


전통의 단절과 역사적 비약의 문제는 거의 모든 영역과 심지어 개인들의 의식과 취향에 이르기까지 제도와 문화의 이식이라는 특수한 역사적 과정을 거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서구사회에의 편입 내지 동질화를 목표로 하는 변화의 과정이 아니라면, 한국에서의 미술현상을 서구미술 맥락의 틀과 개념에 끼워 맞추고, 그 정체성 논의를 형태적 유사성 시비차원에서 진행한다는 것은, 우리의 미술비평과 미술사 연구를 위해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만일 한국미술로서의 ‘현대성’을 ‘추상성’ 혹은 ‘비정형성’의 등장과 집단화의 운동논리에서 찾는다면, 1950년대 후반의 ‘추상성’과 1930년대의 ‘추상성’의 차이와 한국미술로서의 ‘현대성’과 ‘추상성’의 문제, 그리고 미술에 있어서의 ‘현대성’과 ‘집단화’의 운동논리들의 관계를 먼저 규명해야 할 것이다. 


  가. 한국현대미술의 기점논의에 대한 의문들
사실 작품들 간의 형태적 유사성을 시비하는 일보다 윤진섭이 현대미술의 기점을 1년 더 소급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반국전 선언」의 실체가 무엇이었는지, 과연 이 선언이 한국미술로서의 ‘현대성’에 값할 수 있는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검증하는 일이 더 중요한 일이다. 그리고 이 검증은 다시 다음과 같은 문제들,


○ 이 선언이 《국전》의 역사적 위상과 왜곡된 아카데미시즘에 대한 도전과 비판, 그리고 대응의 논리를 구체적으로 담보하고 있는지,
○《국전》의 아카데미시즘 미학에 관한 비판적 관점과 대안미학이 이들의 작품에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있는지,
○ 혹시 《국전》을 비롯한 기성화단에 대한 반발의 성격이 과장된 것은 아니었는지,
○ 평생 《선전》및 《국전》의 존재를 원천적으로 거부해온 작가들의 소신과 실천은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
○ 이들이 1970년대 이후 《국전》에 개입하고 화단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온 점은 또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

     등에 관한 의문을 푸는 것으로부터 시작할 필요가 있다.25)
만일 1956년의「반국전 선언」이 기성세대의 권위주의에 대한 구체적인 비판의 미학적 내용을 담고 있지 않다면, 이는 미술 내적 문제가 아니라, 젊은 작가들의 기성세대에 대한 반발이라는 차원에 한정시켜 재평가해야 할 문제가 될 것이다. 뒤에 다시 다루겠지만, 당시 반국전 정서는 이미 일간지에서 다룰 만큼 보편적인 분위기였고, 《국전》에 출품도 하고 입선도 했던 젊은 작가들의 선언적 제스처를 아방가르드 예술가로서의 소신이라고 보기에도 무리가 있는 만큼, 이것을 한국현대미술의 기점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에는 공감이 가지 않는다.


유감스럽게도 적지 않은 미술평론가 혹은 미술사가들이 미학적 문제제기와 미술운동, 그리고 ‘유파’와 ‘그룹’을 종종 혼동하고 있으나, 이는 분명히 각각 다른 차원에서 해석하고 연구해야할 문제이다. 미술운동으로 어떤 상황을 바꿀 수는 있을지 몰라도 정작 미학은 다수가 동의했다고 해서 극복되거나 쟁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미술은 다수가 운동으로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술가 개인의 미학적 성취를 통해 가능해 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 구체적으로 규명되어야 할 문제들
이런 비평적․미술사적 넌센스들은 곧바로 특정한 미술양식의 유행과 화단운동 차원의 집단화, 세력화의 지형도에 따라 미술계의 표면적인 현상들을 사건일지 수준으로 나열․정리하는 것으로, 한국미술의 ‘현대성’과 관련된 제 문제들을 안이하게 분류하고 규정하는 오류를 낳고 있다.

   

1) 1956년 주장에 관하여 

윤진섭은 한발 더 나아가서『한국모더니즘 미술연구』에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4인전》에서 표출된 「반국전 선언」은 동세대에 해당하는 《현대미협》의 작가들뿐만 아니라 일부 기성작가들에게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반국전 선언」이듬해인 1957년에는 《국전》에 불만을 품고 있던 기성작가들이 《4인전》에 자극을 받아 각기 다른 이념과 성격을 표방하며 그룹을 창립하게 된다.”26)


이 글대로라면 1957년에 창립된 《모던아트협회》와 《창작미술협회》, 《현대미술가협회》, 《신조형파》, 《백양회》 등의 단체들이 《4인전》의 「반국전 선언」에 자극을 받은 결과인 셈이다. 일단 《4인전》의 「반국전 선언」이 시기적으로 이들 단체의 창립보다 앞서 있다는 점과 이마동이 위의 단체들의 창립을 “이 선언에 따른 행동의 구체화”라고 진술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견 설득력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27)

그런데 정작 이마동은「반국전 선언」이 “성명이 아닌 선언으로서는 최초의 것”임을 지적하고 있고, 반국전의 정서는 1955년부터 신문지상에 오르내릴 만큼 이미 보편적 정서28)였으며, 《현대미협》을 제외한 《모던아트협회》와 《신조형파》등이「반국전 선언」에 영향을 받아 각각 창립되었다는 주장은 앞서 인용한 김병기와 이구열 그리고 정점식의 증언으로 보아 사실과 차이가 있다고 판단된다.29)


또한 이들은 선언을 통해 “《국전》과의 결별과 기성화단에 대한 도전”30)을 내세우고 있지만, 정작 그에 대응하는 미학적 대안이 준비되어 있지 못한 상태에 있었고, 그에 반해 이미 상당한 미학적 기반을 구축하고 있었던 기성작가들이 대학을 갓 졸업한 신예들의 선언적 제스처에 자극을 받아 일제히 단체를 창립하고 서로 다른 성격의 미술활동을 시작했다는 것은 논리적으로도 설득력이 없다.


윤진섭의 이러한 주장은 사실과도 차이가 있는 것 같고, 설득력도 없지만 사실여부의 문제보다 더 중요한 문제를 남기고 있다. 그것은 윤진섭이 직업적 평론가이며 적지 않은 저술을 발간해 왔다는 점에서 역사적 사실을 확인하는 과정을 결여한 채, 많은 예술가들의 당대의 활동과 작품들이 지닌 역사적 의미를 호도하는 일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는 연구자로서의 단순한 나태함이든 어떤 ‘의도’를 드러내는 일이든, 그의 위치로 보아 ‘아니면 말고’ 식으로 넘어갈 문제가 아닌 것이다.

 

2) ‘뜨거운 추상’을 바라보는 또 하나의 눈
한편, 미술평론가 오광수는「한국 추상미술, 그 계보와 동향」에서 1958년 이후 비정형회화의 확산과 소진의 과정에 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58년경부터 등장한 뜨거운 추상미술은 《현대미협》의 이념적 동질성으로 나타났지만 60년대에 이르면서 급속한 보편적 미의식으로 공감대를 넓혀갔다. 젊은 세대에게는 말할 나위도 없고 일부 기성세대에까지 파급된 것이었다. 일종의 유행현상으로서의 국면을 보여준 것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략) 보편화 또는 유행화란 일종의 형식화, 유형화의 또 다른 명칭일 터이다. 너나 할 것 없이 일정한 형식, 또는 유행에 편승하기만 하면 다 현대작가로 둔갑할 수 있었다. 그것이 곧 포화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63, 64년경에 오면 격정의 추상미술도 애초의 신선한 열기는 찾을 수 없고 한갓 형식으로서만 명맥이 유지되고 있었을 뿐이다.”31)

즉 당시 앵포르멜32)이라고 지칭된 비정형회화 양식이 최초로 등장한 것은 1958년 《제3회 현대전》33)이며, 김창렬, 김청관, 박서보, 나병재 등에 의한 동시적 출현34)이었고, 1960년대에 이르러서는 앵포르멜/추상표현주의의 비정형성 자체가 정형화됨으로써 포화상태를 맞이하게 된다는 말이다.

 

이 내용은 여러 자료들 통해 거듭 확인되는 것이지만, 이 진술 속에 내재된 근본적인 문제들에 관한 의문-예컨대, 왜 그 표현 양식이 앵포르멜/추상표현주의가 되어야 했으며 무엇이 뜨겁다는 것인지, 네 작가에 의한 동시출현이 가능했던 배경이 무엇인지, 비정형성의 형식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등은 제기되고 있지 않다. 물론 “유행에 편승하기만 하면 다 현대작가로 둔갑”하는 현상은 문제가 있는 것이지만, 과연 그 각각의 작품들에 관한 구체적인 비평적 분석을 통해 이것이 맹목적인 ‘유행’에 지나지 않았다고 평가하는 것인지 의문이다. 즉, 초창기의 작가들이 서구의 미술에 영향을 받은 것과 유행현상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다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만일 초반기에 앵포르멜/추상표현주의 미술의 미학을 수용한 작가들의 작품이 단지 모방이 아니라면, 유형화 현상이라고 말하는 시기의 다른 작가들의 작품 중에서도 그런 가능성을 찾아볼 수 있지 않겠는가? 이런 측면에서 보면 오광수의 지적은 당시 미술작품들을 구체적으로 분석하고, 그 실체에 관한 비평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화단의 표면적 현상을 묘사하고 있는 것에 불과한 것이며, 이점에서도 어떤 ‘의도’를 읽을 수 있다.

 

3) 그동안 가려져 온 당시의 비평적 논의들-이경성의 시각
여하튼, 많은 이론가들이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제3회 현대전》에 관해 이경성은 1958년 5월 20일자 한국일보에「환상과 형상-제3회 현대전 평」을 싣고 있다. 이 글은 이미 여러 사람들에 의해 인용되어 소개된 바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이 글의 전반부 내용은 잘 소개가 되지 않았고, 자주 인용되어 왔던 후반부의 내용과 그 의미가 사뭇 다르다는 사실에 있다. 말하자면, 이경성은 이 글의 전반부에서 《현대전》의 변화에 대해 신중한 태도로 의문을 제기하고 있고, 개별작품들에 관해서는 애정을 가지고 분석하고 있었던 것이다.


“(상략) 그러나 막상 따지고 보면 그들의 젊음이란 생리적이거나 체질적인 것이기에 무척 불안하기도 하다. 왜냐하면 예술창조에 있어서의 젊음이란 생리적이거나 체질적인데서 그쳐서는 못쓰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생명 자체의 젊음이어야 되고 또한 예술의 젊음이어야 되기 때문이다. 같은 이야기는 그들의 방랑에도 적용할 수 있으니 그들의 방랑이 단순한 생명의 소비에 그치거나 무목적적이거나 또는 방랑 그 자체가 결국적 목적이 되면 못쓰기 때문이다. 그들의 방랑은 어디까지나 보다 큰 생명의 환희나 미의 창조를 위한 하나의 방법이어야 된다. 사실상 젊음만이 전부이거나 소중한 것은 아닌 것이다. 그 젊음이 무엇을 위하여 있을 적에 비로소 젊음은 보배로운 것으로 되는 것이다. 또한 방랑은 그것이 생이나 미의 폭을 확대하는 역할을 완수하였을 적에 가치 있는 것으로 화化하는 것이라 하겠다. (중략) 오늘의 그들의 위치나 탐구의 도정은 어느 곳에 도달하거나 머물러 있는지 이미 그들의 젊음은 발산할 대로 발산하였고 그들은 그들의 미의 편력에서 약간의 피로를 느끼기 시작하였다. 그러면 그들의 현재의 위도는? 그들의 환상과 형상의 중간지대에서 불안한 자세로 고민하고 모색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들의 환상은 확실히 아름답다. 그러나 그들의 형상은 그것을 뒷받침하기에는 너무나 빈약하다. 그들의 예술적 번뇌는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었다. 꿈의 아름다움과 현실의 무서움에 떨고있는 그들은 어떻게 될 것인지 그들의 앞날에는 광명과 더불어 암흑이 기다리고 있다. 그러면 오늘날 그들이 우리에게 고백한 예술적 주장은 과연 무엇이었을까.(하략)”35)

 

4) 그동안 가려져 온 당시의 비평적 논의들-정규의 시각
한편, 1958년 5월 24일자 동아일보에는 정규의「젊은 정열과 의욕-현대미술가협회 3회전 평」이 실려 있다. 그러나 이 글은 어떻게 된 일인지 한국미술을 다루는 평론가들의 글에서 인용이나 언급을 찾을 수 없다. 그리고 그 이유는 글의 내용을 통해 충분히 이해가 될 뿐만 아니라, 한국미술비평과 미술사전반에 관해 많은 생각을 갖도록 만들고 있다.


“(전람; 필자 주註)회장 전체에 넘치는 정열적인 제작의 열의는 무엇보다도 반가왔다. 용감하게 화포 앞에 설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젊은 의욕의 특권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그것이 번뇌이건 자학이건 삶의 자세를 가지기 위한 몸짓이며 표현이라고 할진대 우리는 먼저 이들의 표현의 의지를 긍정하지 않을 수 없다. (중략) 제작이란 어디까지나 현실적인 작업인 고로 가장 실제적인 지성의 설계를 떠나서 표현의 사명에 충실할 수 없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서구의 비형상회화 운동이란 결코 미지에 대한 모색 또는 반발이 아니라 보다 현실적인 생신生新한 감동을 발견함으로써 기성된 양식과 개념을 부정해보고자 하는 오늘의 새로운 의욕으로서 주목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어떠한 자기현실 위에 어떻게 제작의 성실이 깃들어 있느냐 하는 것은 어느 때나 반복되어도 좋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점에서 새로우려는 젊은 의욕과 용기가 보다 절실한 자기현실의 제목 앞에 의결되고 과감해주기를 바라며 기대하고 싶다.”36)


당시는 기성화단이 《대한미협》과 《한국미협》의 갈등이나 《국전》의 분규와 같은 지리멸렬한 양상을 보이고 있었고, 많은 미술인들이 이를 질타하고 있는 상황이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현대전에서의 비정형회화 양식의 등장은 당시 미술계에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이경성과 정규는 이들의 등장을 반기면서도 한편으로는 조심스러운 충고를 아끼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 두 논자의 평문은 당시 앵포르멜과 추상표현주의를 중심으로 한 서구미술의 양상이 이미 보편적인 정보였다는 점과 이들에 의한 비정형회화의 추구를 주체적 맥락에서의 발동으로 보고 있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점은 김병기와의 대담에서도 확인되고 있다.37)

 

5) 그동안 가려져 온 당시의 비평적 논의들-이봉상의 시각
이 전시로부터 약 6개월 뒤인 1958년 11월, 《현대미협》은 제4회 《현대전》
38)을 개최하는데, 이 전시에 《현대미협》회원들 전원이 대형 캔버스에 비정형회화 양식의 그림을 출품하고 있다.39) 1958년 12월 8일자 한국일보에는「제4회 현대전 평」이 실리고 있는데, 필자인 이봉상은「보다 부정적 의식을 희구하면서」라는 제목의 평문을 통해, 다음과 같은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물론 이 글도 인용과 언급을 발견할 수 없다.


“네 번째의 연륜을 그으면서 그 행동을 과시한 현대전이 덕수궁미술관에서 위풍당당히 개막을 보게된 것은 미온적인 현 화단에 대하여 하나의 청량제가 되리라고 본다. 적막한 회장의 공기는 그네들이 스스로 첨단을 걸으며, 전위를 부르짖고 비형상주의를 자처하는 대가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냉대가 있다할찌라도 서구의 현대회화양식을 옮겨왔으며 그 중추적인 표현형식을 영합하는데 인색치 않았다는 것을 생각할 때 소개미술의 과정조차 걷지 못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실정으로서는 필요한 과제의 제시라고 인정하고 싶은 것이다. 고요한 회장을 일순하고 전체작품에서 받은 인상은 형상주의에 대한 역설과 비형상화에 대한 연역이고 따라서 현대회화 형식의 시위와도 같았다. (중략) 필자는 이 전람회가 전후의 소산인 까닭에 그 행적을 누구보다도 관심을 가지고 봤으며 젊은 세대의 전위적인 활동인 까닭에 보다 아끼고 싶었던 것을 자인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작품내용보다도 형식의 과장이 있고 형식을 통한 시위가 몹시 초조하여 보인다. 자학은 자위로 변모해가고 내부에의 저항은 외부에 대한 반항으로 대치된 것이 아닌가?”


6) 그동안 가려져 온 당시의 비평적 논의들-김병기의 시각
1959년 5월 30일자 동아일보에는「회화의 현대적 설정문제-한국미술과 세계미술」이라는 제목의 글이 실려 있다. 필자인 김병기는 “한국미술은 어떻게 하면 보다 세계미술에 기여할 수 있는가”라고 시작되는 이 글 속에서


“금일에 있어서의 자아의 설정이란 어떤 특수한 성격의 표현이 아니라 국제적인 일환으로서의 자아의 위치를 의미할 것이다.”라고 전제한 뒤, “서구미술의 도입에 있어서도 자연주의 내지 인상파로부터 근래의 추상과 『앵훠르멜』에 이르기까지 일一단 그 과정적 작업을 끝맺았다고 할 수 있을지라도 이것이 곧 우리의 독자적인 이야기를 전개할 수 있는 기본자세의 확립이라고는 속단할 수 없을 것 같다. 지난 시기의 근대화를 위한 서구미술의 도입은 방법적인 구명究明에 있어 단편적 소극적이었다는 지적을 면치 못할 것이다. 말하자면 도입해온 것은 그의 외형적 양식에 불과했으며 양식을 이룩해놓은 『이데』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중략) 추상과 초현실에 있어서도 한국적 정신풍토와 서구의 그것이 어떤 의미로 모순을 자아냈다고 볼 수 있는데 전후에 있어 더욱 새로운 세대들의 주류를 차지하는 추상표현『앵훠르멜』혹은『프리미티븨즘』의 경우는 어떠한가. 역시 그러한 각도에서 일말의 불안이 없지 않다. 일전 경복궁에서 개최를 본 제3회「현대작가초대전」은 한국화단의 새로운 의욕의 단적인 표현이란 의미에서 화단적 의의는 큰 바가 있지만 많은 작품에서 산견散見되는 일종의 유형성, 작품배후에 도사리고 있는 작가들의 사고가 양식의 도입에서 그쳐버린 지난 시기의 그것과 과연 무엇이 다른가를 생각해보고 싶은 것이다. 물론 젊은 세대들의 비장한 부정적 자세는 현실의 모순과 대조하여 저항을 의도하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저항하는 자세에 독자성이 부족하지는 않을까. 너무나도 판에 박힌 듯한 작품들, 이를테면 너무나도「앵훠르멜」적이고 추상표현적인…….「앵훠르멜」의「이데」가 지난 수십년간에 있어 마련된 모던아트의 뜻하지 않은 고정개념을 다시 한번 박차려는 과감한 부정이라 할진대 이것을 하나의 유형으로써 받아들인다는 것은 이미 「앵훠르멜」의 기본태도에서 벗어나는 것이 된다. 채료를 뿌리거나 흘리거나 문지른다는 것은 그러한 행위를 통하여 굳어버린 의식의 밑바닥에서 숨어있는 의식을 끌어내보자는 것일 것이며 결코 뿌리는 기법의 체득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하략)”


물론 이 글도 인용도, 언급도 되어 오지 않았다.
이 일련의 인용들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몇 가지 중요한 쟁점이 있다. 그것은 이 인용들이 앞서 언급한 소위 ‘수용론’과 ‘자생론’의 논란에 당시 진술로서의 중요한 근거를 충분히 제시해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또한 당시의 평문들이 1950년대 후반의 시점에서 이미 서구미술의 자극과 영향에 대한 주체적 인식을 촉구하는 상당한 수위에 올라있었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문제는 당시에 이미 구체적으로 논의되었던 평문들이 왜 차별적으로 인용되고 언급되어 왔는가에 있다.

 

다. 다시 연속되는 의문들- ‘자생론’을 향하여
사실 상기한 인용들은 《현대미협》의 비정형회화 열풍을 한국현대미술의 기점논란 한 가운데 위치시켜온 일단의 미술평론가들과 미술사가들의 그간의 주장과 매우 상치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인용들이 비정형회화의 집단화가 왕성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시점의 평가라는 점에서 이 상반된 주장들의 의미를 숙고할 필요가 있다. 또한 현 시점에서 이 상반된 주장들의 제 문제들을 좀더 구체적으로 검증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 제3회 현대전에 출품한 작가들의 비정형회화 양식이 반국전의 연장선상에 있다면, 이 비정형회화 양식이 《국전》의 소위 아카데미시즘에 대응하는 대안미학이라고 볼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 이 양식의 자생론 주장40)에 대해 비정형회화 양식으로의 갑작스러운 전환을 뒷받침할 발상과 미학적․방법론적 변화의 배경을 당연히 물어야 하고, 미학적․방법론적 맥락이 없는 우연의 결과를 한국미술의 역사성 논의의 중심에 놓을 필요가 있는 것인지도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이미 김병기가 지적하고 있듯, 앵포르멜이든 추상표현주의든 그 ‘추상성’은 스타일의 문제가 아니라 서구의 전통미술을 극복해가는 과정으로서의 ‘맥락context’ 문제이기 때문에 우연히 도달한 양식으론 대응이 될 수 없는 일인 것이다.


○ 어떻게 한 전시에 네 작가가 동시에 전격적인, 그러나 서로 유사한 형식의 그림에 우연히 도달할 수 있으며, 불과 6개월 뒤의 4회전에 《현대미협》의 작가 전원이 집단적 양식에 도달할 수 있었는지 역시 해명되어야 한다.


○ 박서보의 주장41)대로 전혀 독창적인 발상에 의해 그의 비정형회화가 만들어 졌다면, 다른 작가들이 모두 그의 영향을 받았다는 말인지, 아니면 자신만 빼고 다른 작가들은 서구미술의 영향을 받았는데, 그 결과가 우연히 같게 나타났다는 말인지? 사실 이 문제는 미술의 문제를 떠나 도덕적․윤리적 차원에서 다루어져야 할 문제가 될 수도 있다.42)

한편, 제2차 세계대전과 6. 25의 전후 상황의 유비 논리에 대해,


○ 나치의 침략에 의해 야기된 제2차 세계대전과 남북분단의 대립상황 속에서의 동족간 이념전쟁(6․25)은 근본적으로 성격이 다른 전쟁이었다. 그러나 당시 작가들의 진술과 작품에 나타나는 전쟁의 상처가 남긴 ‘허무’와 ‘실존의식’은 유럽의 그것과 별반 차이가 없다. 당시 전후 상황에 관한 진술의 구체성이 결여되어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 비정형의 격정이 전쟁에 대한 분노의 자발적 표출이었다면, 이러한 감정적 폭발이 6․25 전쟁상황 혹은 그 직후가 아니라, 미국의 원조로 전쟁의 상흔이 외부적으로 어느 정도 회복되어가고 있고, 민간교류도 제법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던43) 1958년에 이르러 느닷없이 일제히 이루어지고 있는 점 역시 납득이 되지 않는 점이다. 1950년의 전쟁발발과 1958년 사이의 8년간의 공백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44)


○ 처절한 전쟁과 전후상황의 체험을 통해 주체적으로 육화된 이념과 표현이었어야 할 미학과 미술양식이 왜 하필 공교롭게도 미국의 추상표현주의 회화양식이나 유럽의 앵포르멜 회화 양식과 닮게 된 것인가?


○ 그 양식이 자생적인 것이었다면 자신의 독창성을 추상표현주의나 앵포르멜로 분류하던 시점에서 반박과 저항을 왜 하지 않은 것인가?45)


○ 전쟁이라는 역사적 체험에 그토록 절규했던 용감한 예술가들이 1960년대 초반의 4․19와 5․16에 이은 군사정권의 등장과 개발독재에 따르는 크고 작은 사회적 문제들에 관해서는 집요하리만큼 침묵하며, 1958년 이후 6, 7년 간을 오직 전쟁 후 파괴와 허무의 양상에 관한 울부짖음(비정형회화)으로 일관하면서 오직 국제무대로의 진출에만 열을 올렸다는 점도 이상한 일이 아닌가?46)


○ 미학적 측면에서도 이 비정형회화 양식이 갑자기 집단적으로 등장하고 집단화에 의한 양식의 정형화에 빠져 포화상태에 이르렀다는 점도 의문이다. 설사 유행현상에 의한 정형화라고 해도 독창적 발상에 의한 자생적 양식이 추종자들에 의해 함몰되었다는 점도 이해가 가지 않지만, 당연히 있었어야 할 Pre 현상도 없거니와 Post 현상마저 부재한 상태로 지리멸렬해졌다는 점은 더더욱 납득이 되지 않는다. 더구나 불과 몇 년 뒤인 1960년대 후반에 들어 발표했던 소위 딱딱한 추상들과 입체작업들이 비정형회화 양식의 Post 현상으로 볼 수 없는, 전혀 비약된 미학적․방법론적 전이轉移라는 점에서 일련의 변화에 관한 집중적인 질문을 시도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계속>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