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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루 - 바람이 찍은 점 하나

​드로잉과 감각의 자리에서

루씨: 전 당신의 드로잉에서 이미지 대신 운동성과 시간, 그리고 침묵의 궤적 같은 걸 봅니다.

상길: 우린 대상을 습관적으로 보면서 사실로 믿는 경향이 있어요. 훨씬 더 많은 것들을 감각하고 느낄 수 있는데도 말이죠. 난 어떤 형태를 그릴 생각이 없습니다. 그보다는 내 감각이 질료의 특성과 만나는 사건을 드러내려고 하죠. 호흡과 긴장, 떨림이나 속도 같은 것들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세잔이 자기 눈으로 본 세상을 그렸다면, 난 내가 감각하고 느끼는 것들을 드러내는 셈이에요. 감각이 늘 ‘정답’보다 앞서니까...

루씨: 어쩌면 당신의 드로잉에는 시간의 여백 같은 게 있기 때문일 겁니다. 말보다 먼저 도착한 감각들, 그런 것들이 그림 속에 오래 머무르고 있는 것 같은… 혹시 인상 깊었던 그림이 있을까요?

상길: 몇 년 전, 우연히 한 인터넷 사이트에서 Robert Morris의 《37 Minutes, 3879 Strokes, 1961》를 보고 멈칫했던 적이 있어요. 그게 어떤 작업이었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죠. 그는 이미 60여 년 전에 지금 제가 몰두하고 있는 문제에 접근했던 것 같더군요. 불규칙한 스트로크, 흐트러진 선들에서 속도와 운동성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루씨: 로버트 모리스는 1970년대 말 자신의 ‘Stroke’ 연작에 관해  “회화적 제스처—그러니까 붓질이라는 단위가  더 이상 이미지를 그리는 수단이 아니라, 몸의  시간성과 반복된 행위의 잔류”라고 말한 적이 있었죠. “행위가 흔적이 되고, 반복되는 몸의 제스처가 회화적 기호로 고착되는 과정”이라는 말이죠. 그 흔적들이 캔버스 위에 쌓이고, 그 흔적에 반복과 리듬을 쌓으며, 자기 몸을 하나의 ‘기억 장치’로 삼으려는 시도겠지요.

상길: 네. 바로 그 점에 멈칫하고 놀랐던 겁니다.

루씨: 그러고 보니 그건 참 놀라운 지점이네요. ‘순간의 흡’,  ‘불규칙한 리듬’,  ‘몸의 운동’ 같은 것들이  당신의  드로잉 속에 공명하며 되살아나는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모리스가 스트로크 속에 자신의 육체적  존재와 행위의 잔상을 눌러 담았다면, 당신은 그것을 더 느리거나 깊게— 침묵 안에서 채집하는 방식으로 이끌고 들어가는 듯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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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bert Morris, 37 Minutes, 3879 Strokes, 1961

오상길, untitled, 2011, 종이 위에 먹과 안료, 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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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길: 모리스의 드로잉에 나타나는 호흡과 운동성이 곧 시간과 몸의 문제니까 비슷한 맥락이라고 볼 수 있겠고, 그게 다른 감각적 측면으로 빗겨나가는 것도 흥미로운 점입니다.

 

루씨: 맞습니다. 모리스의 《37 Minutes, 3879 Strokes, 1961》가 시간을 ‘질주’하며 통과하는 몸의 흔적이라면, 당신의 드로잉은 오히려 그 시간의 틈에 멈춰 서 있는 몸, 혹은 침묵 속에서 머물며 감각하는 몸처럼 느껴져요. 모리스의 스트로크와 운동이 땀과 속도, 파열의 기억이라면, 당신의 드로잉은 기다림, 떨림, 머뭇거림이 스며든 촉각의 시간인 것 같습니다. 둘 다 ‘몸의 기록’임엔 분명하지만, 어쩌면 당신은 몸이 사라진 이후에도 남는 ‘감각의 입자들’을 채집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어요. 저는 그게… 참 신비롭고 아름답게 느껴져요.

상길: 네. 전 시간과 감각을 펼치고 겹치기도 하는 레이어들을 통해 과정과 감각들을 기록하고, 그 결과가 보기 좋기를 바라죠.

​루씨: 먼저 그은 선과 다음에 그은 선이 서로 간섭하거나 스며들고, 그 사이에서 몸이 한 겹 더 깊어지는, 그런 시간이군요. 드로잉이 그리는 행위가 아니라, 쌓고 남기고 기다리며 응답하는 ‘몸의 기록’이라는 걸 이렇게 생생하게 듣는 건 처음인 것 같습니다.

상길: 보고 느낄 수 있는 감각들이 지닌 잠재력들과 그 감각들로 열어갈 수 있는 새로운 미술에 관해서 얘기하는 건 상당히 의미심장한 일이에요. 그건 기법이나 형식에 관한 말이 아니라, 지각의 윤리이자 예술의 감응 방식을 묻는 태도입니다. 감각이란 결국 우리 몸 안에서 일어나는 가장 생생한 사건들일 텐데, 왜 사람들은 통념과 습관에 집착하는 걸까요? 눈이 볼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 보고 느낀다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저 보던 대로 보는 습관이나 통념에서 벗어나는 일일 수도 있어요. 난 통념과 습관이 감각이 포착하고 있는 많은 것들을 가리고 있다고 생각해요.

루씨: 당신의 드로잉들은 눈이 아닌 다른 감각들, 이를테면 ‘촉각’, ‘근감각’, ‘리듬’, ‘저항’ 같은 것도 중요하게 여길 것 같습니다. 단순히 ‘보는 그림’이 아니라, 마치 몸으로 듣는 그림처럼 느껴지거든요. 최근에 제작한 드로잉 중 그런 시간의 층위나 몸의 움직임, 침묵의 리듬이 잘 드러난 작품은 어떤 건가요?

상길: 어린이들 교육프로그램의 결과물에 자극을 받아서 먹과 물, 안료를 즉흥적으로 섞고 손가락으로 밀어내면서 그린 드로잉이 있어요. 손가락이 질료와 뒤섞이며 움직인 흔적들이 남아서 그 순간의 감각과 리듬, 감정들을 생생하게 환기시키는 그림이에요. 다시 그릴 수도 없고, 그려지지도 않는 그런 그림들입니다. 목탄으로 긋는 선도 늘 불규칙하고 기획할 수 없는 것들이지요.

루씨: 정말 그러네요, 특히 ‘다시 그릴 수 없다’는 말이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아요. 한 번 지나가면 되돌릴 수 없는 순간들이 남아 기록으로 남는 장면. 문득 ‘기억의 감각화’라는 생각이 들어요.

상길: 전 2010년과 2020년 두 번에 걸쳐 국립현대미술관의 요청을 받아들여 작품들을 재연한 적이 있습니다. 1989년에 제작해서 발표했던 작품이었는데, 재료를 찾고 받아들이는 과정에서부터 작품의 설치를 마칠 때까지 단 한 순간도 긴장이 풀리지 않았어요. 2020년에 설치했던 감나무 뿌리는 설치를 마치고 돌아 나오는 제 뒷덜미를 잡아채듯 당기는 것 같았어요. 누가 들으면 정신이 좀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전 분명히 그걸 느꼈고 며칠 뒤 다시 미술관으로 가서 한참을 끙끙대며 수정을 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진땀을 빼고 나서야 마음이 놓이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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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7.30, 국립현대미술관 설치

2020.8.3, 국립현대미술관 설치 수정

untitled, 1989, 나무뿌리, 생선 뼈 등

루씨: 흔히 그걸 ‘재연’이나 ‘재설치’라고 하겠지만, 당신의 그 경험은 당신의 몸과 시간을 호출한 사건이었군요. 이 푸른 드로잉에서도 몸이 흔들리며 남긴 감각의 언어라는 걸 느낄 수 있습니다.

상길: 1989년에 설치했던 나무뿌리도 단순히 작품의 재료였던 건 아니었어요. 1988년 어느 날 인도에 버려진 나무뿌리를 보고 작업실로 가져와 1년이 넘도록 보고 또 봤죠. 어느 날 그 나무뿌리를 옮기려다 뿌리가 하늘로 올라가게 된 순간이 있었는데, 문득 ‘이것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그 나무와의 어떤 접점이 열린 것 같았고, 그 뒤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어요. 1987-1991년경까지 전 오브제를 자연에서 빌려와서 작품으로 구성하고, 전시가 끝나면  그걸 해체해서 원래 있던 자리에 돌려놓는 작업을 했었죠. 그건 의무도 아니고, 퍼포먼스도 아니었어요. 뭐랄까, 제가 예술을 통해 ‘세계와 맺는 관계’ 같은 것이었죠.

루씨: 그렇게까지 깊은 교감을 하셨다면… 그 나무뿌리는 단지 재료로 선택된 게 아니라 하나의 관계, 혹은 존재 간의 협의 같은 것이었군요. 특히 자연에서 오브제를 빌려오고, 전시가 끝난 후 그것들을 제자리로 돌려놓는다는 건 일종의 예술가적 태도에 관한 이야기일 텐데, ‘돌려놓는다는 행위’에 담긴 의미에 대해 조금 더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상길: 그건 어떤 신념 같은 것이라기보단 오랫동안 제 안에 자리 잡아 온 감각이나 태도 같은 거예요. 전 자연을 재료로 ‘소유’하거나 ‘조형’을 하려는 게 아니라 감각을 드러내기 위해 빌리려는 것이었으니까...  

예술이라는 건 결국 일시적인 틈을 여는 작업이 아닐까요? 그 틈 안에서 사물과 몸, 시간과 공간이 조우하고, 그게 끝나면…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가는 게 맞는다고 생각했던 거죠. 1989년 전시되었던 나무뿌리와도 그랬던 겁니다. 사실 드로잉도 그런 점에서는 다를 것이 없구요. (끝)

첫 번째 마루의 대화는 여기까지입니다.
당신은 이제 다른 시간, 다른 몸, 다른 침묵, '마루'의 두 번째 대화를 보고 들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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