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상미술 양식화의 함정
Mark Rothko,
Red and Blue over Red,
1959, Oil on canvas,
236.86 x 205.74 x 4.45 cm
대부분의 미술용어들이 그렇듯 추상미술abstraction도 엄밀하게 정의된 용어는 아니다. 흔히 추상으로 일컬어지는 미술작품들은 거칠게 세 가지 정도로 분류할 수 있다. 그 하나가 폴 세잔으로부터 큐비즘과 구성주의를 거쳐 후기색면추상Post-painterly abstraction에 이른 Formalism 추상미술이고 다른 하나는 서구미술의 형식주의적 전통 자체의 전복을 기도했던 비정형미술(Art Informel)이며, 나머지 하나는 형상성을 배제한 비형상미술(non figuration)이다. 언뜻 보기엔 그게 그것인 것 같은 이 미술들은 각각 다른 역사적 계보를 가진, 엄연히 ‘다른’ 미술이다.
현대미술의 이해에는 이런 맥락과 계보를 잘 파악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바로 미술형식의 양식화가 지닌 함정 때문이다. 가령 누군가 모네보다 더 세련된 파스텔 톤의 인상파 그림을 그렸다면, 그 그림은 여전히 인상파 회화일 수 있고, 마릴린 먼로 대신 샤론 스톤을 실크스크린 기법으로 제작하면 팝아트가 될 수 있는 걸까? 도대체 이런 그림들이 동네 카페의 벽장식용 그림들과 무슨 차이가 있나?
현대미술에 있어 작품의 스타일이란 작가의 독립적인 고유 언어이고, 그 언어는 미술이나 사회현상들과의 맥락context을 갖고 있다. 이 지점이 작가 개인의 성취가 ‘예술’이라는 공공성을 획득해 내는 포인트라고 말할 수 있다. 현대미술에 있어 예술이란 ‘무엇이 예술인지,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를 묻고 답해가는 시대적 담론discourse이지 그림의 스타일이나 예술이라는 제품이 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Andy Warhol이 예술의 맥락에서(미술시장의 맥락이 아니라) 사이비 아방가르드로 평가될 이유는 충분한 것이다.
오늘날의 예술가들에게는 과거의 예술개념을 끊임없이 해체시키고 자신의 언어와 방법으로 재규정해 가야하는 과제가 주어져 있고, 예술작품의 형식은 이 과제를 풀어낸 일종의 수학공식 같은 기호인 셈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Mark Rothko의 추상회화 앞에 서서 감상이 아니라 그의 시각적 발언을 경청하고 있는 셈이다.
오늘의 예술가artist는 이런 문제들을 풀어나가는 사람을 말한다. 또한 오늘날의 예술작품은 그런 예술가들에 의해 새롭게 정의된 예술의 성과물을 말하는 것이다.
예술가와 좀 다른,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바로 장인匠人artisan들이다. 누가 어디 속하는지는 구태여 말할 필요조차 없다. 그리고 이런 구별이 왜 필요한지는 한국미술계의 현 상황을 들여다보면 된다. 너나 할 것 없이 어디선가 본 듯한 추상화들을 발표하고, 모노크롬이니 단색화니 저희들끼리 이름 붙여가며 벌리는 촌극은 근원적으로 조영남 사건의 본질과 다를 것이 없어 보인다.
현대미술이란 게 남의 예술 맥락을 컨닝해다가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아프게 깨달을 때쯤에는 한국미술이라는 고목에도 새싹이 돋아날 수 있을까.